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동양철학

공자의 수레 - 안연과 백어에 대한 공자의 본심

공자의 수레 - 안연과 백어에 대한 공자의 본심

11편 선진(先進) 제7장

by펭소아

 

안연이 죽자 그 아비인 안로가 공자의 수레로 외관을 만들고 싶다고 청했다.

 

공자가 말했다. “잘나건 못나건 사람은 각자 자기 아들에 대해 말하기 마련이다. 리(공자의 외아들 공리)가 죽었을 때도 내관은 있었지만 외관은 없었다. 내가 수레로 자식의 외관을 삼고서 걸어 다니지 않은 것은 내가 대부의 말석에 끼어있어 걸어 다니면 안 되기 때문이다.”

 

顔淵死, 顔路請子之車以爲之槨.

안연사 안로청자지거이위지곽

 

子曰: “才不才, 亦各言其子也. 鯉也死, 有棺而無槨. 吾不徒行, 以爲之槨, 以吾從大夫之後, 不可徒行也.“

 

자왈 재불재 역각언기자야 리야사 유관이무곽 오부도행 이위지곽 이오종대부지후 불가도행야

 

안로(顔路)는 안연의 아버지입니다. 이름은 무요(無繇), 자가 로(路)입니다. 증석과 증삼처럼 안로와 안연도 부자(父子)가 모두 공자의 제자였습니다. 안로는 증석과 마찬가지로 공자보다 불과 여섯 살 적었지만 공자의 제자가 됐습니다. 그러니 안연에 대한 공자의 애정이 얼마나 깊었는지 속속들이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공자의 수레로 안연의 곽(槨)을 만들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곽은 관을 담는 외관(덧널)을 말합니다. 의장용 관입니다. 앞서 공문의 제자들이 안연의 처지를 딱히 여겨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진 것과 이를 연결시키는 해석이 많습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안로는 아들이 스승인 공자를 얼마나 존경하고 따랐는지를 잘 알기에 그런 공자가 타던 수레를 아들의 황천길 수레로 만들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치를 부리겠다는 생각보다는 안연에 대한 공자의 지극한 애정을 확인받고 싶은 마음이 더 컸을 것입니다.

 

공자도 그 마음을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안연은 한 번도 관직을 맡은 적이 없었기에 공자가 천하주유하던 13년의 세월 내내 공자 곁을 지키며 수행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 풍찬노숙을 함께 한 동지였으니 속정이 얼마나 깊이 들었겠습니까? 게다가 인품과 학문에 있어서 공문의 후계자로 여겼던 안연이었으니 뭔들 못해줄까요?

 

하지만 공자는 곡진한 말로 거절합니다. 예의 전도사답게 예에 어긋난다는 이유를 듭니다. 안연에 앞서 장례를 치른 공자의 외아들 백어(공리)와 형평성 얘기도 꺼냅니다. 이 때문에 안연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려는 제자들의 뜻에 반대했던 것과 같은 논리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볼 때는 뉘앙스가 다릅니다.

 

10장에서 안연의 후장(厚葬)에 반대할 때는 가정형편이 어려운 데다 공직에도 있지 않은 사람의 장례가 성대한 것은 분수에 맞지 않은 사치이기에 반대한다는 뉘앙스가 강했습니다. 안연을 아들처럼 여겨 백어와 똑같이 검소한 장례를 치러주려 했는데 제자들 때문에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말도 살짝 변명처럼 들린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장에서 그 본심이 엿보입니다. 공자 역시 애제자였던 안연을 위해 수레를 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러자니 백어에게 너무 미안했던 것입니다. 백어가 죽었을 때도 수레로 외관을 만들자는 말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의 지위에 있는 사람은 수레를 타고 다녀야 하기에 안 된다’는 예를 내세워 내관으로만 조촐하게 장례를 치렀을 겁니다. 그래 놓고선 안연을 위해선 그 수레를 내주자니 난처했던 것입니다.

 

안로에게 그 말을 건넬 때 ‘재주가 있건 없건 누구나 자기 아들 중심으로 말한다’를 서두에 꺼낸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공자 역시 백어 중심으로 생각한다고 여기면 착각입니다. 거기엔 언중유골이 숨어 있습니다. 재주 있는 건 안연이요 재주 없는 건 백어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안연은 공자 공적 삶(비오스)의 계승자였다면 백어는 사적 삶(조에)의 후계자였습니다. 비오스와 조에, 둘 중에 공자는 뭘 더 중시했을까요? 당연히 비오스입니다. 하지만 조에와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안로에게 일깨워 준 것입니다.

 

공자의 군자학에는 공선사후(公先私後)의 정신이 뚜렷합니다. ‘논어’에는 ‘이로운 것을 보면 의로운 것을 생각하라’는 견리사의(見利思義) 외에도 ‘힘든 일을 먼저, 이익은 나중에’라는 선난후획(先難後獲‧ 6편 ‘옹야’ 제22장)과 ‘공직을 맡으면 먼저 정성을 다하고 보수는 그다음’(15편 위령공 제38)이라는 메시지가 되풀이해 등장합니다. 당연히 가문의 계승자인 백어보다 공문의 후계자인 안연을 더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자는 동시에 중용(中庸)의 지혜를 갖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안연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하나뿐인 아들을 섭섭하게 대접해서 안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앞서 보낸 아비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 안로에게 백어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내고 예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말은 뒤로 돌린 것입니다. 같은 메시지를 전하더라도 제자들에게 공적 발언을 할 때와 동병상련을 겪은 아비에게 전할 때 그 화법이 이렇게 달랐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만일 안연이 먼저 죽었다면 공자가 망설임 없이 자신의 수레를 내어줬을 것이란 걸 미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백어가 죽었을 때 안연의 전례와 균형을 맞추기 위해 빚을 내서라도 외곽을 마련했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공자의 제자였다면 안로 역시 공자의 말 뒤에 숨은 속뜻을 읽어내고 감읍했을 것입니다. 그만큼 공자는 여러 사람의 마음을 배려하면서도 균형 감각이 뛰어났던 것입니다. 안연의 장례와 관련한 에피소드를 읽으면서도 예를 중시한 것에만 방점을 찍으면 이런 중용의 지혜를 읽어내지 못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