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의미-불교적 관점에서/존 바우커
290-2.붓다의 불교에서 고타마(깨닫기 전의 호칭)가 죽음의 의미에 대하여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그가 처한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석가족 부족장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죽음의 비참함을 보게 되면서 그런 일이 자신에게도 일어날 것이라는 당혹감을 갖게 된다. 절망적인 심정에 빠진 그는 어떤 치유책 혹은 질병과 죽음에 저항할 수 있는 방도를 찾아 외출했을 때, 노란 장삼을 입고 삭발한 수행자를 본 것이다. 이 고행자는 현세에서의 모든 세속적인 문제들에 초연하기에 힘쓰면서 죽음을 기다리는 자들이었다. 고타마는 편안한 삶과 아내, 아들을 버리고 궁을 떠나 당시 기원전 6세기경의 인도 종교에서 행해졌던 절제와 초연함의 수많은 고행 방법들을 실천하는 데에 자신을 던졌다.
일반적인 고행으로도 부족하여 극단적인 고행을 계속했으나 그것들이 자신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그런 노력들이 완전히 무익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고행으로는 합당한 목적에 이를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깨달음에 도달한 그날 밤에 이런 경험을 성찰하여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일상적인 의식으로부터 그것을 완전히 초월한 상태로 이동하는 단계들. 四聖諦. 苦·集·滅·道)를 하나하나 통과한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였다. 諸行無常과 변화와 해체에 의해 지배받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심지어 죽음의 반복을 통해 하나의 생명으로부터 다른 생명으로 이어지는 그런 아트만, 즉 불변의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오직 無我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가시적인 형태들을 낳는 것은 오직 변화의 과정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四法印.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 열반적정 > 하지만 이런 것들은 오래 가지 않는다. 물론 신들은 다른 것들보다는 오래 지속되기는 하지만 그런 신들조차 영원하지는 않다. (三界 중 欲界의 6욕천<천상계>에는 신들이 산다고 함. 여기서 신은 창조주가 아니며 생사를 초월한 열반에 이르지 못한 신)
三界(삼계) : 【범】 Trayo-dhātava 【팔】 Tayodhātavo 생사 유전(流轉)이 쉴새 없는 미계(迷界)를 셋으로 분류한 것. 욕계ㆍ색계ㆍ무색계. (1) 욕계(欲界). 욕은 탐욕이니, 특히 식욕ㆍ음욕ㆍ수면욕(睡眠欲)이 치성한 세계. (2) 색계(色界). 욕계와 같은 탐욕은 없으나, 미묘(微妙)한 형체가 있는 세계. (3) 무색계(無色界). 색계와 같은 미묘한 몸도 없고, 순 정신적 존재의 세계. 이 3계를 6도(道)ㆍ25유(有)ㆍ9지(地)로 나누기도 함.
欲界(욕계) : 3계(界)의 하나. 지옥ㆍ아귀(餓鬼)ㆍ축생(畜生)ㆍ아수라ㆍ인간ㆍ6욕천의 총칭. 이런 세계는 식욕ㆍ수면욕(睡眠欲)ㆍ음욕이 있으므로 욕계라 함.
六欲天(육욕천) : 또는 욕계육천(欲界六天)ㆍ6천(天). 3계(界) 중 욕계에 딸린 6종 하늘. 이 하늘 사람들은 모두 욕락이 있으므로 욕천이라 함. (1) 4왕천(王天). 수미산 제4층의 4면에 있는 지국천(동)ㆍ증장천(남)ㆍ광목천(서)ㆍ다문천(북)의 4왕과 그에 딸린 천중들. (2) 도리천(忉利天). 33천이라 번역. 수미산 꼭대기에 제석천을 중심으로 하고 4방에 8천씩이 있음. (3) 야마천(夜摩天). 선시천(善時天)ㆍ시분천(時分天)이라 번역. 때를 따라 쾌락을 받으므로 이렇게 이름. (4) 도솔천(兜率天). 지족(知足)이라 번역. 자기가 받는 5욕락에 만족한 마음을 내는 까닭. (5) 화락천(化樂天). 또는 낙변화천(樂變化天). 5욕의 경계를 스스로 변화하여 즐김. (6)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 다른 이로 하여금 자재하게 5욕 경계를 변화케 함. 6천 중 사왕천은 수미산 허리에 있고, 도리천은 수미산 꼭대기에 있으므로 지거천(地居天), 야마천 이상은 공중에 있으므로 공거천(空居天)이라 함. ⇒욕천(欲天)
293.붓다가 깨달은 이런 진리는 고통의 네 가지 본질에 관한 것(四聖諦)이며 만일 고통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볼 수 있다면, 고통의 소멸에 무엇이 연루되어 있는지 알게 될 것이며, 고통의 소멸로 이르게 하는 길도 즉시 알게 된다. 죽음은 고통의 전형이며 붓다의 깨달음은 내면에 있어서 이런 진리를 철저하게 근본적으로 인식한 것이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알았다. 고통이 무엇이며, 그것을 일으키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의 소멸이 무엇인지를, 고통의 소멸로 이끄는 과정이 무엇인지 알았다. 나는 그것이 정말 무엇인지를 알았다. -------나의 자아가 열정적으로 싸우고 투쟁하는 동안, 무지가 추방되고 앎이 생겨났다. 어둠이 사라지고 빛이 나타났다.
