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도송(悟道頌)
오도송(悟道頌) 이란 선승이 자신의 깨달음을 읊은 선시(禪詩)를 이르는 말로서 게송(偈頌)의 하나이다. 게송이란 불교의 가르침을 함축하여 표현하는 운문체의 짧은 시구를 말하는데, 본래 게와 송은 같은 의미이다.
게는 산스크리트 가타(gatha)의 음을 따서 만든 말이고, 송은 가타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따라서 게송을 게 또는 송으로 줄여 부르기도 한다. 이 게송 중에서 고승이 자신의 깨달음을 노래한 것이 바로 오도송이다.
기록상 오도송을 가장 먼저 남긴 이는 조동종을 일으킨 동산양개(洞山良价:807∼869)이다. 《조당집》 제5권 〈운암화상장(雲岩和尙章)에 따르면, 양개가 개울을 건너다가 깨달음을 얻고 ‘동산과수(洞山過水)’라는 게송을 남겼다고 한다.
개울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문득 깨달은 바를 노래한 이 게송은 훗날 과수게(過水偈)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오도송은 양개의 경우처럼 뜻하지 않는 곳에서 깨달음을 얻을 때 남기는 경우가 많다.
《참동계(參同契)》를 지은 석두희천(石頭希遷:700∼790)은 《조론(肇論)》이라는 책을 읽다가 ‘삼라만상의 진실을 깨닫고 자신으로 삼는 자는 오직 성인일 뿐이다’라는 오도송을 남겼다.
휴정(休靜:1520∼1604)은 전라북도 남원의 한 마을을 지나다가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깨달아 오도송을 남겼다고도 한다.
西山大師(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
千計萬思量 (천계만사량) 천가지 계획 만가지 생각들이
紅爐一點雪 (홍로일점설) 붉은 화로 위에 한 점 눈이로다
泥牛水上行 (이우수상행) 진흙 소가 물 위로 다니나니
大地虛空裂 (대지허공열) 대지와 허공이 다 찢어지도다
曉峰禪師(효봉선사 1888-1966)
吾說一切法 (오설일체법) 내가 말한 모든 법
都是早騈拇 (도시조병무) 그거 다 군두더기
若間今日事 (약간금일사) 오늘 일을 누가 묻는가
月印於千江 (월인어천강) 달 그림자 일천강에 비치리
仁坡禪師(인파선사)
樹樹皆生新歲葉 (수수개생신세엽) 나무마다 새해되면 새잎이 나지만
花花爭發去年枝 (화화쟁발거년지) 꽃은 언제나 묵은 가지에서 피네
故鄕千里眞消息 (고향천리진소식) 고향 천리 참 소식
今日明明的的知 (금일명명적적지) 이제 더욱 분명하게 알겠노라
高峰和尙(고봉화상)
七十八年歸故鄕 (칠십팔년귀고향) 일흔 여덟 살다가 고향 돌아가려니
山河大地盡十方 (산하대지진십방) 산하대지 어디나 다 내 고향 일세
刹刹塵塵皆我作 (찰찰진진개아작) 이 세상 모든 것 내가 만든 것이니
頭頭物物本眞鄕 (두두물물본진향) 보고 듣는 어느 것이 고향 아니랴
彦機禪師(언기선사) 편양 언기(鞭羊彦機 1581∼1644)
雲邊千疊嶂 (운변천첩장) 구름가엔 천겹의 번뇌 산봉우리요
檻外一聲川 (함외일성천) 해탈한 난간 밖엔 철철철 시원한 개울물 소리
若不連旬雨 (약불연순우) 만일 장마비가 아니였던들
那知霽後天 (나지제후천) 어찌 비 개인 뒤에 하늘을 알리
逍遙禪師(소요선사 / 중국)
解脫非解脫 (해탈비해탈) 해탈이라고 할 때 벌써 해탈은 아니로다
涅槃豈故鄕 (열반기고향) 열반인들 어찌 고향이랴
吹毛光爍爍 (취모광삭삭) 취모검 번득이는 빛에
口舌犯鋒鋩 (구설범봉망) 입대지 말라 혀 잘릴라
과거칠불의 오도송 *^^* | 자유로운글 2010.02.06 21:07
물같이 바람같이(kyungae0750)
http://cafe.naver.com/dream2250/4981
과거칠불의 오도송
비바시불
몸이 형상 없는 가운데서 태어나니
마치 허깨비에서 갖가지가 나는 듯하다.
