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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주와 부여] 삼국 시대 문화의 '공주', 백제를 '부여' 잡는 여행

[공주와 부여] 삼국 시대 문화의 '공주', 백제를 '부여' 잡는 여행

 

공산성 입구인 진남루 위로 초가을 하늘이 푸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부족 연맹으로 남부권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가야는 나라 취급조차 받지 못했고, 고구려와 백제의 수도는 신라 경주에 비하면 초라했다. 복속과 정벌의 당위를 위해, 망한 나라는 부패와 사치로 물들었어야 했다. 삼천궁녀 신화도 그렇게 태어났다. 문화 콘텐츠가 국력으로 추앙받는 시대다. 삼국 가운데 가장 높은 문화적 성취를 이뤄 동아시아에 전파했던 백제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 자산이다. 백제의 숨결이 잠들어 있는 옛 왕도 공주(웅진)와 부여(사비)를 찾아봤다. 백제 문화의 정신이라고 할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를 절감할 수 있었다. 마침 오는 28일부터 10월 5일까지 제63회 백제문화제도 열린다. 부산권에서는 마음먹고 가야 했던 곳, 긴 연휴를 활용해도 좋고, 낙엽이 아름다운 가을 어느 때라도 좋다.

4600여 점 유물 송산리 고분군 무령왕릉

금제관식 등 화려한 장신구 세공술 보여 줘

공산성에서는 백제의 뛰어난 건축술 확인

오로지 흙으로 쌓은 토성 1000년 이상 견뎌

금동대향로 전시 부여박물관도 필수 관람을

■송산리고분군과 무령왕릉

일제 강점기에 무덤 6기가 발견된 송산리 고분군은 도굴로 인해 유물이 몇 남지 않았다. 굴식 돌방무덤이라는 백제의 고분 양식을 보여 주는 정도로만 의미를 가졌다. 여섯 번째 무덤 뒤에서 1971년 발견된 무령왕릉은 송산리 고분군의 의미를 전혀 새로운 단계로 끌어 올렸다. 도굴의 마수를 피해 온전히 보존됐기에 108종 4600여 점의 유물이 묘지석과 함께 출토됐다. 한반도에 남은 삼국 시대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무덤의 주인공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송산리고분군과 무령왕릉 내부는 실물을 그대로 재현한 모형전시관에서 볼 수 있다. 보존을 위한 조치다.

무령왕은 한성을 고구려에 빼앗겨 웅진(공주)으로 천도한 뒤 흔들리던 왕권을 바로잡고 22년간 재임한 강력한 왕이었다. 그런 무령왕 부부 무덤은 넓지 않았다. 폭 2.7m 길이 4.2m. 왕 부부가 눕고 부장품을 채우니 딱 맞는 공간이었다. 봉분도 나지막한 것이 경주에 있는 무수한 '능'과 '총'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대신 이 왕릉에서 출토된 금제관식 등 장신구는 당시의 화려하고 정밀한 세공술을 그대로 보여 준다. 무덤을 크게 쌓아 권력을 과시하기보다 내재된 문화의 힘을 보여 주고자 했던 것 아닐까.

또한 백제가 동아시아 문화 교류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무령왕릉 출토 유물에서도 드러난다. 왜에서 가져온 금송으로 관을 만들었고, 땅을 주관하는 신에게 묘 터를 산다는 의미로 중국 양나라 화폐인 오수전 한 꾸러미를 왕비 묘지석 위에 얹었다. 중국 도자기도 여러 점 나왔다. 백수정 문화해설사는 "무령왕릉을 보면 당시 백제가 동아시아 다국적 문화의 집약체였음을 알 수 있다"며 "살았을 때는 왕으로 나라를 다스리지만 땅으로 돌아갈 때는 신의 허락을 받고 묘 터를 구해야 하는 신분으로 인식했다는 도교적 색채가 묻어난다"고 말했다.