-붓다의 말씀 중에서
이런 깨달음을 얻자마자 붓다는 무상과 덧없는 변화의 과정으로부터 초연한 상태 안에서 안식을 얻었다. 그것은 니르바나, 열반의 상태이다.
295.무한한 진리를 알지 못하고 집착에 빠진 인간에게 개개의 현상은 다른 현상에 의해 조건 지어져 있으며 모든 현상은 선행하는 원인에 의해 생겨난 결과 안에 얽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란 너무도 어렵다. 또한 삶의 모든 활동들을 안식에 이르게 하고 재생으로 흘러가는 모든 것을 멈추게 하고, 갈애를 깨뜨리고, 열정을 소멸시킴으로써 완전한 소멸 즉 열반에 이르게 하기란 너무나도 어렵다.-12緣起
*갈애(渴愛)
갈애(渴愛)란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고 싶어하듯 무엇을 하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마음에 드는 것을 만나면 애착심(愛着心)이 생기고 마음에 들지 않는 싫은 것을 만나면 증오심(憎惡心)이 생기는데 이 모두가 갈애(渴愛)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갈애(渴愛)는 인간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본능적 욕구이기도 한다. 오욕락(五慾樂)인 이성간의 성적인 욕구와 음식에 대한 욕구, 수면에 대한 욕구, 재물에 대한 욕구 명예에 대한 욕구가 모두 갈애(渴愛)인 것이다. 고(苦)·낙(樂)등의 감수 작용이 심해질수록 거기서 일어나는 애착심 증오심도 강해지면서 다음의 취(取)의 집착이 갈애(渴愛)를 통해 일어나는 것이다.
296-300.붓다는 최초의 설법에서 양극단을 피하라는 중도와 깨달음에 이르는 팔정도를 포함한 개략적인 내용을 이야기한다. 이 최초의 설법에서 마지막 설법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메시지를 강조했다. 즉 아무것도 영원한 것은 없으며, 불변의 자아나 혹은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그것이다. 붓다가 임종하기 직전에 남긴 말은 “모든 삼카라sam/nkhara(오온 중의 行. 정신적 요소들의 합성체) 안에는 쇠퇴와 소멸의 힘들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늘 자신을 경계하고 근신하기를 멈추지 말라.”고 말했다. 모든 삼카라는 무상하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는 심지어 시네루 산처럼 거대한 산이라 할지라도, 심지어 이 광대한 대지라 할지라도 연기를 뿜어내기 시작하면서 거대한 우주적 불길에 휩싸여 타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자아의 완전한 소멸을 상상하기란 이보다 훨씬 어렵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고통의 소멸을 헤치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불변의 자아란 없으며 내가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이런 형상의 모든 측면이 결국에는 변하여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오, 수행자들이여, 어떤 물체도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감정도 지각도 형체도 의식도(色受想行識) 결코 영원하거나 불변적인 것은 없고 모든 것은 변한다.” 그런 다음 붓다는 소똥 한 줌을 손에 쥐고는 이렇게 말한다. “수행자들이여, 설령 영속적이고 영원하고 불변하는 개체의 자기정체성이 발견될 수 있다 하더라도, 고통의 완전한 근절을 위한 청정한 삶이 현세에서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붓다의 말씀 중에서
그렇다면 인간은 현재 모습은 무엇인가? 오온의 복합체이다.