허깨비의 마음과 뜻 본래 없으니
죄도 복도 모두 공(空)해 머물 곳 없도다.
시기불
착한 법을 짓는 것도 본래가 허깨비요.
악한 업을 짓는 것도 모두가 허깨비
이 몸은 거품이요 마음은 바람이니
허깨비에서 나오는 것 뿌리도 실성도 없네.
비사부불
사대(四大)를 잠시 빌려 이 몸을 이루었고
마음은 본래 무생(無生)이나 경계 따라 있게 된다.
경계가 없으면 마음 또한 없어지니
죄와 복이 허깨비 같아 일어나자 멸한다.
구류손불
몸이 진실치 않음을 보면 이것이 불신(佛身)이요.
마음이 허깨비 같음을 알면 이것이 불심(佛心)이다.
몸과 마음의 본 성품이 공함을 요달하면
어찌 이 사람을 부처와 다르다 하리.
구나함모니불
부처님의 몸은 보지 못하니 이를 앎이 부처이다.
만약 진실로 안다면 따로이 부처가 없다.
지혜로운 이는 죄의 성품이 공함을 알아서
항상 태연하게 생과 사를 두려워 않느니라.
가섭불
일체 중생의 성품은 청정하기 그지없고
본래부터 남도 없고 멸함도 또한 없다.
이 몸과 마음은 허깨비에서 생겨났으나
허깨비 속에는 죄도 복도 본래 없도다.
석가모니불
허깨비는 원인도 없고 생겨남도 없으니
모두를 자연스럽게 그러한 것으로 보라.
모든 법 모두가 허깨비 아닌 것 없으니
생겨남 없는 허깨비는 두려워할 것 없도다.
과거칠불의 본맥을 잇는 33조사의 오도송들은 법(法)이나 심(心)을 주제로 삼고 있는데 비해 칠불의 게송은 몸(身)과 마음(心)과 허깨비(幻)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아울러 몸과 마음이 허깨비와 다를 바 없고 공(空)임을 요달하여야 본래 청정한 자성의 자리로 돌아가 생사의 두려움으로부터 해탈할 수 있음을 설하고 있다.
[출처] 과거칠불의 오도송 *^^* (대전 화암사 참선 수련회) |작성자 물같이 바람같이
환생과 재생은 다르다, 부처님의 오도송으로 본 윤회의 타파
윤회가 없는 불교를 상상 할 수 있을까. 불교를 믿으면서도 윤회를 부정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그런 사람들은 ‘유물론자’이거나 ‘단멸론자’들일 수 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반면에 영혼불멸을 주장 하는 사람들도 있다. 영원히 존재 하는 진아 즉 ‘참나’가 있다고 생각 하는 사람들이다. 영원히 변치 않는 진실된 나가 있어서 몸만 바꾸어 다시 태어 난 다는 것이다. 이른바 ‘환생론’이다. 힌두교의 ‘아트만’과 같은 맥락이다. 이런 윤회에 대하여 명상원 교재 마하시사야도의 12연기(paticca-samuppada)의 역주를 참고 하여 보았다.
환생(reincarnation)과 재생(rebirth)은 다르다
윤회의 원어는 삼사라(samsara)이다. 삼사라는 ‘함께 움직이는 것’ 또는 ‘함께 흘러 가는 것’이라는 뜻이다. 영어로 표현 하면 ‘round of rebirth’ 이다.
앗타살라니(Attasalini)는 윤회를 5온, 12처, 18계가 연속하고 끊임없이 전개 되는 것으로 정의 하였듯이,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윤회의 주체가 없는 연기적인 흐름을 가리키는 것이다.
근본적인 입장에서 보면 매 찰나 전개되는 오온의 생멸자체가 윤회이고, 생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한 생에서 마지막 마음이 일어났다 멸하고, 이것을 조건으로 하여 다음 생의 재생연결식이 일어 나는 것이 윤회이다. 그러므로 힌두교나 다른 종교에서 설하는 윤회설과는 구분 되어야 한다.
힌두교의 윤회는 불변하는 아뜨만(자아)이 있어서 금생에서 내생으로 전변하는 재육화(再肉化, reincarnation)이다. 반면에 불교는 갈애를 근본원인으로 한 다시 태어남(再生, rebirth)이다.
부처님의 오도송
윤회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명에 덮인 중생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치달리고 윤회하므로
그 시작점을 꿰뚫어 알 수 없다.
