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슬픔을 보는 눈, 죽음을 만지는 손
아아, 그때의 빛이여. 빛 주위로 뭉치는 어둠이여. 서편 하늘 가득 실신한 청동의 구름떼여. 목책 안으로 툭툭 떨어져 내리던 무엄한 새들이여. 쓴 물 밖으로 소스라치며 튀어나오던 미친 꽃들이여. 나는 끝을 알 수 없는 질투심에 휩싸여 너희들을 기다리라. 내 속의 모든 움직임이 그치고 탐욕을 향한 덩굴손에서 방황의 물기가 빠질 때까지.
밤은 그렇게 왔다. 포도 압착실 앞 커다란 등받이 의자에 붙어 한 잎 식물의 눈으로 바라보면 어둠은 화염처럼 고요해지고 언제나 내 눈물을 불러내는 저 깊은 空中들 기억하느냐, 그해 가을 그 낯선 저녁 옻나무 그림자 속을 홀연히 스쳐가던 천사의 검은 옷자락과 아아, 더욱 높이 흔들리던 그 머나먼 주인의 임종. 從者여, 네가 격정을 사로잡지 못하여 죽음을 환난과 비교한다면 침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네가 울리는 낮은 종소리는 어찌 저 놀라운 노을을 설명할 수 있겠느냐. 저 공중의 욕망은 어두움을 지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종교는 아직도 지상에서 헤맨다. 묻지 말라. 이곳에서 너희가 완전히 불행해질 수 없는 이유는 이 우리에게 괴로워할 권리를 스스로 사들이는 법을 아름다움이라 가르쳤기 때문이다. 밤은 그렇게 왔다. 비로소 너희가 전 생애의 쾌락을 슬픔에 걸 듯이 믿음은 不在 속에서 싹트고 다시 그 믿음은 부대의 석방 속으로 돌아가 영원히 숲 것이나, 곧 자기는 정적에 싸이고 우리가 그 전적을 사도하듯이 어찌 비밀을 숭배하는 두가 많지 않으며, 밤은 그렇게 노여움을 가장한 모습으로 찾아와 어두운 실내의 램프볼을 돋우고 우리의 후회들로 빚어진 주인의 말씀은 당신의 헛된 식용처럼 아름답다. 듣느냐, 이 세상 끝 간 곳엔 한 자락 바람도 일지 않았더라. 어떠한 슬픔도 그 끝에 이르면 짓궂은 변증의 쾌락으로 치우침을 내가 아느냐, 밤들어 새앙쥐를 물어뜯는 더러운 달빛 따라가며 휘파람 부는 작은 풀벌레들의 그 고요한 입술을 보았느냐. 햇빛은 또 다른 고통을 위하여 빛나는 나무의 알을 잉태하느니 從者여, 그 놀라운 보편을 진실로 네가 믿느냐.
(「포도밭 묘지 2」)
미학적 구조는 긍정과 부정의 변증법 아래서 발생한다고 한다. 말하자면 슬픔과 위안이 미의 변증법에서 명제의 단위가 된다는 것이다. 자연과 사회에 대한 인간의 관계 위에서 주제가 발생하고 이 주제를 뒷받침하는 일반적 국면이 시적 모티브라고 할 때 주제와 모티브의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이 슬픔이라고 보는 것이다. 슬픔의 동기는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인간의 운명에 자극을 받을 떠나 사회적 갈등이 동기가 될 때 발생할 수 있다. 사회에 대한 외상적(外傷的) 경험이 없이 순수한 인간적 고뇌에 의한 슬픔은 철학적 사색이나 관념 쪽으로 흐르게 마련이지만 모종의 외상적 경험이 일종의 강박관념으로 쏠리게 될 때 시인은 대사회적 공격을 직접적으로 가하든가 간접적으로 야유나 풍자의 형식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작품의 미학적 양상은 작자와 독자의 심리 활동과 관련시켜 볼 때 ‘표현적’일 수도 있고 ‘감정적’일 수도 있다. 순수한 인간적 고뇌가 동기가 될 때는 표현적이지만 사회적 갈등의 동기인 경우는 대개 감정적 양상(비판적 감정)을 띠게 마련이다.
기형도 시의 슬픔의 동기는 순수한 인간적 고뇌가 동기가 된다. 그리고 미학적 양상은 표현적이다. 표현적이란 것은 무시간적 · 무장애적 자유감정을 임의롭게 하면서 어떠한 표현의 질량도 이미지나 관념의 용기에 담을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그 뿌리는 인간의 원형적 운명 조건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 시의 내용은 그 원천을 인간적 고뇌에 두고 있다. 아이스킬러스의 「포박된 프로메티우스」가 그렇듯이 인간적 고뇌는 운명적인 것으로 본다.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지 않는 곳에 프로메티우스의 비극적 운명이 싹텄듯이 시인은 스스로 불행이라는 이름의 아성을 정복하려 했다. 인간이 불행해질 수 없는 이유를 “神이 우리에게 괴로워할 권리를 스스로 사들이는 법을 아름다움이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갈파한 것은 신이 인간을 회유하기 위한 위증(僞證)으로, 혹은 “어떠한 슬픔도 그 끝에 이르면 짓궂은 변증의 쾌락으로 치우친다"고 한 것은 인간이 안일을 위해 인간 스스로에게 던진 위증으로 생각했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쯤 되면 기형도는 아마 니체라는 강물의 한 지류로 출렁이고 있는지 모른다. 그만큼 인간고(人間苦)의 깊이를 앓고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슬픔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전생애의 쾌락을 슬픔에 걸 듯이 믿음을 부재 속에 싹틔우고 다시 그 믿음을 부재의 씨방 속으로 돌아가 영원히 쉬게 한다. 햇빛이 또 다른 고통을 위하여 빛나는 나무의 알을 잉태한다. 빛 주위로 뭉치는 어둠”, “실신한 청동의 구름떼”, “무엄한 새들”, “미친 꽃들”을 보는 눈을 그는 스스로 질투심과 탐욕의 눈이라 했지만 결국은 죽음의 그림자인 슬픔에 깊이 함몰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머나 먼 주인의 임종을 추종하는 종자(者)들을 향하여 "그 놀라운 보편을 아직도 믿느냐"고 반문하면서.