1) 색-기본 구성 물질
2) 수-6근, 즉 여섯 감각기관의 느낌
3) 상-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여 그것을 감각으로 조직하는 수단인 지각능력
4) 행-정신상태를 구성하는 것
5) 식-내용을 담지 않는 중립적인 감각 및 지속적인 의식
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인간의 형상 혹은 인격은 이것들의 합성체이다.
거기에는 이원론이란 없다. 즉 오온은 분리 상태로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은 다양한 능력과 기능을 가지는 인간 형상의 단일한 형식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사고력 혹은 의식을 순수 형식의 영역으로 이동시키는 합성체의 능력은 매우 중요하다. 이때 순수 형식의 영역에서는 ‘나’라고 하는 자아의식이 모두 사라져 버린다. 인간의 형상을 구성하는 혼합체는 일상 경험의 접근 가능한 영역, 즉 집착과 갈애의 영역 안에서 작동이 가능하며, 그 영역의 반대편에는 아무런 형태도 없고 따라서 갈애도 존재하지 않는 영역이 있다. 이 두 영역 사이에 순수 형식의 영역이 존재하고 만약, ‘나’라고 하는 자아의식을 모두 버리기만 한다면, 인간 형성을 구성하는 저 연속성의 흐름으로 이 순수 형식의 영역을 인식할 수 있다. 이는 집착이 없는 순수의식이다. 그리고 그 최상의 수준(열반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은 텅 비어있다.
누가 ‘나’라고 말할 때, 그는 오온(五蘊)의 합성체 혹은 그중의 하나를 가리키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이 ‘나’라고 생각하여 스스로를 속인다. 가령 연꽃의 향기가 꽃잎과 색깔과 꽃가루 등에 속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듯이, 오온의 하나가 ‘나’라든가 또는 오온의 일부가 ‘나’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온 안에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붓다의 말씀 중에서
그러므로 죽음이란 오온이 산산조각으로 해체되는 것을 가리킨다. 오직 존재하는 것은 오온뿐이므로 다시 존재하는 불변의 자아란 없다. 해체된 오온이 다시 해체되기 전과 완벽하게 똑같이 다시 모이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다시 태어나는 불변의 자아란 없다. 붓다고사는 “누구도 죽음에 대해 확실하게 알고 있지 않다. 그리고 누구도 모든 죽음은 곧 오온의 해체를 뜻하는 것이라는 사실, 그리하여 죽음의 문제는 결국 ‘살아있는 모든 것은 죽어서 다른 몸으로 전이한다’는 식의 (표현은 다양하지만)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꿰뚫고 있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이는 죽음이 소멸 혹은 망각이라는 것을, 혹은 어떤 결과도 수반하지 않는 채 형상을 가진 생명체의 종말임을 뜻하는 것일까? 붓다의 가르침에 의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불변의 자아라든가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과관계로 이어지는 어떤 영속성은 존재한다. 사실 붓다는 특히 영속론자들(eternalists, 죽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 영혼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자들)과 멸절론자들(annihilationists, 현재적 삶에서 이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 모두를 부정하면서 양자 사이의 중도를 제시했다.
이처럼 만일 다시 태어나는 불변적인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불교신자의 경우 사후에 무엇이 계속 이어진다는 말인가? 한 생명에서 다른 생명으로 이어져 흐르는 것은 바로 카르마(業)의 숙명적인 인과이다. 형태 있는 모든 생명체의 복합적인 구성요소들은 카르마(업)의 법칙에 의해 지배를 받아온 기나긴 시간들의 표현이자 현현이다.
301.인간 형상을 구성하는 오온은 “그저 물질화된 카르마(업)일 따름이며 과거의 계기들이 가시화된 의식일 따름이다. 카르마(업)은 다만 활동적인 의식 원리일 뿐이다. 그런 의식 원리 또한 결과로서 가시적인 형상이 된다. 그러니까 우리 눈앞에 보이는 형상은 본질적으로 ‘과거적’인 것이며 따라서 그런 형상을 정신적으로 극복한 자에게 그것들은 낯선 어떤 것으로 느껴지게 된다.” 그러므로 불교도의 중도는 새로운 형식의 형상들을 구축하는 카르마(업)의 지속적인 과정을 멈추게 하는 것이 되지 않을 수 있다. 팔정도는 그런 불교도들이 따라야 하는 길을 간략하게 요약한 것이다.
