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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이야기

바라나시, 그 적멸(寂滅)의 땅을 가다

바라나시, 그 적멸(寂滅)의 땅을 가다

 

섭씨 45도를 넘나드는 불볕 더위가 인도를 엄습하던 작년 여름, 바라나시를 다녀왔습니다. 뉴델리에서 바라나시행 밤 열차에 몸을 실으면서 왜 유치환의 시 ‘생명의 서’가 생각났는지 모릅니다.

『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 중 략 -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하게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유치환 시인은 사막의 고독 가운데 홀로 서서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배우겠다는 생명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주변의 일상과 살인적인 더위에 지쳐있던 나는 아라비아의 사막이 아닌 삶과 죽음이 혼재하는 땅 바라나시에서 ‘인도인들의 초연한 자태’를 배우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삶과 죽음이 혼재하는 땅 바라나시

바라나시는 너무나 잘 알려져서 웬만한 한국 여행객들은 한번 이상 거쳐가는 곳입니다. 바라나시를 다녀간 한국 사람들의 평가는 대개 두가지로 나누어집니다. 혼잡스럽고 불결해서 두 번 다시 오고 싶지 않다는 의견과, 척박한 환경이지만 인생의 의미와 인도인들의 종교적 경외심을 느낄 수 있어 다시 한번 찾고 싶다는 의견입니다.

 

델리발 바라나시행 기차의 침대칸

우리가 금요일 저녁 8시 뉴델리에서 탑승한 기차는 서다가 달리다가를 반복한 끝에 토요일 이른 아침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방문객들에게 특별한 인상을 심어 준다는 도시 바라나시에 들어 선 것입니다. 그리고 나같은 범인(凡人)의 눈에 비친 바라나시의 첫 모습은 역시 당혹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우리 시골 간이역만도 못한 바라나시 역 구내는 걸인과 잡상인들과 여행객들로 들끓고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한눈을 팔다가 걸인들과 마주칠 것 같으면 필사적으로 달라붙는 바람에 자칫 일행을 놓칠수도 있습니다. 두눈 부릅뜨고 일행의 뒷 꽁무니를 ?으면서 바라나시 역을 빠져 나오는 데 꽤 힘이 들었습니다.

바라나시(Varanasi)는 북쪽의 바루나(Varuna)강과 남쪽의 아시(Assi)강 사이에 위치한 도시라는 뜻입니다. 현지에서는 바나라스(Banaras)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바라나시의 또 다른 이름은 카시(Kashi)라고 하는데 이것은 순례 성지로서 ‘영적인 빛으로 충만한 도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적인 빛으로 충만한 도시’라는 표현에 어울리지 않게 바라나시는 혼돈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도로는 아예 중앙 차선 개념이 없이 사람이 끄는 릭샤, 삼륜차 같은 자동 릭샤, 온갖 자동차들이 뒤섞여 아슬아슬하게 비켜갑니다. 도로 여기저기에는 배회하는 소와 개들의 배설물로 뒤덮여 있어 마치 지뢰밭을 걷는 듯 합니다.

갠지스 강가의 삶과 죽음

그러나 좁은 골목에 다닥 다닥 붙어선 작은 가게들 앞을 힌두 순례자, 거리의 아이들, 여행객들과 어깨를 부딪히며 걷다보면 간간히 힌두사원도 만나고 매년 100만명 이상의 순례자들이 찾아온다는 갠지스(Ganges) 강의 가트(계단식의 목욕장 시설)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갠지스 강은 영어 이름이며 인도인들은 갠지스 대신 성스러운 의미를 지닌 강가(Ganga)라고 부릅니다.

힌두 신앙에 따르면 강가의 성스러운 물에서 목욕을 하면 모든 죄가 씻기고 이곳에서 화장한 시체의 재를 강가로 흘려 보내면 윤회로부터의 해탈을 얻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나이가 든 힌두 순례자들 중에는 일부러 죽는 것을 목적으로 이곳을 찾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바라나시 가트 건너편 모래밭. 나룻배를 타야만 도착하는데 피안의 땅이라고도 부른다.

