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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이야기

팔상도 八相圖

팔상도 八相圖

 

붓다의 생애에 온갖 불법의 가르침이 다 들어 있다. 태어나서 깨달음을 위해 정진하고 열반에 드는 한 생이 곧 진리의 장인 것이다. 그래서 붓다의 생애를 알면 불법을 다 들을 수 있다. 따라서 석존이 태어나서 열반에 들기까지의 생애는 불교도들의 가장 지대한 관심사였다. 석존이 입멸한 후 위대함이 추모되던 그 생애는 점차 역사적인 실재에 초인적인 전설이 부가되어 불전설화(佛傳說話)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불전의 변화는 그대로 조각과 그림으로 만들어져 석존에 대한 추모 신앙을 이끌었다.

 

인도에서는 석존의 생애와 관련하여 4대 영장(靈場)이 불교도들의 순례의 대상이었다. 탄생지 룸비니(Lumbinī, 藍毘尼), 성도지 부다가야(Bodhgaya, 佛陀加耶), 초전법륜지 녹야원(Sarnath, 鹿野苑), 열반지 쿠쉬나가라(Kuśnagara, 拘尸那揭羅)가 그것이다. 후대에 이 4대 영장은 8대 영장으로 확대되었다.

 

 

『유부비나야잡사』에는 석존의 열반 후 가섭이 묘당전(妙堂殿)에 여래 일대의 자취를 그리게 했는데 그것은 도솔하천(兜率下天)·탁생·강탄·출가·고행·성도·초전설법·사위성신변(舍衛城神變)·33천불모설법·보계삼도(寶階三道)·제국화생(諸國化生)·쌍수열반 등이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경전의 기록은 실제 도상에서도 확인된다. 마투라 출토 사상도(四相圖)는 탄생·성도·전법륜·열반에 33천강하를 넣은 것이고, 사르나트 출토의 팔상도(八相圖)는 사상에 도솔하천·원후봉밀(猿猴奉蜜)·사위성신변·33천하강이 더해진 것이다. 4대 영장은 분명한 데 비해 8대 영장은 반드시 일정하지는 않아 조형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표현된다. 대표적인 팔상도는 탄생·성도·초전법륜·사위성신변·33천강하·취상조복(醉象調伏)·원후봉밀·열반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양탑(간다라 시크리 출토, 2세기, 파키스탄 라호르박물관)

부처의 생애를 13장면으로 나누어 아래 부분에 새긴 공양탑.

 

연등불수기도(간다라 시크리 출토, 2세기, 높이 32cm, 파키스탄 라호르박물관)

부처의 생애를 13장면으로 나누어 새겨 만든 공양탑의 한 장면. 붓다의 과거세에 운뢰범지로서 연등불을 뵙고 꽃을 올리고 머리를 진흙땅에 풀어 연등불에게 공양하여 석가모니불이 되리라는 수기를 받았다는 본생담.

 

 

중국에서 팔상은 불전의 번역에 따라 이해되어 불교의 전파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며 조상으로 전개되었다. 기록에 따라 다소 차이를 보이는 팔상은 『화엄경』의 「십지품」이나 『기신론』 등에서 하천(下天)·입태(入胎)·주태(住胎)·출태(出胎)·출가·성도·전법륜·입열반을 꼽았는데, 천태(天台) 지자(智者)대사는 주태를 항마로 바꾸었다. 송대에 도성(道誠)이 『석가여래성도기주(釋迦如來成道記註)』에서 말한 도솔래의(兜率來儀)·람비니원강생·사문유관(四門遊觀)·유성출가(踰城出家)·설산시수도(雪山示修道)·보리수하항마성도·녹야원전법륜·사라림하반열반으로 이루어진 팔상이 현재 일컫는 것에 가장 가까운 형태여서 이때쯤에 지금의 팔상이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하여 탄생하여 출가하고 깨달음을 이루어 열반에 드는 가장 중요한 네 부분이 비람강생(毘藍降生)·유성출가·수하항마(樹下降魔)·쌍림열반(雙林涅槃)으로 정착되고, 여기에 도솔천에서 코끼리를 타고 모친 마야부인의 태에 드는 도솔래의, 생로병사의 모습을 보는 젊은 날의 사문유관, 출가 후 수행하는 설산수도, 녹야원에서 5비구에게 첫 설법을 한 녹원전법(鹿園轉法)을 합쳐 팔상이 된다.

붓다생애도(인도 나가르주나콘다 출토, 석회암, 높이 176cm, 뉴델리박물관)

부처 탄생 전후의 생애를 여러 장면으로 나누어 새긴 석판. 아래쪽은 정반왕과 마야부인, 사천왕의 찬탄과 제석천을, 가운데에는 마야부인 무우수가지를 잡고 태자를 낳는 장면과 오른쪽에 사천왕이 일곱 발자국이 찍힌 천을 받드는 장면을, 위쪽에는 발자국이 찍힌 태자의 상징을 정반왕에게 처음 보이고 신에게도 고하는 장면을 새겼다.

 

 

같은 팔상이라도 인도에서는 천불화현(千佛化現)이나 사천왕봉발(四天王奉鉢) 같은 기적적 주제나 33천강하 등을 팔상에 넣어 석존의 초인간적인 면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초전법륜 이후 열반에 이르는 사이에 4장면이 추가되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역사상 현실의 석존 생애를 중시하여 탄생 이전에 도솔래의가 들어가고 탄생 후 사문유관과 유성출가·설산수도와 같은 성도 이전의 행적이 추가되었다. 인도의 사상도나 팔상도처럼 서역의 키질 석굴에도 사상도와 같은 불전도가 보인다. 중국 북위 때의 돈황 석굴에는 입태·탄생·출가·항마·열반상 등이 조성되었고, 운강 석굴 역시 탄생·항마·열반 등 더욱 다양한 불전 주제가 조성되었다.