모형전시관을 나와 실제 무령왕릉 봉분을 밖에서 보니 완만한 곡선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남쪽을 멀리 바라보니 봉황산 봉우리가 볏단을 차곡차곡 쌓은 듯 어여쁜 삼각형을 이뤘다. 사후 백제 문화의 융성을 기리는 길지로 이 땅을 선택했던 것이리라.

■공산성

위례성을 허망하게 고구려에 빼앗기고 천도한 백제. 신라와 고구려의 침입을 막는 일이 급선무였다. 475~538년, 웅진 시대를 지킨 것은 해발 110m 언덕 위에 쌓은 공산성이었다. 금강을 북동쪽으로 껴안은 공산성은 고구려와 신라의 움직임을 미리 파악하고 대처할 수 있는 천혜의 요새였다. 크고 화려하진 않지만 왕궁터도 발견됐다. 고려와 조선에서도 이 성이 꾸준히 사용된 것을 보면 탁월한 입지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공산성에서는 백제의 뛰어난 건축 기술도 확인된다. 오로지 흙으로 쌓은 토성 위에 조선 선조 대에 와서야 벽돌을 얹어 석벽을 쌓았다. 1000년 이상을 토성으로 견딘 것이다. 이성열 백제문화제추진위 대변인은 "하중을 감당할 수 있도록 지하를 깊이 파고 진흙과 모래를 차례로 시루떡 쌓듯 지반을 튼튼하게 다지는 백제의 독특한 건축기술 '판축공법'이 적용됐다"며 "신라 황룡사 9층 목탑 터에서도 이 공법으로 다진 지반이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황룡사터에서 발굴된 찰주본기에는 백제 장인 아비지가 목탑 건축 기술을 지원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 공법은 백제가 웅진으로 오기 전 풍납토성에도 적용했는데, 지반이 안정되지 않고 지진이 잦은 일본에서도 판축공법을 적용한 고대 건축물이 다수 발견된다. 백제 유민들이 후쿠오카, 나라, 오사카 등으로 옮겨가며 당과 신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것으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공산성에는 미스터리로 남은 유물도 있다. 성안마을에서 2011년 발굴된 옻칠 갑옷이 그 주인공이다. 10여 차례 옻을 덧칠한 가죽 갑옷 위에 붉은색으로 새겨진 '정관 19년 4월 21일'이라는 글귀. 당 태종 연호를 쓴 지 19년이니 의자왕 5년에 해당하는 645년이다. 사비성에 있던 의자왕은 660년 공산성에 몸을 피했다 성이 함락되면서 포로로 잡혀간다. 적국인 당 연호가 쓰인 갑옷이 성안마을에서 나온 이유가 무엇일까? 치열한 전쟁 중 당군이 잃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당이 요동을 함락했을 때(645년) 조공으로 보냈던 갑옷 선물과 똑같은 물품을 15년 뒤 묻으며 백제군이 최후의 전의를 불태운 것일까.

 

공산성 전망대인 공산정에 오르면 금강과 공주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공산성 전망대인 공산정에 올라 눈앞에 펼쳐지는 도도한 금강 물결을 바라봤다. 일제가 1932년 공주에서 대전으로 충남도청을 옮기며 만들었다는 금강철교는 한국전쟁 당시 폭파됐다 1956년 재건됐다. 망국의 한도, 식민과 전쟁의 아픔도 고요히 잠들었고, 세월처럼 말없이 강은 흘렀다.

■국립부여박물관

백제의 마지막 122년간 왕도였던 사비성. 공산성은 군사·지리적 요충이었으나 산 위에 성을 쌓고 왕궁과 마을을 배치해 땅이 좁을 수밖에 없었다. 넓은 사비로 천도한 백제는 문화적 중흥기를 맞는다. 왜에 불교를 전파해 아스카 문화가 꽃피게 하고, 동남아 국가와의 교류도 활발하게 벌인다. 국립부여박물관은 바로 이 백제 후기 찬란한 문화 수준을 엿볼 수 있는 필수 관람 코스다.

