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 기독교의 나라에다 자유롭고 풍요로운 미국 사람들이 불교에 관심이 많다고 들었는데요, 언뜻 이해가 안 됩니다.
답 : 시대가 바뀌다 보니 서양 사람들이 더 열심히 마음공부를 해요. 서양 사람 머리라는 것은 우리 한국 사람들보다 앞을 내다보는 정신이 있어요. 앞으로 이 세상이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가 그것을 내다보니까 불교밖에 없거든. 대개 박사들이나 젊은 사람들이 불교를 많이 좋아해.
지금까지 인간 사회가 걸어온 길을 쳐다보고 또 앞으로 세상을 쳐다보니까 더 이상 바깥을 바꿔 봐야 끝이 없거든. 안에서 찾아야지. 기독교라는 것은 현재와 미래밖에 없어. 과거라는 게 없거든. 불교는 과거 현재 미래가 뚜렷하면서도 찰나에 과거 현재 미래의 근본으로 돌아가라고 하잖아.
본바탕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교여. 시간 공간을 초월하지 않고는 본바탕으로 돌아갈 수 없어. 똑바른 시간과 공간을 가르쳐 줄 때에 공의 사상이 거기서 나오는 것이여. 비웠다는 사상 말이여. 옛날로 다시 돌아가는 거여.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했잖아. 나 자신을 찾는 길, 그 방법을 뚜렷하게 가르쳐 주는 것은 한국 불교밖에 없거든. 그러니까 서양 사람들이 한국불교에 몰려들고 있어. 한국불교는 포교를 늦게 시작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 왜냐? 참선을 가르치는 불교가 한국 불교밖에 없어.
문 : 큰스님이 미국 가신 게 1972년이지요. 그때는 한국 스님으로 미국 가서 포교하시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답 : 그렇지. 그때는 한국 사람으로 미국 가서 포교한다는 생각을 한 사람이 없지. 허허허.
문 : 처음 미국에 가셔서는 세탁소에서 일하셨다면서요. 힘들지 않으셨어요?
답 : 돈벌이는 없고 언어는 안 통하고. 세탁소는 그저 일만 하면 됐거든. 힘들었지. 그런데 해야만 했어.
여기서 잠깐 큰스님이 처음 미국으로 건너간 1972년으로 거슬러 가보자. 그때 스님 나이 마흔여섯 살이었다. 당시 큰스님은 조계종 청담 종정 스님과 함께 조계종단을 이끌고 있었다. 1950년대부터 70년까지 그는 한국의 유명한 선승이었다.
제자의 초청으로 미국에 첫발을 디뎠다가 아예 미국을 근거지로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큰스님은 미국에 도착해 로드아일랜드의 프로비던스에 방 두 칸짜리 작은 아파트를 구했다. 이웃은 대부분 가난한 흑인들이었다. 작은 불상, 목탁, 죽비, 향만 들고 미국으로 간 큰스님은 아파트에 작은 법당을 꾸미고 혼자서 아침저녁으로 예불을 하고 참선수련을 했다.
한국에서 그는 존경받는 선승이었다. 그를 위해 요리해주고 빨래해주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됐다. 그러나 미국에선 철저히 혼자였다. 게다가 영어도 전혀 못 했고 무일푼이었다.
미국에서 스님이 처음으로 한 일은 앞서 말한 대로 세탁소의 세탁기계 수리공이었다. 아침예불과 참선이 끝나면 사복으로 갈아입고 세탁소로 출근해 저녁 늦게까지 고장난 세탁기들을 수리하고 청소를 하고 온갖 잡일을 했다. 고된 일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혼자 저녁밥을 짓고 저녁예불을 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어느 날 한 남자가 세탁소에 빨랫감을 맡기러 들어왔다가 허름한 차림에 머리 깎은 한국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유난히 맑게 빛나는 눈동자가 그의 시선을 잡아당긴 것이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한국의 숭산 스님 아니십니까?”
그는 근처 브라운 대학에서 동양 문명사를 가르치는 리오 프루덴(Leo Pruden) 교수였다. 불교문화 연구에 일가견이 있던 그는 그동안 숭산 스님을 사진에서만 뵙고도 대뜸 알아본 것이었다. 작은 키에 삭발한 머리, 기름때 묻은 작업복, 가슴에는 ‘미스터 리’라는 명찰뿐이었지만, 프루덴 교수는 그가 숭산 스님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프루덴 교수의 놀라움에 큰스님은 ‘잉글리시 노노’만 연발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일본말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어 프루덴 교수는 자신의 제자들을 큰스님께 소개했다. 큰스님은 항상 밝은 미소로 그들을 맞이했고 직접 된장찌개와 칼국수 김치를 만들어 대접했다.
큰스님의 첫 법문은 프루덴 교수의 통역으로 시작됐다. 그렇게 시작한 법회는 정례적인 예불과 강연으로 이어졌으며 2년 뒤 드디어 예일대학 졸업생 두 명이 승려가 되면서 비로소 큰스님 제자들이 탄생했다. 바야흐로 한국 선불교가 미국에 뿌리내리는 순간이었다.
문 : 최근 조계종 분규를 둘러싸고 한국불교에 대해 실망을 많이 합니다.
답 : 사람들이 살다 보니까 모기 물려 긁을 때도 있고 다리가 아파 두들길 때도 있고, 다 과정이여 과정. 우리 한국불교가 정화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35년밖에 안 됐어. 처음 정화할 때에 대처승이 2500명이고 비구승이 600명밖에 없었어. 그 600명이 대처승을 다 쫓아냈는데 비구승 수가 모자라잖여. 자꾸자꾸 불어 몇 천 명이 됐어. 그래서 급조승이란 게 생겨났다구.
스님 수가 한꺼번에 늘어나니까 그중에는 사기꾼 협잡꾼 깡패 별것이 다 머리 깎고 중이 됐다구. 그런 사람들을 옳게 가르쳐야 했는데 능력이 없었어. 우리 노장님들이 안목이 모자란 것이 아니라 힘이 모자랐던 거여. 갑자기 사람 수가 늘어나니까 균형을 잃어버렸어요. 그때 중이 된 사기꾼 깡패 협잡꾼들이 요새 큰스님들이여. 종단을 휘어잡고, 싸움질하고, 협박질하고, 이 물이 다 지나가려면 한 20년은 지나야 혀.
문 : 20년이나 걸려요? 그럼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은 그동안 어떻게 해야 해요.
답 : 산에 얼마든지 공부 잘하는 스님이 많아. 그 스님들은 이 세상에 나와 설치는 사람들이 아녀. 겉만 보고, 명예나 돈만 보고 집착한 스님들 따라가면 안 되지. 그네들은 스님네 탈을 쓰고 안에는 스님 마음이 아닌데 스님입네 한다구. 그런 사람들을 또 좋다고 좇는 사람들도 있고. 산에는 얼마든지 공부 열심히 하는 스님들이 많으니까 겉만 볼 일이 아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