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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이야기

<용수(龍樹)의 중관사상(中觀思想)>

 <용수(龍樹)의 중관사상(中觀思想)> 

           

                                                                용수보살

1. 용수(龍樹, Nagarjuna)에 대해 

 

   용수의 생몰연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고대 남인도에 있었던 사타바나(Satavahana) 왕조의 가우타미푸트라 샤타가르니(Gautamiputra Satakarni)왕이 용수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점을 미루어보면, 불멸 후 6~7백년 경에 해당하는 AD 2세기 후반과 3세기 전반 사이(AD 약 150~250년)의 인물로 추정된다. 그리고 ‘Naga’는 용(龍)이란 말이고, ‘arjuna’는 나무의 일종이기 때문에 중국에서 용수(龍樹)라고 한역했다.

   그는 남인도 바라문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해 아무리 긴 내용의 경전이라도 한번만 들으면 다 외울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자라면서 당시 인도의 거의 모든 종교, 철학 등을 섭렵했으며, 최종적으로는 불법에 귀의해 중관사상을 수립함으로써 붓다의 사상을 논리적으로 완성시켰다.

   용수 탄생 당시 인도 불교계에는 전문수행인들이라 할 아비달마(阿毘達磨) 논사들에 의해 방대한 아비달마불교가 성행해 그 교파가 20여 종으로 난립한 부파불교시대였다. 이들 아비달마불교가 지나치게 번쇄한 이론중심의 불교여서 여기에 불만을 품은 혁신적인 불교도들을 중심으로 대승경전의 편집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또 전통적인 바라문교의 육파철학(六派哲學)이 하나 둘 정비돼감과 동시에 대중적인 힌두교가 서서히 그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사상계의 혼돈 속에서 불세출의 사상가이자, 훗날  대승불교의 아버지, 제2의 붓다, 혹은 보살이라 칭송되는 용수가 탄생했다. 그리고 후세의 몇몇 불교학파가 그에게 연원을 두고 있어 중국에서는 8종(宗)의 조사(祖師)로 존경했다.

   용수는 <중송(中頌)> 외에 <대지도론(大智度論)>,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 십이문론(十二門論) 등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반야경>, <화엄경> 등 대승경전의 사상을 간결하게 잘 정리해서 대승불교의 기초를 놓았다.

   용수의 핵심 저서인 <중송(中頌, Madhyamaka-karika)>은 용수의 초기 작품으로 27장 449게송(한역은 445게송)으로 간결하게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용수의 저서 <중송>에는 본래 [논(論)-sastra] 자가 붙어 있지 않았다.

   그런데 청목(靑目, Piṅgalanetra, 핑갈라, 4세기경)이 용수의 <중송>에 대한 주석서를 썼고, 이것을 409년 중국에서 구마라습(鳩摩羅什, Kumārajīva, 344∼413)이 한문으로 번역하면서 다소 가필을 해서 <중론소(中論疏)>라고 이름 지었다. 그리고 여기에 들어있는 중론이란 말에 근거해서 용수의 <중송>을 아예 <중론(中論, 산스크리트어 Madhyamaka-sastra, 마드야마카 사스트라)>이라 불렀다.

    그 후 <중론>에다가 용수의 <십이문론(十二門論)> 및 그의 제자 제바(提婆 Kanadeva, 2~3세기경)의 <백론(百論)>를 합해 삼론(三論)이라 불렀고, 이에 근거해 삼론종(三論宗)이 성립됐다. 그리고 중국 수 ․ 당시대에 삼론종을 대성시킨 길장(吉藏, 549~623)이 지은 <중관론소(中觀論疏)>는 중론연구의 획기적 저서로 꼽힌다.

   

2. 중관사상(中觀思想)이란

                   

   • 중론(中論)은 중도(中道)를 지향한다.

   <중론>을 중심으로 한 중도(中道) 지향의 사상을 중관사상(中觀思想)이라 하고, 중관사상의 흐름을 이어받은 논사들을 중관파(中觀派)라 불렀다. 중관파는 후에 유식(唯識)을 설하는 유가행파(瑜伽行派)와 함께 인도 대승불교의 2대 사상이 됐으며, <중론>은 대승불교에 이론적 기초를 부여함으로써 대승불교의 사상 전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론>은 <반야경>에 입각한 대승공관(大乘空觀)의 입장에서 공사상(空思想)을 철학적으로 체계화시키고, 원시불교 이래의 연기설에 독자적인 해석을 부여했으며, 이에 의해 순차적으로 각 장에 걸쳐 부파불교가 지닌 오류를 결정적으로 논박했을 뿐만 아니라 인도 일반 철학사상까지도 비판했다.

   <중론>의 중심사상은 연기(緣起) → 무자성(無自性) → 공(空)으로 귀결되는데, 모든 존재가 연기성이기 때문에 그 자체의 고유한 자성(自性)이 없으므로 공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공은 유 ․ 무의 극단이 없는 것이므로 중도(中道)를 지향하고 있다.

   따라서 중관사상은 사상적 중도를 말한다. 중도란 아무런 걸림 없이 바르게 관찰하는 것이고, 올바르게 관찰하는 거기에 깨달음이 있다고 했다. 즉, 어리석은 중생의 생각으로 구성한 선과 악, 상과 하, 유와 무, 좌와 우 같이 양극단의 상대적인 개념을 모두 근거 없음을 밝혀내서 부정하고, 궁극적인 깨달음을 지향한다. 그리하여 수행을 높이 쌓아 번뇌와 무명(無明)을 탁 깨뜨려 버리면 허공처럼 청정하고 확 트인 참마음 자리가 열린다. 여기에는 한 점의 속박도 치우침도 없다. 이것을 ‘중도의 경지’라고 한다.