 

역시 북위 때 조성된 맥적산(麥積山) 석굴 133굴에 있는 10호조상비는 중국 불전도의 대표적인 예이다. 중단에 도리천에서 발원하는 보살교각상 좌우로 수하탄생·칠보행·구룡토수·연등불수기와 승상입태·항마성도, 상단에는 이불병좌상 좌우로 보살사유·아육시토·열반과 초전법륜, 하단에 설법하는 불상 좌우로 유마변상과 녹원전법상 그리고 사천왕이 비면을 가득 채워 조성되었다. 북위 때인 5~6세기는 단독 불비상(佛碑像)의 이면에 구획을 나누어 경전에 충실한 불전도를 새겼으니 수하탄생과 구룡토수 및 사자후 장면을 차례로 새긴 조각상이 여럿 남아 있다. 북제 조성의 불상 대좌에는 전통적인 사상도가 조각되었고 9세기의 돈황 불전번(佛傳幡)은 석존의 생애를 여러 폭의 그림으로 그려냈다. 10세기의 서하사(棲霞寺) 사리탑에는 탁태·탄생·사문유관·출가·고행·항마·설법·열반의 팔상이 조각되어 중국 팔상도의 틀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석가생애팔상(석씨원류 마야득몽·수하탄생·득우사문·유성출가, 1673년 불암사판, 각 18.5×26.5cm)

불전의 중요한 일을 200가지 장면으로 꾸민 석씨원류 중에서 불전 전반기의 중요한 네 가지.

 

석가생애팔상(석씨원류 육년고행·성등정각·화엄대법·쌍림입멸, 1673년 불암사판, 각 18.5×26.5cm)

불전의 중요한 일을 200가지 장면으로 꾸민 석씨원류 중에서 불전 후반기의 중요한 네 가지.

 

 

우리 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탄생불이 널리 제작되었다. 조각과는 달리 고려 이전에 제작된 불전 불화는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조선 세종대인 1447년에 『석보상절(釋譜詳節)』을 만들면서 도솔래의·비람강생·사문유관·유성출가·설산수도·수하항마·녹원전법·쌍림열반의 팔상을 들고 이들 각각의 장면을 두 쪽의 이은 그림으로 새겨 간행하였다. 이는 송대에 나온 『석가여래성도기주』에서 제시한 팔상을 넉자씩으로 맞추어 정리한 것이었다.

 

『석씨원류응화사적(釋氏源流應化事蹟)』은 석존의 상세한 행적과 불법의 계승 그리고 중국 불교의 전개를 400항목으로 정리하여 그림과 내용을 나란히 새겨 간행한 것이다. 조선 후기에 많이 읽혔던 『팔상록(八相錄)』은 『석가여래성도기주』의 팔상 구분에 『석씨원류응화사적』의 석존 행적 부분을 내용은 물론 그림까지 옮겨 엮은 것이었다. 조선 후기에 탱화로 조성된 팔상도는 『석씨원류응화사적』의 도상들을 수용하여 정형을 이룬 것으로서 18세기 이후 다수 조성되었다. 용문사(1709)와 천은사(1715)의 것을 거쳐 1725년에 조성된 송광사의 팔상탱화에서 전형이 이루어지고 이어 통도사(1775), 선암사(1780) 팔상탱과 같은 명작들이 제작되었다.

석씨원류(釋氏源流)(쌍림입멸, 1673년, 불암사판, 18.5×26.5cm)

붓다의 생애를 200장면으로 엮어 그림과 설명으로 만든 목판본 석씨원류.

 

 

천상에서 내려와 이 땅에 태어나다

一相, 도솔래의(兜率來儀)

도솔래의(송광사, 1725년, 견본, 125×118cm)

팔상의 첫째 장면으로 도솔천에 있던 보살이 코끼리를 타고 카필라성의 마야부인의 태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

 

 

팔상탱의 첫 장면은 도솔래의로 시작한다. 이 세상에 크나큰 광명을 밝힐 위대한 자 붓다는 태어날 자리부터 덕을 많이 쌓은 청정한 집안을 선택해야 한다. 과거 오랜 선업(善業)을 쌓아 그 공덕으로 도솔천에 머무르며 수행하던 보살이 어느 곳에 탯자리를 잡아야 할지 이 임무를 맡은 금단(金團)천자가 고르고 또 골라서 정한 것이 고타마(Gautama, 瞿曇)씨 집이었다.

 

흰 코끼리 위에 앉은 호명(護明)보살이 구름을 타고 지상에 내려온다. 보살은 연화좌에 신광과 두광을 갖춘 장년형이다. 보살 주위에는 10여명의 크고 작은 천왕들이 역시 구름을 타고 옹위하고 있으며 천동천녀와 주악중들이 앞장서 일행을 이끈다. 향하는 곳은 2층의 누각으로 이루어진 마야(摩耶, Māyā)부인의 침실이다. 화려한 휘장이 둘려진 침실에 앉아 있는 마야부인의 바로 곁에까지 구름은 휘돌아 이어진다. 이렇게 입태(入胎)한 소식을 부인은 슈도다나(Śuddhodana, 淨飯) 왕에게 고하고, 왕이 선상(善相) 바라문을 불러 점을 치게 하니 바라문은 훌륭한 왕자가 태어날 것을 예언하고 찬탄한다. 도솔천에서 카필라(Kapila, 迦毘羅)국 슈도다나 왕비 마야부인에게 몸을 의탁하는 과정이므로 가장 복잡하지 않은 구성을 보인다. 구담귀성(瞿曇貴姓)·정반성왕(淨飯聖王)·마야탁몽(摩耶托夢) 또는 승상입태(乘象入胎)를 내용으로 한다.

조선시대의 팔상탱은 기와지붕이며 수목이나 등장인물들을 우리 식으로 꾸미고 중간중간에 글귀를 써넣어 확실하게 이해를 돕고 있다. 강렬한 색채를 구사하여 붓다의 생애를 생생하면서 장엄하게 묘사하고 있다.

상탁도솔

보살이 흰코끼리를 타고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장면. 구름 사이사이로 천자들과 천녀들이 무리지어 천상세계를 보여준다.

 

구담귀성

금단천자가 보살이 터잡을 집을 공덕을 쌓아온 고타마가문으로 정하다.

 

정반왕과 마야왕비

왕궁에서 마야왕비가 슈도다나왕에게 태몽을 이야기하며 그 의미를 점치다.

 

마야탁몽

굽이치는 구름을 타고 보살이 이층 누각에서 쉬고 있는 마야부인의 태 속으로 들어가다.

 

二相, 비람강생(毘藍降生)

비람강생(송광사, 1725년, 견본, 125×118cm)

화창한 봄날 룸비니동산에서 마야부인이 태자를 낳다. 태자는 낳자마자 사자후를 하고 구룡이 물을 뿜어 관정하며 축하한 뒤 왕궁에 돌아와 부왕과 처음으로 대면하다.

