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한철학회 논문집 철학논총 제82집 2015ㆍ제4권 붓다의 연기법과 불교의 연기설 – 연기해석학들에 대한 의문 – 박태원(울산대) [한글 요약] 연기의 원형사유는, 모든 현상을 ‘조건에 따른 성립/발생’(緣起, paṭic a-samuppāda, paṭic a/緣하여 sam/함께 uppāda/일어남)으로 보아 ‘성립/발생의 조건들’과 ‘조건들의 인 과적 연관’을 포착하려는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붓다의 연기법을 파악하기 위 한 관문은 ‘조건에 따른 성립/발생’이라는 말의 의미와 초점이다. 이 말의 의미와 초점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연기해석학의 계보들, 즉 ‘불교의 연기설’들이 갈라진다. 붓다는 이 ‘조건에 따른 성립/발생’이라는 원형사유를 가히 전방위적(全方位的)으로 일관되게 적 용한다. 붓다 삶의 모든 범주와 내용이 이 원형사유에 의해 직조(織造)되고 있다. ‘붓다의 연기법’과 ‘불교의 연기설들’ 사이에는 초점의 다양한 자리이동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불교의 연기설들’, 그 연기 해석학들은, 비록 ‘조건에 따른 성립/발생’이라는 연기 원형사 유의 중요한 ‘부분 의미들’을 포착하여 나름대로 정교하게 이론화시키는 기여를 하지만, 동 시에 간과할 수 없는 ‘초점 이동’을 수반하고 있다. 삶과 세계의 문제들을 연기법으로 이해 하고 풀어가고자 할 때, 연기법의 원형사유에 초점을 두어 ‘연기의 법칙언어’에 의거하는 것과, ‘불교 연기설들’의 프레임으로 접근하는 것은, 통하면서도 어긋난다. 불교의 연기설 들은 붓다의 연기법이 지닌 의미와 생명력을 발굴하는 동시에 제한시켜 온 측면이 있다. 연기법에 의한 삶과 세상의 치유, 개인과 세계의 연기법적 합리화를 향해 전방위적(全方位 的)으로 작동해야 할 붓다의 연기 깨달음은, ‘불교 연기설들’의 특정한 해석학적 프레임 안 에 갇혀 연기법 본연의 삶/세계 치유력이 제한 내지 왜곡되지 않았는가를 물어볼 필요가 있다. 남방과 북방의 연기해석학들이 제공해 온 연기적 개안이, 일상의 실존문제들을 ‘조건 인과적’으로 파악하여 개인과 사회를 ‘조건인과적 합리성’으로 치유하는 힘으로 이어졌다 고 보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불교전통에서 ‘수행’이나 ‘깨달음’의 문제가 흔히 일상이나 사 회의 문제와 괴리되어 버린 것은, 근원적으로 ‘붓다의 연기법’과 ‘불교의 연기설들’ 사이에 서 발생한 초점의 이동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주제분야 : 불교철학, 인도불교, 초기불교 주 제 어 : 연기법, 연기의 원형사유, 연기해석학, 연기법적 치유, 조건인과적 합리성 218 박 태 원 Ⅰ. 불교학 방법론의 문제 - 주석(註釋)/교학(敎學)적 독법과 철학적 독법 ‘불교를 축으로 삼아 형성된 것들에 대한 학적(學的) 탐구’는 모두 불교학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불교학의 내용을 학문 범주별로 구별할 때는 ‘불교학’ ‘불교 사학’ ‘불교문학’ ‘불교철학/불교윤리학’ ‘불교문화/예술’ ‘응용불교’ 등으로 나뉜 다. 이처럼 불교학이라는 개념은 총괄적 의미로 채택되기도 하고, ‘불교에 관한 학적 탐구’ 안의 고유범주를 지칭하기도 한다. 맥락의 엄밀한 구분 없이 사용된다 는 점에서, ‘불교학’은 융통성 있는 개념이기도 하고 애매한 용어이기도 하다. ‘불교에 관한 학적 탐구’ 내의 고유범주로서의 불교학도 그 의미와 내용은 명 료하지 않다. 이런 경우의 불교학은 ‘교학에 관한 탐구’가 그 핵심의미를 차지하 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교학 탐구의 방법론을 주도하는 것은, 문헌학과 주 석학의 결합 형태이다. 언어학과 서지학에 의거한 문헌학적 탐구와, 불교용어와 이론에 대한 선행(先行) 주석의 의미 파악과 체계적 재구성이 결합되어, ‘교학의 전통체계’를 호교적(護敎的)으로 재구성해 가는 방식이 불교학 방법론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종학(宗學)불교의 근대적 계승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헌학과 주석학을 기반으로 하는 교학적 불교학은 불교 이해와 탐구의 기초 를 확립한다는 점에서 유익하고 또 필수적이다. 그러나 교학적 불교학은 이제 그 출구를 전망하고 준비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방법론의 폐기가 아니라 중심자리 의 다원화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문헌과 주석의 이론과 개념을 체계적으로 분류/ 분석한 후 그 문헌학적/주석학적/교학사상적 의의를 확인하는 작업은, 학문적 요청의 상당부분을 충족시킨 것으로 보인다. 지속되어야만 하는 번역/재번역의 축적작업을 제외하고는 학문적 기여도를 확보할 작업영역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 다는 의미이다. 게다가 기존 불교학의 방법론적 관행을 그대로 답습하는 작업에 대한 비판적 시선도 점차 고조되고 있다. 