302.중도의 다른 측면에서 팔다리를 움직이는 것은 의식적이며 장기의 활동은 무의식적이다. 그것들과 달리 호흡은 의식과 무의식적으로 가능하기 때문에 중도에 가깝다. 실로 호흡은 현재와 과거, 정신과 육체, 의식과 무의식을 연결시켜준다. 호흡은 중개자이며 하나의 출발점으로 호흡을 통해 우리는 생성된 것과 생성되고 있는 것을 포착하며 또한 과거와 미래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말하자면 호흡은 창조적인 명상의 출발점이 되어준다.
303.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가 남아 있다. 만일 하나의 생명에서 다른 생명으로 전이하는 불변의 자아 혹은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내’가 어떻게 미래의 주체가 될 것인가? 그리고 만일 ‘내’가 그런 주체가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내가(즉 비자아이기도 한 나의 자아가) 연루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좀 더 거칠게 말하자면, 하나의 생명에서 다른 생명으로 이동하는 것은 무엇인가? 예컨대 누가 한 방에서 다른 방으로 옮겨 가듯이, 혹은 옷이 다 헤지면 다른 옷으로 갈아입듯이, 한 생명에서 다른 생명으로 전이하는 단일하고 지속적인 경험 주체라는 의미에서의 그런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금강경의 일체유위법과 무위법의 깊은 성찰에 대하여 알아보기
갠지스 강의 무수한 거품들처럼 오온을 붙잡고 주의 깊게 조사 분석해 봐도 텅 비고 실체가 없는 비실재이므로 붙잡아지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특정 집합체를 이름 붙이는 것은 가능하다. 인간의 외적 형식을 구성하는 특정 집합체는 그것이 스스로를 의식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따라서 그것은 스스로를 ‘나’라고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대승은 그것조차 부인해버린다) 그것은 단순히 인간이라고 하는 오온의 집합체가 급조한 복합적 현상을 나타낼 뿐이다. 물론 어는 정도 지속적인, 그러나 영원하지 않는 정체성의 속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나, 영혼에 관한 다양하며 장황한 논쟁인 <포타파다 숫타>에서 붓다가 싯타Citta에게 했던 아래 대답처럼, 이는 과거 혹은 미래의 오온 집합체에 대해 굳이 어떤 실체적인(영구적으로 존재하는) 자아를 상정하지 않더라도 양자를 연결시켜 현실의 만질 수 있는 한 사람의 인격으로 간주하는 태도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임을 의미한다.
305.싯타여, 만일 사람들이 그대에게 “당신은 과거에 존재했는지, 하지 않았는가? 당신은 미래에 존재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 당신은 지금 존재하는가, 하지 않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대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과거에 존재했고 미래에 존재할 것이며, 지금 존재하고 있다.”라고
그럼 만일 그들이 “음, 당신의 과거의 존재가 당신에게 그렇게 실재적이라면 당신의 미래의 존재와 현재의 존재는 비실재가 아닐까? 마찬가지로 당신의 미래의 존재가 당신에게 그렇게 실재적이라면, 당신의 과거의 존재와 미래의 존재는 비실재가 아닐까?”라고 반문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저는 과거의 나의 존재가 내게 실재적이었다면 미래와 현재의 나의 존재는 비실재적이며 다른 두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말하겠습니다.
싯타여, 잘 말했다. 인격의 세 가지 양식 중 하나가 진행될 때 그것은 나머지 두 개의 양식의 범주에는 귀속하지 않게 된다.
-붓다의 말씀 중에서
306.엄격히 말하면, 생명체의 생명의 지속시간은 매우 짧아서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 이는 마치 마차가 구를 때 오직 바퀴의 한 점에서만 구르고, 멈출 때 오직 한 점에서만 멈추는 것과 같다. 정확히 이와 마찬가지로 생명체의 생명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 그 순간이 지나가 버리면 존재는 끝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한순간을 살았던 과거의 존재는 지금 살지 않으며 앞으로도 살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미래의 한 순간을 살게 될 존재는 과거에는 살지 않았으며 현재도 살고 있지 않다. 또한 현재의 순간을 살고 있는 존재는 과거에는 살지 않았으며 미래에도 살지 않을 것이다.”
-붓다의 말씀 중에서
308.하지만 각각의 계기(연기)의 분석에 대한 이와 같은 강조에도 불구하고, 삶의 과정은 필름 장면처럼 연쇄적으로 하나의 장면이 다음 장면을 낳음으로써 결국 하나의 연속적인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 연속적인 이야기는 하나의 생명에서 다른 생명으로 이어진다. 기억하는 의식이 전생에서와 동일한 의식 혹은 자아로서 현존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붓다(및 그 밖의 사람들)가 전생의 경험을 기억할 수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붓다에 의하면) 그들은 과거의 사건 및 현재의 기억 주체로서의 자아가 전생에 존재했음에 틀림없다는 잘못된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여기에서 예거한 것은 이 특정한 오온의 집합체가 연속적인 선행 계기(연기)들을 기억할 수 있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 전부이다.