(상윳따 니까야, S15:13)
또 법구경에서 부처님은 오도송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많은 생을 윤회하면서
나는 헛되이 치달려 왔다.
집짖는 자를 찾으면서 거듭되는
태어남은 괴로움이었다.
집 짖는 자여,
마침내 그대는 보였구나,
그대 다시는 집을 짖지 못하리.
그대의 골재는 무너졌고
집의 서까래는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마음은 업 형성을 멈추었고
갈애의 부서짐을 성취 하였다.
(법구경, 153-154게송)
이렇게 부처님은 윤회가 종식된 것에 대하여 감회를 밝히셨다.
부처님은 분명히 갈애(tanha, 딴하)와 무명(avijja, 아윗자)이 윤회의 원인이라고 밝히셨다. 그 중에 갈애를 ‘재생 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갈애와 무명이 있는 한 한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생사윤회의 수레바퀴는 계속 굴러간다. 하지만 갈애를 위시한 모든 번뇌를 쳐부순 아라한에게는 더 이상의 윤회가 없다.
윤회는 갈애와 무명에 휩싸여 치달리고 흘러가는 중생들의 생생한 모습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윤회(苦)를 설하셨고, 윤회의 원인(集)인 갈애를 설하셨고, 윤회가 다한 경지(滅)인 열반을 설하셨고, 다한 경지를 실현 하는 방법(道)인 팔정도를 설하셨다.
초기불교와 너무나 동떨어진 교재의 내용을 본 바와 같이 환생과 재생은 다르다. 모두 다 윤회라고 하지만 환생은 영원불변 하는 자아가 있어서 몸만 바꾸어 태어나는 개념이고, 불교의 윤회는 주어진 조건에 따라 다시 태어나는 재생개념이다. 업의 과보가 전해져서 몸과 마음이 재생되는 것이다. 따라서 더 이상 업을 지을 일이 없으면 몸과 마음이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 업을 짓지 않게 하기 위한 단계가 12연기에서 느낌(受)에 갈애(愛)로 넘어 가지 않게 하는 것이다.
티벳불교에서는 환생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그리고 영어로 reincarnation이라 한다. 초기불교에서 말하는 재생(rebirth)개념하고 다르다. 달라이라마도 환생되었다라고 말하지 재생 되었다고 하지 않는다. 그런 것을 보면 티벳불교가 초기불교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원히 변치 않은 참나가 있다는 한국불교 역시 초기불교의 재생개념과는 동 떨어져 있기는 마찬가지 일 것이다.
2009-07-20 진흙속의연꽃
*윤회가 다한 경지를 해탈. 윤회의 6도에서 벗어난 상태를 해탈. 열반-탐진치의 3독의 불이 소멸한 상태
석가모니 붓다의 오도송 불편한 진실
2009/07/20 12:54 http://blog.naver.com/samdech2/140077293272
허공으로 높이 올라간 화살도 마침내 땅으로 떨어지듯이
생사를 초월하지 못하는 이상 인간이 누리는 그 어떠한 행복도 허무하다는 것을 절감한
붓다는 출가의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 최고 수행 고수들로부터 최상의 단계인 사마타(삼매) 팔선정의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를 전수받고도 생사 없는 궁극의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스스로 보리수 아래에서 위빠사나 12연기를 관찰하여 생사를 해탈하시게 됩니다.
아래는 그 깨달음의 기쁨과 소회를 노래한 오도송인데 몇 년 전에 보았을 때는 무슨 부처님의 오도송이 이리 밋밋한가 또는 좀 시시하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중국 선사들이나 근래의 한국의 조사들의 오도송에 비해 너무 맹숭맹숭하다 할까? 시적이지도, 잔 듯 멋을 부리지도 않은 있는 그대로 밝혀주신 부처님의 오도송을 저의 잘못된 견해로 인하여 오해하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노력하는 수행자에게
오~무명의 원인과 함께
행(行)등의 연기에 속하는 결과를
자세하고 분명하게 관찰하여 모든 의심 사라졌네.
무상. 고. 무아의 본성을 명백히 보았노라.
깨달음의 조건이 드러나자 모든 번뇌 사라지고
지혜의 밝은 빛 찬란하게 빛나네.
집(육체) 짓는 자가 누구인가를 찾아
수많은 생을 헤매며
거듭거듭 태어남은 고통이어라.
아! 드디어 찾았네. 집짓는 자가 누구인가를
그는 바로 욕망이어라.
