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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신종교 출현의 역사적 배경과 전개 양상③전통사회의 구조적 해체

신종교 출현의 역사적 배경과 전개 양상③전통사회의 구조적 해체

<연재순서>

①기성종교, 신종교, 사교는 어떻게 다른가

②한국 신종교의 중심사상

③전통사회의 구조적 해체와 신종교운동의 전개

④신종교의 변용

 

민중종교사상의 전개와 외래종교문화의 충격

 

조선후기에 들어오면서 양반 관료 중심의 봉건적 지배구조가 해체되어 사회구조가 변화하게 되는데 신분질서의 이완, 자본주의의 맹아, 사회경제적 모순의 확대가 심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신분질서의 상향이동은 두드러진 현상으로 직접 생산에 종사하는 다수의 하위신분층과 소수의 양반신분층간의 균형이 요구되는 조선왕조의 지배구조는 구조적으로 불안정해지게 됐다.

 

붕당정치 및 벌열화(閥閱化)로 인한 신흥양반형의 급격한 증가와 족보의 유행이나 직첩(職帖)의 남발로 인한 하위 신분층의 상향 이동은 기존 양반층의 다수를 지배구조 밖으로 밀어냄으로써 자연히 잠재적인 반사회적 세력이 만들어져 대항이데올로기를 제공하는 역할을 가능케 했다. 이들이 기존체제에 갖는 불만은 민중의 잠재의식 속에 내재된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와 서로 투합하여 민중종교운동의 사상적 원천을 형성하게 됐다. 더구나 조선후기의 농업기술 발달에 따른 생산성 증대 및 유통경제의 활발한 전개로 인해 자본주의적 경제의 문을 열면서 대지주에 의한 광작(廣作)이나 겸병(兼倂)이 광범위하게 행해짐으로써 양반층은 물론 직접 생산자인 농민들도 임금노동자로 전락하게 된다.

 

이런 과정 속에서 필연적으로 다수의 유민이 발생하게 마련이며 이들은 쉽사리 사회적 부당집단화하게 되어 민란 발생 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또한 수취제도의 문란으로 인해 강제적 수탈이 행해지면서 유민화현상보다 더 심각한 현상으로 농민들의 직접적인 저항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인한 궁극적인 부담은 모두 직접 생산자인 농민에게 지워졌으므로 농민봉기의 일차적인 원인은 봉건체제의 무차별한 수탈에서 빚어지는 것이었다. 민란이나 농민봉기에 대한 관변 측의 기록을 보면, 항상 요언(妖言)·참설(讖說)이 횡행하고 혹세무민(惑世誣民)의 광분상태가 만연했다는 내용이 나타나는데, 이는 바로 민중종교사상에 대한 지배층의 일반적인 반응이다.

 

◆민중종교사상의 전개

 

조선시대 불교의 탄압이나 음사(淫祀)폐지를 주장하는 유교적 명분론은 구두선(口頭禪)에 그치고 말았고, 불교는 여전히 명맥을 잇고 민간신앙은 그대로 존속하게 되었다. 이러한 민중의 성향은 단순히 개인 수준의 현세구복적 기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 존재에 의존해 일상적 세계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이상세계(理想世界)의 실현을 촉구하는 민중적 결집을 낳게 했다. 이런 민중적 종교운동에는 주술적 사고와 더불어 유토피아의 대망(待望)사상 및 유교문화권의 저변을 흐르고 있던 운세사상(運世思想)이 복합돼 있었다.

 

운세사상이란 중국의 선진시대(先秦時代)부터 내려오는 음양오행(陰陽五行)과 참위설(讖緯說) 및 도교의 요소가 가미된 일종의 순환론이다. 보본반시(報本反始)의 원초적 황금시대로 복귀하고자 하는 바람은 본래 유교정신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잠재적 소망이었으며, 특히 음양오행설의 독특한 상생상극론(相生相剋論)은 이런 원시복귀 내지 새로운 시대의 개시가 우주의 섭리로써 내재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참위설은 왕조의 흥망성쇠가 인위적인 작용에 의해서라기보다는 우주의 섭리에 따른 오행의 운행에 의해 정해진다는 결정론적인 예언사상을 펴고 있다.