그렇다면 만일 불변의 자아가 없다면 이런 종류의 기억을 가능하게 하는 연속성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유력한 답변으로 후기 대승의 유식론에서 주장하는 아뢰야식, 즉 인간의 인식을 8가지로 분류하고 의식의 창고라는 제8식을 들 수 있다. 그것은 의식상에서 일어나는 특정 사건들 밑에 깔려 있는 지속적인 현존을 가리킨다. 이는 마치 수면에 이는 파도의 밑으로 물이 흐르는 것과 같다. 하지만 이 아뢰야식도 영원한 것은 아니다. 그것 역시 결국에는 멈추고 만다.
한편 어떤 유파는 아뢰야식의 그와 같은 전개를 아트만(불변의 자아)의 방향으로 지나치게 몰고 갔으나 거기에는 매개적 구성 요소, 즉 고유한 행위와 생각의 動因이 되는 연속성이 결여되어 있다.
인식작용은 인성(人性)의 핵이다. 그것은 합목적성, 활동성, 연속성, 감성의 중심이다. 그것은 영혼이 아니라 경험적이고 기능적인 자아이다. 그것은 주로 의식적이다. 하지만 순간적인 의식 내용과 과정에 제한받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무의식까지 포함한 모든 의식층에 걸쳐 있다. 이런 인식작용에 의해 연속성과 정체성이 유지된다. 그것은 현저하게 개체적인 형식을 갖고 있다.
이처럼 지속적인 불변의 자아가 없으며 오직 연속성 그 자체만이 있다고 한다면, 불교도들이 참으로 ‘환생’을 말할 수 없는 이유가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다시 태어날 만한 실체라든가 자아 혹은 영혼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일부 불교도들은 환생에 대해 말한다. 즉 사람이 죽으면 아직 다 고갈되지 않은 카르마(업)의 영향력이 한 군데로 모여 적합한 현현을 위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여기서 ‘적합‘하다는 것은 , 즉 선하든 악하든 축적된 카르마(업식, 업장)에 상응한다는 말이다. 이 과정은 직설적으로도 은유적으로도 다양하게 묘사된다. 가령 하나의 양초에서 다른 양초로 옮겨지는 불꽃과 같다. 이것들을 볼 때 불교도들이 왜 일반적으로 카르마(업)의 영향력이 죽음을 통해 연속성을 가지도록 하는 수단으로서 인식작용을 선택했는지 그 이유가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죽음은 오온의 해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붓다가 일찍이 제자들에게 지적했듯이 하나의 역설이 존재한다. 즉 몸이야말로 사실상 연속성을 담지할/드러낼 수 있는 가장 유력한 후보라는 것이다. 몸은 의식의 계기(연기)들보다도 오랫동안 지속되기 때문이다.
가르침을 받지 못한 보통 사람은 사고력/의식보다는 오히려 地水火風 4원소로 구성되어 있는 이 몸을 자아로 취급하는 편이 더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몸은 1년, 2년......심지어 100년까지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사고력/의식, 마음, 인식작용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밤낮을 통해 상이하게 생겨났다가 또 멈추곤 한다. 이는 마치 숲 속을 헤집고 다니는 원숭이가 나뭇가지 하나를 붙잡았다가 그걸 놓아 버리고 다시 다른 가지를 잡는 것과 같다.
312.인식작용이라는 것은 그것 없이는 우리가 존재하거나 자신을 유지할 수 없는, 우리 존재의 필수 조건이다. 그러나 물론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단지 문제가 무엇인지를(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주관적으로 연속성을 가지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 지속되는 그것은 무엇인가?) 지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마음들(사고력, 의식, 인식작용 등)이라는 것을 생명의 끝인 죽음의 관점이 아니라 생명의 시작인 탄생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이 점이 보이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면, 죽음의 순간에 이전의 개체 안에서 획득한 전체 ‘생명의 세트’(바반가)가 즉 ‘재생 의식’으로서 태아 안에 있을 때 직접적인 계기로 형성된다.