   따라서 ‘중도’ 앞에서는 우매한 중생들이 항상 끄달리는 나다 너다, 옳다 그르다, 높다 낮다, 많다 적다고 하는 등의 온갖 분별이 봄 눈 녹듯 없어진다. 이와 같이 중도는 바르게 깨친 법의 안목으로서 치우침이 없는 부처의 경지를 뜻하는데, 반야(般若)를 터득하고 공(空)을 체험한 후에라야 실감할 수 있다. 따라서 중도의 완성은 불교의 완성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중도사상을 중관사상이라 한다.


     ※부파불교시대에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를 비롯한 일부 부파불교에서는 모든 법은 실체가 없지만, 궁극적 실체(빠라마따-paramattha)는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여기에 용수가 반론을 제기해서, 모든 것은 공(空)하며, 단지 연기돼 나타난 것일 뿐이라고 했다.


     ※‘중도(中道)’에서의 ‘중(中)’자는 가운데라는 뜻이 아니고, ‘정확하다, 올바르다’라는 뜻으로 바를 ‘정(正)’ 자와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중론에서 ‘중(中)’은 무자성(無自性)과 공성(空性)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 중도(中道)와 유학에서의 중용(中庸)의 차이---중용은 과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중간쯤이란 개념이다. 이에 비해 중도는 유무(有無), 진속(眞俗), 염정(染淨), 생사와 열반 등의 양변을 여의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중간도 아니다. 양변이 원융무애(圓融無碍)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양변이 합쳐 하나가 된 것도 아니다. 이것을 융이불일(融二不一)이라 한다. 원융무애란 서로 모순되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양변을 떠나서 양변이 거리낌 없이 통해버리는 것을 말한다. 즉, 일체가 거리낌 없이 원만하게 껴안아 받아들이는 경지를 의미한다.

   

   • 중론은 곧 연기론(緣起論)이며, 공성(空性)을 추구한다. 

   용수가 <반야경>의 공관을 추구한 것은 그것이 바로 연기(緣起)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이것은 곧 우리가 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실제 모든 사물이 각기 독자적인 존재의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연기의 관계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기의 관계로 이루어진 까닭에 연기의 관계를 떠나있는 독자적인 성질로서 자성이나 실체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용수는 붓다의 연기론에 근거해 <중론>에서, “연기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존재를 무[공]라고 한다. 그것을 가명(假名)이라고 하며, 또한 그것이 중도의 뜻이다(衆因緣生法 我說卽是無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제24장 18게)”라고 했다.

   이와 같이 용수는 불교의 핵심을 연기로 파악했으며, 이 연기는 관계성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즉 연기는 모든 존재의 존재방식을 ‘관계’로 설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존재가 타자와 관계를 맺으면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존재도 자성(自性)이 없으며, 이것이 용수가 말하는 공(空)의 의미이다. 그리하여 다시 <중론>에서 “인연으로부터 생하지 않은 사물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일체의 사물은 공이 아닌 것이 없다(未曾有一法 不從因緣生 是故一切法 無不是空者-제24장 19게)”라고 말했다. 즉, 용수는 연기하고 있는 것을 공성이라 설하고, 그것이 중도 그 자체라 했다.

   공한 존재는 고정불변한 실체가 없고, 모든 언어는 고정적인 대상을 가지므로 공한 세계는 언어적인 개념으로 표현할 수 없다. 다만 필요에 의해 그런 이름으로 부르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가명(假名)이라고 한다. 이렇듯 실체를 전제해 성립하는 모든 언어가 공한 세계를 올바로 드러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론들은 이러한 언어로 구성돼 있다. 그 때문에 용수는 이러한 이론들을 희론(戱論)이라 칭하며 비판했다. 따라서 <중론>의 주석가들에 의하면 승의제(勝義諦)란 궁극적으로 “언설(言說)을 떠나 희론(戱論)이 적멸(寂滅)한 것”이라고 했다.


   • 중론은 무자성(無自性) - 공(空)을 추구한다.

   특히 용수는 이러한 연기의 인연관계를 떠나 있는 것을 자성(自性)이라고 부르고 따라서 자성이란 존재하지 않는 까닭에 무자성(無自性)이며 공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만약 사물이 연기적인 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독자적인 실체인 자성에 의해 생긴다고 한다면 그 때는 자성이 서로 연기한다는 모순이 될 것이라고 했다.

   곧 자성(自性)이란 인(因)과 연(緣)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자립적인 것이며, 또한 다른 것에 의존하는 일 없는 항상 고정불변한 존재이지만 실제로 그와 같은 것은 생겨날 수도 있을 수도 없다고 했다. 곧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과 연의 상호관계로 생겨나는 것이고, 따라서 그와 같은 것은 곧 자성이 없는 까닭에 공(空)인 것이다. 