 

팔상탱의 두번째인 비람강생상은 수하탄생·구룡관욕·종원환성·선인점상 등의 내용이 담긴다. 비람은 룸비니가 어순이 도치된 것이니 비람강생은 룸비니 동산에서 붓다가 세상에 태어났음을 이른다.

 

한 가운데에 사방칠보행상을 두고, 오른쪽 아래에 수하탄생상, 오른쪽 위에 구룡관정상, 왼쪽 아래에 종원환성상, 왼쪽 위에 선인점상상을 배치하여 화면을 구성하였다. 탄생상은 아래 오른편에 장막을 친 가운데 마야부인이 무우수(無憂樹) 가지를 잡고 오른쪽 옆구리로 붓다를 낳는 장면이다. 사방 7개의 연화로 구획한 정중앙에 왼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고 오른손을 내려뜨려 땅을 가리키며 우뚝 선 사방칠보행·사자후상의 탄생불(誕生佛)을 둔 것은 불전설화 형성의 정점에 이 사자후가 있기 때문이다. 위쪽 왼편에는 궁정의 왕이 있고 오른편에는 9마리 용이 물을 뿜어[九龍吐水] 관정(灌頂)하여 찬탄하는 광경이다.

수하탄생

휘장을 두른 속에서 무우수 가지를 붙잡고 마야부인은 오른쪽 옆구리로 태자를 낳다. 천지가 진동하며 축하하고 하늘에서 꽃비를 내리다.

 

마야부인의 태 속에서 자란 붓다는 따뜻한 봄날 룸비니(Lumbinī) 동산에서 태어났다. 마야부인은 산달이 되어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난 룸비니 동산에 산책하러 나왔다가 산기(産氣)를 느껴 곧바로 오른손으로 무우수 가지를 붙잡고 오른쪽 옆구리로 태자를 낳았다. 도솔천에서 마지막 하생(下生)을 기다리다가 지상의 가장 정결한 카필라국 슈도다나 왕과 마야부인의 몸을 빌어 입태한 지 열 달만에 이 세상에 나와 대광명(大光明)을 발한 것이다.

강생

모비 마야부인의 오른쪽 옆구리로 탄생하는 태자.

 

조형물에 석존이 등장하지 않았던 불상불표현 시대에는 석존의 탄생 장면을 직접 만들어낼 수 없었다. 그래서 도솔천에서 코끼리를 타고 태에 들어오는 마야부인의 꿈을 그린 탁태영몽(託胎靈夢)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불교 조형물인 바르후트(Bhārhut)대탑 부조에 남아 있고, 남인도 아마라바티(Amaravatī)의 부조에는 산개로 상징한 태자의 탄생과 이를 받쳐든 담요자락에 일곱 걸음을 찍은 것으로 표현하는 정도였다.

마야탁몽(석씨원류, 1673년 불암사판, 18.5×26.5cm)

도솔천에서 코끼리를 타고 마야부인의 태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 옆 건물에는 정반왕이 있다.

 

불상이 나타난 이후 탄생 광경은 무우수 가지를 잡은 마야부인의 옆구리로 탄생하는 태자를 제석천과 범천이 공손히 받드는 장면으로 묘사되었다. 시대가 내려오면서 이 수하탄생 장면에 태자가 누구의 부축도 없이 혼자서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며 "천상천하에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고 사자후(獅子吼)를 하는 사방칠보행(四方七步行) 장면과, 9마리 용이 물을 토해 태자를 씻어주는 구룡관욕(九龍灌浴) 장면으로 세분되어 수많은 도상으로 만들어졌다. 6세기 아잔타 동굴의 벽화도 마찬가지 형상이다. 인도의 조형에서는 수하탄생 그림의 태자 밑에는 마야부인과 나란히 두 팔을 내리고 곧게 선 태자가 칠보행을 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수하탄생(석씨원류, 1673년, 불암사판, 18.5×26.5cm)

태자가 마야부인에게서 태어나 구룡의 관정을 받으면서 한손을 들어 사자후를 하는 광경을 한 화면에 그린 목판본 석씨원류의 탄생도.

 

탄생 관련 도상 중에서 석존 탄생의 의도를 강하게 드러낸 것이 사방칠보행 곧 사자후 장면이다. 비교적 오래된 경전인 『숫타니파타』에는 아시타 선인이 하늘의 신에게서 들은 대로 새로 태어난 왕자는 위 없는 사람이며 최상의 사람이라고 하였다는 구절이 있다. 이 부분이 후대 불전에 등장하는 탄생게(誕生偈)의 선구가 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으로 대표되는 탄생게는 "가장 존귀하고 뛰어나다, 이번이 최후의 생이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것을 3가지 구성요소로 한다. 이 탄생게는 후에 붓다가 성도한 후 녹야원으로 향하면서 붓다의 자각(自覺) 선언을 나타내는 게송으로 변용되었다.

사자후

태어나자마자 3마디의 사자후를 하는 태자. "나는 가장 존귀하고 뛰어나다. 이번이 최후의 생이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태어났다." 사방으로 7보를 걸으며 한손은 하늘을 가리키고 한손은 땅을 가리키며 사자후를 하자 걸음마다 연꽃이 생겨나다. 벌써부터 사천왕이 지켜보고 있다.

 

탄생(석씨원류 수하탄생, 1673년 불암사판, 18.5×26.5cm)

나뭇가지를 잡은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나는 태자를 받아 모시는 시녀.

 

사자후(석씨원류 수하탄생, 1673년 불암사판, 18.5×26.5cm)

왼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고 오른손은 땅을 가리키며 사자후를 하

 

경전에는 처음에 그냥 7보를 걷고 사방을 두루 관찰하고 손을 들어 "천상천하 유아위존"을 말하였다고 하였다가 손으로 상하를 가리키고 연꽃이 걸음따라 생겨나며 용왕이 관욕하였다는 것이 더해진다. 7보행은 다시 사방으로 확대되고 상하까지 늘어난다.

관정

수미좌 위에 올린 금단지 속에 앉은 태자를 오색 빛이 감싸고 구룡이 찬물과 더운물을 뿜어내 관정하다.

 

환궁

태자와 마야부인이 화려한 꽃가마를 타고 왕궁으로 돌아오다.

