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탈과 윤회라는 양면을 단일한 원리로써 이해하고자 할 때, 인도의 철학, 특히 불교의 무아설과 윤회설은 불합리에 봉착한 것처럼 인지되기 쉽다. 인도의 고대 사상가들도 이 난점을 감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동일한 원리를 추상화와 구체화의 양면으로 이해하는 데서 그 난점의 해소를 기도하였을 것으로 이해된다. 그 동일한 원리란 해탈과 윤회의 당사자인 '나 자신'이며,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나의 육신을 형성하고 지배하는 정신이다. 이 정신을 추상화하면 그것은 세계 운행의 이치가 되는 보편적 원리로서 표현되며, 그 정신을 구체화하면 그것은 나의 활동을 지배하는 개체적 원리로서 표현된다.
아트만 즉 자아 또는 영혼이라는 개념은 동일 원리의 추상화와 구체화 중 후자에 속하며, 이에 대한 해명은 有我論을 형성한다. 불교의 무아설은 전자의 입장에서 후자를 해명한다. 그리고 윤회설은 그 양자를 포괄한다.
정신의 구체화는 곧 윤회를 성립시키는 주체를 제시하는 과정이다. 인도 철학 일반에서 제시하는 다양한 이름의 주체 개념들은 구체적 원리일망정 궁극의 실재는 아니다. 그것은 궁극적 실재의 可視化이며, 그 실재와 연결되는 매체일 뿐이다. 그 실재는 추상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에 그러한 가시화 또는 매체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매체의 존재는 무아를 주장하는 불교측에서도 부정되지 않는다.
불교에서 영혼의 존재를 인정한 듯한 표현이나 개념, 예를 들어 非我, 푸드갈라(人我), 中陰身, 알라야식, 여래장 등도 그러한 입장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그 보편성과 진리성을 확대하면 할수록 더욱 추상화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궁극적 실재는 탐구자들에게 서로 다르게 표현되거나 命名될 수 있다. 혹은 그 표현이나 명칭이 아예 거부될 수도 있다. 한정하면 할수록 파기될 수밖에 없는 理想 또는 진리가 존재함은 어느 탐구자에게든 결코 부정되지 않는다.
인도 철학의 과제로서, 有我를 전제하는 윤회설과 그러한 전제를 거부하는 무아설의 상충을 해소하는 길도 위와 같은 관점에서 찾을 수 있다. 아울러 여기서 양자의 同異를 반목 없이 인정할 수 있다. 여기서는 아트만의 존재 또는 인정 여부가 윤회설의 성립 여부를 판가름하는 결정적인 기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불교에서는 영혼과 같은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윤회를 인정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기존의 관점에서 벗어나 이해해야 한다. 이런 윤회설을 무아설과의 양립 불가라고 논란하기보다는 불교의 윤회설로 그 특수성을 인정해야 한다. 불교에서는 무아설과 윤회설이 '모순인 채로의 공존하는 교설'이 아니라, '병합이 전제되어 공존하는 교설'이라는 사실에서 불교 윤회설의 특수성이 인정된다. 緣起的인 세계의 생성て변화 과정은 어떤 基體로서의 자아(我)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설명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윤회는 자아가 없더라도 가능하다.
그러나 현실의 범부 의식에서는 자아를 상정함으로써 심리적 집착에 의해 고통의 세계를 연출하므로, 자아는 부정되고 윤회는 극복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결국 불교에서의 무아설과 윤회설은 그 취의가 동일하며, 이런 의미에서도 무아설과 윤회설은 양립할 뿐만 아니라, 그 궁극에서는 우파니샤드 이래 인도 철학 일반의 해탈관과도 일치한다.
무아설과 윤회설이 정작 지시하려 하는 것은 인생의 궁극적 가치와 이것의 추구에 부합하는 바른 삶이다. 윤회설과 필연적으로 결부되는 業說은 바른 삶의 방도로서 업 즉 행위의 진상을 밝혀 나간다. 이 점에서 윤회설의 의의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나와 세계의 진상에 대한 탐구는 철학의 주제를 형성한다. 有我論 또는 無我論은 '나'에 대한 탐구 과정이며, 윤회설은 나를 포함하는 세계에 대한 탐구 과정이다. 업설은 이 과정에서 바람직한 가치와 행동 방식을 제시한다. 불교는 인도 일반의 어느 思潮보다도 치밀하게 행위의 심리 기제 및 양태를 분석 고찰한 業說을 정립함으로써 종교로서의 독자적인 가치를 발휘해 왔다.