재생 의식(임신기의 태아 안에 있는)이 멈추고 거기서 그것과 정확히 동일한 목적을 가지 유사 잠재의식이 생기한다. 이 유사 잠재의식은 재생 의식에 곧바로 이어서 생겨난 것이며 이런저런 카르마(업)의 결과이다. 이제 다른 의식이 生起하여 생명 흐름의 연속성을 방해하지 않는 한, 강물의 흐름처럼 그렇게 기나긴 생명 흐름이 동일한 방식으로 되풀이하여 생겨난다. 이는 꿈을 꾸지 않는 수면기와 그 밖의 시간에 일어난다. 우리는 생명의 흐름 안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연속적인 生起를 이런 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런 모든 논의에서 불교도들은 베다 시대 이후의 인도인들이 직면했던 문제에 접하게 된다. 죽음을 맞아 몸이 해체되었을 때 카르마(업식, 업장)와 관련한 아뢰야식(의식의 창고)을 어디에 담아두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상상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미묘한 몸’을 제시했다. 이런 것들이 무언가 새로운 산물로 들어가 작용할 수 있는가를 문제 삼았고, 보다 초기의 <대화 Dialogues>에서 그 문제는 다소 신화적이기는 하지만 독창적으로 해결하고 있다. 이는 카르마(업식, 업장)적 현현의 다른 형식으로 지지를 보장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것은 임신을 위해 현존해야 하는 ‘天上 영역의 존재 형식’이다. 그것들 자체가 재생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가 다만 미루어졌을 뿐 아직 다 해결된 것은 아니다.
결국 불교는 실체가 없는 직접적인 연속성을 긍정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불교의 딜레마> 그 밖의 다른 것들은 멸절주의 입장이 될 수밖에 없다. 혹은 그것은 카르마적 과정이 끝나더라도 어떤 카르마적 현현 안에서 자기 활동의 지속적이고 현존하는 담지자를 가정하게 만든다.
푸가라바딘과 같은 불교도들은 멸절주의 입장을 도입했으니, 그들에게는 정지 상태를 넘어선 열반 상태의 주체 없이 고통을 중지시킨다는 목표가 비논리적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불교 안에서 ‘대인격체주의(Personalist)’ 논쟁을 야기했으며, 최소한 1,000여 년간 계속되었다.
-죽으면 오온이 해체된다. 오온은 각자 흩어지므로 동일성을 상실한다. 각자 흩어진 오온은 업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몸으로 들어간다. 업은 좋은 것끼리 나쁜 것끼리 모아져서 새 몸으로 들어간다. 그러므로 영원불변한 자아란 없다는 이유다. 새 몸은 각자의 업과 조상들의 유전자들이 모여 아뢰야식에 저장되어 필요한 때에 나타난다. 이런 이유로 영속적인 자아는 없지만 연기의 적용을 받는 임시적인 자아는 있다는 전제는 필요하다.<도봉별곡>
또한 무상. 고. 무아임을 알 때 윤회는 멈추게 된다. 이것이 아라한이 되었음을 의미한다.<도봉별곡>
색, 곧 몸이 없으면 기억도 없다.<도봉별곡>
우리는 대인격체(大靈)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하나의 실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불교의 주류는 이런 주장과는 달리 양극단의 입장을 멀리 하고 영속론과 멸절론 사이에 중도가 있다고 주장했다. 붓다는 영원한 영혼이 존재하느냐는 질문에 직접적인 답변을 피하면서 전혀 다른 방향을 제시했다. 그것이 10 혹은 14無記이다. 즉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참된 문제로부터 벗어나는 무익한 질문에 속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긍정과 부정 중 하나를 답하게 되면 그들은 영원히 보지 못할 게 확실하기 때문에 오히려 논쟁으로 오류로 이끌어갈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 붓다의 현명함에 다시 머리 숙인다. 엄청난 부작용을 걱정해서 미리 막은 것이다.
이는 성스러운 삶에 도움이 되는 질문도 아니고 그렇다고 성스러운 삶의 제일 원칙과 관계된 물음도 아니다. 그것은 혐오와 반감, 카르마(업)의 중지와 평정, 혹은 비범한 힘 등과 무관한 물음이다. 더구나 완전한 지혜나 열반으로 이끌지도 않는다. 수행자들이여, 때문에 나는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은 것이다.