 

임진왜란 전후에 성립되었다고 여겨지는 『정감록(鄭鑑錄)』은 이러한 사상적 배경을 가진 참위서로서 점복과 파자(破字)풀이에 의거해 이(李)왕조의 멸망과 정(鄭)왕조의 개국을 예언하고 있다. 『정감록』에 나타나는 미래국토의 개시(開示)와 십승지지(十勝之地)의 사상은 민중적 심성 속에 자리잡고 있던 종말관이 시·공간적으로 투영되어 나타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십승지지가 대체로 차령(車嶺)·금강(錦江) 이남에 위치해 있는 점으로 보아 『정감록』의 성립을 전후하여 이른바 남조선신앙(南朝鮮信仰)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정조 때의 홍복영(洪福榮) 모반사건이 『정감록』과 연루돼있다는 것은 기록으로 밝혀져 있으며, 홍경래(洪景來)의 난 당시에도 남도(南島)라는 문구가 등장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 후기에 와서 『정감록』의 감결(鑑訣)이나 남조선신앙이 민간에 널리 퍼져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은 민간에 널리 유포되어 있던 종말론적 대망사상을 토대로 하여 몰락 양반과 같은 주변 지식인들이 체계화한 관념형태로, 미륵신앙(彌勒信仰)과 더불어 민중종교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미륵신앙 역시 당래세불(當來世佛)의 현현과 이상향의 실현을 예언하고 있어서 종말론적 비전을 뚜렷이 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후천개벽설(後天開闢說)은 민중의 이상향에 대한 염원을 보다 세련된 형이상학적 추론에 의해 체계화한 관념형태로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崔濟愚)나 남학(南學)의 창시자인 이운규(李雲圭)·김항(金恒), 증산교의 창시자인 강일순(姜一淳)의 세계관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현재에도 신종교운동의 핵심이 되는 관념형태가 후천개벽사상임은 그 체계성과 세련됨에서 오는 설득력 때문이다.

 

◆외래종교문화의 충격

 

유교국가의 제도적 결함도 있지만 비교적 조직종교로서의 요건을 갖춘 불교 역시 조선시대에는 교단적 활동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물론 교단적 성격을 강화하기 위해 순조 때 이판승(理判僧)과 사판승(事判僧)으로 분리시키지만, 조선시대의 불교가 선종(禪宗)에 대한 지향성이 강한데다 불교 자체의 성격이 수도(修道)집단적인 성향을 두드러지게 띠고 있으므로 현실적 영향력의 측면에선 취약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대다수 불교 신도의 실제적 관행은 불교 교리의 엄격한 통제하에 있었다기보다는 민간신앙과 상당 부분 결합되어 있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절대적 유일신의 강력한 통제아래 사제와 신도의 준별이 엄격하고 형식성이 두드러진 조직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가 수용되었다는 것은 전통적 종교문화에 커다란 충격을 주는 사건이었다. 유교적인 조상숭배나 민간의 동제(洞祭)는 자연적인 합치집단적(合致集團的)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공통체 생활의 장(場)과 종교집단이 분화되지 않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종교집단의 전통문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며 직업적인 사제가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예컨대 제례의 경우 의식을 집전하는 제주(祭主)는 가부장이며, 종교의례만을 전담하는 특수한 회중(會衆)을 요하지 않는다. 이에 비해 천주교의 교회는 전문적인 사제조직을 지니고 있으며 일상생활과는 준별되는 종교적 형식성을 보유하고 있고, 신도들의 신앙적 고백이 필수적이라는 점, 회중 역시 혈연이나 신분 차이를 넘어선 포괄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 종교와 판이하게 구별된다.

