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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현스님의 초기불교에서 선禪까지 (141) 선종의 수행론-조사선①등현스님 / 고운사 화엄승가대학원장

등현스님의 초기불교에서 선禪까지 (141) 선종의 수행론-조사선①

등현스님 / 고운사 화엄승가대학원장

 

 

“대혜여, 사람이 꿈에서 강을 건너기 위해 애쓰다가 아직 다 건너기도 전에 문득 꿈에서 깨어나면 꿈에 본 것이 사실인가 거짓인가를 알기 어려운 것처럼,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애를 쓰지만 깨닫고 나면 ‘수행을 해야한다’거나 ‘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다만 과거에 보고 듣고 깨닫고 안 것을 분별하는 습기가 꿈에 나타나는 것처럼, 삼계 또한 마음의 분별일 뿐이기 때문이다.”

 

선종에서의 깨달음은 꿈에서 깨는 것으로 비유한다. 깨닫고 나면 더 이상 수행이 필요없는 ‘일초직입여래지’라고도 한다. 예를 들어, 꿈에서 강을 건너 저 언덕에 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꿈에서 깨어나면, 더 이상 저 언덕에 가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는 것과도 같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수행을 한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성립될 수 없다. 이것이 돈오돈수의 논리이다. 그러나 깨달음이 꿈에서 깨어난 것이라고 한다면, 정말로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앞선 사람의 말을 믿어 꿈이라 생각하는지에 따라서 돈수와 점수의 갈림길이 있게 된다.

 

사람의 의식은 끊임없이 어떤 대상을 향하고 있으며, 그것은 꿈에서도 생시에서도 그러하다. 마음이 대상을 향해 집착한다는 점에서 보면, 꿈과 생시는 근본적 차이점이 없다. 삶이라는 것은 의식이 항상 어떤 대상을 향해 있으며, 의식이 그 대상에 사로잡혀 있는 한, 마음은 대상의 생멸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마음의 평안과 휴식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이 그것들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마치 거울이 거울에 비친 모든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과도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상은 모두 다 허망하여 실체가 없음을 알아야, 아는 마음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지에서 6지까지의 보살은, 삼계와 일체가 오직 마음과 뜻, 의식의 분별일 뿐이라고 관한다. 이 단계에서 수행이란 밖의 법에 대한 시비와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보살이 7지에 이르러서는 눈에 보이고 들리는 이 세계가 바로 심의식의 투사물이라고 관하지만,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 자상과 공상을 잘 관찰하여 삼매문에서 자재를 얻고 보리분법(37조도법)을 구족하는 차이점이 있다.

 

그러나 8지에 이르러서는 심의식의 분별상마저 멸하게 된다. 꿈속에서 바라본 세계가 기억과 마음작용들의 투사임을 알뿐만 아니라, 그 기억과 마음 작용들마저 실체가 없음을 본다. 주관과 객관의 그 어느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8지보살의 마음은 열반상이다. 그러나 열반에 들지는 아니한다. 만일 보살이 열반에 들면 일체 중생을 교화 제도할 수 없기 때문이고, 여래지(如來地)를 얻을 수도 없기 때문이며, 여래의 종성을 단절시키기 때문이다.

 

이 까닭에 모든 부처님께서는, 여래의 불가사의한 대공덕을 설하시어 8지보살이 끝내 열반에 들지 않도록 권하는 것이다. 모든 보살은 적멸의 삼매를 경험할 때, 초지 보살 때 세운 10가지 대서원과 본원(本願)의 대비심을 깊이 생각하여 곧 열반에 들어가지 않으나, 이때 성문 연각은 삼매락을 열반이라 오해하여 그 가운데서 열반상을 취한다.

 

깨달음은 멸진정과 동일시된다. 그리고 아라한, 벽지불, 6지 보살의 깨달음이 동등하다고 <능가경>에서는 말한다. 하지만 성문연각의 깨달음은 선, 불선, 자상, 공상, 그리고 주관과 객관의 능소가 남아있는 상태의 멸진정이다. 그에 비해 7지 보살의 경우에는 이와 같은 법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매 순간마다 멸진정에 든다.

 

보살이 제8지에 이르기까지는 삼매락에 취착하여 오직 마음이 보는 것임을 잘 깨달아 알지 못하고, 자상과 공상의 습기가 그 마음을 얽매고 덮어서 2무아(無我)에 집착하니 열반에 대한 개념과 지성적 사유가 있을 뿐 열반에 대한 체험은 아니다.

 

[출처]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