 

선인점상

왕궁에 돌아와 태자를 받들고 부왕에게 처음 뵈다.

 

태자생활에서 출가로

三相, 사문유관(四門遊觀)

사문유관(송광사, 1725년, 견본, 125×118cm)

왕자 수업을 받으며 장성한 태자가 동·남·서·북의 네 문을 돌며 늙고 병들고 죽는 사람들의 모습과 출가 사문을 보고 출가할 마음을 정하다. 중앙 윗부분에 태자를 낳은 지 이레만에 돌아간 모비 마야부인이 항상 태자를 하늘에서 내려보며 안녕을 기원하는 모습을 담았다.

 

태자는 이름이 모든 것이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싯다르타(Siddhārtha, 悉達陀)였다. 어린 시절의 태자는 왕이 되기 위한 예비수업으로 학문과 무예를 비롯하여 갖가지 수련을 쌓았다. 그러던 어느 해 봄 태자는 들에 나가 농사짓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농부들이 논을 갈아엎는데 흙 속에서 벌레들이 죽어 나왔다. 그런가하면 동물들이 서로 잡아먹기 위해 싸우는 장면도 눈에 들어왔다. 사는 것이 무엇인가. 왜 자신의 삶에는 집착하면서 다른 존재의 삶은 생각지도 않는가. 이런 고민에 빠져 태자는 염부수(閻浮樹, Jambu) 나무 그늘 아래에서 고요히 명상에 잠겼다.

 

태자의 얼굴에 서린 고민을 감지한 부왕은 태자의 마음을 돌리려고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여름, 겨울, 그리고 봄·가을을 따로따로 철마다 기분을 다르게 느낄 수 있는 3궁전을 지어 주고 수백의 궁녀들이 태자의 곁에서 시중들며 환락의 세계에 젖어 들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어서 태자비를 구하고자 애썼다. 그래서 명망 있는 장자의 따님으로 재색을 겸비한 야쇼다라(Yaśodhara, 耶輸陀羅)를 태자비로 맞아들였다.

 

또래들과의 무예시합에서 기량을 한껏 발휘하는 등 한동안 왕자 역할에 충실하던 태자의 큰 의문이 다시 살아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안 가서였다. 태자는 시종들과 함께 어느 날 세상 물정을 알아 볼 겸 놀이 차비를 하고 동문으로 나섰다. 그런데 뜻밖에도 길에서 한 노인을 만났다. 나는 이렇게 젊어 온 몸에 힘이 넘치고 즐거운 일들로 하루 해가 짧은데 저 노인은 어찌하여 저토록 늙어 힘도 없고 적적한가. 사람은 누구나 때가 되면 저렇듯 늙어 힘들게 되는 것인가. 태자는 차비를 거둬들여 곧바로 궁궐로 돌아왔다.

 

다음 번에는 남문으로 행차 길을 바꾸었다. 이번에는 길가에 병든 사람들이 고통을 못 이겨 괴로워하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다음에 서문으로 길을 나섰더니 이 세상의 명을 다해 하얀 거적으로 덮여 다른 삶들의 손에 들려 죽어나가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다시 북문으로 길을 잡았더니 이번에는 출가 사문을 만나게 되었다. 이제까지 본 사람들과는 다른 형형한 눈빛과 편안하기 그지없는 얼굴은 태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바로 그렇구나. 세상의 욕락이며 번뇌를 모두 놓아두고 지극한 도를 이루기 위해 수도하는 사문의 삶이야말로 내가 가야 할 길이로구나. 사대문으로 짝지어진 생로병사의 장면은 태자의 출가 의지를 북돋우려는 작병(作甁)천자가 몸을 만들어 내보인 것이고 사문의 모습은 정거천인(淨居天人)이 만들어 보인 것이라고 불전은 적고 있다.

동문

마차에 타고 시종을 거느린 태자가 동문에서 늙은 사람을 만나 왜 사람은 반드시 늙어가야 하는지를 깊이 생각하다.

 

남문

남문에서는 병든 자를 보고 인간의 괴로움을 깊이 생각하

서문

서문에서 성 밖으로 나가는 죽은 사람의 관을 보고 생사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다.

 

북문

북문에서 출가 수행자를 보고 신념에 넘쳐 평온한 얼굴에서 태자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보다.

 

태자의 마음은 태산같이 굳어졌다. 돌아와 부왕에게 출가를 허락해 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부왕은 거절하였다. 소생을 얻어 왕위를 계승할 후사를 얻어 놓고 나서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다. 태자의 마음이 굳어졌음을 안 슈도다나 왕은 태자의 출가를 경계하는 경비를 더욱 강화하였다.

 

그래서 팔상탱의 세번째 사문유관(四門遊觀)상은 4장면으로 구성된다. 화면을 넷으로 갈라 오른편 위쪽에 마차를 타고 동문에 나가 노인을 보는 장면이 자리잡고 오른편 아래쪽에 남문에 나가 병자를 보는 광경을 그렸다. 왼편 아래쪽에 서문에서 죽은 자를 보는 광경이 있고 왼편 위쪽에 북문에 나가 사문을 만나 저절로 마차에서 내려와 사문에게 다가가 경의를 표하는 장면을 넣었다. 마차는 모양새나 시종들의 구성은 대체로 비슷하나 수레 장식이나 인원 배치를 다소 다르게 하였으며 배경이 되는 궁궐이나 성문의 위치와 형태에 변화를 주었다. 4장면 사이는 나무나 건물로 자연스럽게 구분하였다. 중앙 위쪽에 생모 마야부인이 도리천에서 내려와 태자가 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다. 이레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자라가는 아들을 못 잊어 발길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하늘에서 내려보고 있는 간절한 모정(母情)을 빼놓지 않았다.

마야부인

낳은 지 이레만에 아들을 떠나 아들의 발길마다 내려다 보는 애틋한 모정.

 

四相, 유성출가(踰城出家)

유성출가(송광사, 1725년, 견본, 125×118cm)

출가를 결심한 태자는 사람들이 모두 잠에 취해 고요한 밤 성을 넘어 출가를 결행하다.

