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전결집(佛典結集, Saṁgīti)>
불전결집이란 경전편찬회의라고 할 수 있다.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장소에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 모여 부처님 가르침을 종합하고 정리하는 편집과정을 말한다. 결집은 확인된 부처님 가르침을 참석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합창하는 절차를 거쳐 만장일치로 불설(佛說)로 승인하는 합법적인 정전화(正典化) 절차나 형식이라 할 수 있다. 불교사에 있어서 불멸(佛滅) 후 네 차례 공식적인 불전결집이 있었다. 부처님 말씀이 산실(散失)되지 않도록 하고, 또한 교권(敎權)의 확립을 위해 부처님 말씀을 정리하고 집대성해 바른 가르침이 전승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이 설하신 말씀을 합송(合誦, Samgiti)함으로써 그곳에 모인 사람 모두가 같은 말씀으로 기억한다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한 이유로 결집은 합송(合誦)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제1차 결집(BC 5세기경 불멸직후) - 부처님이 쿠시나가라 교외 사라나무 아래에서 입멸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마하카샤파(마하가섭 존자/迦葉尊者) 일행은 부처님보다 좀 늦게 같은 길을 따라 북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반대쪽에서 내려오던 한 외도로부터 부처님의 부음(열반)을 들었다.
그 때 많은 제자들은 그 소식을 듣고 애통해 했지만 그 가운데 한 늙은 비구만은 아랑곳 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벗들이여 슬퍼하지 마라. 상심하지도 마라. 우리는 이제야 대사문(부처님)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됐다. 대사문은 그동안 ‘이것은 허용 한다’ ‘이것은 적당치 않다’면서 우리들을 잔소리로 무척 고통스럽게 속박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이 같은 폭언을 들은 마하카샤파는, 이런 분위기가 확산되면 부처님 가르침이 다 흩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그래서 불전결집을 절실하게 구상했을 것이다.
이리하여 제1회 결집은 부처님 열반 후 맞이하게 된 첫 우기(雨期) 안거(安居-하안거)를 마치고, 마가다국의 아사세왕(阿闍世王) 후원으로 라자그리하(Rājagaha-王舍城) 부근의 바이바라산 중턱의 칠엽굴(七葉窟)에서 행해졌다. 결집을 위해 장로비구 5백여 명이 선출됐으며, 상수제자(上首弟子) 마하카샤파가 총 책임자가 돼 모임을 주관했다.
이 첫 결집에서 경(經, Sutra)의 암송자로 아난다(阿難陀, Ananda), 그리고 율(律, Vinaya)의 암송을 위해서는 우팔리(Upali)가 각기 뽑혔다. 아난은 부처님 시자(侍子)였고, 우팔리는 부처님 이발사였기에 늘 부처님 가까이에 있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들을 송출자로 선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송출하면 장로들이 여러 가지로 검토해 불설(佛說)임을 승인했다.
제1결집이 이루어진 동기는 위와 같은 사건 외에, 부처님 재세 시 가르침을 설하실 때 주로 대기설법을 했으므로 가르침이 일정치 않았고, 일정한 형태를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부처님 입멸 후에 그 가르침을 바르게 전승하기 위해서 형태를 하나로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제1차 결집이 이루어졌는데, 제1차 결집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었다.
① 제1차 결집은 500명의 아라한(阿羅漢) - 출가승단이 개최한 것으로 재가신도들은 여기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이 사실은 결집된 경과 율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에 큰 의미를 준다. 즉, 출가자 중심의 경 ‧ 율이었음을 말해준다.
② 부처님은 생전에 교단을 통제할 후계자를 지목하지 않았으며, 승가의 조직형태도 서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멸이후 교단이 혼란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남기신 가르침에 대한 수집과 정리 및 확인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승가에 이러한 합의의 관습이 성립돼 있었기 때문이고, 마하가섭과 같은 훌륭한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③ 경과 율은 이때 팔리어로 합송(合誦)됐고, 그 후에도 오랫동안 구전(口傳)으로 전승됐다. 이것이 문자로 써진 것은 그 200여년 뒤의 일이다.---→불전암송(佛典暗誦) 참조.
④ 이러한 결집의 시도는 당시 불교승가 전체의 의향이 반영된 것은 아니며, 단순히 마하가섭을 중심으로 한 일파, 혹은 마가다국 일대라는 한정된 지방의 회합에 불과했다.
⑤ 이러한 제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이 결집에서 정리된 경 ‧ 율이 일반화될 수 있었던 것은 제1차 불전결집이 그만큼 정밀했음을 의미한다.
⑥ 7개월이 소요된 이 결집에서 장로들은 석가모니가 언제, 어디에서, 누구를 대상으로 어떠한 설법을 하고, 들은 사람은 어떠한 감명을 받았다고 하는 사정을 상의해 이것을 석가모니가 설법한 형식으로 전승했다. 이때부터 대부분의 경전은 “이와 같이 내가 들었노라(如是我聞)”로 시작해, “기뻐하며 받들어 행하더라(歡喜奉行).”로 끝나는 형식 - ‘육성취(六成就)’를 취하게 됐다.