윤회설은 깨달음의 세계를 경험하지 못한 범부의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바로 이 차이로 인해 목표와 취지가 동일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적어도 불교내에서는 윤회설과 무아설의 상충이라는 문제도 여기서 비롯된다고 말할 수 있다. 범부가 이해하고 구사하는 방식이나 언어로써 무아의 진실을 전달하는 것이 윤회설이다. 그러므로 무아설과 윤회설은 일맥 상통하며 양립할 수 있다.
제1장: 非我와 無我
불교의 무아설이 '非我'라는 표현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점에서, 자아를 전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라는 시각을 원전의 문맥에 따라 재검토한다. 이에 의하면 凡夫가 보는 현상 세계의 해명에 초점을 둘 때는 我의 존재가 상정되어 있지만, 그런 세계의 극복에 초점을 둘 때는 我를 부정하는 無我를 설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我의 존재를 상정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는 非我的 표현은 '我의 존재가 가짜로 구상되어 있는 윤회적 생존'임을 시사한다. 이 사실을 바른 지혜로 여실히 관찰할 때, '모든 것에는 我가 없음'(諸法無我)를 깨닫게 되고 더 이상 윤회에 빠지지 않는다.
따라서 非我的 표현은 無我를 설하는 일환이며, 非我와 無我는 사상적으로 구별되어야 할 대립적 사고가 아니다. 無我라는 부정적인 언급은 긍정적인 말로는 아무래도 충분히 묘사하기 어려운 열반의 초세간적이고 형언할 수 없는 성격을 강조한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한편 진실한 실체라거나 타당한 '我'를 생각할 여지를 남기는 非我 표현의 이면에서도 我는 어떤 식으로든 부정될 수밖에 없다. 非我는 별개의 실체를 전혀 의미하지 않으며, 별개의 실체는 어떤 의미에서든 불교도가 부정하기 때문이다.
결국 非我와 無我는 서로 차별하여 구분할 수 있는 성질의 관념이 아니다. "실천 수행 또는 교훈적 측면에서는 非我이고 철학적 측면에서는 無我이다."라는 식의 차별도 반드시 타당하지는 않다. 전자의 측면도 궁극적으로는 후자의 경지를 지향하는 데 불교적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我'를 상정하고 있는 듯한 非我的 표현도 결국은 무아설의 범주 안에 있으며, 그것은 별개의 非我說으로서가 아니라 무아설의 일환으로서 구사된 것이다.
제2장: 非我의 의미
제1장의 결론을 무아상경 등의 經文에 의거하여 입증한다. 非我 표현은 무아로 귀결되지만, 그것이 단순히 설법 기교상의 선호라고는 간주되지 않는다. 그것은 석가모니 자신이 체험한 자각의 내용과 불가피한 관계에 있다. 다시 말하면 非我的 표현은 형이상적인 문제에 대해 단정적인 대답을 기피했던 無記와 상통하며, 그 無記의 이면에 있는 자각의 내용과 상응한다. 그가 자각한 내용의 핵심이 緣起와 中道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緣起와 非我 표현 사이에 無記의 입장이 개입되어 있다. 緣起의 이법에 입각한 당연한 귀결로서 無記의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그 이법에 무지한 범부를 향해 입을 열 때, 非我的 표현은 無記에 가장 근접한다. 그래서 무기의 대표적인 예인 붓다와 밧차곳타와의 대화는 '자아는 없다'는 결론을 유도한다.
따라서 非我的 표현의 일차적인 귀결은 무아이지만, 그 궁극적인 귀결은 緣起와 中道라는 자각의 내용에 이르며, 이 자각의 체험에 도달하면 무아 관념 자체도 부정하는 데까지 이를 것이다. 이 과정의 전모가 非我的 표현에 내재된 무아설의 취지라고 이해된다.
제3장: 무아와 윤회의 양립
현상 세계의 진실을 자각하지 못한 범부의 인식에서 我는 다양하게 긍정된다. 이 我는 경험적인 我, 해탈 이전의 我, 윤회 상태의 我이다. 그러나 진실을 자각하여 체험한 성자의 인식에서는 그런 我가 실재하지 않는 것으로 부정된다. 그렇다고 하여 범부에게 我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경험적 我'로서 있다는 사실까지 부정되지는 않는다. 다시말해서 성자에게는 그런 我가 構想(假想)된 我, 즉 我想인 것으로 그 존재가 긍정된다. 이 我想은 무상하고 변화하는 것이며, 또 소유자의 다른 의식과 행위를 결정한다. 이런 과정이 윤회적 삶의 과정이므로 我想이야말로 윤회의 주체라고 말할 수 있다.