   이처럼 용수가 고정불변한 자성의 개념을 부정한 것은 그 자성의 관념이 우리 인간들의 망상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의 세계는 수많은 언어로 이루어져 있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약속에 의거한 언어적 세계로서 영원히 변치 않는 절대불변의 세계는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언어를 불변적인 것으로 잘못 생각해 그로 인해 번뇌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중론>은 그와 같은 불변적인 성질로서 자성이란 존재하지 않고 그 자성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가 우리 삶의 세계가 연기의 이치에 의거해 있고, 공의 세계이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그래서 용수는 <중론>에서 “공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모든 사물이 성립한다. 만약 공의 의미가 없다면 모든 사물은 성립하지 않는다(以有空義故 一切法得成 若無空義者 一切則不成-제24장 14게)”라고까지 말했다. 결국 이 세상은 공관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지 자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중론>이 이처럼 연기법을 바탕으로 무자성(無自性) - 공에 대한 논리를 수립해 <반야경>의 공관에 대한 이론적인 체계를 세우고 있지만, 이러한 이론적 체계에 무엇보다 중요한 관점을 용수는 이제설(二諦說)의 정립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 중론은 2제설(二諦說)을 통해 드러난다.

   진제(眞諦)와 속제(俗諦)의 2제는 붓다에 의거해 설하는 것이어서 용수는 이 2제에 대한 바른 이해는 진실한 뜻을 아는 관건이 된다고 말했다. 진제는 여러 경전에서 제일의제(第一義諦) ․ 승의제(勝義諦) ․ 최승의제(最勝義諦)라 했으며, 세속을 초탈한 출세간적인 진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속제는 세속제(世俗諦) 혹은 세제(世諦)라고도 해 세간적인 진리를 말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진리에 무슨 세간적이니 출세간적이니 하는 차별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할 수도 있으나 쉽게 말해 속제란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진리, 즉 모든 것은 인(因)과 연(緣)으로 이루어진 과(果)로서, 이것은 생멸의 원리로 돼 있으며, 생멸은 공의 상태이고, 신진대사의 원칙에 따르고 있다는 등의 비교적 초보적인 것을 말한다. 이에 비해 진제는 이와 같은 원칙을 기준으로 해서 점차로 고차적인 이치를 이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체를 부정하고 언어를 초월하며 불생불멸하고 비인비과(非因非果)인 것을 말한다.

   그런데 세간의 언어 습관인 속제가 다름 아닌 연기와 공을 바탕으로 성립하므로 만약 연기와 공을 부정한다면 세간의 삶을 부정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된다. 즉, 우리의 삶의 세계가 언어의 세계임에 틀림없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변의 자성세계가 아니라 약속과 습관에 의거한 연기의 세계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와 같이 속제를 성립시키는 바탕으로서 연기와 공의 이치를 바로 알지 못한다면 진제를 알 수도 없고 또한 열반을 얻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연기와 공의 이치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행하는 경지에서 얻어지는 것으로 반야바라밀의 세계는 곧 진제의 진리세계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다시 말해 세간의 언어습관인 속제가 성립하는 근저로서 연기와 공에 대한 이해야말로 승의(勝義)의 진리를 알고 열반을 얻게 하는 구체적인 지혜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용수는 이와 같이 2제설을 통해 연기와 공의 이치가 세간을 세간답게 하고 진제와 열반을 얻게 하는 구체적인 지혜임을 나타내 보이고자 했다.

   용수의 저서 <중론(中論)>은 이상과 같이 속제에 의거해 구체적으로 표현된 연기의 용어로서 자성의 개념을 비판하고 일체세계가 연기의 이법에 따르고 있음을 논증한 저술이다. 따라서 <중론> 저술의 의도는 연기의 이치를 바로 나타내 보임으로써 일반 중생을 승의의 열반세계로 이끌고자 한 것이다. 즉, 2제라는 보다 구체적인 방법으로 공(空)에 집착하는 자에게는 속제를 설해 유(有)를 밝히고, 유에 집착하는 자에게는 진제를 설해 공을 제시한다. 따라서 공이 곧 유이며 유가 곧 공이다. 이것이 모든 진리의 실제 모습이라는 것이다.

   즉 언설로서 연기의 이치를 나타내 보이지만, 실은 승의의 세계를 나타내 보인 것이 <중론>이다. 결론적으로 용수는 붓다의 중도사상을 2제설(二諦說)에 의거해 재정립하고, 세속제의 연기로서 승의(勝義)의 세계를 밝히고자 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용수에서 출발하는 중관사상은 붓다가 설한 중도(中道)의 이치를 2제설을 통해 재조명함으로써 당시 일부 부파에서 자성(自性)을 주장한 잘못된 사상에 대응해 연기의 이치를 재확립하고자 한 것이다.


   • 중론의 뿌리는 붓다에 있다.

   용수는 <중론>에서 <반야경>에 나타나는 공관(空觀)을 연기설과 같은 위치에 놓음으로써 공관을 이론적으로 해명하고 대승불교의 역사적 위상을 확립시켰다. 이로 인해 <반야경>으로 대표되는 대승불교는 역사적으로 그 연원이 붓다에게 유래됐음을 분명히 했고, 그럼으로써 대승불교의 역사적 의미는 더욱 공고하게 됐다. 즉, 용수는 중론에서 그의 사상적 근본이 불교의 개조인 붓다에게서 출발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와 같이 <중론>은 초기불교를 비판하고 대승불교를 수립하려고 저술한 것이 아니라, 부파불교에 의해 왜곡된 불교를 바로잡고 초기불교를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저술한 것이다. 부파불교 당시 일부 부파의 아비달마교학에서 자성(自性)의 존재를 긍정하거나 연기설을 왜곡해 붓다의 사상과 배치되는 주장이 있었다. 용수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중론>을 비롯한 자신의 저술을 통해 엄격히 비판하고, 자신의 설이야말로 모두 붓다의 진의를 전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지금도 일부 학자는 대승비불설(大乘非佛說)을 주장하며 대승불교는 붓다의 가르침과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용수의 진의를 파악한다면 대승불교야말로 붓다 사상의 확장이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일체법이 연기이며 무자성이라는 연기 - 무자성 - 공론이 용수보살이 확립한 중관사상의 근본으로서, 이 중관사상은 붓다가 설한 중도사상을 계승한 것이요. 후에 삼론종은 물론이고 천태종, 화엄종, 선종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파에 그 영향을 미쳤으니, 모든 불교사상의 근본적인 교의가 된다고 하겠다.

