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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선. 묵조선. 선

선문답의 기준과 역할

선문답의 기준과 역할

 

공·중도 선 논리 바탕한

중생심 제거하는 ‘일전어’

살아 있는 禪 정신·기개

 

‘간시궐’, ‘마삼근’, ‘정전백수자’ 등 선문답은 얼핏 보기에는 동문서답을 하고 있는 것 같이 볼 수 있다. 그러나 선문답에는 일정한 기준과 치밀한 선의 논리가 그 바탕에 깔려 있다.

선문답의 기준은 공(空)·진공묘유(眞空妙有)·중도(中道)·불이(不二), 일여(一如)·무아(無我)·무집착(無執着)·무분별(無分別)·몰종적(沒踪迹)·무심(無心)·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불립문자(不立文字)·언어도단(言語道斷)·부사의(不思議) 등 선의 논리에 바탕하고 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참선자로 하여금 차별심과 사량 분별심 제거, 번뇌망념 제거, 집착심과 관념 타파, 인위적인 행동[作爲]과 유아적인 사고 등 중생적인 생각을 버리고 깨닫게 하는 데 있다.

선문답이 이와 같이 공(空)·중도 등 선의 논리에 바탕하고 있지 않고, 사량 분별심 등 중생심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선문답이 아니다. 그런 대화는 밤새도록 주고받아도 깨달음을 이루게 하는 열쇠가 될 수 없다. 그 외에 선시(禪詩)나 오도송, 게송도 마찬가지로 이 기준에서 벗어난다면 그것은 세속인들의 시와 다를 바 없다.

또한 선문답은 두세 가지 정도 역할을 한다. 첫째, 참선자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한다. 결정적인 한마디에 눈이 번쩍 하면서 깨닫게 되는데, 그것을 일전어(一轉語)라고 한다. 중생에서 부처로 전환, 일전(一轉)하는 말이라는 뜻이다.

둘째, 선승과 선승 사이에 주고받는 선문답은 상대방의 경지를 파악하기 위한 역할을 한다. 물론 이때 하수는 고수에게 한 수를 배운다. 초견성자는 방장(方丈) 급에 해당하는 고수들과의 문답, 즉 실전을 통하여 깨달음의 경지를 더욱 탄탄하게 한다. 중국 선종의 역사에서 수천 명의 선승이 깨달았지만, 한 산문(山門)을 개창하여 몇 백 명의 납자들을 지도한 이는 마조, 조주, 임제, 운문 등 30~40명 정도에 불과하다. 쇠를 두들겨서 각종 쟁기를 만드는 기술은 숙련된 대장장이가 아니면 불가능하듯, 수많은 중생을 부처로 만드는 기술 역시 정법안장을 갖춘 노련한 선승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다.

셋째, 선문답은 상대방이 정말 깨달았는지의 여부를 점검하는 역할을 한다. 깨달음을 검증하는 데 어떤 공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정법안장을 갖춘 선사만이 알 수 있는 것으로, 그 검증 방법이 바로 선문답 또는 오도송이다. 그리고 스승과 제자 사이의 선문답은 제자의 공부를 테스트하는 역할을 한다. 물론 스승의 한마디에 깨닫는 경우도 있다. 깨닫지 못한다면 그 말은 화두가 된다.

짧은 선문답(법거량)을 통하여 상대방의 경지, 공부 여부를 가늠하자면 방장이나 조실의 안목이 탁월해야 한다. 안목을 갖춘 유능한 선사라면 상대방이 내뱉는 한두 마디만 들어도 곧바로 그 경지를 간파한다.

당송시대의 선승들은 주로 선문답을 통하여 깨달았다. 이를 본다면 선문답은 깨달은 부처를 탄생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전등록〉 6권 백장회해 장(章)에 수록된 ‘선문규식’에는 선문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학인(賓)과 선사(主)가 서로 묻고(問) 답(酬)하여 종요(宗要, 핵심)를 드높이고 발분(發憤)시키는 것은, 이것은 법에 의하여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賓主問酬, 激揚宗要者, 示依法而住也)”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선문답이 곧 살아 있는 선의 정신이고 기개임을 명확히 하고 있는 것이다. 선문답이야말로 선불교의 가장 값진 모습이요, 아름다운 모습이다. 또한 활발하게 수행하고 있는 선자(禪者)들의 생동감 넘치는 생활상이다.

 

윤창화 도서출판 민족사 대표 ggbn@ggbn.co.kr

[출처] 선문답의 기준과 역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