불교의 시각에서 윤회란 곧 我想의 相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실체로서 존재하는 我가 아니라, 범부의 그릇된 인식으로서 존재하는 我일 뿐이다. 왜냐하면 我想은 무상인 5온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와 같은 사실에 대한 인식이 성자의 자각일 것이며, 소위 '진실한 我' 또는 다른 긍정적인 표현으로 불릴 수 있는 我(나)일 것이다. 또 이러한 인식의 과정에 있는 '나'를 '수도적 주체로서의 我'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무아에 대한 인식이다. 이 인식 과정을 형이상학적으로가 아니라 체험적으로 완결한 이가 바로 '진정한 我'로서의 붓다 자신이다.
따라서 윤회설과 무아설은 상충하는 교설이 아니라, 전자에서는 '凡夫의 나'에 의한 轉生을 설명하며, 후자에서는 수행자가 지향하는 '覺者의 나'를 제시한다. 결국 무아설이든 윤회설이든 그 핵심은 '나'의 문제로 집약된다. 그런데 바로 그 '나'(我)가 범부의 의식에서는 항상 오해된 채 있음으로 인해 정작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착각 또는 집착하여 고통의 쳇바퀴를 맴돈다. 불교에서 윤회의 주체와 관련된 여러 가지 代案과 異見이 등장한 것도 그러한 범부의 의식을 고려한 데서 기인한 것이라고 이해된다.
제4장: 有我 윤회와 無我 윤회의 상통
윤회설에서 상정하는 윤회의 주체에 대해서는 불교측과 反불교측 사이에도 상통하는 인식이 발견된다. 이 점에서 불변의 주체 인정 여부가 윤회설의 성립을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불교측을 대표하는 예는 구사론의 中有 개념이고, 반불교측을 대표하는 예는 상키야 학파의 微細身 개념이다.
구사론에서는 '中有의 상속' 또는 '蘊들(5온)의 상속'으로써 윤회가 성립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中有의 상속'이란 中有라는 개념이 윤회의 주체를 연속시키는 것으로서 상정되었음을 의미하며, 中有가 연속시키는 윤회의 주체가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것은 '업력 또는 잠세력의 상태로 있는 5온'이다.
결국 '中有의 상속에 의한 윤회'라는 관념에 압축되어 있는 의미는 업력 또는 잠세력에 의한 윤회이다. 상키야 철학에서의 미세신은 잠세력에 의해 윤회한다. 中有의 상속을 언급하는 구사론의 문맥에서는 "5온 자체는 刹那滅이어서 다른 곳으로 갈 수는 없지만, '온갖 번뇌와 業에 의해 오염된 蘊'은 中有라는 상속을 거쳐 모태로 간다."라는 취의를 읽을 수 있다.
이와 대응하여 상키야의 미세신은 그 자체로서는 윤회할 수 없지만, 업에 의해 오염됨으로써 그 잠세력에 의해 윤회한다. 상키야의 형이상학에 의하면 이러한 미세신이 아트만은 아니지만, 윤회의 주체에 관한 통념에 따라 소위 個我로서 상정된 아트만으로 간주될 수는 있다. 윤회의 주체가 되는 아트만으로 상정되는 미세신은 구사론이 '오로지 蘊과 같은 것'이라고 비유적으로 인정하는 그 비유의 대표적인 實例가 된다.
불교는 아트만과 같은 불변의 실체를 부정하면서도 윤회를 인정하는 소위 '무아 윤회'의 시각을 견지한다. 윤회의 주체에 관한 통념으로는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이 시각을 구사론에서는 '中有의 상속'이라는 개념으로써 해명을 시도한다.
그러나 이 시도 역시 불교 안팎으로부터 오해와 반박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각에는 긍정적으로 수긍할 만한 사고가 내재되어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 특히 '有我 윤회'의 시각에서 '미세신에 의한 윤회'를 주장하는 상키야 철학의 사고를 면밀히 검토해 볼 때, 이는 中有의 상속에 의한 윤회를 입증하는 하나의 실례가 될 만하다는 점이 인정된다. 윤회에 관한 한, 反불교적 시각에서 불교적 시각을 드러낸다는 사실은 그만큼 '무아 윤회'의 타당성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한편 상키야 철학에서의 푸루샤 즉 아트만은 결코 윤회에 관여하지 않는 '순수 정신'일 뿐이다. 이러한 순수 정신으로서의 아트만은 불교에서 지향하는 '윤회하지 않는 나', 즉 '覺者의 我'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윤회설과 양립하는 무아설로써 제시하는 理想鄕과 동일한 차원의 개념이다.