 

물론 불교도 전문 사제 및 사원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제도종교적인 성격을 부여할 수 있으나 수도 위주의 초세속적 경향이라든지 신도의 신앙관리라는 측면에서 볼 때 유일신론적인 천주교가 전통 종교에 끼친 충격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천주교의 이러한 영향력은 대항세력의 규합이라는 의미에서 교단적 조직종교의 태동을 보게 했다. 최제우가 『동경대전』이나 『용담유사』에서 밝히고 있듯이 동학은 서구문화, 특히 천주교의 전파에 큰 충격을 받고 그에 대한 대응책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동학교단의 성립

 

동학(東學)이 성립된 사회적 배경은 조선왕조의 봉건적 사회구조가 전반적으로 해체되는 과정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그런 구조적 변혁의 맥락속에서 자주 일어나는 민란(民亂)들, 특히 1862년(철종 13년)에 일어난 임술민란의 연장선상에서 동학의 발생이 이해되기도 한다.

이러한 관점은 봉건질서의 전면적 타파를 위한 민중에너지의 누적된 축적의 결과로 민란이 발생했으며, 민란의 여러 경과에 의해 동학종교운동이 확산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질곡적인 전통질서를 변혁시키고 근대사회로 변화하게 되는 원동력을 동학운동이 공급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런 관점과 대조적으로 종교운동 자체의 비합리성 내지 주술성과 카리스마적 권위구조로 인해 민중운동이 종교적 성격을 강하게 띨수록 전근대성의 탈피가 불가능해진다는 입장도 있다.

 

그래서 근대성의 개념규정 문제, 근대성에 내재된 다양한 차원의 문제, 그리고 종교 교단의 상대적 자율성의 문제 등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복잡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일단 그런 문제들에 대한 직접적 언급은 유보하면서도 동학이 기포(起包)조직을 통해 근대적 교단조직의 선단을 이룩했다는 데 방점이 찍힌다. 포와 접(接)에 의한 전교활동은 무엇보다 교리·의식 및 직업 집단으로서의 종교전문가 확보를 전제로 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2대 교주 최시형의 30여년에 걸친 은도(隱道)활동을 통해 동학의 조직적인 종교 교단으로서의 성격은 더욱 두드러진다.

 

최시형은 동학의 교단조직을 쉽사리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교주의 사후(死後) 위기에 봉착한 카리스마를 일상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광화문 복합 상소 이후 급진주의 노선의 남접(南接)측이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자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며, 그에 대한 탄압으로 교단조직은 와해상태에 이르게 된다.

 

남접측의 주요 근거는 농민수탈이 가장 심했던 호남지역으로서 혁명적 변혁의 의지가 팽배하여 근대사회에 대한 지향 가능성이 가장 높던 곳이었다. 그러나 외세의 개입 및 동학 자체의 전통주의적 한계 때문에 동학교단의 활동과 표리관계를 이루는 동학농민운동의 연속성은 차단되고 말았다.

 

◆동학 이후 신종교운동의 전개

 

1894년 갑오경장 이후 1910년까지는 한국 종교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획기적인 변혁기였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갑오경장 자체가 외세의 위협 아래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근대사회를 지향하는 제반 조치들이 실시된 점은 상당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종교 문제에서도 승려의 도성출입이 허용되었다든지 신·구기독교의 포교활동이 공식적으로 인정됐다는 것은 종교에 관한 기존의 국가통제가 전면적으로 해제됐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때부터 기독교를 비롯한 신종교들이 경쟁적으로 포교활동을 전개하게 됐다.

 

이 시기는 동학농민운동·청일전쟁·러일전쟁·을사조약·한일합방 등으로 이어지면서 정치·경제·문화의 제(諸)분야에서 일대 가치변혁의 움직임이 솟구치던 때로 농민층의 분해, 신분질서의 해체, 정치적 자주권의 상실로 인해 민중들은 좌표축을 잃게 되었다.