 

 

3. 팔부중도(八不中道)

        

   팔부중도(八不中道)는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인연법으로 허망하고 사악한 이론들을 모조리 때려잡은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중론>의 첫 구절 귀경게(歸敬偈)는 용수가 부처님의 진리 중 으뜸인 연기법을 가지고 당시에 횡행하던 잘못된 이론들을 모조리 타파한 후에 부처님께 자랑스럽게 절하는 용수의 자부심을 나타낸 문장이다.

 

   <중론> 첫머리에 유명한 귀경게(歸敬偈)가 실려 있다. 귀경게란 부처님을 기리는 노래란 뜻으로서,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상부단(不常不斷) 불일불이(不一不異) 불래불거(不來不去), 이런 인연을 능히 설하시어 여러 희론(戱論)을 소멸시키시니, 설법자 가운데 최고인 분에게 나는 머리 숙여 예배합니다.”라고 하면서 팔부중도(八不中道)를 제시했다.

   이 귀경게의 팔불 게송이 중론의 핵심을 요약한 것이다. 즉, 이 세상을 이루고 있는 연기의 이법(理法)이 생(生) ․ 멸(滅) ․ 상(常) ․  단(斷) ․ 일(一) ․ 이(異) ․ 내(來) ․ 거(去)의 여덟 가지 잘못된 견해[팔사(八邪)]를 떠난 것임을 파악할 때 참다운 공(空)의 진리를 체득할 수 있고, 팔사가 떨어져 무소득(無所得)의 바른 견해에 머무르는 것을 팔부중도라 했다.

   그리고 부파불교 당시 아비달마교학에서는 부처님 교설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12연기설을 삼세양중인과설(三世兩重因果說) 혹은 태생학적인과설(胎生學的緣起說)로 단순한 인과관계로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여기서 ‘불(不)’이란 다 버리고 다 포용하는 원리이다. 그것이 바로 공의 세계이며, 개체와 전체를 모두 살리는 중도의 원리이다.


     ※무소득(無所得)---<반야심경(般若心經)>에 나오는 말로서 무소유(無所有)라고도 하며, 집착하지 않음을 일컫는 말이다. 단순하게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구하려는 마음이 없어 모자람도 없고 궁색함도 없어 집착(번뇌)의 범위를 넘어선 상태를 말한다. 이와 같이 얻을 바가 없는 공의 경지에 이르면 곧 깨달음을 성취한 경지이다. 무소득은 일체가 공(空)이기 때문이다.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부파불교시대의 소승불교에서 주장한 12연기설의 해석 방법이다. 삼세(三世)란 과거-현재-미래를 의미하고, 양중(兩重)이란 두 번 반복된다는 것을 말하며, 인과(因果)란 원인과 결과의 연결을 말한다. 즉 삼세에 걸쳐 두 번의 인과를 가지고 윤회하는 과정을 말한다. 12연기는 삼세에 걸쳐서 이러한 원인과 결과가 인-과-인-과로 두 번 반복됨(兩重)을 가르친다고 해서 ‘삼세양중인과(三世兩重因果)’라고 하는데, 12연기법의 유전문(流轉門)의 설명만 될 뿐, 환멸문(還滅門)은 담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태생학적연기설(胎生學的緣起說)---삼세양중인과설이 태내 오위설(胎內五位說) 등과 결합해 태생학적 연기관을 낳았다. 태내 오위설이란 사람이 모태에 들어가서 태어나기까지의 기간, 즉 모태에서 자라나는 과정을 다섯 단계로 나눈 설명이다. 그러니까 12연기를 사람이 육체를 중심으로 해서 태어나서 죽는 과정으로 설명하는 해석이 태생학적 연기설이다. 따라서 생사를 육체의 생사로 보기 때문에 12연기의 본뜻을 왜곡시킨다고 비판받고 있다.

  

   그러나 인과설은 불교뿐만 아니라 외도들도 공유하는 사상이었다. 따라서 단순한 인과론이 연기의 의미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중론>에서는 상견(常見) ․ 단견(斷見)을 모두 비판하면서 그런 극단적인 견해를 떠난 ‘중도적인 인과론’이 연기의 진정한 의미라고 했다. 이렇게 연기가 중도적 인과관계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표한한 구절이 바로 귀경게의 팔부중도이다.

   팔부중도는 우리가 존재로 여기는 모든 그릇된 고장관념을 깨뜨리기 위해서 설해진 여덟 가지의 부정이다. 고정관념이란 모든 것은 영속적이고, 불변하고, 고정적이고, 일원적이며, 독립적이라고 여기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사물에 대해 이런 고정관념이나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찰나에도 머물지 않고 변하고 있는 모든 것이 우리의 눈에는 실재하는 존재로 여기에 된다. 모든 것을 존재로 보기 때문에 영원성이나 불변성을 이야기하게 되고, 영원성이나 불변성을 추구하는 마음 때문에 미망에 갇히게 돼 고통과 번뇌를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사물이 존재한다[유(有)]고 하는 판단도,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무(無)]는 판단도 모두 연기 - 공의 입장에서는 부정되는 것이며, 이런 존재론적인 유와 무의 두 견해를 끝없이 부정해가는 바에 참된 중도가 있다고 했다.

