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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바람과 종교

바람과 종교

 

바람과 함께 왔지만 함께 사라지지는 않는다!

더위가 이끌어낸 바람의 사색

 

참으로 기막힌 여름이었다. 기억하기 귀찮아하고 글쓰기 싫어하는 사람도 훗날 <내 인생의 혹서일기>를 쓰라 하면 틀림없이 그 유명했던 1994년의 여름과 이번 2016년의 지긋지긋한 더위를 더듬어 회고할 게 분명하다. 그런 혹심한 더위 속에서 절박해진 게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바람, 바람이었을 것이다. 산바람 골바람 가림 없이, 맞바람 뒷바람 마다않고, 선풍기바람 에어컨바람 거침없이 그저 기나긴 동면을 앞둔 곰 마냥 닥치는 대로 틈나는 대로 미풍, 약풍, 강풍 할 것 없이 모조리 포식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기껏 하룻밤의 휴면도 챙기지 못하면서 말이다. 말 그대로 바람 잘날 없이 우리는 그렇게 바람을 안고, 이고, 업고 여름을 나고야 말았다. 우리네 종교도 그렇게 바람을 달고 지내왔을까.

 

바람은 움직임이요 흐름이다. 식지 않은 여름밤에 우리가 간절히 염원했던 것도 다름 아닌, 인위적이고도 강제적인 바람의 이동이 안겨줄 시원한 쾌감이었다. 그런데 고대의 종교적 지성인들은 역시 남달랐다. 바로 그런 바람의 움직임에 주목하면서 예민하게 힘과 존재와 생의 원리를 떠올렸으니! 초기불교의 사색이 담겨 있는 <구사론(俱舍論)>은 일체의 대상을 형성하는 요소로서 ‘지수화풍’ 사대(四大)를 언급하면서, 바람을 만물의 변화를 낳는 움직임으로 특화시킨 바 있다. 바람의 흐름을 통해 우주 변화의 동력을 직시한 통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고대 히브리인들은 바람의 흐름을 통해 생명의 기원과 영혼의 기반을 이해하였다. 바람은 이동하는 공기로서, 생령을 불어넣는 호흡이었던 것이다. 기독교의 성령이 ‘움직이는 공기’ 또는 ‘숨결의 움직임’을 뜻하는 그리스어 ‘프네우마(pneuma)’에서 비롯되었음을 고려한다면, 생생한 영혼과 정신의 기초는 결코 바람의 흐름과 무관할 수 없음을 인정하게 된다.

 

바람을 모아야 기가 모인다

 

동아시아의 사고에서 변화의 흐름은 기(氣)의 이합집산으로 설명되었다. 특히 기는 바람을 타고 흩어지며 물을 만나 보존된다는 일단의 사고가 풍수(風水)의 사상과 신앙을 낳았다. 풍수의 본디 말인 ‘장풍득수(藏風得水)’는 “바람을 가두고 물을 얻는다”는 뜻이다. 좋은 기운이 바람과 함께 흩어지지 않도록 바람을 적절하게 모아야만 하고, 좋은 기운이 물을 만나 유지되도록 제대로 물을 얻어내야 한다는 게 풍수의 기본 생각이었다. 실제로 국도(國都)를 건설하거나 가택을 마련하거나 묘지를 조성할 때 명당의 기운이 응집되도록 바람과 물의 흐름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특히 중국에 비해 한국의 풍수가 상대적으로 산형과 산세에 보다 집중력을 보였던 것은 산지가 많아서이기도 하려니와 바람이 곧 기의 흐름과 집산을 좌우한다는 사고의 경향과도 밀접한 연관성이 있을 것이다. 어쩌다 바람이 막힌 음습한 공원과 정원을 대하노라면, 바람을 막을 일(防風)이 아니라 모아야 할 일(藏風)임을 절감하게 된다. 오늘날 도시를 꾸미고 주택을 가꾸는 데에 바람은 얼마나 고려되고 있을까?