-붓다의 말씀 중에서
316.그래서 붓다는 깨달음의 길을 지적 수수께끼에 대한 풀이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2,500년이 지난 지금은 깨달음의 길을 붓다와 조사들의 물음이나 가르침의 의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 밑도 끝도 없는 수수께끼 같은 화두에 대한 답이 아니고 팔정도와 사무량심, 육바라밀 등의 실천의 관점과 방향에서 찾아야 한다.
자기 자신의 의미가 자아라든가 영혼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일련의 계기(연기/인연)들이 명멸하는 연쇄의 한 순간을 뜻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면 영원한 것처럼 현상에 집착하는 갈애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죽음의 계기(연기/인연)는 확실히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순간일 뿐이지만 죽음의 계기(인연/연기)는 중요하니 네 가지 죽음의 이유를 보자.
1)오온의 연속성을 위한 자연의 기간이 다 찼을 때(이때 카르마는 중립)
2)카르마가 고갈되어 영향력이 소멸되는 시점에 이르렀을 때
3)앞의 두 가지가 모두 발생할 때
4)파괴적인 카르마가 죽음의 결과를 요구할 때
318.바르도
많은 불교 종파는 즉각적인 전이를 말하지 않는다. 연속성의 흐름이 새로운 형상을 얻기 위해 스스로 모이는 동안의 중간적 시간이 상정되고 있다. 그리하여 생자들은 죽어가는 자 혹은 이제 막 죽은 자들의 정신적 구성체를 보조적 이미지와 독송 및 주문 등으로 둘러쌈으로써 그들을 도와줄 수 있다. 이런 방법은 불교가 티베트에 전파되었을 때 기존의 전통과 결합하여 극적으로 전개되고 세부화되었다. 이것이 <티베트 사자의 서>로 나왔다.
티베트의 바르도는 죽음으로 이어지는 중간 상태를 가리킨다. 사람의 생전의 카르마(업)로 획득한 축적에 의해 새로운 존재로 환생할 때 지나가는 은유적 디딤돌이다. 이 중간 단계에서 여러 가지 가능성과 영향력이 나타난다. 특히 네 가지 영역이 있는데, 거기서 연쇄적 결과의 연속성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1)지옥에서의 고문의 심연에서부터 데바로카/신들의 영역까지
2)환생을 기다리면서 사마디/마음의 평화와 집중의 항상적인 상태에 거하는 자들의 영역
3)심판과 보상을 내리는 다르마라자
4)티베트 미술에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신들과 보살들, 42명의 평화의 신들, 만다라의 원천이자 창조자인 아디불, 대일여래 비로자나불, 극락정토의 아미타불
실로 티베트인들의 고유한 전통에 주목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우주의 영역과 현상에 관한 티베트의 우주론이 얼마나 광대하고 복합적인 것인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실제로 존재할까?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정확히 우리가 무지로부터 실재를 추론하느냐 아니면 깨달음으로부터 실재를 추론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결국 그것들은 궁극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현상들의 여러 가지 형식 이상의 실재를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무엇 무엇에 대해 말하려 할 때 그것이 우리의 서술 언어에 얼마만큼 상응하는지 하지 않는지를 판단하기 위하여 우리가 의거할 수 있는 지식의 토대가 전혀 확보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좀 더 불교적인 언어로 바꾸어 말하자면, 모든 현상은 수냐타/空 안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현상들은 우리가 그것들에 관해 추론할 수 있을 만큼의 현실성을 획득할 따름이다. 가령 지옥이나 천국은 상상력이 만들어낸 가공적인 허구일 뿐인데, 실재한다고 믿을 수 있으나, 이는 마치 오래 꿈을 꾸는 것과 같으며, 우리 내면 상태의 투사(projection)에 지나지 않는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티베트 불교도들은 지옥을 존재하는 것이자 동시에 우리 상상력의 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투사(projection)
받아들일 수 없는 충동이나 생각을 외부 세계로 옮겨놓는 정신 과정. 이것은 방어적 과정으로서, 개인 자신의 흥미와 욕망들이 다른 사람에게 속한 것처럼 지각되거나 자신의 심리적 경험이 실제 현실인 것처럼 지각되는 현상을 말한다.
321.이와 같이 탈신화(脫神話)한 형식에서조차 지옥은 여전히 죽음을 위한 준비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한다. 불교적 명상의 두 가지 부분, 죽음에 대한 명상과 육신의 무상함에 대한 명상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죽음을 잊지 않고 늘 마음에 두기’는 조용한 곳에 홀로 나아가 죽음이 내게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죽음에 대한 명상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명상을 나 자신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 명상법은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 방식으로 죽음에 대한 사색을 시작한다.