집의 서까래(오온)은 무너지고
대들보(무명)은 갈라졌네
이 마음은 지금 모든 환영에서 깨어나
대열반에 이르렀고
욕망의 소멸을 이루었네
-<초전법륜경>-
그리고 나서 깨달음의 실천수행 방법으로 사성제와 팔정도를 제시하셨습니다.
붓다께서는 <상적유경>에서 모든 발자국이 코끼리 발자국 안에 들어오듯이
모든 불교경전은 사성제를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또 한 번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지요.
'비구들아 사성제를 있는 그대로 이해했기 때문에 여래는 아라한, 완전한 각자라 불린다'
[출처] 석가모니 붓다의 오도송|작성자 삼덱
홀문인어무비공(忽聞人語無鼻孔) ㅡ 홀연히 콧구멍 없다는 말을 듣고
돈각삼천시아가(旽覺三天示我家) ㅡ비로소 삼천대천 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유월연암하산로(有月淵岩山下路) ㅡ유월 연암산 아래 길에서
야인무사태펑가(野人無事太平歌) ㅡ나 일없이 태평가를 부르노라
***23세때 동학사에서 강사를 하고 있던시절 은사 스님을 찾아가다가 어느 마을에서 호열자(장티프스)유행병으로 마을사람들이 거의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처사집에서 하루 유숙을 하게 되었을 때 그 집주인이 묻기를 "스님들은 일생동안 시주 돈으로 살다가 죽게 되면 그 과보로 소가된다고 하는데..." 일체 앞뒤가 막혀서 답을 못하고 제아무리 상사로 존경을 받고 사는 소임보다 생사를 해결하여야겠다는 답답한 마음으로 32세 되던 해 경허스님 머무는 옆방 객실에서 어느 처사가 스님과 대화를 나눈데 나는 죽어서 소가되어도 콧구멍 없는 소가되겠노라..."하는 말에 그만 경허선사의 답답하던 마음이 홀연히 열리며 대오(大悟)를 하고나서 읊게 된 오도송(悟道頌)입니다.
여기서 콧구멍 없다는 말은 숨 쉬는 콧구멍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소라는 동물을 사람들이 끌고 다니려는 방법으로 송아지 때부터 꼬뚜레를 꿰고서 밧줄로 끌고 다니는 것인데 바로 그 끌려 다녀야 하는데 코뚜레 구멍이 없다는 소를 말한 것입니다. 흔히 불가에서는 마음의 깨달은 경지를 소라는 동물로 예를 들어 심우도 또는 심우도라는 그림으로도 도를 얻고서 마음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소라는 동물로 10가지 종류의 상황을 그려서 표현하는데 바로 코뚜레 꿰는 구멍이 없는 소가되겠다는 그 말 한마디에 생사에 대하여 근 십 년가까지 답답하던 경허스님의 마음이 홀연히 미투리끈 툭하고 끊어지듯이 마음을 깨달은 후 깨달은 경지를 상기한 게송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굳이 거기에는 해설이 필요 없는 것이지만 깨닫고 나면 어디에고 걸림이 없는 탕탕 무애 자유자재하는 것인데 바로 깨닫고 나니 어디에고 걸리는 바가 없다는 것을 그 처사는 끌려 다니지 않는 자신의 마음을 구멍 없는 소라고한 표현이 바로 경허선사가 걸려있던 마음을 홀연히 열리게 해준 동기가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달마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
효봉선사의 오도송(悟道頌)
| 기사입력 2002-12-27 09:39 | 최종수정 2002-12-27 09:39
海底燕巢鹿抱卵 ( 해저연소록포란 )
火中蛛室魚煎茶 ( 화중주실어전다 )
此家消息誰能識 ( 차가소식수능식 )
白雲西飛月東走 ( 백운서비월둥주 )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
불 속 거미집에 고기가 차를 달이네
이 집 소식 뉘라서 알꼬?
흰 구름 서으로 날고 달은 동으로 달리네
표충사 천진보탑(天眞寶塔)
밀양 표충사 정문 앞에는 우측으로 난 길이 있고 그 길을 따라가면 금새 커다란 바위를 만나게 되는데 그 바위 위에, 조계종 종정을 지내시고 표충사 서래각(西來閣)에서 열반에 드신 효봉(曉峰) 선사의 사라를 모시고 천잔보탑이라고 아름하였다. 그 앞에 탑비가 있는데 앞에 쓴 모도송은 거기에서 베낀 것이다. 그 비에는 오도송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휼륭한(?) 열반송(涅槃頌)도 새겨져 있으나 그에 대하여는 뒤에 다시 언급한다.
