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성(自性)과 무자성(無自性)>
같은 불교이지만 초기불교(소승불교)와 대승불교 이 둘 사이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우선 경전이 다르다. 초기경전은 소위 니까야(Nikaya)라 일컫는 오늘날의 남전경전(빠알리어 삼장)이고, 대승경전은 북방경전인 반야경, 열반경, 화엄경, 법화경을 비롯한 수많은 경전이 불멸 후 500년경(AD1세기 전후)부터 새로 조성됐다. 따라서 초기불교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등 남방불교 지역에서는 지금도 대승경전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추구하는 이념도 다르다. 초기불교에서 4성제(四聖諦)와 6바라밀(六波羅蜜), 8정도(八正道)를 강조했다면 대승불교에서는 공 ․ 가 ․ 중(空假中) 3제(諦)와 불성론(佛性論)를 내세운다. 그리고 초기불교에서는 자아(自我)나 영원불멸의 영혼을 부정하지만, 대부분의 대승불교에서는 삼라만상의 본성이고, 불생불멸의 존재로서 불성(佛性) 혹은 자성(自性)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열반(涅槃)이라는 목표를 가진 초기불교, 그리고 불성(佛性)과 자성(自性)의 실상을 인정하는 대승불교는 달라도 너무나 다르다. 열반에 들기 위해서는 제법이 생멸해야 한다. 그런데 만일 변치 않는 자아나 영원히 죽지 않는 영혼이 존재한다면 열반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불교에 있어서 자성(自性) 혹은 불성(佛性)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논의는 중대한 문제이다. 어떻게 보면 불교의 근본을 뒤흔드는 일이기도 하다.
사물이 참으로 존재하는 것[유자(有者)]이라면 - 즉 자성적 존재라면 소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존재하지 않는 것[무자(無者)]이라면 소멸하는 일도 있을 수 없다. 이미 없는데 무엇이 소멸한다는 말인가. 결국 사물에 자성이 있다면, 변화와 다양성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붓다는 상주론(常住論)을 비판했고, 초기불교사상을 계승한 용수(龍樹, 나가르주나/Nāgārjuna)는 그의 저서<중론(中論)>에서 무자성(無自性)을 취했다. 즉, 붓다는 브라만이 존중하는 영원불멸하는 근본원리인 아트만(atman)을 부정하기 위해 무아설(無我說)을 주장했고, 초기불교 무아설을 계승한 용수의 중관학파에서는 자성을 부정하고 「무자성(無自性) - 공(空)」을 주장했다. <중론(中論)>은 용수의 초기작품으로 <대반야경>에 기초한 공관(空觀)의 입장에서 초기불교 이래의 연기설(緣起說)에 독자적인 해석을 가해, 부파불교 설일체유부가 주장한 법체설(法體說)과 독자부에서 주장한 개아설(個我說-뿌드갈라(pudgala) 등을 비판했다. 이러한 중관학파 최대논사 용수는 연기를 상호연관성, 상호의존성으로 해석해 「무자성 → 공」사상을 확립했다. 즉, 용수는 그의 저서 <중론(中論)>에서 인연으로 생겨난[중인연생(衆因緣生)] 모든 것을 공하다고 했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다른 사물들과 서로 얽혀 있는 관계 속에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존재이므로, 그 모양이나 형태, 또는 그 성질이 전혀 변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이것은 일체의 실재론적(實在論的) 사상을 부정하는 것이다.