제5장: 윤회의 주체 개념
인도 철학에서 아트만은 보편적인 주체 개념이다. 그리고 그 사고의 추이를 더듬어 보면 주체 개념은 아트만으로부터 프라나로 더욱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프라나보다 더욱 구체적인 주체는 인간의 신체에서 모색된다. 여기서 신체와 분리될 수 없는 주체이면서 생명 유지의 근간이 되는 원리로서 등장한 개념이 '미세한 신체' 즉 微細身이다.
상키야 철학에 의하면 미세신은 특히 윤회와 관련하여 이루어진 주체 탐구의 인식을 망라한 개념이다. 이 미세신 개념의 전개를 고찰함으로써 주체 개념이 구체화하는 다양한 양상과 추이를 발견할 수 있는데, 불교에서는 간다르바 개념을 중심으로 그것과 유사한 인식을 드러낸다. 결국 이 양상과 추이는 신비의 보자기로 감싸 두었던 윤회의 주체를 드러내어 실감으로 인식시키려는 탐구의 도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도정의 배후에는 언제나 해탈이 대기하고 있다.
상키야 학파내에서 전변 원리들의 순서가 다양한 것은 윤회 주체에 대한 다양한 인식과 그 추이를 반영한다. 프라나를 중시하는 우파니샤드 이래의 전통적 인식은 고전 상키야에 이르러 비정신적 요소인 5唯를 보다 중시함으로써 윤회 주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도모했다. 특히 18종의 요소로 성립되는 미세신 개념은 이 새로운 인식의 정합이며, 이는 불교에서 무아와 윤회의 상충이라는 문제를 中有를 제시함으로써 교리적으로 정합하려 했던 것과 상응하는 과정이다. 불교측에서 간다르바는 中有 개념으로의 진전이 전제된 전통적 사고의 정합이다.
윤회의 주체에 대한 두 계통의 사조는 서로 다른 사고 성향을 드러낸다. 프라나를 중시하는 입장에는 이성적 사유에 의한 이론적 이해보다는 권위로서 형성된 통념이나 인습을 반영하는 감성적 사고의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이에 대해 5唯를 중시하는 입장은 실재하는 세계의 변화 과정을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사유로써 이해하려는 이성적 사고 성향을 드러낸다. 간다르바가 아닌 中有를 제시한 불교측의 입장도 이 후자에 속한다. 그리고 윤회의 주체 개념으로서의 中有는 대승 불교의 唯識學에 이르러 알라야식으로 대체되며, 이 알라야식은 불교내에서 모색된 주체 개념의 최종적 整合으로서의 의의를 지닌다.
제6장: 알라야식과 무아
세계의 모든 대상이 인식(識) 활동과 변화일 뿐임을 주장하는 유식설은 이 주장의 근거로서 알라야식을 내세운다. 이 주장은 소위 '識의 변화'(識轉變)를 현상 세계에 적용하여 緣起의 실상을 입증하는 實例로서 의의를 지닌다.
여기서 심층 의식으로 상정된 알라야식은 윤회를 설명하는 주체적 원리로서 제시되었던 기존의 개념들을 포괄한다. 즉 윤회의 주체에 상당하는 개념으로서 간다르바, 中有, 識 등의 기능이 모두 알라야식의 일면을 형성한다. 이 알라야식에 의한 윤회설은 무아 윤회를 해명하는 기존의 '상속 이론'을 계승하면서 진전된 무아설의 일환이다.
다만 알라야식의 기능을 설명하는 데서 구사되는 다양한 異名과 비유적 표현들이 그 적합성으로 인해 오히려 알라야식에 대한 실체적 관념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사례의 대표적인 예가 종자라는 개념이며, 이것은 異熟, 習氣, 熏習 등의 개념과 함께 사용됨으로써 불교내의 有我的 사고를 이끌었다.
그러나 알라야식의 異名들은 알라야식과의 同義 관계에서 구사되며, 모두가 업의 잠세력인 習氣를 지칭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알라야식은 곧 습기일 뿐이며, 바로 이 점에서 그것은 무아적 존재이다. 알라야식의 이 같은 본의가 간과되어 그것이 有我的 개념으로 인식되어 왔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사실을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알라야식 자체의 양면적 기능과 이에 대한 양면적 이해의 가능성은 그대로 무아와 윤회의 양립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알라야식을 내세우는 유식설은 무아설 해석의 전통에서 중도적 위치에 있다.