 

1905년부터 평양 일원에서 개신교 장로교회의 부흥회가 전대미문(前代未聞)의 군중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도 여기에 연유한다. 격심한 사회 변화와 가치 변동에 따른 새로운 의미의 추구, 사회 불안에서 오는 안심입명의 획득, 생활난과 병고를 타개하기 위한 주술적 동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대규모의 신종교 교단운동이 전개되는데, 천도교·대종교·증산교 등은 이러한 맥락을 가지고 창출된 종교들이다. 이 종교들은 우리나라 근대 신종교운동의 3대 기둥으로 볼 수 있으며, 이 세 기둥을 근간으로 일제시대의 숱한 종교단체들이 생성됐다.

 

⓵천도교

 

동학교문의 법통을 이은 대표적인 민족종교로 3대 교주 손병희(孫秉熙)가 1905년 이용구(李容九)·송병준(宋秉畯)의 일진회와 손을 끊고 창교한 종교이다. 천도교의 교세는 크게 발전하여 평안남북도와 함경남북도 일원에 많은 신도를 거느리게 되었고, 여러 교육기관과 청소년 계몽단체를 방계기관으로 삼게 되었다.

 

3·1운동 당시에는 주동적 역할을 담당하여 민족대표인 손병희를 필두로 오세창(吳世昌)·최린(崔麟)·권동진(權東鎭) 등의 간부가 대거 참여했다. 손병희는 3·1운동 이후 옥중생활을 하면서도 교단의 안정을 도모하였고, 특히 이돈화(李敦化)로 하여금 최제우의 사상을 ‘인내천(人乃天)’이라고 개념화하게 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하지만 1922년 그의 죽음과 함께 교주 승계 문제를 둘러싸고 신·구 두 파로 극한의 대립상태가 야기되었다. 일제말기에 재통합되기는 했으나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으로 교단이 거의 와해된 상황이었다.

 

⓶대종교

 

1909년 나철(羅喆)·정훈모(鄭勳謨) 등이 단군신화의 모티브를 근간으로 세운 종교이다. 1904년에 백두산의 백봉(白峰)·백전(白銓) 등이 ‘단군교포명서(檀君敎布明書)’를 발표하고 나철에게 이를 전수했다고 하지만 역사적 사실성은 희박하다.

 

▲ 대종교 천궁에 모신 4종사의 진영. 왼쪽부터 백포 서일, 홍암 나철, 무원 김교헌, 단애 윤세복.

 

1910년 나철이 ‘대종교(大倧敎)’라고 개칭하면서 원래 이름인 단군교의 명칭을 고수하려는 정훈모와 분립하였다. 그 후 나철은 교단의 포교활동 중심을 북간도지역으로 옮겨 항일무장투쟁 노선을 종교적 실천의 과업으로 삼았다. 그 결과 1915년 조선총독부는 국내활동을 불법화했고, 나철은 이듬해 황해도 구월산에서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자결하였다.

 

이러한 항일정신으로 1920년 청산리대첩과 같은 혁혁한 승리도 가져올 수 있었으나, 일제의 가혹한 보복을 받게 되어 교단은 궤멸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독립운동을 종교적 실천의 궁극 목표로 설정하고 민족해방을 위해 투쟁한 종교이면서도 국내 활동이 거의 없었으며, 북만주에서도 비밀포교의 특수한 종교조직 형태를 취했기 때문에 광복 후 교단 재건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⓷증산교

 

1901년 전라북도 금구(金溝) 모악산(母岳山)에서 강일순에 의해 창시됐다. “신화일심(神化一心) 인의상생(仁義相生) 거병해원(去病解怨) 후천선경(後天仙境)”이라는 교의를 내걸고 이 교의의 내용을 성취하기 위해선 ‘태을주(太乙呪)’ 또는 ‘여의주(如意呪)’를 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태을주’의 첫머리가 “훔치훔치(吽哆吽哆)”로 시작하는데서 훔치교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교세가 확장되어 가는 도중에 강일순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승통 문제에 혼선이 일어나게 되어 결국 여러 분파가 난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민중종교로서의 기반은 지니고 있었으므로 계속 발전해 오늘까지 여러 계열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신종교운동