수많은 유물이 전시돼 있지만 빠뜨리지 말아야 할 핵심은 백제 문화의 상징으로 불리는 금동대향로다. 1993년 능산리 사찰 공방 터에서 출토돼 국보 제287호에 지정된 향로의 은은한 금빛과 향로 꼭대기에 앉은 봉황의 고고한 자태는 단번에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중국 한나라 박산향로 형식을 잇는 이 향로는 향을 피우면 12개의 구멍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신산(신선들의 산)이 된다. 지상과 천상을 잇는 용이 향로를 받치는 지지대 역할을 하고, 대접 모양 몸체는 연꽃이 3단으로 형상화됐다. 신산을 형상화한 뚜껑에는 영생불사하는 것으로 여긴 상상의 동물과 악기를 연주하는 5명의 악사가 앉아 있다. 하늘과 양기를 상징하는 봉황은 날개를 활짝 펴고 꼬리 깃털을 드높이 날리는 하늘의 사자로서 향로 꼭대기를 장식한다. 봉황이 여의주를 턱밑에 끼고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청동소탑 조각은 하중을 분산시키는 하앙 등 백제 건축 문화를 집약해 보여준다.

학계에서는 청동에 금을 입히는 데 수은을 이용한 아말감 도금법이 사용된 것으로 본다. 이 기술은 유럽이 중세에 이르러서야 사용한다. 수많은 인물과 자연을 사실감 있게 표현해 낸 것 또한 놀라울 뿐이다. 백제의 뛰어난 세공술과 도금술이 녹은 최고의 걸작이라고 부를 만하다.

 

용마루 양쪽 끝을 장식하는 화려한 치미는 백제 건축물의 상징이다.

금성산에서 발굴된 청동소탑 편, 부소산에서 나온 치미는 백제의 건축문화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청동소탑 조각을 보면 처마 아래 서까래가 있고, 그 아래 하앙이 보인다. 백제 건축물의 특징으로 꼽히는 하앙은 지붕 하중을 분산시켜 처마를 더 길게 늘어뜨릴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일본 아스카 시대에 건축된 호류사 오층 목탑에도 이런 방식이 사용돼 일본 고대 건축에 백제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하앙과 더불어 백제 건축물의 또 다른 특징은 치미다. 용마루 양쪽 끝에 하늘로 솟아오르는 듯 얹은 장식 기와다. 단순한 기와 하나도 미적 감각을 담아 작품으로 만들어낸 예술 정신이 묻어난다.

■정림사지

중국으로부터 불교가 전해진 뒤 한반도의 불교는 사리 신앙이 지배하다 통일신라 이후 불상 신앙으로 넘어간다. 사리를 모시는 탑이 삼국 시대에 집중적으로 세워진 것도 사리 신앙의 산물이었다.

 

우람한 위용과 균형미를 자랑하는 국보 제9호 정림사지 오층석탑.

백제가 사비에 정착한 뒤 6세기 중엽 도성 한가운데 절을 짓고, 그 절 한가운데 오층석탑(국보 제9호)을 쌓은 것을 보면 왕실이 불교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아직도 백제가 지은 이 절의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절터에서 발굴된 기와 조각에서 '태평 8년 무진(거란족의 요나라 연호로 고려 현종 19년인 1028년에 해당) 정림사 대장당초(定林寺 大藏當草)'라는 글이 발견돼 고려 때 이 절 이름이 정림사였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1400여 년 전쟁과 참화 속에 이 절은 기둥뿌리 정도만 발견되는 옛터가 됐으나, 석탑은 남아 이곳이 절터였음을 보여준다. 안내판을 보니 '목탑 쌓는 방식을 그대로 적용해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 함께 백제 시대 석탑의 장중하면서도 절제된 세련미를 보여준다'고 쓰여 있다. 무심한 듯 큼직한 돌판을 지붕돌로 얹으면서도 사방 모서리는 하늘로 솟아오르는 듯 기상이 넘친다. 1층 기단을 불쑥 높여 세운 뒤 나머지 층 기단은 비슷한 높이로 맞춰 비례의 안정감이 두드러졌다. 실제 높이 8.3m보다 훨씬 우뚝한 인상을 줬다.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은 백제의 미를 그대로 보여주는 건축물이었다.