   이와 같이 팔부중도는 어리석고 삿된 견해를 끊어 없애[파사현정(破邪顯正)]는 바른 가르침이다. 따라서 팔부중도의 참뜻을 알면 일체의 어리석고 삿된 견해가 없어질 뿐만 아니라 팔부중도라는 생각까지도 그 안에서 사라지게 된다고 했다. 즉, 서로 대립하고 있는 여덟 가지 그릇된 개념을 연기법으로 타파해 분별과 집착이 소멸된 공의 지혜를 드러내게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범부 중생은 망상에 빠져 생멸(生滅)ㆍ단상(斷常)ㆍ일이(一異)ㆍ거래(去來)를 실체적인 법(法)이라고 고집한다. 그 결과 생사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고정관념에서 탈피해 공(空)의 팔불(八不)이 중도임을 깨달아 열반에 들어야 한다고 했다.

                                         

   ① 불생불멸(不生不滅)---부처님이 깨달으신 중도의 이치는 모든 법이 본래부터 자성(自性)이 없이 갖가지 인연을 통해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연기법(緣起法)에 근거해 설해진 것이다. 인연에 의해서 나타난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는 공(空)한 것으로 극단적인 양변을 여의었고. 그러므로 중도는 곧 연기의 법이며, 공한 법이고, 일체의 차별과 대립을 떠난 적멸의 법이라는 것이다. 즉, 불생불멸이란 태어남과 죽음, 만들어짐과 사라짐의 양극단을 부정한 것이다. 일체의 모든 존재는 연기의 법칙에 의해 인(因)과 연(緣)이 화합하면 만들어지는 것이며, 이 인연이 다하면 스스로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예컨대, 여기에 나무와 또 하나의 나무가 있다고 할 때, 이 나무와 나무[인(因)]를 인위적으로 비벼줌[연(緣)]으로써 우리는 여기에서 불[과(果)]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이때 나무와 나무 사이에 본래 불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공기 중에 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비벼주는 손에 불이 있었던 것도 물론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무라는 인(因)에 힘을 가해 비벼 주는 연(緣)으로 인해 결과인 불[과(果)]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불이 만들어 진 것은 나무 때문만도 아니고, 공기 때문도 아니며, 비벼주는 손 때문만도 아니다. 다만 나무와 공기와 손, 그리고 습도를 비롯한 주변여건 일체가 인연 화합해 모일 때에 불이란 결과를 생(生)하게 할 수 있다. 젖은 나무를 아무리 비벼도 불을 얻을 수 없으며, 공기가 없는 곳에서 나무를 비벼도 불을 얻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서 나무가 모두 타게 되면, 인과 연이 소멸했기 때문에 불도 자연히 꺼져 소멸하게 된다.

   모든 존재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인연생기(因緣生起)해 인연소멸(因緣消滅)하는 것일 뿐이다. 즉, 불이 본래 있던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생멸하듯, 존재도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에 따라 생멸할 뿐이다. 본래 생멸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망념 된 중생의 차원에서 볼 때에는 일어남이 있고 사라짐이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 실상은 거짓모습이다. 즉, 삼라만상은 인연의 있고 없음에 따라 생멸변화 할뿐이요, 현상 그 자체에는 아무런 자성(自性), 즉 실체성이 없음을 말한다.

   일체법의 생(生)은 인연이 화합해 나타나는 것이며, 멸(滅)하는 것도 인연이 다 돼 사라질 따름이다. 모든 존재가 실재적 생멸이 있는 것처럼 착각해서 거기에 집착하는 그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도록 가르치기 위해 가장 먼저 생과 멸에 대해서 부정하고 있다. 이는 인연의 유무에 따라 생멸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생멸에 대한 집착을 고쳐 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라 생멸이란 고정된 실체적 관념을 타파하기 위해 ‘불(不)’이란 부정의 개념을 도입했을 뿐이다. 여기서 ‘불(不)’이란 부정의 의미라기보다는 ‘연기’의 의미로 이해함이 옳다. 인연생기해 인연소멸하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가 없다[불(不)]는 의미이다. 이 ‘불생불멸’은 우리에게 존재 본성의 의미를 시사하고 있다. 모든 존재는 생겼다고 해도 그것이 어떠한 고정된 것이 아니며, 멸해 없어졌다고 해도 완전한 단멸(斷滅)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인연 따라 다른 모습으로 겉모양을 바꾸었을 뿐인 것이다.

   예를 들어, 물이 추위를 만나서 영하의 온도가 되면 얼음이 되고, 이 얼음을 끓이면 열이라는 연을 만나 수증기가 된다. 물과 얼음, 수증기를 각각 따로 보면 생과 멸이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생멸이 따로 없다. 물이 얼음이 되고 얼음이 수증기이다. 단지 모양만 바뀌었을 뿐 물의 성질은 멸하지 않는다.   

   마음도 그와 같아서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일어나고, 마음이 가라앉으면 만법이 사라진다. 세계를 만들고 파괴하는 것이 마음이지만 그 마음은 원래 형체가 없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는 것이 세계와 우주를 만들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한다. 마음이 가정과 세계를 바꿀 수 있는 주인공인 것이다. 그러니 어찌 마음이 인생의 주인이 아니겠는가. 마음은 원래 생한 적이 없고(不生) 그렇기 때문에 멸하지도 않는다(不滅).”라고 했다.  