효봉 선사와 무(無)자 화두(話頭)
효봉 선사는 잘 알려진 것처럼 알제 사대에 판사를 하다가 오심(誤審)이 연유가 되어 40이 넘어 행복한 가정과 좋은 직장을 버라고 스님이 되신 분이다. 선사는 열반에 드실 때까지 무자를 화두로 삼고 참선하셨다.
무자 화두에 대하여, 모르는 분을 위해 간단히 설명해 보겠다,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중국의 고승-께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조주 스님이 대답했다.
"없다(無)"
부처님께서는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다고 하셨는데 조주 스님은 왜 개에게는 유독 불성이 없다고 하셨을까? "없다(無)"의 참뜻은 무엇일까?를 참구(參究)하는 것이 무자 또는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이라는 화두다.
무의 참뜻이 무엇인지 의심하고 또 의심하여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에 간단없이 계속하여, 깊은 잠이 들어도 깨어 있을 때처럼 그 의심을 놓지 않고 잡고 있을 경지에 이르면, 잠이 들면 태양 같은 붉은 덩어리가 보이다가 드디어 의심이 탁 풀리는데 그 시원함이 흡사 통 밑이 화 빠지는 것 같다는 것이다.
효봉 선사는 늦깎이로 스님이 되자마자 어찌나 참선을 열심히 하였는지 "절구통 수좌"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고 "무(無)"라고 화두 챙기는 소리를 시자(侍子)가 잘못 듣고 물을 올렸다는 얘기도 있고 열반을 바로 앞두고 지금도 화두가 성성(惺惺)하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하시더라는 얘기도 전해진다.
이 오도송을 읽고
아 오도송을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은 십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어찌하여 바다 밑에 제비가 집을 지을 수 있으며 사슴이 알을 낳아서 제비 집에서 품은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화암(華嚴) 4법계의 하나인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가 있다는 것을 알고 부터 달라졌다. 사사무애법계란 쉽게 말해서 겨자씨 한 알속에 우주 전체가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우주 만물이 서로 거리낌이 없다는 진리의 범주다.
선사께서 자기만의 독특한 깨달음의 세계를 노래한 것이 아니고 이미 있는 남의 얘기를 한 것에 불과하구나하고 생각하니 속은 기분까지 들었다. 그러나 개달음은 한번만 있는게 아니고 오도송 또한 한번만 짓는 게 아닐진대 오도송을 자은 선사의 문제가 아니라 이 오도송을 골라 비에 새긴 뒷사람의 문제이리라.
그 오도송이 완벽하게 깨달은 후에 지은 게 아니라서 약간의 께름찍한 맛이 있다고 한들 완벽하게 깨닫지 않고는 지을 수 없는 열반송이 있는데 무슨 상관이 있으랴. 선사의 열반송을 실으면서 이 글을 끝내고자 한다.
오설일체볍(吾說一切法)
도시조변무(都是早 拇)
약문금일사(若問今日事)
월인어천강(月印於千江)
지금까지 내가 항 말
모두가 군더더기
오늘 일을 묻는다면
달이 일천 강물에 비친다 할 뿐이로다. ( 2002. 12 .22 )
불가에서 참선이니 명상이니 하는 것은 마음의 공극을 채우는 일이다. 마음의 틈새가 생겼을 때 그 사이에 탐진치가 찾아들고 방황을 하게 디고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게 된다. 마음이 틈새가 생겼을 때 그 사이로 비도 새고 바람도 들어오게 된다. 참섬이나 명상은 그 공극을 메꾸어주는 역할을 한다. 메꾸어주는 매개가 된다. 천주교에 피정센터가 있으니 핑계를 대고 다녀오면 좋을 것인가. 불가에는 템플스테이라 한다. 참선이나 명상을 한소식을 듣기 위한 매개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던데, 대중으로 나와야 한다. 거기서 함께 숨 쉬면서 함께 고통을 나눠야 종교인으로서 임무를 하는 것이다.
'붓다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씨잡변 佛氏雜辨 (0) | 2017.05.23 |
---|---|
[최보식이 만난 사람]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것이 宇宙를 지탱하는 두 기둥" (0) | 2017.05.17 |
붓다의 독백, 무문관無門關 / 도봉별곡 (0) | 2017.03.30 |
붓다의 제자들 (0) | 2017.01.22 |
[스크랩] 정법시대와 상법시대 말법시대 (0) | 2016.1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