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를 포함해 인도에서 발생한 거의 모든 종교에서는 윤회를 당연시했다. 그러나 순세파만은 예외였다. 순세파(順世派)는 로까야따라는 산스끄리뜨어의 번역어인데 문자 그대로 ‘세속에 순응하는 학파’라는 뜻이다. 그 시조의 이름을 따서 짜르와까라고 불리기도 했다. 순세파에서는 철저한 물질주의, 유물론를 가르친다. 이 세상에는 오직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네 가지 물질만 존재한다.
우리의 정신은 이런 네 가지 물질에서 파생된 것일 뿐이고 죽으면 모든 것은 끝이다. 윤회는 없다. 지옥이나 천상과 같은 내세가 있다는 가르침은 모두 거짓말이다. 따라서 감각적 쾌락에 탐닉하며 사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이들 순세파의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살아 있을 때 행복을 쫓아라. 빚을 지고 있더라도, 버터와 같은 좋은 음식을 먹어라. 죽어서 육신이 재가 되면, 그 빚을 갚을 필요가 있겠는가?” 불교를 포함해 인도종교의 거의 모든 성전에서는 이들 순세파의 가르침을 자주 인용했다. 그 이유는 오직 감각적 쾌락만 추구하는 천박한 사상의 대표적인 예이기 때문이었다.
순세파는 서력기원전 3~4세기 경 마우리아(Maurya) 왕조 때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다른 모든 종교에서 조롱과 지탄의 대상으로 삼긴했지만 기원후 15세기까지 존속하였고 그 가르침을 하나하나 따져 보면 현대인들 대부분의 세계관, 인생관, 가치관과 크게 다르지 않기에 섣불리 비판하기도 힘들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현대인들을 오염시키고 있는 순세파적인 물질주의와 쾌락주의는 자연과학적 세계관을 바탕에 깔고 있기에 웬만한 인문, 철학, 종교의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현대인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려고 할 때 마주치는 거대한 장벽은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이슬람교와 같은 셈족의 종교가 아니라 자연과학에 근거한 물질주의와 쾌락주의다. 서구사회에서 셈족의 종교들은 설득력을 잃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
교회와 성당이 텅텅 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서구의 모든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종’을 근대화로 착각할 정도로 그 구성원들의 인문사회과학적 판단력이 미숙했는데, 최근 들어 ‘서구의 종교’를 ‘과학주의와 합리주의와 법치’와 구분할 줄 알고 전자가 아니라 후자가 근대화의 원동력이라는 점을 깨달으면서 우리사회에서도 그런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려고 할 때 이런 조짐이 도움이 되는 것만은 아니다. 근대화의 두 가지 그림자, 물질주의와 쾌락주의는 불교에 대해서도 위협적이다. 현대판 짜르와까들은 묻는다. 우리가 윤리적이고 도덕적이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생에 불행하지 않기 위해서? 그렇다면 죽은 후 내생은 있는가? 윤회를 증명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서 이웃종교에서 그러하듯이 “그냥 믿어라”라고 대답할 수만은 없다. 불교는 ‘맹신의 종교’가 아니라 배우고(聞), 따져 본 후(思), 실천하는(修) ‘문사수의 종교’다. 불교를 신행하기 쉽지 않은 이유가 이에 있기도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친 수행자는 그 어떤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현대사회에서 불교를 배우고, 연구하고, 전하는 모든 사람들을 가로막고 선 두 개의 큰 산, 물질주의와 쾌락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연과학과 대립할 것이 아니라, 자연과학의 언어로 불교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