 


   ② 불상부단(不常不斷)---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의 어느 한 극단에 사로잡혀 중심을 얻지 못하는 그릇된 견해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는 윤회 상에 있는 중생의 몸과 영혼은 항상 하지 않음을 말한다. 즉, 모든 법은 영원함도 끊어짐도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들이 생각하기에 이 세상에는 영원히 지속되는 것들이 있고 반대로 순간적으로 끝나는 것들이 있다고 여기기 쉽지만 그 역시 치우친 견해로서 망념 된 마음의 소산일 뿐이다.

   그리고 용수가 불상부단으로 드러내고자 한 것은 존재자의 연속성에 관한 논의이다. 여기서 상(常)이란 상주(常住)로서 변하지 않는 자성을 가지고 계속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단(斷)이란 단멸(斷滅)로서 연속성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연기(緣起) - 무자성(無自性) - 공(空)의 입장에서의 불생불멸이 이미 불상부단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구분해 본다면 불생불멸이 생멸의 과정 즉 생멸이라는 상태에 주목하는 것인데 반해 불상부단은 생한 존재자와 멸한 존재자 간의 연속성에 관한 논의라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불상(不常)은 일단 생한 존재자가, 생(生)이란 상태를 계속해 유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부단(不斷)은 멸한 존재자의 멸(滅)이란 상태가 계속 유지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있겠다.

   예를 들면, 우유가 발효돼 버터나 치즈가 됐을 때, 버터나 치즈에는 우유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아 불상이다. 그러나 전생(前生)과 내생(來生)이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우유가 없이는 버터나 치즈가 생길 수 없기 때문에 부단이다.

   그리고 목재를 다듬어 집을 짓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기둥을 이루는 어떤 목재의 기능은 집이라는 구조물 속에서만 파악될 수 있다. 집을 떠나서 기둥이라는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기둥을 이루는 목재는 예전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어서 불상이며, 그래도 예전의 상태로부터 연유됐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므로 부단이다.

   이와 같이 우유와 치즈, 목재와 집 간의 모든 관계는 따라서 상도 아니요 멸도 아니다. 이렇듯 인과란 자성이 없이 일어나는 것이어서 연기적이며 상대적이니, 단상(斷常)이라는 양극단의 견해에 떨어지지 말고, 연기 - 무자성 - 공의 입장에서 인과관계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 불상부단이라 하겠다.

   그래서 용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사물이 연을 따라서 발생한다면 (그것은) 원인과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실상(實相)은 단멸도 아니고, 상주도 아니다(若法從緣生 不卽不異因 是故名實相 不斷亦不常-제18장 10게). 결국 불상부단이란 모든 법은 인연의 집합으로 모이고 흩어지고 하는 것이므로 영원히 존속한다거나 단멸한다고 착각하는 극단적인 사고를 타파하려는 것이다.

                          

    ③불일불이(不一不異)---불일불이란 현상계의 모든 사물은 서로 다르나 그 진리의 본체에서 보면 동일한 것이기에, 영원히 다르다거나 동일하다는 집착을 부정한 것이다. 이리하여 하나이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하나인 관법을 제시하고 있다.

   즉, 불일불이란 연기(緣起)로 생한 현상적 존재들은 독립체로서 고정적인 자성을 갖고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에 따라 일시적으로 나타난 거짓 상(相)일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존재들의 참 성품은 동일한 진여법성으로서 하나이다. 그러므로 현상적 존재들은 서로 다르지 않다. 별개의 존재가 아닌 한 몸으로 이어져 있는 것처럼 하나도 아니면서 다르지도 않다는 것이 불일부이의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서 ‘일(ㅡ)’이란 원인과 결과가 같다는 인과동일(因果同一)의 입장이며 ‘이(異)’란 원인과 결과가 다르다는 입장이다. 원인과 결과는 연기론의 기본적인 요소이다. 용수는 이를 능동적으로 생겨나게 하는 것으로서의 능생(能生)과 수동적으로 생겨나는 것으로서의 소생(所生) 즉 능소(能所)의 관계로 파악하면서 이 관계를 불일불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용수는 “원인과 결과가 동일하다는 것은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원인과 결과가 다르다면 이러한 일도 또한 성립하지 않는다(因果是一者 是事從不然 因果若異者 是事亦不然-제20장 19게)”라고 했다. 만약 원인과 결과가 동일하다면 능생(생겨나게 하는 것)과 소생(생겨나는 것)은 동일한 것이 되며, 원인과 결과가 다르다고 한다면 원인은 원인이 아닌 것과 동일한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원자의 세계에 견주어 살펴보면, 수소 원자 두 개와 산소 원자 하나가 결합해 물 분자를 이룬다. 수소와 산소가 결합해 물을 이룬다는 관계에서 본다면, 수소와 산소는 물을 생겨나게 하는 것이므로 능생이며, 물은 수소와 산소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므로 소생이 된다. 중론에서의 중요한 테마는 이 능생과 소생의 관계가 불일불이라는 것이다. 물의 성질이 수소와 산소의 성질과 동일할 수는 없으므로 불일이다. 그러나 수소와 산소를 떠나서는 물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으므로 전혀 관계가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불이이다. 따라서 이들의 관계는 서로 연기에 의해 성립 할 뿐이다. 따라서 이들은 각자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무자성적인 것이다. 그러니 불일불이 역시 연기 - 무자성의 원리를 설명한 것이다.