우리가 강가를 방문한 때는 순례 시즌이 아닌 한여름이라서 비교적 한산했습니다. 몇몇 힌두 여인들이 빨래를 하고 더위에 지친 아이들과 물소가 한가로이 목욕을 하고 있었습니다. 늙은 걸인 하나는 땔감으로 쓰기위해 소똥을 말리는 옆에서 한가로운 오수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조용하고 평화로운 풍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강변의 가트를 어느 정도 거슬러 올라 가다보니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매캐한 연기와 야릇한 냄새가 풍겨오는 곳에 시선을 멈추니 바로 그 유명한 힌두교도들의 화장터라고 합니다. 순례시즌은 아니라도 자연의 섭리에 따라 죽는 사람들은 생기기 때문에 여러구의 시체들이 화장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체들은 화장하기 전 강가의 물로 적시고 간단한 힌두교 예식을 거친후 불타는 장작더미 위에 올려 놓습니다. 불사신 같이 작열하는 태양볕 아래 화장터의 무수한 장작더미들과 시체를 덮은 황금색 비단의 강렬한 색감이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는 사진촬영이 철저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성스러운 장례의식을 거행하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수년전 영국 BBC 방송이 강가의 화장장면을 촬영해 부정적으로 보도한 것이 결정적인 이유라고 합니다. 우리도 내내 카메라를 숨기고 있다가 강가를 오르내리는 배를 탓을 때 겨우 원거리 촬영을 할 수 있었습니다.

2500년 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중 하나

화장터를 거쳐 강변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배를 탓습니다. 배를 타기 전에 본 강변은 온갖 쓰레기들과 오물들로 지저분합니다. 이곳 힌두 고행자인 사두와 순례자들은 이 물로 양치와 세수는 물론 마시기까지 한다고 합니다. 그래도 크게 병이 나거나 탈이 나는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강가의 신성한 물이라서 신통력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신성한 물이라는 사람들의 믿음의 효력 때문인지 잘 가늠이 되지 않았습니다.

 

바라나시 화장터. 곡소리 하나 없이 마치 한가로운 일상처럼 보인다.

강가 가운데의 물은 강변에 비해 그런대로 깨끗했지만 비 힌두교도인 우리가 선뜻 손을 담그기에는 꺼림칙했습니다. 강 한가운데에서 바라본 바라나시는 우리 인간들이 사는 속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다닥다닥 이어진 집들과 숙박시설들 사이로 힌두사원이 드문드문 보이는 가운데 한편에서는 죽은 사람을 화장하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다른 한편에서는 죽음과는 상관없는 사람들이 한가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더 이상의 삶도 죽음도 없어 보입니다. 바라나시는 2천5백년전에 만들어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중의 하나입니다. 힌두교와 불교의 오랜 전통이 공존하는 이 영혼의 도시는 12세기에는 무슬림의 지배를 받아 힌두 사원과 유적지가 파괴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습니다. 강가는 이러한 인간들의 애절한 역사와 현세의 고통을 끌어안고 말없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한 생명의 끝은 다른 생명의 시작

강가 맞은편 사구(砂丘)는 불교에서 피안(彼岸)의 땅으로 보고있지만, 힌두교도들은 부정한 곳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룻배로 강을 건너서 고운 모래가 끝없이 이어진 사구(砂丘)에 발을 딛고 반대편의 바라나시 쪽 가트를 바라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온갖 더러움과 갈등을 끌어안고 묵묵히 흘러가는 강가 앞에서 ‘피안의 땅’이니 ‘부정한 곳’이니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해탈의 강 강가(Ganga)의 뱃사공 .

다시 배를 타고 돌아오면서 바라본 바라나시 가트는 여전히 한낮의 뜨거운 정적 속에서 화장하는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배를 젓는 사공은 깊이를 알수 없는 맑은 눈빛을 하고 있었습니다.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탈의 강에서 노를 젓는 그의 전생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사슴이나 순한 소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힌두교도들에게 한 생명의 끝은 다른 생명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정작 이들이 원하는 것은 다음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 완전한 소멸, 즉 해탈에 이르는 것이라고 합니다.

바라나시는 인도 어느 곳보다도 혼잡스러움과 불결함으로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고달픈 현실을 겸허히 수용하면서 해탈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사는 이곳이 바로 순수한 영겁속으로 일체가 소멸하는 ‘적멸(寂滅)의 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트를 떠나면서 뒤돌아본 강가의 물은 여전히 기세등등한 햇살에 부서지면서 말없이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주: 사진들은 주 인도 한국대사관에 근무하는 사진작가 이경훈씨가 제공해 주었습니다.

[출처] 바라나시, 그 적멸(寂滅)의 땅을 가다|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