공성(空性)은 자성(svabhava)의 부재 - 무자성에 근거한다. 그런데 자성(自性)이란 법의 본질, 법 본연의 상태 등을 실체시한 것이다. 만들어진 것, 다른 것에 의존해서 생성 소멸하는 연기성은 자성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다른 어떤 사물이나 조건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일러 자성이라고 한다. 자성은 ‘불멸의 실체’로서 변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사물에 자성이 있다면 변화하는 현상계와는 모순된다. 오직 모든 사물이 무자성이므로 현상계의 생성과 소멸을 설명할 수 있다. 「무자성 - 공」은 실재적 사고를 배제함과 동시에, 어떤 것에도 집착됨이 없는 깨달음의 경지를 여실히 나타낸다. 모든 현상은 여러 인연의 일시적인 화합에 지나지 않으므로 거기에 불변하는 실체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성(自性)이라는 것은 자아(自我)라고 하는 것과 같다. <열반경>에서도 「불성은 자아(自我)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무자성은 아공(我空), 법공(法空)을 말한다. 법공(法空)이란 인무아(人無我) ․ 인공(人空)에 대칭되는 말이다. 무아사상은 원시불교 이후 복잡한 발전과정을 겪어왔지만, 부파불교에서는 존재의 다섯 가지 구성 요소가 되는 오온(五蘊)의 가화합(假和合)으로 이루어진 인간에 아트만[atman, 자아(自我)]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무아(人無我)만을 설했을 뿐, 무아사상을 일체의 존재에로 확장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파불교 설일체유부의 경우, 법(法)은 자성을 가진 실유(實有)의 것으로 해석해서 ‘아공법유(我空法有)’의 입장을 취해 법체설(法體說)을 주장했고, 독자부에서는 생사윤회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윤회하는 개개 존재의 인격주체로 개아설(個我說)을 주장했다. 이러한 부파불교 사상에 반격하는 중관학파에서는 무아를 무자성(無自性)의 의미로 보아 인무아뿐 아니라 법무아까지 포함한 ‘아공법공(我空法空)’을 주장했다. 이와 같은 해석이 성립된 근거는 모든 존재는 서로 의존해 있는 것, 즉 연기의 존재로 본 데에 있다. 만약 제법에 자성이 있다면, 제법의 작용은 일어나지 않으며, 따라서 종교적 실천은 성립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법은 연기의 존재로서 법의 자성은 실재하지 않으며 공(空)이라 했다. 이와 같은 연기 → 무자성 → 공사상이 용수 철학의 근간이다.
이러한 용수 철학에서의 공관(空觀)이란 우주 사이에 벌여 있는 수많은 현상은 모두 인연소생(因緣所生)에 따라 생기는 것이므로, 그 실체가 없고 자성이 없는 것이라고 보는 공적무상(空寂無相)이라고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즉, 무자성을 연기로 봤다. 그리하여 현상계의 일체법은 다 실체가 없는 공이며,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물든 우리들의 번뇌 또한 그 실체가 없는 공한 것이라 했다.
<능엄경(楞嚴經)>에 “자성이 없다”라는 표현이 있다. 또한 많은 경전에서도 “진리의 실상은 공(空)”이라고 하는 공관(空觀)을 내세우는데, 공이나 자성이 없다는 말을 제대로 아는 것이 바로 정견(正見)이며, 이 정견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비로소 그때부터 수행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정견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는 수행이라기보다는 수행에 진입하려고 노력하는 단계라 할 수 있다. 공(空)이라 하거나, 자성이 없다는 말은 자기 개인의 성품이 없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우주에는 해, 달, 별, 지구가 있으며, 지구에는 나무, 동식물, 사람, 산천초목 등 무수한 삼라만상이 있는데, 이 무수한 삼라만상 각각의 개별적인 성품이 따로 없다는 뜻이다. 즉, ‘자성이 없다’는 뜻은 각각의 개체에 따른 성품이 없다는 말이다. 세상에서 이거다 저거다, 나다 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법은 ‘나’라고 고집할 것이 없다. 모든 것은 인연이 서로 연기해서, 여러 원인과 요소들이 결합해서 만들어진 것이므로 그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법무아(諸法無我)라 하고, 무자성(無自性)이라 한다. 세상사는 알든 모르든 간에 그 모든 것은 이미 ‘더불어 함께’ 하는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래서 편을 가르고 무리를 짓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몸을 반쪽을 잘라내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성(自性)이란 것이 없고 모두 함께 어우러져서 자성이 있는 것처럼 드러나는 것이고, 이름 하여 그러할 뿐이지, 이름조차도 거짓이다. 그래서 똑똑히 알아야 한다. 이름이 그러할 뿐이며, 이치가 그러할 뿐이지, 그것이 전부인양 착각하고 오판하지 말라고 한다. 형체가 있는 일체는 거짓으로 펼쳐져 보일 뿐이다. 그렇게 보일 뿐, 제법(諸法)은 무아이며, 무자성이고, 명가명(名假名-가짜 이름)이다.삼라만상은 인연 따라 그 인연에 맞는 모습을 갖는 것이고, 생명체들은 처해진 환경이나 여건에 맞게 진화하고 발전해 지금의 모습을 드러낸 그 상태가 바로 삼라만상이고, 이런 삼라만상의 모습도 영원히 지금과 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의 흐름, 공간의 변화에 따라, 그리고 자기가 행한 업(業)에 따라 변하고 진화하고 발전해 세월이 지난 후에는 얼마든지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불교는 진화론을 긍정한다. 기독교는 진화론을 부정하다가 자승자박에 걸려 있다. 이런 불법의 이치를 알음알이로 이해하려면 안 되고, 수행을 통해 자기가 체득한 경지로서 정견(正見)을 세우고, 이어서 부단히 수행해 앎의 경지를 벗어나 실제 그렇게 되는 경지에 이르러 체득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물론 깨달은 후에도 보임수행(保任修行)을 거쳐서 처음 깨달음의 경지가 흩어지지 않고 늘 이어져서 절대성의 경지에까지 이르러야 「무자성 - 공」을 깨쳤다고 하리다. 몽산(夢山) 스님 법어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맑고 밝은 보름달 빛이 물위에 비쳤을 때 바람이 불어 물결이 출렁거리더라도 그 달빛처럼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경지가 돼야 한다.…”고, 즉 자기가 체득한 깨달음의 경지를 보임수행을 통해 위급한 상황이든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경지가 돼야 한다. 즉, 이런 깨달음의 세계는 아무리 훌륭하게 표현하고, 비유하더라도 그 자체가 될 수는 없고, 오로지 자기 스스로 실천해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적어도 그런 수준에서 「무자성 - 공」이 논의돼야 한다는 말이다.
