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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

무아와 자성의 대립. 현민에 대한 강병균의 반박 2018년 8월 27일 오후 03:30

무아와 견성성불의 부딪침. 자성은 자성성불의 줄인 말로서 자성을 봐야 성불한다는 것은 힌두교의 아트만을 인정하는 것.

연기에 다른 무명의 痴와 受와 渴愛 사이에 탐진貪嗔 중 어느 것이 앞인가
돈오돈수, 점오점수, 돈오점수, 점수돈오 중 어느 것이 바른 수행법인가
태어날 때 성선설과 성락설 중 어느 것이 맞는가

 

주자학의 나흠순은 양명학의 깨달음을 선종에서는 순식간에 전체를 깨닫는 돈오(頓悟)를 위주로 하는데, 모든 의견을 억압하고 제거하면서 모든 외부 유입의 길을 닫고, 내면의 습기가 발현되는 생각을 끊어서 마음에 통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도 없애야만 하루아침에 갑자기 깨달음이 온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추구하는 것은 실체가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 사유 수단인 언어가 끊어진 길로 나가도록 화두나 공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나흠순의 깨달음이라는 것은 그러한 체험 속에서 신령스런 지각/명각(明覺)을 본 것에 불과할 뿐이라고 비판한다. 깨달음은 의식 속에서 떠오르는 신비체험이라는 광경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것도 여전히 주관적인 상상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양명학은 신비적인 체험을 통하여 궁극적인 도덕적 본체를 깨닫고자 한다. 이러한 사고는 마음의 심층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 그러한 깨달음의 차원은 객관성이 없고 이미지나 상상에 불과한 측면이 있다. 다시 말해 폐관(閉關/館)공부하는 동안에 몸의 정기(精氣)와 마음의 혼(魂)을 갖고 장난하는 정혼(精魂)에 불과한 것이다. 나흠순은 이러한 지점을 공격하고 있다. 양명학이 불교나 도교의 방법을 차용한 이상 종교로 흐를 가능성이 있음을 예리하게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양명학이나 불교가 지적한 대로 나흠순의 주자학은 이성적인 판단에 머물러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이성적인 판단이라고 하는 것도 그 시대적 가치판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은 곧 시대적 한계를 넘어설 수 없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시대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할 때 일상적인 속된 철학에 빠지게 된다.

 

나흠순은 지각의 기능을 본성이나 본체를 알 수 있는 인식적인 능력에만 한정한다. 지각이 가지는 가치적인 기능을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각은 주관(主觀)이라는 자신의 자리를 망각하고 자기가 객관적인 진리임을 주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각은 감각적인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다. 이러한 지각에 대한 불신은 뒤에 智와 知覺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