생각하건대, 관행적 방법론에 의한 연구 물들이 현대의 다양한 언어지형들과 접속하여 상호작용하는데 취약할 뿐 아니라, 일정한 해석학적 자기제한에 갇혀 있다는 것이 비판의 주된 배경으로 보인다. 문헌학/주석학/교학이 결합하여 구성한 기존의 불교학 방법론과 연구내용은, 주석과 교학이론을 수립한 선행 해석학적 시선에 대한 이해와 정리에 그치는 경 향이 농후하다. 남방/북방의 해석학적 안목들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계승하는 것 은 교학의 주된 과제가 분명하다. 그런데 교학에 관한 탐구들이 암암리에 공유하 는 전제가 있다. 붓다가 보여준 길이 선행 교학에 의해 온전하게 드러났다고 하 는 믿음이다. 그리하여 남방과 북방의 해석학적 안목들을 정확하게 이해하여 선 붓다의 연기법과 불교의 연기설 219 택하거나 종합하기만 하면 충분할 것이라 여기는 것이, 교학 일반의 암묵적 전제 인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는 과연 얼마나 타당할까? 붓다의 지혜와 그것을 계승하려는 통찰의 계보를 불학(佛學)이라고 불러본다면, 불학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 질문에 대해 응답하는 과정에서 수립되었다고 본다. 첫째는 ‘붓다의 언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이다. 이 질문에 대한 응답이 현재 우리가 접하는 남방 과 북방의 다양한 교학이다. 둘째는 ‘교학은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되고 있는가?’ 이다. 주석학적 전통과 그것을 계승하는 형태의 현대 불교학은 대부분 이 질문에 대한 응답이다. 셋째는 ‘기존 교학은 얼마나 타당하며 또 충분한가?’이다. 부파불 교 내부의 이론 공방, 아비담마 교학에 대한 대승의 비판, 중관과 유식의 상호비 판, 연기(緣起)에 대한 이해의 다양한 전개 등이 이 질문에 대한 응답들이다. 불학 형성의 이러한 과정을 볼 때, 현재의 불교학은 전반적으로 두 번째 질문 에 경도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붓다의 언어에 대한 ‘해석학적 이해의 선행 전 통들’인 교학을 파악하고 정리하는 작업에 편향되어 있다. 문헌학적 기초를 단단 히 다지면서 진행된 이러한 작업의 가치는 결코 과소평가 할 수 없다. 그러나 근/ 현대 불교학에서 축적된 성과들은 이제 그동안 소홀히 했던 두 가지 질문 앞에 다시 호출된다. ‘기존 교학은 얼마나 타당하며 또 충분한가?’와 ‘붓다의 언어를 어 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 다시 응답해 보라고 요청한다. ‘교학은 얼마나 정확 하게 이해되고 있는가?’에 대한 응답도 지속적으로 탐구해야 하지만, 불교학이 계 속 이 질문에 편향되어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불학의 생명력이 유지되려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이 균형 있게 탐구되어야 한다. 갈수록 불교학 방법론 이나 연구내용에 대한 비판적 갈증이 고조되는 근원적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으 로 보인다. 불학 형성의 세 질문 가운데 하나에만 치우친 편향성의 후유증이다. 이제 불학에 참여한 학인들은, 불학을 형성해 온 세 가지 질문 모두를 품어보 는 균형성을 회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세 질문이 골고루, 그리고 개방적으로 탐 구되어야, 붓다의 길은 지속적으로 그 면모의 온전함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낼 것 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철학적 읽기’의 좌표가 부각된다. 철학적 읽기야말로 세 가지 질문 모두에 동시적으로 응답하려는 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교학에 대한 정확한 이해인가?’를 무전제의 열린 성찰로 탐구하는 동시에, ‘기존 교학은 얼마나 타당하며 또 충분한가?’를 기존의 해석학적 권위에 구애받지 않고 탐구하며, 그리하여 ‘붓다의 언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궁극 관심사로 삼 아 지속적으로 재응답해 보려는 성찰적 태도. - 이것이 불교의 철학적 읽기이다. 철학적 읽기가 가능하려면, 무엇보다도 이미 확립된 교학과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해석학적 시선들에 집착하거나 지배받지 않을 수 있는 ‘자유의 자리’를 확보 220 박 태 원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미 신행(信行)의 제도와 현실을 규정하고 있는 교학적/해석 학적 관행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 있으려면, 탐구하고 수용하지만 머물지 않는 ‘열 린 유동성’, 만나면서도 헤어지는 ‘접속하되 거리두기’가 가능해야 한다. ‘기존 교 학은 얼마나 타당하며 또 충분한가?’