 

3·1운동 이후 문화정치라는 미명아래 어느 정도 유화적인 정책이 펼쳐지면서 종교 문제에서도 민족주의적 색채를 드러내지 않는 한, 일제는 방관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대종교와 분립해서 단군교의 명칭을 그대로 고수한 정훈모가 친일적 인사 박영효(朴泳孝)를 업고 교단활동을 벌일 수 있었던 것도 여기에 연유한다.

 

그러나 당시 일제의 조직적 경제수탈로 대다수의 농민이 자작농에서 농업노동자로 전락했고, 대규모 유민이 생겨나 북만주지역으로 이주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피폐된 농촌지역에 신종교운동이 전면적으로 파급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됐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교세를 떨친 것이 증산교 계통의 보천교(普天敎)다.

 

강일순의 수제자였던 차경석(車景石)은 강일순의 사후 스스로 교단을 만들고 많은 신도들이 운집했으나 사회적 일탈행동과 더불어 관헌의 탄압을 받아 교세가 급격히 약화됐다. 그밖에 무극대도교(無極大道敎) 등 수십 종의 교단이 증산교 계통에서 파생되었다. 이는 강일순의 죽음으로 신도들이 사분오열되었으나 증산교의 신비적 분위기와 주술성으로 인해 끈질긴 생명력을 지니게 된 것에 연유한다.

 

동학은 천도교로 법통을 이었지만, 19세기말에 워낙 커다란 영향력을 지녔던 탓에 천도교에 흡수되지 않은 접주나 신도들이 많이 남게 되어 그들로부터 많은 교단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 중에도 상제교(上帝敎)는 동학교문의 고위 간부였으며, 최시형과 동도(同徒)이기도 한 김연국(金演局)이 계룡산 신도안(新都安)에서 창교한 것으로, 교주의 비중으로 보아 상당히 영향력 있는 교단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최제우의 문도였던 남정(南正)이 동학의 교리에 정감록을 혼합해서 만든 청림교(靑林敎) 및 동학교(東學敎)·수운교(水雲敎)·무궁도(無窮道)·백백교(白白敎) 등이 동학계에 속한 교단들이다.

 

불법연구회(佛法硏究會)는 증산교나 동학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독자적인 성격을 띤 것으로, 1916년 박중빈(朴重彬)을 중심으로 창교됐다. 종교 신앙과 생활 실천의 일치를 주장하면서 간척사업·소작농 경영 등으로 착실한 토대를 닦았다. 주술적이고 비합리적인 신비화를 배격하고 근로와 자영(自營)의 생산적 실천을 주장하여 종교수행과 경제윤리를 연결시켜 오늘날 원불교(圓佛敎)를 이루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밖에 이상필(李尙弼)이 창교한 금강도(金剛道), 이선평(李仙坪)의 각세도(覺世道), 김항의 『정역(正易)』이론에 근거한 김치인(金致寅)의 광화교(光華敎) 등이 있다. 역리(易理)에 근거하여 후천개벽설을 주창한 김항은 남학의 창시자인 이운규의 수제자로, 자신이 영가무도교(咏歌舞蹈敎)를 이끌기도 했으나 난삽한 형이상학적 원리로 인해 신자들에게 호소력을 지니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강일순에게 강한 영향을 미쳤던 것은 사실이며, 그의 독특한 후천역사상(後天易思想)은 그 뒤의 민중종교사상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수암(守岩) 문 윤 홍 大記者/칼럼니스트, moon4758@naver.com

[출처] 신종교 출현의 역사적 배경과 전개 양상③전통사회의 구조적 해체|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