   연기의 법칙에서 조건에 따라 한번 법이 일어나면 그 조건이 반드시 사라지고, 그 일어난 법도 계속 전승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조건에 따라 법이 일어나 다음 조건을 만들어놓고 사라지는 것으로서 그 역할은 끝난다.

   그렇다고 해서 먼저 일어난 법과 뒤이어 일어난 법이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다. 이는 뒤에 일어난 법이 앞에 일어난 법을 상속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건에 따라 연이어 법이 일어나서 상속된다는 것이 연기의 법칙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인데. 이에 대해 우유와 치즈의 관계로 이해해 보자.

   상속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만약 상속으로 이어질 때 절대적으로 하나라고 하면 우유로부터 치즈가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만약 절대적으로 다르다면 치즈는 우유로부터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는 현상계의 모든 사물은 서로 다르나 그 진리의 본체에서 보면 동일한 것이기에 영원히 다르거나 동일하다는 집착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불일불이란 개체와 전체에 치우친 견해이다. 개체적으로 보면 다름이 있지만[불일] 전체적으로 보면 다름이 없다[불이]. 개체는 전체의 부분이며, 전체는 개체의 종합된 모습이다.

   이러한 사실을 사회현상에 적용할 경우, 사회 전체만 보는 것도 치우친 견해이며, 부분만 보는 것도 치우친 견해이다. 왜냐하면 개체는 전체의 부분이며, 전체는 개체의 종합된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와 사회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나에 치우치면 개인주의가 되고, 사회에 치우치면 전체주의가 된다. 따라서 사회와 개체를 함께 봐야 한다. 개인을 무시한 사회가 있을 수 없고, 사회를 무시한 개인생활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융(圓融)한 관계가 바로 불일불이이다.

 

                       

   ④불래불거(不來不去)---중론 제2장 관거래품(觀去來品)의 첫 번 째 게송에 “이미 지나간 것에는 간다는 것이 없으며, 아직 지나가지 않은 것에도 간다는 것은 없다. 이미 지나간 것과 아직 지나가지 않은 것을 떠나 지금 지나가는 것에도 또한 간다는 것은 없다(己去無有去 未去亦無去 離已去未去 去時亦無去-제2장 1게).”라 돼 있다. 이 게송은 과거와 미래, 현재에 대해 ‘간다’는 작용이 불가득(不可得)임을 논증하는 상당히 사변적인 게송이다.

   과거에 이미 간 것에나 미래에 아직 간 일이 없는 것에는 ‘간다’는 동작이 이미 완료됐거나 그 동작이 실현된 일이 없기 때문에 간다는 작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현재 지나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만은 간다는 작용을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용수는 이것마저 부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미 반은 가고, 아직 반은 가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의 작용마저도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을 떠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동작을 관찰하는 사람은 자신이 현재 지나가고 있는 작용을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이미 방금 지나간 과거의 동작을 파악하고 사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불래불거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과 ‘가고 옴’이라는 운동을 다루고 있다.

   이 게송은 이처럼 무척 사변적이어서 무슨 의미인지 분간하기 힘들다. 그러나 알고 보면 간단하다. 가는 것에나 오는 것에 집착하지 말라는 말이다. 집착을 떠난 진여법(眞如法)은 가고 옴이 없고, 가고 옴이 있으면 진여당체가 아니다.

   그 비슷한 이야기가 금강경에도 나온다. 즉 금강경 제18분 일체동관분(一切同觀分)에 “과거심과 현재심과 미래심이 불가득(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이라고 했다.

   과거나 미래라고 하는 것이 본래 없다. 다만 우리가 과거다, 미래다, 현재다, 하고 이름 지어 놓았을 뿐이다.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시간이 흐른다는 개념을 만들어 놓고는 우리 스스로 그 개념에 얽매여 과거 때문에 걸려서 괴로워하고, 미래 때문에 걸려서 괴로워할 뿐인 것이지, 본디 시간이란 개념 또한 텅 비어 공할 뿐이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다. 그냥 그렇게 이름 지어 놓은 것일 뿐이다.

   그렇게 이름 지어놓았지만 그 실체가 있는가, 과거란 실체가 없다. 백 번 양보해서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과거는 지나갔다. 즉 과거의 마음은 사라졌다. 그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 또한 실체가 없다. 미래라는 이름뿐 도대체 미래를 본 적이 없다. 그리고 현재란 말도 지나간 것이 아니면 아직 온 것이 아닐 뿐, 지금 현재란 없다. 머물음이 없기[무주(無住)] 때문이다. 그러니 과거심, 현재심, 미래심, 다 실체 없는 텅 빈 공일뿐이다. 가고 오는 마음이란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진여법(眞如法)은 본래 공(空)으로서, 얻는 것도 없고 잃는 것도 없으며,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다는 뜻이다. 일체중생이 무명 망상으로 윤회해 왔다 갔다 하지만 본래 진리의 당체는 오고 가는 체성(體性)이 아니고, 시방에 편만한 채 한결같이 변함없는 여여부동(如如不動)이다. 그런데 임시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을 실제의 현상으로 집착하니 이것을 타파한 것이다. 만일 법성(法性)에 가고 옴이 있다면 일체존체와 그 생멸변화에 대해서 시방에 일관하는 상주법성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모든 법은 어디로부터 온 바도 없고 어디를 향해 간 바도 없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왔다가 저곳으로 가는 것이 모든 존재들의 흐름 같지만 그것 역시 형상에 집착하는 망념 된 마음에서 그렇게 보일뿐 실지로는 움직임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불래불거’를 불래불출(不來不出)이라고도 하는데, 불래불출이란 말은 앞서 나온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는 말과 같은 내용이다. 모든 유정(有精)은 윤회 중에 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온 것처럼 고집하니 이것을 부정하고, 또한 본래의 고향, 진여세계로 돌아감을 망각하고 있는 중생을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본래 진리의 당체는 오고 감이 아닌데 임시로 오고 가는 것을 실제의 현상으로 집착하므로 이를 타파하는 가르침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여래(如來)’ 한 마디에 집약된다. 여래(如來)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명호이다. 여래라는 말은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되고 있으나 근본 뜻은 언제든지 와 있다는 말이다. 즉,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아니다. 여래라고 하는 것은 불거불래(不去不來)이다. 여래(如來)에서 ‘여(如)’ 자는 항상(常)이라는 뜻이다. ‘언제나’라는 글자로서, 언제나 부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구제하기 위해 인간세계에 와 계시다고 해서 여래라고 한 것이다.  