※몽산법어(夢山法語)---원나라 말의 몽산(夢山) 스님의 설법을 고려 말에 나옹(懶翁, 1320년∼1376년) 스님이 1350년에 편찬했다.
이상을 요악하면, 모든 사물들은 단지 원인과 결과로 얽혀 서로 의존하는 관계에 있어서 그 스스로의 자아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무아(無我)라고 하며, 자아(自我)가 없는 무아이기 때문에 그것을 공(空)이라고 한다. 이 말은 곧 자성(自性)은 없다는 뜻이다. 실체를 자성이라고 하는데, 실체가 없다는 말을 무자성이라 한다. 그런데 고정불변한 실체로서의 자아(自我)는 없지만 변화하는 과정으로서의 ‘행위하는 자아’는 있다. 그 행위가 쌓여 인격이 되고, 업이 된다.
그러나 연기가 곧 무자성(無自性)이고, 무자성이 바로 공이다. 공사상은 인간의 언어논리에 의한 판별의 진실성을 부정하는 사상이다.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 된다. 이와 같은 공, 공성을 주축으로 하는 공사상은 초기 대승경전인 일련의 <반야경(般若經)>과 용수의〈중론(中論)〉등에서 명확하게 되고, 그 이후 대승불교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공사상은 대승불교의 기본사상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그것은 전체적으로 봐서 존재론적이고 인식론적인 양상을 드러내면서, 사실은 중생과 보살이 왜, 무엇을 위해, 어떻게 해서 공(空)이라고 깨닫는가라는 수행론을 항상 그 바탕에 깔고 있다.이상과 같은 공 또는 연기가 대승불교[중관학파]의 핵심사상이다.
공이란 불변하는 고유의 성질을 가진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후 바라본 세계는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는 세계였다. 혼자 존재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부파불교의 학자들은 이 공(空)에 대해 끊임없이 토론했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법칙으로 규명하려고 했다. 용수는 바로 이것을 비판한 것이다. 용수의 논리는 간단히 말해 “너희들이 존재한다고 믿는 공(空)이라는 개념의 속성도 사실은 공(空)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공의 개념을 다시 팔불(八不)로 설명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공을 여덟 가지로 설명한 것이다. “불생(不生), 불멸(不滅), 불상(不常), 불단(不斷), 불일(不一), 불이(不異), 불래(不來), 불거(不去) - 생겨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으며, 영원하지도 않고 단멸하지 않으며, 같지(하나)도 않고 다르(둘)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
* 이제(二諦) - 속제(俗諦)와 진제(眞諦)
한마디로 부파불교의 학자들에게 ‘공(空)의 속성도 공(空)’이라고 설파했다. 왜냐하면 공이란 실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공이라는 실체 그건 또 다른 실체가 돼버리기 때문이다. 아마 부파불교 학자들은 이를 납득하지 못하고 용수를 맹비난하지만 용수는 같은 논리로 모두를 다 제압했고, 이어서 용수가 설명한 것이 이제설(二諦說)이다. 이제(二諦)란 세상 모든 존재를 두개의 존재 형태로 설명한 것인데, 속제(俗諦)는 모든 존재가 실상 그대로 있다는 것을 명확히 인정하는 것이다. 제 앞에 컴퓨터가 있고, 당신 앞에 찻잔이 있고, 산에 나무가 있다는 건 사실이다. 존재하는 건 명확히 실상 그대로 존재한다. 반면 진제(眞諦)란 그 존재하는 사물들이 사실은 모두 불변하는 실체를 지닌 존재가 아닌 어디까지나 연기성으로 이루어진 일시적인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를 「무자성 → 공 → 연기」라고 한다.