⑦ 방대한 초기경전이 제일결집(第一結集)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은 통설이다. 그러나 불과 7개월간의 결집기간에서 이같이 방대한 경전군(經典群)이 모두 성립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제일결집에서 이루어진 경전에다가 그 이후 여러 차례에 증가되고 부가(附加)됐을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성이다.
• 제2차 결집 - 불멸 후 100년경(BC 4세경), 아소카왕 시대보다 조금 앞선 시기로서 이때 계율상의 문제가 쟁점이 돼[십사(十事) 혹은 오사(五事)] 중인도의 상업도시 베살리(Vēsalῑ-산스크리트어 바이살리/Vaishali)에서 교단이 보수파와 진보파의 대립으로 인해 분열돼, 각기 상좌부와 대중부라고 했다. 이때의 분열을 근본분열이라 한다.
그리고 이때 아난의 제자 야사(Yasa) 비구의 주도로 보수파인 상좌부에 의해 제2차 불전결집이 이루어졌다. 제1차 결집이 단순히 ‘경장과 율장의 결집’으로 본다면, 제2차 결집은 율장에 대한 해석이라는 성격 차이가 있었다.
• 제3차 결집(일명 아소카 결집 혹은 파탈리푸트라 결집) - BC 260년 경 마우리아왕조 아소카왕(阿育王, BC?ㅡ232) 즉위 17년에 아소카왕의 종교적 스승인 목갈리풋타 팃사(Moggaliputta-tissa, 목건련제수/目健連帝須) 존자 주관으로 수도 파탈리푸트라성(波陀利弗城, Pātaliputta -현재의 비하르주의 주도 파트나 부근)에서 제3차 불전결집이 이루어졌다. 이때 처음으로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부처님 말씀을 팔리어로 문자화됐다고 한다. 그리고 1, 2차 결집 때는 경(經)과 율(律)만 결집했지만, 이때는 논장(論藏)이 주로 결집돼 불경의 영역이 훨씬 확장 정비됨으로써 비로소 <팔리어 삼장>의 기초가 성립됐다. 이 ‘아소카 결집’ 이전까지를 원시불교라 한다. 아소카왕 통치시기에 이루어진 결집이어서 아소카 결집 혹은 파탈리푸트라 결집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때 팔리어로 편찬된 불경이 스리랑카로 전해졌다.
그런데 제3차 결집 무렵의 부파분열은 매우 심각한 상황을 야기했다. 따라서 최초로 인도를 통일해 마우리아 왕조를 세운 아소카 대왕은 국론통일을 위해 당시 최고의 진리로 인정받던 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상좌부 계통의 교리로 통일을 기했다. 그리고 이에 반대하는 대중부 측의 비구들은 모두 흰옷을 입혀 추방했다고 한다. 그래서 대중부 계통은 한동안 비밀리에 활동을 했다.
※제1,2차 결집까지는 암송으로 결집됐고,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지 200여년 후(BC 3세기)에 열린 제3결집(아소카 결집) 때에 경전, 율장, 논장이 문자로 정리됐고 한다. 그런데 경전이 문자화된 것이 스리랑카에서 BC 35~32년 마딸레(Matale)에 위치한 알루위하라(Aluvihara)에서였다고 하는 주장이 있다. — Lamotte의 <인도불교사> 2권 P249. 그러므로 경전의 문자화 시기는 역사학자, 불교학자 등에 의해 다소 시차가 있다.
• 제4차 결집 - 제4차 불전결집은 북방경전 결집과 남방 상좌부경전 결집으로 크게 나누어져 이루어졌으며, 북방경전 결집에 대해서도 두 가지 설이 있다.
제4차 북방경전 결집 - 두 가지 설이 있다.
- 하나는 불멸 600년경(AD 2세기경) 인도를 통일한 쿠샨왕조(대월지국/大月氏國) 카니시카(Kaniska)왕 후원으로 협(脇, 파르스바/Parsva) 존자를 중심으로 해서, 세우(世友), 법구(法句), 묘음(妙音), 각천(覺天) 등 500 나한이 북인도 지금의 인도 캐시미르 지방 건다라국(乾陀羅國-간다락국)
― 혹은 쿠샨왕국 수도의 환림사에 모여 <아비달마비바사론> 10만송 등을 짓고, 율장, 논장을 해석하니, 모두 30만송의 주석서를 편집했다고 한다. 이때 산스크리트어가 불교 공식어가 됐고, 이때 결집된 경전(아함경)이 중국에 전해졌기에 중국엔 산스크리트어 불경이 전파됐다는 것이다.
- 다른 하나는 불멸 후 400년경(BC1세기 말~AD1세기 초) 500명 나한들이 모여 가전연(迦旃延) 나한을 상좌로 하고 마명(馬鳴) 보살을 판수로 해서 <아비달마비바사론> 1백만 게송(偈頌)를 지었다는 설이다. 어느 주장이 맞는지 확실한 논증이 안 되고 있다. 아무튼 설일체유부 논사 가전연이 불경 제4차 결집에 참여해 <아비달마비바사론> 편집에 공헌했다는 것은 일반화돼 있다.