 

마모와 파손 등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는 석불좌상.

오층석탑 뒤 강당 터에는 11세기에 만들어진 석불좌상(보물 제108호) 보호각이 세워졌다. 오층석탑을 바라보는 자리에 이제는 불상을 신앙으로 삼는 신도들을 위해 석불좌상을 조성해 주존불로 모신 것이다. 불상은 마모가 심해 마치 추상 미술 조각처럼 흐릿하지만, 흙 속에 묻혀 풍화를 피한 대좌는 빛깔만 약간 누런 흙빛을 띨 뿐 연꽃무늬가 선명했다.

■백제문화단지

성급하게 성과를 재촉하는 한국 행정의 생리 탓에 진득하게 충분히 검토하며 유적을 제대로 되살린 경우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1993년부터 2010년까지 17년간 국내 전문가 50여 명의 연구와 자문을 바탕으로 백제문화단지가 만들어졌다는 얘기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약 330만㎡ 넓이에 투입된 예산도 8077억 원에 이른다.

맨땅 위에 백제 유적을 새로 지었음에도 사비궁과 왕실 사찰인 능사를 둘러보며 마치 원래 이곳이 궁궐과 절이었던 듯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사비궁의 중심 공간이자 즉위 의례, 사신 맞이 등 주요 행사가 열린 천정전(天政殿)은 천정대에서 이름을 따왔다. 지금의 총리에 해당하는 대좌평 후보 3~4명의 이름을 써 바위에 얹어 뒀다가 하늘이 표시를 남긴 후보를 임명한 데서 이 바위를 천정대라 불렀다고 한다. 왕권이 귀족 권력을 압도하지 못한 측면도 있으나 신라의 화백제처럼 민주적인 면모가 있다는 점도 새삼스러웠다.

 

계층별 주거 유형을 보여주는 백제문화단지 내 생활문화마을.

백제문화단지에는 궁과 절뿐 아니라 계층별 주거 유형을 재현한 생활문화마을, 온조왕이 터전을 잡은 위례성, 고분공원, 전망대 역할을 하는 제향루도 있다. 적어도 2시간 정도는 충분히 둘러볼 만하다.

글·사진=이호진 기자 jiny@busan.com

여행팁

백제문화제 28일부터 '축포'

 

영남에 개천예술제(67회)가 있다면 호서엔 백제문화제가 있다. 올해로 63회 역사를 자랑하는 백제문화제는 부여군 지역민의 축제로 시작된 이후 1966년 공주시가 참여해 동시·격년(홀수 해 공주, 짝수 해 부여) 개최로 이어져 왔다. 2007년부터는 두 지역을 포괄하는 (재)백제문화제추진위원회가 구성돼 통합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발돋움했다. 2015년 7월 국내 12번째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지정돼 찬란한 문화 대국 백제의 이름을 세계에 알리는 주축이 되었다.

세계유산 등재 2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를 더한 올해 백제문화제는 '한류 원조 백제를 만나다'를 주제로 오는 28일부터 10월 5일까지 공주 금강신관공원과 부여 정림사지를 중심으로 다양한 장소에서 열린다.

29일 오후 6시 금강신관공원에서 열리는 개막식은 2시간 뒤 한화그룹이 메세나 활동으로 참여하는 중부권 최대 불꽃 축제로 축포를 울린다.

