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불
'미륵보살(彌勒菩薩)'의 줄임말로 '내세에 성불하여 사바세계에 나타나서 중생을 제도하리라는 보살'이다.
인도 파라나국의 브라만 집안에서 태어나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고, 미래에 부처가 될 수기(受記)를 받은 후 도솔천에 올라갔다고 한다.
미륵은 '사보살(四菩薩)'의 하나인데 사보살은 크게 2가지가 있다. 하나는 법화경에 나오는 네 보살로 '상행보살(上行菩薩)', '무변행보살(無邊行菩薩)', '정행보살(正行菩薩)', '안립행보살(安立行菩薩)'이고 다른 하나는 태장계 만다라에서 대일여래를 둘러싼 네 보살로 '보현보살(普賢菩薩)', '문수보살(文殊菩薩)',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미륵보살(彌勒菩薩)'이다. 미륵은 후자의 사보살로 대일여래를 둘러싼 네 보살 중 미륵보살을 의미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미래불.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이후 56억 7천만 년이 되었을 때[2][3] 후에 부처가 될 것이라 수기(예언)를 받은 보살들이 거주하는 도솔천에서 이 세상으로 하생(下生)한다고 한다. 미륵은 하생하기 전까지 도솔천(兜率天)의 보살로 머물면서 중생을 교화하고 있다.[4] 이 때문에 미륵을 보살이라고도 하고 부처라 부르기도 한다. 사실 이 부분은 좀 복잡한데, 미륵삼부경 중 미륵하생경과 미륵대성불경에서는 미륵이 수기를 받고 도솔천에 있다는 미륵불설을, 미륵상생경에서는 석가의 제자 미륵이 미래불이라는 미륵보살설을 따른다.[5] 근데 석가모니를 더 높이는 현 불교계에서는 관습이란 이름으로 그냥 미륵불/미륵보살을 혼용한다.
석가모니 부처가 입멸한 뒤 이루어진 제1차 경전 결집에서 경의 암송을 맡은 아난다에게 당시 장로들이 제기한 아난다의 다섯 가지 잘못 가운데 하나가 "석가모니 부처께 1겁(劫)[6] 동안 이 세상에 머물러 달라고 요청하지 않은 것"이었다. 열반경에 따르면 석가모니 부처는 입멸을 앞두고 "사신족을 닦은 자는 1겁 동안 세상에 머물 수 있다." 하고 아난다에게 넌지시 말한 적이 있는데, 아난다는 석가모니 부처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럼 1겁 동안 세상에 머물러 주십시오."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때 아난다가 장로들 앞에서 자신의 잘못에 대해 항변하면서 든 것이 석가모니 부처가 미륵 부처의 존재를 수기(授記)[7]하였다는 것이었다. 석가모니 부처께 1겁 동안 머물러주시라 원하지 않은 것은 그때 마라 파피야스 때문에 마음이 가려져서였기도 하지만, 석가모니 부처께서 생전에 누누히 "세상의 모든 것은 무상(無常)한 것이니 무언가에 매달리거나 그에 구애받아서도 안 된다"이라고 강조한 것과, 석가모니 부처 자신의 뒤를 이어 미륵 부처가 세상에 내려와 중생을 교화할 것이라고 예언하셨는데, 석가모니 부처께 떠나지 말고 영원히 머물러 달라고 하면 석가모니 부처께서 말한 제행무상의 가르침은 어떻게 되고, 석가모니 부처 이후로 오게 될 미륵불에 대한 예언은 또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
그리고 미륵불이 하생하는 장소는 용화수(龍華樹) 아래라고 한다. 이에 따라, 미륵 부처를 모신 법당을 특별히 용화전(龍華殿) 또는 미륵전(彌勒殿)이라고 한다. 또한 일반적으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보통 불상들과 달리, 미래에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명상을 하는 반가상이나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설법하러 갈 때 움직이기 쉽도록 서 있는 입상이나 걸터앉은 모습의 좌상을 주로 취하고 있다. 여담으로 미륵은 입상으로 표현될 경우 협시보살들에 비해 키가 크게 표현된다.
<미륵하생경변상도>에 그려진 미륵의 모습. 일반적인 불화의 부처의 모습과는 확연히 자세가 차이가 있다.