어느 영혼이기에 아직도 가지 않고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느냐. 네 얼마나 세상을 축복하였길래 밤새 그 외로운 천형을 견디며 매달려 있느냐. 푸른 간유리 같은 대기 속에서 지친 별들 서둘러 제 빛을 끌어모으고 고단한 달도 야윈 낫의 형상으로 공중 빈 밭에 힘없이 걸려 있다.
아느냐 내 일찍이 나를 떠나보냈던 꿈의 힘들로 하여 모든 용사들을 힘겨워하고 모든 높고 험한 언덕들을 피해 삶을 지나다녔더니, 놀라워라, 가장 무서운 방향을 택하여 제 스스로 힘을 겨누는 그대, 기쁨을 숨긴 공포여, 단단한 확신의 즙액이여.
보아라, 쉬운 믿음은 얼마나 평안한 산책과도 같은 것이냐, 어차피 우리 모두 허물어지면 그뿐, 건너가야 할 세상 모두 가라앉으면 비로소 온갖 근심들 사라질 것을. 그러나 내 어찌 모를 것인가. 내 생 뒤에도 남아 있을 망가진 꿈들, 환멸의 구름들, 그 불안한 발자국 소리에 괴로워할 나의 죽음들.
오오, 모순이며, 오르기 위하여 떨어지는 그대, 어느 영혼이기에 이 밤새이도록 끝없는 기다림의 직립으로 매달린 꿈의 뼈가 되어 있는가. 곧이어 몹쓸 어둠이 걷히면 떠날 것이냐. 한때 너를 이루었던 걷고 투명한 물의 날개로 떠오르려는가. 나 또한 얼마만큼 오래 냉각된 꿈속을 뒤척여야 진실로 즐거운 액체가 되어 내 생을 적실 것인가. 공중에는 빛나는 달의 귀 하나 걸려 고요히 세상을 엿듣고 있다. 오오, 내 어찌 죽음을 비웃을 것이냐 삶을 버려둘 것이냐, 너 사나운 영혼이여! 고드름이여.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
“오르기 위하여 떨어지는” 행위는 시시포스의 신화 구조와는 다르다. 시시포스의 오르는 행위는 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지만 여기서는 시인 자신의 작위적인 행위다. 그만큼 시인의 눈에 비친 모순의 세계도 자신이 만들어낸 모순의 운명이다. 죽음을 비웃을 수도 없고 삶을 버려둘 수 없는 양감정(兩感情)의 정서가 어쩌면 시인 보편의 정서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이 정서 속에서 자기 존재의 근거를 찾고 의미를 찾고 그의 미학을 창출한다. 그러나 슬픔에서 기쁨으로 이어지는 통로는 언제나 순탄치가 않다. 아니 스스로 그런 길을 선택한다. 그러한 척박한 동토 위에 서 있는 자신의 초상(‘고드름' 같은 ’영혼‘)을 즐겨 그려 보인다. 그의 시적 호흡은 가쁘고 열기가 있다. 휴식을 원하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도달한 휴식 공간은 가장 비극적인 마지막 밀폐된 공간이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횐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빈집」)
아무런 기교도 없다. 모든 영양과 수분이 증발해버린 언어의 유해(遺骸), 인생에 대한 마지막 감상을 찾아보려는 것도 여기서는 사치다. 슬픔의 잔해에 대한 가벼운 전율이 일 뿐이다. 그는 슬픔을 신으로부터 사들인 권리로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을 놀라운 보편의 진실로 간주한다. 그러나 그가 창조한 슬픔은 이와 같이 그의 생각보다 독자에게 미치는 감동의 파장이 훨씬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슬픔을 보는 눈은 죽음 앞에서 백내장에서 녹내장으로 사위어가고 죽음을 빈방의 문고리를 만지듯 빈손으로 만지고 있다. 처절한 적요의 공포 앞에서.
인간적 비전 1: 본연적 순수성
'시 메모'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정이입Empathy, 感情移入 두산백과 (0) | 2022.11.15 |
---|---|
나태주/ 도담한 정시(正視)와 여심(餘心)의 의취(意趣) (0) | 2022.11.14 |
나희덕 / 로고스적 에스프리-진실과 사랑의 화성법(和聲) (0) | 2022.11.10 |
김윤성 / 존재의 의미- 동양적인 프시케(영혼)의 소요(逍遙) (0) | 2022.11.08 |
이성선 / 영혼의 울림-선시(禪詩)의 현장 (0) | 2022.1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