전체 123개 프로그램 가운데 백제 문화의 국제적인 면모를 보여 주는 이벤트가 특히 눈에 띈다. 일본 가면극의 원조로 불리는 백제 출신 예술가 미마지를 기리는 미디어 아트쇼가 공주 미르섬과 부여 정림사지 잔디광장에서 축제 기간 내내 열린다. 중국 일본 인도 필리핀 캄보디아 등 5개국 사신단이 왕을 알현하러 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교류 왕국 퍼레이드는 오는 2일과 4일 오후 7시 30분 공주 금강신관공원에서 시작된다.

백제는 의자왕이 웅진에서 끌려갔다고 해서 곧장 패망하지 않았다. 유민과 부흥군이 들고일어났고, 왜에서는 원병이 밀려들었다. 배 400척과 군사 4만 명이 대한해협을 건너 백제 땅에 온 것으로 일본서기는 기록했다. 나당연합군과 제왜연합군이 백강에서 벌인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 전투 '백강 전투'를 소재로 백제 유민의 장렬한 최후를 그린 국악 뮤지컬 '백강의 노래'가 4일 오후 7시 부여 정림사지 주무대에서 공연된다. 041-635-6980. www.baekje.info.

공주에도 한옥마을이 있다?

한옥마을은 전주에만 있는 줄 알았다. 이번 여행에서 충남 공주시에도 한옥마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공주한옥마을은 2010년 문을 열었다. 한꺼번에 숙박객 5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평일에는 40%, 주말은 거의 100% 예약이 찬다. 한옥마을에서 2㎞ 거리에 산림휴양마을이 있다.

한옥마을 집들은 황토에 구들장 방식으로 지어져 참나무 장작으로 군불을 땐다. 피로 풀기에 그만이다. 가족이나 동반자 수에 따라 다양한 크기로 준비된 개별 숙박동 16개와 단체숙박동 6개가 있다. 개별 숙박동마다 별도의 욕실이 구비돼 편리하다. 식당촌인 저잣거리에는 국밥과 연잎밥, 막국수, 전통 불고기 등의 메뉴를 내는 도화관과 율화관, 한정식집인 태화관, 알밤 칼국수와 온·냉면을 내놓는 공주면옥이 있다. 멀리 가지 않고도 이 지역의 개성 넘치는 밥을 먹을 수 있어 편리하다. 공주시 관광단지길 12(웅진동). 041-840-8900.

공주시는 인절미와 깍두기의 고향으로도 유명하다.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에 파천했을 때 임 씨 노인이 진상한 떡을 먹어 보고는 '천하의 절미'라 감탄한 뒤 '임절미'로 불리다 지금의 인절미가 됐다고 전해진다. 깍두기는 조선 정조의 딸인 숙선옹주가 처음으로 '각독기'를 오빠인 순조에게 올려 칭찬받은 뒤 공주로 낙향해 민가에 퍼진 데서 유래한다.

공주시 음식문화거리에도 맛집이 많다. 인기 요리 경연 TV프로그램인 '한식대첩4'에서 우승을 차지했던 원진노기순 청국장(041-855-3456)이 요즘 유명하다.

 

부여군에는 굿뜨래 음식특화거리가 있다. 메밀 막국수와 편육만 전문적으로 파는 장원막국수(041-835-6561)는 줄 서는 맛집이다. 메밀국수 한 젓가락에 편육을 함께 먹고 국물을 들이켜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사진). 충남 향토음식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구드래 돌쌈밥(041-836-9259)은 채소 가득한 불고기에다 푸짐한 반찬을 돌솥밥과 함께 먹을 수 있는 밥집이다.

공주와 부여는 전국 밤 생산량 수위권을 다툰다. 생산량도 많고 맛도 좋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는 알밤 막걸리 등 밤을 이용한 음식이 다양하게 판매된다.

[출처] 삼국 시대 문화의 '공주', 백제를 '부여' 잡는 여행|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