 

이제 풀이 바람을 부를 차례

 

바람은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종교적 교화는 늘 바람으로 비유되곤 하였다. 풍교(風敎)니 풍화(風化)니 하는 말들이 있는 것을 보면 종교문화의 모범이 널리 자리 잡는 데에 바람이 한 몫 한다. 무엇보다 공자가 정치를 묻는 계강자에게 답하면서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로 바람이 지나가면 반드시 쓰러질 것이다”(<논어> 안연)라고 한 대목이 떠오른다. 유교의 이상적 인간형인 군자, 그 군자가 쌓아 발휘하는 덕은 바람이라 불렸고(德風), 민중은 그 바람에 좌우되는 풀이라 칭해졌다(民草). 근본에서 말단으로 위에서 아래로 중심에서 주변으로 교화를 확장하려는 문화론적 태도에서 보자면 관건은 늘 덕풍이었다. 그러나 2000년 이상 지속된 덕풍과 민초의 구도에 역전의 기운이 감돈다. 시인 김수영은 <풀>이라는 시에서,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의 이미지로써 바람의 우선성에 좌우되지 않는 풀의 자율성을 노래하며 반전을 꾀한다. 민초들에게 바람은 더 이상 선덕이 아닌 악덕과 폭력의 다른 이름인 것일까?

 

풍경(風磬), 바람에 흔들리기는 민초와 마찬가지다. 그러나 바람에 흔들리며 또 다른 바람을 일으키는 게 다르다. 산사의 처마 끝에 매달려 힘없이 쉼 없이 흔들리는 풍경은 바람을 맞고서야 비로소 새로운 교화의 바람을 시작한다. 풍경은 그 울림으로 세상의 번뇌를 씻게 하는 범종과 닮아 있어 그야말로 매달린 종이다. 종벽에 부딪혀 소리를 자아내는 붕어 모양의 탁설 (鐸舌)은 물고기처럼 밤낮 없이 눈 뜨고 각성하라는 정진수행의 메시지를 바람에 실어 나른다. 바람 맞은 경쇠, 아니 바람을 일으키는 경쇠가 번뇌의 파란으로 얼룩진 도시의 삶 속에서 요란한 소음을 이기고 청아하게 울려 퍼질 수 있을까? 방음창 굳게 닫은 현대인들, 풍경소리 들으며 한 떨기 바람이 주는 고귀한 힘을 감지할 수 있을까?

 

바람의 신, 신들의 바람

 

바람은 신이었다. 갖가지 바람이 다 신의 이름으로 불리었다. 그리스에서는 바람의 신 ‘아네모이’로도 모자라 동서남북 방향마다 별칭의 바람신을 배치할 정도였다. 이집트의 ‘슈’, 메소포타미아의 ‘엔닐’, 그리고 인도의 ‘바유’는 바람의 신이면서도 공기나 호흡의 신으로도 통했다. 그러나 바람의 신은 얌전하고 순조롭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바람의 기세는 거세다. 오죽하면 <주역>에서 동기감응(同氣感應)의 상관관계를 말하면서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따른다(雲從龍 風從虎)”고 했을까. 운룡문자도(雲龍文字圖)와 함께 풍호문자도(風虎文字圖)가 인기를 얻은 것도 예사롭지 않다. 물을 매개로 한 구름과 용의 친연성에 빗대어 천지를 진동시킬 바람의 기운과 맹호의 포효가 포개졌다고 할 수 있다. 바람은 힘이었고, 그 힘은 괴력의 신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바람의 신이 힘센 폭풍신으로, 거기에 동반되는 뇌우신으로, 폭풍우가 이는 바다신으로, 난폭과 광란이 진동하는 전쟁신으로 확대되기도 하였다.

 

게르만의 주신 ‘오딘’은 바람과 전쟁의 신이었고, 그리스의 ‘포세이돈’과 그것의 로마 버전인 ‘넵튠’은 바람을 일으켜 보내는 바다의 신이었다. 일찍이 일연 스님이 단군신화의 ‘환인’을 ‘제석’으로 부연하며 동일시했던 바로 그 인도의 ‘인드라’는 천신이면서도 폭풍과 뇌우의 신이었다. 누이인 태양신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를 천상의 동굴에 숨어들게 하여 세상을 암흑의 도가니로 빠지게 한, 난폭하기 이를 데 없는 ‘스사노오노미코토(須佐之男命)’도 바다와 폭풍의 신이었다. 바람의 신이 내뿜는 바람, 그냥 바람이 아니라 신의 바람이었다. 동서양을 거머쥔 몽골의 대군을 무력화시킨 태풍도 위풍당당한 조조를 눈물짓게 한 비밀스런 적벽의 계절풍도 다 신풍(神風)이 아니고 무엇이랴!