제4차 불전결집 - 남방 상좌부경전 결집(알루비하라/Alu Vihara 결집)
BC 1세기 중반 남방 불교권(스리랑카)에서 이루어진 제4차 불전결집은 스리랑카 중부 고원도시 마탈레(Matale) 불쪽 근교에 위치한 알루비하라(Alu Vihara, 알루위하라) 석굴사원에서 대대적인 불전편찬회의가 열려 그때까지 전승돼오던 경ㆍ율ㆍ론의 모든 가르침을 총망라한 결집인 <팔리어삼장(三藏, Tipiṭaka)>을 완성했다. 이로써 처음으로 완성된 <팔리어대장경>이 성립됐다. 남방권에서는 이를 ‘제4차 불전결집’으로 공식화하고 있다.
남방에서 불전결집이 이루어진 것은 다른 부파나 대승불교로부터 교의의 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부처님 가르침을 확정해 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남방에서는 부처님 가르침의 확장이나 변용을 오염으로 생각했으며, 이러한 전통은 오늘에까지 전승되고 있다.
이와 같이 제4차 불전결집은 쿠산왕조의 북방 불교권과 스리랑카의 남방 불교권 양쪽에서 각기 이루어졌다.
• 불전암송(佛典暗誦)
고대 인도에서 불경(佛經)을 문자로 적지 않은 이유는 성스러운 말을 문자화한다고 하는 것을 불경스러운 일로 여겼기 때문이다. '문자'는 인간이 만든 것이기에 불경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자화 하게 되면 지나다니는 사람의 발길에 밟히기도 하고, 소나 말도 밟고 다니고,… 그래서 가장 신성하고, 안전한 곳, 인간의 마음에 담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인도 최고의 성전이라고 하는 힌두교의 <베다>도 오랫동안 암송돼오다가 기원 후 1세기경에 문자화됐다. 오히려 불경보다도 늦었다.
그런데 초기에 경전을 한 명이나 소수의 승려에 의해서 암송된 것이 아니다. 경전암송에는 율장 암송자(vinaya-dhara), 가르침 암송자(dhamma-dhara), 아비담마 암송자(mātikā-dhara) 등으로 표현되는 암송전문승려집단에 의해서 체계적으로 나누어 암송되고 전승됐다.… 인도불교의 승단들이 몇몇 거점 지역을 중심으로 점차적으로 거대한 사원군(寺院群)을 형성하게 된 배경에는 많은 수의 암송전문승려들을 조직화해 체계적으로 부처님 말씀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숨어 있었다.
그리고 암송하기 편하게 하기 위해 적당한 분량으로 나누었는데, 이것을 바나바하(bhāṇavāra)라 했다. 바나바하를 흔히 송분(誦分)이라 번역한다. 암송할 분량이라는 뜻이다. 아무렇게나 나눈 것이 아니라 체계적으로 나누었기에 오늘날에 견준다면 책의 편(編), 장(章) 등과 비슷한 개념이기도 하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사찰에서 여러 행사시 불경을 암송할 때 음률에 맞추어 합송하는 것은, 물론 합송하기 편한 것도 있지만 암송의 편의를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불경에 게송(偈頌) 형식의 글이 유달리 많은 것도 암송의 편의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암송(暗誦)하기 쉬운 시(詩) 형식의 게송은 부처님 가르침을 전승하는데 도움은 됐으나 그와 동시에 쉽게 증폭(增幅)되는 가능성 또한 지니고 있었다.
「초기경전은 이 시기(암송 시기)에 이미 변형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동일한 집단 내부에서는 합송을 통해 변형의 가능성을 줄일 수 있었지만, 승단이 지리적으로 광범위한 지역으로 퍼져나가고 점차적으로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사상적 배경에 노출되면서 서로 왕래가 부족했던 집단들 사이에서 합송을 통해 변형을 줄이고 부족한 부분을 보안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 황순일.
그리하여 북전 <아함경>과 남전 <니까야>의 내용에 다소 차이가 있는 것은 부파불교시대 각 부파에서 자기네가 암송해 전해오던 내용을 중심으로 경전을 조성했기에 부파별 경전에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부처님 사후부터 약 200여년의 구전기간이 흘렀는데, 그 사이에 불교계 내부에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니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다만 인간으로서의 부처님 실체는 점차 신비화되고 신화로 채색돼갔다. 따라서 부처님의 생생한 사실적인 가르침은 중생들 생각과 논리에 의해 조금씩 변질돼 갔다. 그리고 문자가 발명돼 경전의 성문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함으로써 부파간에 각기 자기네가 조성한 경전이 옳다느니 그르다느니 교리논쟁이 시작됐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있어서 많은 분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사전에 양해를 구하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그리고 도움을 주셨음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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