이 점에서 알라야식은 불교 사상사에서 무아설과 윤회설의 상충을 해소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로서 그 의의와 가치가 정립되어야 한다. 알라야식은 상반하는 기능이나 작용을 하나로서 발휘하는 원동력이다. 그러므로 알라야식이 윤회의 주체라고 말하는 것은, 알라야식이 해탈의 주체라고 말하는 것과 동일하다.
제7장: 業說의 양면성과 의의
業說은 철학성과 윤리성, 수동성과 능동성, 숙명성과 의지성, 개인성과 사회성 등의 양면에서 인간의 행위와 의식을 이끌 수 있다. 그리고 이 양면성들은 업설을 수용하는 입장에 따라 서로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일반 업설의 문제는 업설을 수용하는 사람의 행위와 의식이 위의 양면성 중에서 철학성·수동성·숙명성·개인성·이기성 등으로 나타나기 쉽다는 사실이다. 이는 업설 일반의 전제(특히 영혼의 존재)에서 기인하는 것이지만, 실제의 삶에서는 업설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인식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무아를 표방하는 불교의 업설은 인식의 전환을 통해 양면성 중의 바람직한 방향으로 자기를 개조하도록 인도한다. 행위론으로서의 불교 업설에 대한 긍정적인 가치 평가는 전환된 인식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업설이 그 효용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복을 개인적으로 한정하지 말고, 사회적 객관적 복지로 확대"하는 자세가 전제되어야 한다. 불교의 업설은 이런 자세를 지향하는 일면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도덕률로서의 의의를 지닌다. 다만 불교에서의 업설도 '세간의 道'로서보다는 '출세간의 道'를 지향하는 입장에서 그 실천적 윤리성을 간과해 온 면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윤회와 업의 사상이 인간의 삶에서 필요 가치로서 요청된 것이라는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 특히 업설은 무엇보다도 인간 사회에서 바람직한 윤리적 인과율로서 필요한 가치를 지닌다는 점에서, 업설은 이 가치를 발휘하는 방향으로 재고되고 강조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업설은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의지적이고 능동적인 행동의 원리로서의 실천 방향을 권장하고 또 새로이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제8장: 윤회설의 의의
불교 본래의 입장에서는 사후 존재의 유무가 일차적인 관심사가 아니다. 이와 연관되는 모든 문제는 현존하는 인간이 세속적 욕구를 극복함으로써 저절로 해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에서 윤회에 대해 많은 설명을 할애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통속의 관념을 쉽게 떨쳐 버리지 못하고 스스로 고통을 야기하면서 살아간다는 사실과 이로부터의 해방은 언제나 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자기의 행위, 즉 업의 전환을 통해 자기 개조가 가능함을 세속의 통념으로써 자각하게 하려는 데 불교 윤회설의 의의가 있다.
자기 동일성을 답보해 주는 자아나 영혼과 같은 본체가 없이 자신의 업에 의해서만 윤회가 가능하다는 無我 윤회는 '업의 자기 복제'라고 말할 수 있다. 과학 용어를 구사하여 무아 윤회의 의미를 묘사해 보면, 아트만이라는 생식 세포에 의해서만 윤회라는 복제가 가능하다는 고정 관념, 즉 有我 윤회를 깨뜨리고, 업이라는 체세포 DNA에 의해 윤회라는 복제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무아 윤회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체세포를 이용한 동물 복제의 성공은, 과학이 불교의 무아 윤회를 실증했다는 의미를 지닌다. 양자의 차이는 인위적 조작의 유무에 있다. 무아 윤회를 업의 자기 복제라고 한다면, 체세포에 의한 복제는 '업의 依他 복제'라고 말할 수 있다. 후자는 업이라는 체세포 DNA가 타력에 의해 복제됨을 의미한다.
윤회는 상속 전변 차별, 즉 '상속의 특수한 변화'라는 과정으로서 이루어진다. 인위적 조작에 의한 복제는 이 과정을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인간을 복제할 경우에 이루어지는 '인위적 조작'의 불교적 의미는, 업의 성숙 과정을 중간에서 차단하여 부자연스럽고 부분적인 연결 즉 상속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것은 업의 자연스런 진행을 인위적으로 방해함으로써 윤회를 극복할 가능성의 감소화를 초래한다. 이 점에서 무아 윤회를 실증하는 생명의 복제는 윤회설의 논리를 거역하는 것이다.
불교의 시각에서 볼 때, 생명의 복제는 벗어나야 할 윤회의 양산이다. 만약 인간 복제가 이면에서 추구하는 것이 어떠한 식으로든 상속되는 삶이라면, 그러한 상속은 이미 윤회하는 이 세계에 이루어져 있다. 이 윤회 세계에 대한 가치 판단, 선택과 회피는 원형 인간의 자유 의지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