 

부왕의 태도는 단호하였으나 태자의 큰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태자의 마음이 출가를 열망할수록 슈도다나 왕은 욕락으로 돌려놓고자 하였다. 그럴수록 태자의 뜻은 더욱 굳어만 갔다. 욕락의 향연이 베풀어져 헝클어진 자리를 밤중에 깨어나 보니 더욱 가관이었다. 그래서 모두 잠에 떨어진 깊은 밤 태자는 마부 찬다카(Chandaka, 車匿)가 끄는 애마 칸타카(健陟)을 타고 성을 뛰어 넘어 출가를 결행한다. 제석천이 산개(傘蓋)를 들고 앞장서고 사천왕이 말 다리를 하나씩 들어 소리 없이 성을 넘으니 정거천인은 성을 지키는 사람들도 잠들게 하였다. 수도자들이 많다는 숲 속으로 한참을 가다가 태자는 입고 있던 태자 옷을 정거천인이 변한 사냥꾼과 바꾸어 입고 머리를 자르고는 가진 것들을 모두 마부 찬다카에게 주며 왕궁의 부왕에게 돌려보낸다.

유성

사방이 고요한 한밤중에 마부 찬다카와 성을 넘어 출가하다. 사천왕이 말의 네 발을 들고 제석천이 앞에서 인도하다.

 

팔상탱의 네번째인 성을 넘어 출가하였다는 유성출가상은 야반유성(夜半踰城)·차익사환(車匿辭還)·차익환궁(車匿還宮) 등의 『석씨원류응화사적』 장면을 찾을 수 있다. 탱화에서는 오히려 환락 장면 등이 더 추가되어 밀도 있는 구성을 이루었다. 왼쪽 아래에 궁성의 환락 장면이 있는데 화려하게 꾸며진 궁궐에서 태자비 야쇼다라와 궁녀들이 잠에 취해 아무렇게나 골아 떨어진 모습으로 묘사하고 떠난 태자의 자리만 비워 두었다. 오른쪽 아래와 왼쪽 위에 대각선으로 밤낮으로 철통같이 성문을 지키라는 엄명을 받은 수졸들이 잠에 취해 떨어진 모습을 배치하였다. 가운데 위쪽으로 제석천·사천왕·인왕 등의 호위를 받으며 말을 타고 성문을 넘는 태자가 그려졌고 그 아래쪽으로 성을 넘는 것을 도운 일행들에게 둘러 싸여 마부 찬다카에게 돌아가라고 하는 태자를 그렸는데 아직 삭발하고 누더기 옷으로 바꿔 입기 전의 태자 차림이다. 오른쪽 위에는 혼자 돌아온 찬다카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부왕이 비통에 잠기는 모습과 양모와 태자비가 찬다카를 꾸짖으며 슬픔에 잠긴 광경을 담았다.

차익사환

수행자들의 숲속에 들어가자 사냥꾼과 옷을 바꿔 입고 마부 찬다카에게 패물을 주며 돌아가게 하니 찬다카 혼자 성에 돌아오다.

 

환궁

찬다카가 돌아와 왕에게 태자의 출가를 아뢰다.

 

태자공석

태자가 떠난 자리는 텅 비어 있고 부인 야쇼다라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설산의 수행과 보리수에서의 깨달음

五相, 설산수도(雪山修道)

설산수도(송광사, 1725년, 견본, 125×118cm)

설산에 들어가 6년 동안 선정과 고행을 계속하여 심신이 극도로 피곤한데도 해탈은 길은 보이지 않자 고행을 그만두고 목욕을 하고 기운을 차리다.

 

출가 이후 태자는 6년 동안 정진을 거듭하였다. 먼저 당대의 수행인들이 모여 있던 중심지 왕사성(王舍城, Rājagṛha)에 가서 선정(禪定) 수행의 대가인 아라다 칼라마(Ārāda-kalama) 선인을 찾아가 수행하였다. 태자는 선인 밑에서 지향하고자 하는 최고의 경지로서 '스스로에게 속하는 것은 없다' 하여 세간의 모든 욕망을 버리는 무소유처(無所有處) 경지에까지 올랐으나 이것으로서는 자신의 근본 의문을 해결할 깨달음을 얻을 수 없었다. 또 다른 대가 우드라카 라마푸트라(Udraka-ramaputra)를 찾아가 더욱 심오한 경지인 '생각도 없고 생각하지 않음도 없다'는 경지, 곧 표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삼매의 세계라는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경지에 올랐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태자는 다시 6년간의 고행에 들어갔다.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않고 나무를 지붕 삼아 육신을 학대하는 속에서 정신적 희열을 얻는 고행으로 태자의 몸은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몰골이 되었다. 그동안 태자 혼자서 수행하는 것을 염려한 슈도다나 왕은 콘디누야(Kauṇḍinuya, 憍陳如) 등 다섯 사람을 보내 태자 모르게 시종하게 하였고 이들은 태자와 함께 험난한 수행을 하고 있었다.

 

선정과 고행, 이 두 극단이 모두 생사윤회의 근본 과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안 태자는 이제까지의 고행을 털어 버리고 강물에 목욕하여 심신의 안정을 취했다. 그런 태자의 모습을 지켜보던 낭자가 우유죽을 끓여 공양하자 태자는 맛있게 받아먹었다. 이를 멀리서 지켜본 5비구들은 태자가 고행을 못 이겨 수도자의 길을 저버렸다고 등을 돌려 숲 속으로 사라졌다.

금도낙발

깊은 산속에 들어가자 진지한 수행을 위해 머리를 자르다.

ⓒ 풀빛 |

원향자량

부왕은 태자가 걱정되어 오비구를 보내 같이 수행하도록 하고 공양물을 실어보내지만 태자는 공양물을 돌려보내다.

 

이런 수행은 설산(雪山)에서 이루어져야 박진감이 더한다. 그래서 팔상탱의 다섯번째 설산수도(雪山修道)상은 오른쪽 위쪽에 흰눈으로 뒤덮인 설산 고봉들이 배경을 이룬다. 그러나 수행지 왕사성은 설산과는 거리가 먼 곳이다. 왼쪽 아래에 머리를 자르는 태자의 모습인 금도낙발(金刀落髮) 장면이 묘사되었다. 『석씨원류응화사적』의 차례대로라면 유성출가상에 나올 장면이다. 태자 뒤에 사냥꾼 모습의 정거천인이 있고 앞에는 찬다카와 말이 울며 슬퍼하는 모습이며 제석천이 탑을 세우려 자른 머리를 받고 있다. 오른쪽 아래에 찬다카가 말과 함께 돌아오고 그 왼쪽으로 슈도다나 왕이 사람을 보내 환궁을 요청하는 장면을 넣었다. 권청회궁(勸請廻宮)이다.