* 무자성(無自性)에 대한 비판, 자성 ‧ 불성의 긍정
이상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대승불교 중관학파는 자성을 부정했지만 대승불교 유식학파에서는 불성(佛性)과 자성(自性)을 인정했다. 유식불교는 아뢰야식에 공으로서 깨끗한 부분이 존재하며, 생명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말한다. 공하지만 그 공한 가운데 묘하게 움직이는 불성(佛性)의 존재를 긍정함으로써 불성이 곧 자성의 입장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공한 가운데 묘하게 움직이는 그것이 진공묘유(眞空妙有)이고, 공의 움직임, 그것이 활공(活空)이고,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 했다. 따라서 유식불교에서는 자성(自性)을 인정한다. 이점이 중관불교와의 차이점이다. 중관불교에서는 「무자성(無自性)-공(空)」이라 한 데에 비해 유식불교에서는 「자성(自性)-공(空)」의 입장임을 천명했다.
4세기 무렵 세친(世親, 바수반두/Vasubandhu)이 정립한 유식불교에서는 중관파의 입장을 방편적인 관점이라 봤다. 「무자성 - 공」을 주장한 중관학파에 비해 유식학파에서는 「자성(自性) - 공(空)」을 주장했다. 유식 3성 중에서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 계산해서 집착하는 마음)은 범부중생의 분별심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있어서 인식작용을 하는 6식, 제7 말나식, 제8 아뢰야식, 이렇게 8가지 식(識), 즉 정신작용은 모두 의타기성(依他起性 - 경계에 의해 일어나는 마음)의 존재이고, 이 의타기성의 근저에는 원성실성(圓成實性 - 본성은 변화하지 않고 영원한 진리의 체성을 구족하고 있다)의 존재인 근본 마음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 근본 마음자리 성품을 자성(自性) 혹은 불성(佛性)이라고 한다. 생각이나 인식작용(정신작용)은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끝없이 반복하지만, 자성은 한 번도 생기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인식작용(정신작용)이 일어났다고 해서 늘어나거나, 인식작용(정신작용)이 사라졌다고 해서 줄어들지 않는다. 불생불멸(不生不滅) 부증불감(不曾不減)이다. 이 자성은 어떤 모습이나 형태도 없으며 무엇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다. 그래서 이것을 공(空)이라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반야심경>의 공성(空性)은 유식불교의 공사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즉,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不垢不淨), 부증불감(不曾不減)”이라 하기 때문이다. 자성(自性)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 ‘sva-bhava’는 ‘자신(sva)에게 고유한 성질(bhava)’이란 뜻인데, 다른 현상과 구분되는 고유한 성질을 말한다. 즉, 스스로의 성품이다. 따라서 자성이란 어원 그대로 ‘자체의 고유한 존재’로서, 모든 존재가 각자 지니고 있는 변하지 않는 존재성을 이르는 말로서 다른 것과 혼동되지 않으며, 변하지도 않는 만유의 독자적 본질을 의미한다. 쉽게 말하면, 우리 본성(本性)이 곧 자성이다. 그래서 유식불교에서는 자성이란 ‘본래 지닌 마음’이라고 해서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을 지칭한다.
초기불교에서 부처란 고타마 붓다(석가모니불)만을 지칭한 것인데, <여래장경(如來藏經)>에서는 최초로 ‘일체중생은 여래장을 지녔다(一切衆生如來藏).’라고 주장했고,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사자후보살품’에서는 이 교설을 이어받아 ‘일체중생은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一切衆生悉有佛性)’라고 언명해 불성사상을 명백히 했다.