미륵이 나타나면 이 세상에 그 가르침을 펼쳐 모조리 깨우침의 경지에 들게 해 버린다 하며[8], 이러한 가르침에 따르면 미륵은 미래에 나타날 구원자인 셈이다. 이러한 먼치킨적인 스펙 때문에 흔히 석가보다 뛰어난 듯 묘사된다. 때문에 불교가 전파된 나라들, 특히 한국에서는 미륵 신앙이 발달하였으며 심지어 창조주와 동일시되기도 한다.[9]
허나 반대로 생각하면 미륵은 세상이 망할 때가 되어서야 등장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오히려 세상이 혼란할 때 나타난다고 생각되었으며,[10] 이 때문에 먼 과거부터 현재까지 많은 이들이 미륵을 사칭하기도 했다 그리고 현재도 진행 중. 지금도 삶이 어렵고 불안한 사람들을 상대로 미륵에게 조상을 천도해야 운이 풀린다며 설득하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미륵을 표현한 조각상은 기원후 1세기 간다라 지방의 그리스풍 불상에서 최초로 확인된다. 미륵 신앙은 아미타불 신앙의 형성 시기인 기원후 3세기경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고구려에서는 이를 반영해서인지 미륵 신앙이 아미타 신앙과 혼재된 모습을 보였다. 군주 차원에서 공공연히 미륵을 자처한 것은 6세기 백제 성왕 시대부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적으로 힘든 시기에는 미래불의 도래를 바라는 미륵 신앙이 유행했는데[11]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의 미륵보살 반가사유상[12], 화랑도[13], 후삼국시대의 미륵 신앙, 고려시대 향도의 매향 활동[14], 조선시대의 후천개벽 사상 등으로 이어졌다.
여담으로 한국 신화에 등장하는 미륵이 불교에서 말하는 미래불 미륵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본래는 이름이 다른 거인신이자 창조신이었으나, 불교의 전래 후 본명 대신 미륵이라고 불리다가 결국 본명은 잊히고 미륵이라는 이름으로 남은 것.
고려시대에는 호국을 기원하며 국가 단위로 제석을 주불로 하여 재를 올리는 제석궁(제석원)에서 제석재를 올릴 때 미륵불과 관련된 경전을 읽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유는 물론 미륵불이 가지는 초월자적인 포스의 영향도 있지만, 제석을 미륵불의 화신이라고 설멍한 경전 <섬자경>의 영향을 받은 것도 있다.[15] 물론 그 이전부터 미륵신앙과 토속신앙은 용화향도의 기록에서 보이듯 서로 섞이고 있었다.
이슬람교 시아파의 마흐디 신앙은 미륵 신앙과 흡사한 면모도 있다. 오늘날 시아파가 주류인 곳은 이란이지만 전통적으로 시아파 신학이 발전한 곳은 타지키스탄 일대였다.[16] 타지키스탄 일대는 인도와 거리가 가까워 교류가 많았고 이슬람교가 전파되기 전에는 불교 문화권이었으며,[17] 파미르 산맥 일대는 시아 이스마일파의 주요 근거지이기도 했다. 중세 쉬아파 학자들은 힌두 철학과 불교 철학 공부에도 적극적이었는데 특히나 불교 및 힌두교 영향이 농후하다. 한 예로 알리의 초상화가 불교 탱화의 영향으로 이란이나 바레인 등 시아파 국가들에서 그려져 숭배되고 있는데 수니파에선 우상숭배라며 기겁한다. 그리고 드루즈파는 환생 관련한 교리 때문에 중앙아시아에서 유행했던 불교 혹은 마니교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종파로도 추정된다.[18] 드루즈들은 오늘날 시리아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거주하지만 드루즈교의 실질적 창시자 앗 다라지는 트란스옥시아나 출신의 이스마일파 신학자였다.
다만 마흐디라는 개념이 미륵에서 음차된 것이라 카더라 등등의 주장은 근거가 다소 부족하다. 마흐디의 어원은 인도를 뜻하는 아랍어 "히다야(هْدِيّ)"에 사람을 뜻하는 접두사 밈(م)이 붙어서 나온 어휘이다. 시아파와 수피즘에서 기존 불교의 말법 사상 일부를 차용했다 보는 것은 모를까.[19] 시아파 내 여러 종파들은 교단주의 권위를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사파비야 교단의 이스마일 1세가 자신이 조로아스터교의 신성한 불을 지키는 존재라고 믿고 홍보했던 사실에서 보듯[20] 비무슬림 현지인들도 자기네 종파로 개종시킬 겸 현지인들이 믿는 구세주 신앙을 끌어다 갖다붙이는 일이 적지는 않았다.
한국에서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비교적 많은 이유 관련하여 일본 불교계는 여호와의 증인 특유의 종말론과 휴거 사상이 미륵 신앙과 유사점이 많아 한국인 입장에서 친숙하기 때문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백련교의 조직 구성과 여호와의 증인 종교 공동체 문화는 모두 외부에게 폐쇄적이고 종말론과 현실부정 이원론에 바탕을 두었다는 점에서 매우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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