오른쪽 중간은 환궁의 희망을 포기한 슈도다나 왕이 다섯 사람을 선택하여 태자의 수행을 돕도록 한다. 그 왼쪽 아래는 아라다 선인을 찾은 태자인데 그곳으로 궁궐에서 보낸 재물을 실은 수레가 다리를 건너오지만 태자는 모두 거절한다. 원향자량(遠餉資糧)이다. 오른쪽 위에는 바위에서 한 가닥 뻗은 나무 밑에서 6년 동안 고행하는 태자가 있고 앞에는 목녀(牧女) 둘이서 죽을 바치는데 5비구가 이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육년고행(六年苦行)과 목녀유미(牧女乳糜)이다. 왼쪽 위에는 목욕을 마친 태자에게 제석천이 옷을 바치고 선생녀(善生女)가 죽을 바치며 무구천자가 가사를 바치는 장면이다. 선하조욕(禪河藻浴)과 제석헌의(帝釋獻衣)이다.

고행

만년설이 싸인 설산에서 오비구와 함께 처절한 고행을 계속하는 태자.

 

선하조욕

진정한 깨침을 얻는 데 고행이 부질없음을 깨닫고 강물에 목욕하고 목녀가 주는 죽을 받아먹은 후 원기를 회복하다.

 

六相, 수하항마(樹下降魔) = 성도(成道)

수하항마(송광사, 1725년, 견본, 125×118cm)

보리수 밑에서 진정한 깨침을 얻기 전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는 투철한 각오로 명상에 들어간 태자에게 유형·무형의 온갖 유혹과 위협이 방해했지만 마침내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 붓다가 되다. 이미 항마상에 등장하는 태자는 모두 부처의 몸으로 바뀌어 두광을 이고 있다.

 

태자는 평범한 보리수나무를 찾아 그 아래 자리를 잡고 명상에 들었다. 내가 이치를 깨치기 전에는 절대로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노라는 굳은 다짐과 함께. 명상에 잠긴 태자에게 온갖 방해가 일어났다. 깨침을 막아보려는 마군(魔軍)들의 준동이었다. 때로는 엄청난 군대의 힘으로 해치려는 공포에 휩싸이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마왕의 아리따운 세 딸을 보내 갖은 교태로 유혹하기도 하였지만 도를 이루겠다는 태자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마왕의 아들은 아버지의 잘못을 참회하며 용서를 바라고 태자는 마왕을 항복시켰다. 그리고 어느 새벽 태자는 이 세상의 모든 이치를 훤히 알아 깨쳤다. 생사윤회의 굴레를 벗어난 해탈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하늘에는 샛별이 빛나고 있었다.

 

팔상탱의 여섯번째 수하항마(樹下降魔)상은 곧 성도(成道)상이다. 성도에 이르기까지의 어려움을 더 강조한 제목이다. 왼쪽 아래가 마왕이 거느린 군대의 공격 장면이다. 호랑이가 끄는 수레엔 창검이 가득하고 코끼리가 끄는 전차에 마왕이 타고 있다. 마군거전(魔軍拒戰)이다. 여기서 오른쪽 가운데로 올라가면 창검을 뽑아 들고 나무 밑에 명상에 잠긴 태자를 공격하는 장면이다. 태자는 정병이나 움직여 보라고 조롱하나 마군들은 한 치도 움직이지 못한다. 마중예병(魔衆拽缾)이다.

 

그 아래는 마왕의 세 딸들이 교태로 태자를 유혹하는 장면이다. 마녀현미(魔女妶媚)이다. 태자는 미녀들을 늙고 추한 모습으로 변하게 하여 이들의 공격도 물리친다. 왼쪽 위는 태자가 성도하여 부처가 되는 장면이다. 성등정각(成等正覺)이다. 그 오른편에 마군들이 패주하여 혼비백산하는 광경이 묘사되었다. 태자가 땅을 가리키자 땅이 진동하면서 지신들이 나타나 증명하자 마군들이 혹은 놀라 달아나고 혹은 태자에게 귀의하였다. 보살항마(菩薩降魔)이다.

마군거전

마왕이 코끼리 전차를 타고 호랑이 수레와 무기를 한껏 갖추고 태자의 의지를 흔들기 위해 싸움에 나서다.

 

마중예병

명상에 잠긴 태자에게 마왕의 무리들이 창검을 빼들고 일제히 공격을 퍼붓다.

 

마녀현미

마왕의 딸들이 교태로 태자를 유혹하자 태자는 빛을 발하여 젊고 예쁜 마왕 딸들을 늙고 추하게 변화시켜 굴복시키다.

 

성등정각

설산 뒤로 북두칠성은 빛나는데 샛별이 떠 있는 어느 새벽 태자는 드디어 해탈의 이치를 깨쳐 '깨달은 자' 붓다가 되다.

 

성등정각(석씨원류, 1673년, 불암사판, 18.5×26.5cm)

나무 아래에서 혼자 앉아 마침내 정각을 이루는 태자의 목판 그림.

 

성도상의 머리에서 과거 7불이 증명하는 광명이 솟아오른다. 지신작증(地神作證)이다. 부처 아래는 마군들이 참회하고 있다. 마자참회(魔子懺悔)이다. 그리고 도를 이룬 부처를 위해 정거천이 부드러운 풀을 베어 바쳐 자리를 만들어드리는 장면이다. 천인헌초(天人獻草)이다. 오른쪽 위에 설산과 별 밑에 납월(臘月, 12월) 8일 성도하는 모습만 수행하던 태자 모습이고 성도하여 정좌하고 풀을 받는 모습은 물론 마군들을 조복받는 장면도 모두 부처의 형상으로 바뀐 모습이다.

지신작증

칠불과 여러 천인 성인들과 지신들이 성불을 증명하다.

 

천인헌초

앉을 자리를 마련하려는 태자에게 제석천이 나무꾼으로 변신하여 길상초를 베어 바치다.

 

항마성도(석씨원류, 1673년 불암사판, 18.5×26.5cm)

마군들의 항복을 받는 태자.