 

바람의 신과 함께 하늘이 열리고 나라가 시작됐다

 

환웅이 풍백(風伯)과 우사(雨師)를 대동하여 신시를 열었음은 주지하는 신화적 사실일진대, 그것이 바로 단군신화를 건국신화답게 만드는 장본인이다. 비도 그러려니와 바람의 다스림은 곧 국정(國政)의 시작이요 끝이었다. 어디 고조선뿐이랴. 이성계가 연 신조선도 다르지 않았다. 조선은 건국과 더불어 바람의 신을 ‘풍운뇌우(風雲雷雨)’라는 복합체에 통합시키고, 종묘나 사직과 같은 대사(大祀)에 버금가는 중사(中祀) 급의 국가의례로써 대우했다.

 

그러나 대중들에게 바람의 신은 따로 있었다. ‘영등할미’가 그것이다. 영등맞이를 통해 영등할미를 모시는 2월 초하루는 영등날이고, 보름이나 스무날 뒤 영등이 떠나긴 하지만 영등할미가 오고가는 2월 한 달을 통째로 영등달이라 불렀으니 2월은 실로 바람의 달이었다. 해안 및 도서지역에서 영등에 대한 신앙이 강렬한 것은 바람이 해상의 안전과 직결되기 때문일 것이다. 대만이나 중국, 그리고 동남아 일대의 도교사원에서 어부나 해상(海商)에게 열렬히 신앙되는 마조낭낭(媽祖娘娘)의 경우에도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할미가 아닌 낭자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바람 중의 제일은 신바람

 

뭐니 뭐니 해도 신바람이 최고다. 마음을 열고 속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의 흐름을 멋스럽게 발산하고, 자연과 바람을 벗 삼은 동료들과 희열을 나누면서 심신의 성장과 인격의 성숙을 이뤄낸 바람의 문화가 있었다. 바로 바람의 종교, 풍류도(風流道)가 그것이다. 오랜 중국 유학과 관직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최치원은 난랑을 기리는 비문에서 풍류라 일컫는 현묘한 화랑의 도가 있으며, 그것이 충효(忠孝)ㆍ무위(無爲)ㆍ적선(積善) 등의 실천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유불도 삼교를 포함하고 있다고 역설한 바 있다. 서로 도의를 연마하며 노래와 음악으로 함께 즐기고 산수를 유람하며 사람의 됨됨이를 완성해가던 화랑의 멋과 도리가 풍류라는 이름에 충분히 어울리고도 남는다. 더욱이 풍류의 도를 실천하는 화랑을 풍월주(風月主)라고도 이름 하였으니 이래저래 바람을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이었던 것일까? 최치원 이후 다시 천년이 흘렀다. 화랑의 고도 경주 땅에서 또 다른 최씨 수운(水雲)이 나타나 동학(東學)이라는 이름으로 유불도 삼교의 가르침을 조율하면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바람이 분다. 종교적 상상력도 함께 불어와 출렁인다. 다시 바람이 멎는다. 절대 고요를 느낄 정도로 적막하고 잔잔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바람이 남기고 간 흔적이 크고 깊어서일까 종교적 상상력에 크나큰 사무침이 더해진다. 때론 힘(威力)으로 어디선가는 존재(神)로 또 뉘게는 흐름(氣)으로 바람은 종교적 삶에 정주한다. 그렇게 바람은 종교가 되고 종교는 또 바람이 될 것이다. 종교, 바람과 함께 왔지만 결코 바람과 함께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최종성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석사와 박사를 받았다. 캐나다 브리티쉬 콜롬비아대에서 박사후연수 과정을 거쳤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학술교육부장을 지냈으며, 현재 한국역사민속학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 <조선조 무속 국행의례 연구>, <기우제등록과 기후의례>, <동학의 테오프락시>, <역주 요승처경추안> 등이 있다.

글 : 최종성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ggbn@ggb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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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바람과 종교|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