그리고 자성(自性)은 정신의 근원이므로 여기서 온갖 인식작용(정신작용)이 일어난다. 거울에 온갖 그림자가 비치는 것에 비유하자면, 여러 가지 온갖 그림자는 인식작용(정신작용)이고, 거울은 그림자를 비추면서 그림자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바탕이 된다. 생각이나 인식작용을 정신이라 하고, 이 정신의 바탕자리가 바로 자성이고 불성이라는 것이다.따라서 유식학파에서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자기’라는 고집된 견해를 내기 때문에 중관학파에서 방편으로 ‘무자성(無自性)’이라 설했다고 봤다. 그러므로 중관학파에서 말하는 무자성의 논리는 궁극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방편적 가르침인 속제(俗諦)라는 것이다. 실제로는 유식의 삼성은 존재한다고 본다. 다만 어리석은 사람들이 집착으로 말미암아서 현상을 보고는 세계라고 애착을 일으키기 때문에 ‘무자성(無自性)’이라 설했을 뿐이라고 봤다.
* 불성론(佛性論)에 대한 비판
불성(佛性)이라고 하는 말은 유식불교를 계승한 중국불교(특히 선종)의 핵심적인 논거인데, 이 불성이라고 하는 말은 여래장(如來藏)이라고 하는 말과 같은 뜻이다. 여래장이란 모든 중생의 번뇌 안에 은밀히 감추어져 있는 자성청정(自性淸淨)한 여래법신(如來法身), 즉 중생 안에 감추어진 여래의 인(因)을 가리킨다. 모든 중생은 여래의 씨앗, 즉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가 여래장이나 불성, 이런 말을 주로 중국불교에서 쓰고, 선종의 논거가 되는 것인데, 불성이라는 용어는 특히 대승경전인 <열반경>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엄격히 말해서 불성은 불교사상이라 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불성이라고 하는 것은 자성과 동일한 개념이며, 자성은 자아를 말하는데, 그 자아는 아트만(atman)과 동일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불성사상의 논거가 되는 <대승열반경>에서도 “불성은 항상한다, 불성은 자아(自我)다”라고 천명하고 있다. 불성을 자아라고 하면 불성은 아트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불교사상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모든 사물의 자성(自性)은, 그 사물을 연기적으로 형성시킨 조건[緣]들 속에는 없다. 자성이 없으므로 그 외에 다른 성품 - 불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연에 의해서 자성이 생기한다는 주장은 불합리하다. 만약 자성이 인연으로부터 생기하는 것이라면 만들어진 것[所作]이 된다. 어떻게 자성이 만들어진 것일 수 있겠는가. 자성은 지어진 것이 아니고[無作]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다른 것에 의존해 생기한다는 것과 연기한다는 것은 같은 의미이다. 연기이기 때문에 독립자존의 자성이 부정된다. 자성이란 지어진 것이 아닌 것[非所作]이며,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 다른 것은 하나의 사물을 성립시키는 다양한 인과 연을 가리킨다. 모든 사물은 자기가 아닌 다른 것에 의존해 성립한다. 즉, ‘나’는 ‘나’ 아닌 것들[오온(五蘊)과 사대(四大)]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자성이 없다. 따라서 자성 - 불성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중국불교를 계승한 한국불교를 지배하고 있는 근본적인 개념 역시 불성이다. 명심견성(明心見性)도 이 불성이라는 데서 나오고, '본래 부처'라는 것도 여기서 나오고, 성불(成佛)이라고 하는 개념도 다 여기서 나오는데, 불성이라고 하는 용어 자체가 비불교사상으로 아트만 사상이라면, 불교의 기본사상인 무아사상과 양립할 수 없다. 「무아 - 무자성」인데 어떻게 불성이라는 것이 언제나 청정하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불성상청정(佛性常淸淨)이라는 것도 불성이 아트만 사상이므로 가능하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한국불교를 지배하는 사상이 불성사상인데, 불성사상 자체가 불교사상이 아닌 반불교 사상이라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래서 한국불교의 많은 모순점은 여기에서 나온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불성(佛性)과 자성(自性)의 유무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래서 1998년 전남 장성의 고불총림(古佛叢林) 백양사(百羊寺)에서 무차법회(無遮法會)가 열려 “불성(佛性)의 실체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라는 불성실체론을 집중적으로 다뤄 관심을 모았다. 그리고 2012년 금강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와 중국 런민(人民)대학 불교와 종교학이론연구소, 일본 도요(東洋)대학 동양학연구소 등이 공동주최하는 “동아시아에서 불성. 여래장사상의 수용과 변용” 세미나가 열려 불성(佛性). 여래장(如來藏)사상에 대한 토론이 행해졌다. 그러나 불성사상에 대한 결론이 아직 나지 않은 상태에 있는 것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