1)죽음은 손에 칼을 든 살인자처럼 나타난다. 죽음은 출생의 사실과 함께 온다.
2)모든 건강은 질병으로 끝나고 모든 젊음은 노년으로 끝나며 모든 생명은 죽음으로 끝난다.
3)세상의 잘난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한다. 하지만 그들도 나처럼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4)인간의 몸 안에는 죽음이 진행되고 있으니 몸 안의 기생충은 생로병사를 거듭한다.
5)우리 몸 안의 생명은 지극히 덧없고 약하기 때문에 항상 죽음 가까이에 있다.
6)죽음이 다가올 때 미리 알 수 있는 명확한 징조는 없다.
7)인간의 수명은 한계가 있다.
8)인간의 삶은 매 순간이 곧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인간의 생애는 바퀴가 구르기 전에 가장자리가 지면에 살짝 닿는 접촉점에 불과하다. 죽음이란 이런 사실과 관계가 있다.
이런 식의 메멘토 모리(죽음에 대한 기억)를 통해 삶에 대한 모든 집착이 정복된다는 것인데 이는 2차적인 명상법, 즉 ‘몸을 잊지 않고 늘 마음에 두기’에 의해 강화된다. 이 명상법은 발바닥부터 머리끝에 이르기까지 32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 몸의 각 부위가 얼마나 더럽고 추하고 약하며 혐오스러운지를 깨달으려는 세심한 시도로서 육체 및 육체의 형상에 집착하려는 작은 유혹이라고 끊어버리기 위한 시도라 할 수 있다.
*<승려와 철학자>에서 옮겨옴
369.바르도-죽음과 탄생 사이의 중간 상태. 중간 혹은 전이 단계를 의미. 삶의 바르도, 즉 탄생과 죽음 사이의 중간 상태. 그 다음에는 죽는 순간, 즉 의식이 육체와 분리되는 순간의 바르도. 여기에는 두 가지 단계의 ‘해체’가 존재한다. 바로 육체적 · 감각적 능력의 외적 해체와 심적 과정의 내적 해체.
1)첫 단계의 해체는 육체가 살아있는 유기체에서 무생물로 변형. 생명을 갖고 있는 의식적인 육체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들의 해체라는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는데, 그 각각의 원소들은 생명이 없는 외부세계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원소와 융합하면서 그 차이를 잃어버리게 된다. 견고함을 상징하는 ‘흙’의 원소가 해체될 때 육체는 무겁게 느껴지고 자세를 유지하기가 힘들며 산과 같은 무거운 것에 눌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의 원소가 해체될 때는 점막이 마르고 갈증을 느끼며 마음은 혼란스럽게 되어 강물에 휩쓸려가는 것처럼 표류하게 된다. ‘불’의 원소가 사라질 때 육체는 열기를 잃기 시작하고 정확히 외부세계를 인식하는 것이 힘들어진다. ‘공기’의 원소가 해체되면 숨을 쉬기가 어렵게 되고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으며 의식을 잃게 된다. 환각이 생겨나고 마음속에서 우리 삶 전체가 필름처럼 전개된다. 어떤 사람들은 평온을 느끼게 되고 광명에 찬 평화로운 공간을 보기도 한다. 그리고 마침내 ‘호흡’이 멈추게 된다. 그러나 내적 호흡이라는 생명력이 잠시 존재하는데 얼마간 계속되다가 정지된다.
2)두 번째 단계의 해체에서는 지속적인 의식의 흐름이 점점 미세해지는 일련의 상태를 통과한다. 우리는 거대한 빛의 단계, 이어서 至福의 단계, 마지막에는 모든 생각이 완전히 부재한 상태를 체험한다. 우리가 짧게나마 절대 체험은 하는 것은 바로 그 순간이다. 훈련된 수행자라면 그때 절대적인 바르도라 불리는 상태에 남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죽음과 다음번의 재탄생 사이의 중간 상태로 접어든다. 마치 업의 바람에 휩쓸려가는 깃털과 같다.
401.습관적인 성향(유식론에서 제8아뢰야식)이 남아 있을 때 불교는 앎의 불로 그것을 태워버리는 것이 더 간단하다고 생각한다. 앎은 마음의 궁극적인 본성, 즉 空을 깨닫게 해주고 동시에 모든 성향(8개의 인식)들의 흔적을 지워준다.
2015.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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