 

항마성도(인도 산치대탑 북문, 1세기)

산치대탑 네 문의 들보에는 갖가지 불전이 새겨져 있다. 여러 마군들을 항복받고 불도를 이루는 모습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전개된다.

 

모든 이들에게 불교의 가르침을

七相, 녹원전법(鹿苑轉法)

녹원전법(송광사, 1725년, 견본, 125×118cm)

깨달은 법을 45년 동안에 걸쳐 대중들에게 널리 베풀어 많은 사람들이 진리 수행에 동참하도록 하다. 기원정사를 비롯한 여러 사원이 기부되어 교단 활동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다.

 

도를 이루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분이 된 붓다 세존(世尊)은 한동안 세상의 더 없는 이치를 깨친 즐거움에 잠겨 있었다. 삼칠일 동안 법락(法樂)에만 잠겨 있자 범천이 그 훌륭한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알려줄 것을 권하였으나 붓다는 중생들이 알아듣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주저하고, 다시 제석천과 범천이 함께 중생 구제를 권청하자 그제야 전법륜을 허락한다. 그 첫째 대상은 6년 동안 가까이서 수행했던 5비구였다. 바라나시(Vārānasī)로 5비구를 찾아 사슴들이 노니는 녹야원(鹿野苑, Sarnath)에서 처음으로 법을 설하니 바로 초전법륜(初轉法輪)상이다.

팔상탱의 일곱번째 녹원전법(鹿苑轉法)상은 실로 붓다의 생애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하는 부분이고 중생들에게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이다. 녹원전법상은 오른쪽 아래에 콘디누야를 비롯한 5비구에게 고·집·멸·도의 사제(四諦) 법문을 설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초전법륜(初轉法輪)이다. 사슴이 함께 법을 경청함으로써 녹야원임을 말해준다. 왼쪽 위에는 처음으로 정사(精舍)가 건립되는 연기를 보였다. 사위성의 왕자 제타(Jeta, 祇陀)태자가 항상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기 좋아하던 급고독(給孤獨) 장자 아나타핀디카(Anātapiṇḍika)의 땅을 금을 깔아서라도 사겠다 하여 붓다를 위해 기원정사(祇園精舍)를 세우는 장면이다. 포금매지(布金買地)이다. 왼쪽 아래는 사위성에서 처음으로 대소승 계율을 설하여 교단의 체제를 갖추는 금강계단(金剛戒壇)을 만드는 장면이다. 초건계단(初建戒壇)이다. 시불이 증명하고 국왕·장자·우바새·우바이·천룡팔부가 운집하였다.

전묘법륜

법문을 설한 대상으로 첫번째 함께 수행하던 오비구에게 녹야원에서 사제의 이치를 설하여 초전법륜을 이루다.

 

포금매지

붓다의 교단활동을 원만하게 하기 위해 제타태자가 급고독 장자의 땅에 금을 깔아서까지 사서 기원정사를 지어 기부하다.

 

초건계단

사위성에서 계율을 설하여 금강계단을 이루다.

 

붓다에게 기부한 사원은 이밖에도 왕사성의 빔비사라(Bimbisāra, 頻毘娑羅) 왕이 기부한 최대의 사원 죽림정사(竹林精舍)가 유명하다. 왕사성이 수도이며 빔비사라왕이 다스리는 마가다국과, 사위성이 수도이며 프라세나짓(Prasenajit, 婆斯匿)왕이 다스리는 코살라(Kosalā, 橋薩羅)국은 당시의 가장 거대한 양국이었다. 빔비사라 왕과 바이데히(Baidehī, 韋提希) 왕비는 불교를 깊이 후원하였으며 바라문 후원자였던 프라세나짓왕도 왕비 말리카(Malika, 茉利) 부인의 권유에 따라 불교를 후원하였다. 마가다국의 빔비사라 왕은 왕자 아자타샤트루(Ajātaśatru, 阿闍世)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바이데히 부인의 요청으로 『관무량수경』이 설해진다는 인연을 갖는다.

 

아래쪽 가운데는 소아시토(小兒施土) 연기이다. 어린 아이들이 흙장난을 하며 놀다 유행(遊行)하는 붓다를 보자 흙 한줌을 바쳤다. 이 공덕으로 장차 아수가왕(阿輸迦王)으로 태어나 8만 4천탑을 세우는 과보를 얻으리라는 아쇼카(Aśoka, 阿育)왕의 이야기이다. 45년 설법이 계속되는 동안 여러 가지 사연도 많아 가장 내용이 풍부한 가운데서도 정사의 창건과 계단의 건립과 조탑 연기로만 내용을 구성한 것은 이를 통해 교단이 이루어지고 유지되었던 것을 강조하여 지금의 교단이 융성하기를 바라는 의미가 깃들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위쪽 오른편에서 중앙에 걸쳐 설법상을 크게 모셨다. 8대 보살과 10대 제자, 사천왕, 천룡팔부를 모두 한자리에 모아 찬란한 광명을 발하는 백복장엄(百福莊嚴)상으로 인천(人天)의 모든 대중에게 붓다가 정법(正法)을 설하는 광경이다. 그 때문에 붓다는 화려한 보관에 영락과 천의 장식을 덧붙인 노사나불이다. 깨달은 내용 그대로인 화엄의 대법을 맨 먼저 설했다는 화엄대법(華嚴大法) 장면이다. 남녀 노소와 귀천 상하를 막론하고 모든 중생에게 열린 가르침의 장을 거룩하게 묘사한 현장이다.

소아시토

어린애가 가지고 놀던 흙을 정성스레 붓다께 공양하고 이 공덕으로 장차 아쇼카왕으로 태어나 8만 4천탑을 세울 과보를 얻다.

 

화엄대법

깨달은 경지 그대로 설한 화엄대법. 법신 비로자나불의 모습으로 산하대지가 있는 그대로의 현상으로 진리를 이루는 이치를 설하다.

 

조복취상(석씨원류, 1673년 불암사판, 18.5×26.5cm)

붓다의 사촌아우인 제바닷다가 교단의 통솔권을 기도하여 코끼리에게 술을 먹여 붓다의 앞에 몰아세우자 붓다는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코끼리를 조복시켰다는 설화.

 

위대한 열반, 그리고 그후

八相, 쌍림열반(雙林涅槃)

쌍림열반(송광사, 1725년, 견본, 125×118cm)

45년 동안의 교화 끝에 80세에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에 들다. 사리는 8분되어 불탑이 세워지다.