 


   우리들은 존재에 대한 그릇된 관념 때문에 우리들의 삶이 미망에 빠진다. 우리가 불변으로 여기는 그런 존재들로 말미암아 사랑과 미움이라는 분별을 일으키고, 행복과 고통을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행복은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고, 고통스러운 것은 빨리 없어지기를 바란다. 행복과 고통은 인(因)과 연(緣)의 경계를 따라 더욱 깊어지고, 마음이 짓는 허망한 이름과 형상들에 집착하게 되면 그것 때문에 갖가지 업을 짓게 된다.

   그러므로 팔부중도는 존재의 근원에 대해 그 허망함을 밝히고, 진정한 존재에 대한 자각을 일깨우기 위해 설해진 것이다. 존재에 대한 진실을 자각하는 것, 그것이 해탈이요, 열반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존재는 하나인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상호의존적이다. 영원한 실재가 아니라 연기적이며, 고정된 실재가 없는 공이다. 

   이렇게 설명은 했지만 이와 같은 팔부중도를 우리들로서는 상당히 이해하기 힘들다. 비유를 든다면 바다와 거품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바다에 거품이 생겼다고 하자. 전체적인 바다의 입장에서 볼 때 많은 거품이 생겨나고 없어지지만 바다 자체에서는 생겨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다. 즉, 파도가 생겨나고 없어지면서 많은 거품이 일지만 바다 자체는 생겨남과 없어짐이 없다. -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 그리고 거품이 항상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거품이 아주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파도가 일면 또 생긴다. - 불상부단(不常不斷)이다.

   • 거품과 바다가 같은 것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바닷물이 파도라는 인연을 만나 거품이라는 다른 현상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거품과 물이 아주 다른 것이냐 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거품은 물로부터 일어났기 때문이다. - 불일부이(不一不異)이다. 

   • 거품이 왔다거나 갔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바다의 입장에서 볼 때 거품은 가고 온 곳이 없다. 바람을 따라 왔건 바람을 따라 갔건 그것은 하나의 허망한 현상이지 바닷물은 그대로인 것이다. - 불래불거(不來不去)이다.

   바다를 전체로 봤을 때 바다는 종일토록 물결치면서도 ‘바다’ 그 자체에는 아무른 변화가 없다. 겉모습에서는 물결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변하는 듯 보이지만 그 본체인 바다는 늘 그대로인 채로 늘고 주는 일이 없고, 가고 오는 일도 없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다른 일상의 경험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닫는데 이론이나 학식의 도움이 전혀 필요 없다.

   진실이란 이런 것이다. 이것이 곧 ‘불생불멸 불래불거’의 이치이다. 그리고 이렇게 바닷물처럼 그대로인 법이 중도법이다. 연기법에 의해 형성된 우주의 모든 것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니 결국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고, 상주(常住)하지도 단멸(斷滅)하지도 않는다.   

   이와 같은 것이 팔부중도인데, 지금까지 장황하게 설명한 내용을 요약하면, “모든 법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영원하고 끊어지는 것도 아니며,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같거나 다르지도 않고, 오는 바도 가는 바도 없다. 모든 법은 인연 따라 화합한 것으로 고유의 성품이 없다[공(空)]. 다만 거짓 이름으로 말할 뿐이다[가(假)], 양 극단에서 벗어났음으로 이를 중도(中道)라 한다.”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를 자각한다면 우리의 삶은 미몽에서 벗어나고, 갇힌 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번뇌 망상을 떨쳐버리고 한 점의 속박도 치우침도 없는 중도의 경지에 이르러 무명(無明)을 탁 깨뜨려버리면, 보는 것마다 진실이요, 하는 것마다 걸림이 없고, 한 치의 어긋남이 없게 된다. 한 점 치우침 없는 중도의 완성은 치우침 없는 부처의 길이다. 

   부처님께서는 “선에도 매달리지 말고, 악에도 매달리지 말라고 가르치신다. 선에 치우치면 선의 노예가 되기 싶고, 악에 매달리면 악의 노예가 된다. 선악을 포용하면서도 선악에 매달리지 않는 삶을 살라고 하셨다.”  선도 포용하고 악도 포용하면서 선악을 초월한 삶 ! 바로 그것이 중도의 도리이다. 성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