 

45년 동안 중생들을 깨우치고 제자들을 이끌며 큰 빛을 드리운 채 붓다는 80세에 열반에 든다. 모든 존재는 생기면 사라지는 이치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 길은 붓다도 벗어날 수 없다는 이치를 보여주고자 열반에 든 것이다. 최후의 여행을 마치고 쿠쉬나가라(Kuśinagara, 拘尸那揭羅)의 나이란자나(Nairañjānā, 希連禪河)강에 목욕을 하고 사라(Salā, 沙羅)나무가 줄지어 선 곳에서 고요히 열반에 들었다. 열반한 붓다는 사리를 남겨 보탑(寶塔)을 이루게 했다. 그리고 법을 전하는 정통의식을 가섭에게 주고자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보였다는 불현쌍족(佛現雙足) 곧 곽시쌍부(槨示雙趺)상을 생겨나게 했다.

팔상탱의 마지막 쌍림열반상은 비람강생상과 함께 가장 많이 조형의 대상이 되었다. 불교를 있게 한 것은 성도(成道)였지만, 이 세상에 태어나 돌아가기까지 모든 일들은 탄생과 열반 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단독의 조형 주제로 널리 사랑 받아 왔다.

 

오른쪽 아래에 열반상이 있다. 부처는 오른쪽 팔을 굽혀 머리에 대고 편안하게 누워 있다. 쌍림열반이다. 비통에 잠겨 통곡하는 제자들 사이로 보살들과 인천(人天)들이 함께 하고 있다. 이밖에도 날짐승과 들짐승 등 온갖 중생들이 모두 모여 슬퍼한다. 가운데에 표현된 금관자거(金棺自擧)상은 붓다의 관이 동서남북 사문의 안팎에 저절로 공중으로 솟아올라 이를 본 코끼리를 비롯한 뭇 중생들이 통곡하여 천하가 진동하였다는 것을 보인다. 두 그루 소나무는 사라쌍수의 우리다운 표현이다. 사라쌍수는 붓다가 열반하자 곧 기운을 잃고 하얗게 말라버려 학림(鶴林) 곧 학처럼 흰 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그 왼편이 불현쌍족(佛現雙足)상이다. 붓다와 떨어져 숲 속에서 두타행(頭陀行)에 열중하던 가섭 존자는 열반시에 자리에 있지 못했다. 뒤늦게 도착한 가섭이 울부짖자 붓다는 관 속에서 두 발을 내보였다. 1,250제자 중에서 가섭에게만 내려준 특별한 소식이었고 이는 염화미소(拈花微笑)와 함께 가섭이 불멸(佛滅) 후 제1대 전법제자가 되는 상징이 되었다.

쌍림입멸

사라쌍수 아래서 고요히 오른쪽 옆구리로 누워 열반에 들자 제자들이 슬퍼 소리쳐 울며 비통에 잠기고 제보살과 제대중과 생명체와 산천초목이 슬퍼해 마지않다.

 

제자오열

붓다의 열반상 앞에서 오열하는 제자들.

 

붓다는 열반 후 불생불멸(不生不滅)상을 보였다. 왼쪽 중간에 관 속에서 한 줄기 새나온 자락으로 그린 이 모습은 7불이 증명하는데 도리천에서 내려온 마야부인이 꽃을 뿌리며 이를 바라보고 있다. 불모산화(佛母散花)이다. 마지막 자리까지 지켜보는 모성을 담은 장면이다.

불모산화

붓다의 열반을 안 불모 마야부인이 도리천에서 내려와 꽃을 뿌리며 관 속에서 솟아 나오는 불생불멸상을 바라보는 장면.

 

불현쌍족

붓다가 열반에 들 때 수제자 가섭은 숲속에서 수행에 열중하느라 임종하지 못했다. 가섭이 뒤늦게 도착하자 관 밖으로 붓다의 두 발이 삐죽 나와 가섭을 반겼다. 이로써 가섭의 전등(傳燈)을 확인해주다.

 

다음 세 장면은 다비(茶毘) 장면과 사리의 분배 장면이다. 열반 후에 붓다의 다비는 보통 사람들처럼 되지 않았다. 세간의 불로는 도저히 불길이 당기지 않았던 것이다. 범화불연(凡火不然)이다. 대신 붓다의 심장에서 삼매(三昧)의 불길이 나와 스스로 붓다의 색신(色身)을 불태우자 오색 영롱한 사리가 8만 4천섬이 나왔다. 성화자분(聖火自焚)이다. 붓다의 입적을 전해들은 마가다국왕 아자타샤트루와 바이샬리의 릿차비족들은 사신을 파견하여 붓다의 유골을 요구하지만 말라족들은 이를 거부한다. 서로들 차지하려는 것을 대신 우바길(優婆吉)이 중재하여 삼분하여 하나는 제천(諸天)에게 주고 하나는 용중(龍衆)에게 주며 나머지 하나를 8등분하여 여덟 나라의 왕들이 공평하게 나누어 갖도록 하였다. 균분사리(均分舍利)이다. 다비 자리에 늦게 도착한 한 핍발바나의 모랴족도 사리를 모시고 싶어했으나 이미 끝난 일이어서 남은 재를 가지고 갔다. 이렇게 하여 8등분한 사리를 모신 팔탑과 재탑[灰塔] 그리고 배분을 결정한 자가 가졌던 병탑(甁塔)을 더하여 10개의 근본 대탑이 이루어졌다.

 

불멸 후 붓다에 대한 신앙은 이 탑(塔, Stupa)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졌다. 탑에 세워진 탑원(塔院)은 신앙의 중심이자 승원(僧院)과 함께 교단의 기둥이었으며 새로운 대승정신의 출발점이기도 하였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중요성은 변함이 없다.

성화자분

사람들이 붓다의 관을 다비하려 불을 붙였으나 전혀 불길이 타오르지 않다. 붓다의 삼매의 불길이 스스로 타올라 다비가 이루어지다.

 

 

균분사리

다비하여 얻은 사리를 서로 갖겠다고 다투어 8나라에 골고루 나눠주다. 뒤늦게 도착한 나라에는 나눠준 재와 사리를 담았던 병을 주어 모두 10개의 근본 대탑이 이루어지다.

 

 

 

[출처] 팔상도 八相圖|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