에 응답하며, 마침내 ‘붓다의 언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답해 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해석학적 토대 자체를 재음미 /재구축하려는 ‘철학적 정신’ 요청된다. 교학 구성의 원점으로 작용하는 사유 자체를 철학적으로 성찰하는 것은, 붓다의 권고에도 상응한다는 점에서 가히 ‘불 교적’ 다. 서구의 사변적 언어실험실 도구들을 불교 언어에 이식하는 것이 ‘불교 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대신해서는 안 된다. 붓다의 진리탐구 정신과 방법론을 계승한 ‘불교언어의 철학적 성찰’은, 현행 불교학에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철학적 불교학’의 결핍을 채울 수 있는 긴요한 과제로 보인다. Ⅱ. 붓다의 연기법과 불교의 연기설들 “연기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보고 진리를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1)는 말은 아마 도 연기법의 위상을 가장 적절히 담아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붓다의 교설에서 차지하는 연기법의 위상이나 연기법의 의미에 대한 이해는 다양한 해석 학적 선택지가 되어 왔다. 붓다의 깨달음(自內證) 내지 깨달음의 핵심을 연기법으 로 간주하는 관점은 이미 학계에서 지적되어 온 것처럼 연기법의 의미를 공성(空 性)으로 이해한 대승의 공(空)교학을 배경으로 한다.2) ‘12연기의 논리적/무시간 1) 코끼리 발자취에 비유한 작은 경(Cūḷahatthipadopamasutta)(M1:175)(전재성 번역 맛 지마니까야,,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9) 2) 대승교학 연구자들은 소의경전의 문헌학적 취약성을 보완하기 위해 대승교학의 해석학적 우월성을 확보하려는 태도가 강하다. 근대 이후의 일본불교학계가 보여준 전반적 노력은 이러한 태도의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공사상을 붓다 연기사상의 핵심으로 정초(定礎)하려는 관점은 소의경전의 문헌학적 정통성을 지닌 아비달마 전통에 대해 해석 학적 정통성으로 대응하려는 대승 전통의 전략이다. 그러나 연기설의 이해를 중심으로 한 대승 교학자들의 대응이 니까야/아함 연기설의 본래 취지와 상응하지 않는다는 비판적 시 선도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다. 이 비판의 핵심은 니까야/아함의 연기설은 대승의 공(空) 교학이 해석하는 것처럼 ‘상의적 관계 → 무자성 → 공성(空性)’의 천명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니까야/아함이 전하는 붓다의 연기설은 괴로운 삶을 발생시켜 윤회하게 하는 조 건들의 인과적 연쇄를 밝히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12연기를 삼세양중인과로 해석하는 유 부(有部)의 분위연기설(分位緣起說)과 같은 발생학적/태생학적 관점이 연기설의 맥락을 적 절히 계승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슈미트하우젠(Schmithausen)(「12지 연기형식에 관하 여」, 안성두 번역, 『불교학리뷰』3권, 금강대, 2008);三枝充悳(『바웃드하 불교』, 中村 元 공 붓다의 연기법과 불교의 연기설 221 적 해석’은 대승 공(空)교학의 영향에 의한 것으로서 12연기 본래의 취지와는 부 합하지 않는다고 하는 비판적 시선은 분명 경청할 대목이 있다. 연기법의 이해를 12지연기설 유형에 국한시키는 학계 일반의 태도에는 동의하기 어렵지만, 연기법 을 ‘상호의존의 관계 → 무자성 → 공’으로 읽어버린 나가르주나 공 교학의 문제 점을 지적하는 것은 충분히 타당하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대승의 공 교학이 12 연기 본래의 취지와 다르다는 점에 초점을 두고 있는데, 논자는 비판의 근거를 달리한다. 연기법의 핵심과 취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연기법에 대한 공 해석학(이하 ‘공연기’라고도 부른다)을 평가하는 내용이 달라지는데, 연기법에 대 한 논자의 관점은 공연기 해석학은 물론 아비달마를 비롯한 여타의 연기해석학들 과도 초점을 달리한다. 니까야/아함에 의거하는 한, 붓다의 궁극 깨달음에 배대할 수 있는 개념은 열 반이다. 따라서 붓다의 깨달음과 연기법을 등치시키는 것은 교설의 체계상 부적 절할 수 있지만3), 붓다가 연기법에 각별한 의미와 위상을 부여하고 있는 것은 명 백해 보인다. 그리고 연기에 대한 해석학, 즉 연기 교학들은 크게 네 가지 계열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12연기에 대한 삼세양중인과설(有部의 分位緣起說)과 유 식연기설(經量部/唯識), 연기법의 핵심을 ‘상호의존의 공성(空性)’으로 이해하는 공(空)연기설(반야/중관), 연기법의 초점을 ‘상호관계’에 두고 그것을 주로 세계관 에 적용하는 관계연기설(화엄 법계연기)이 그것이다. 이 외의 연기설 유형들은 이 네 계열의 어느 하나 내지 둘 이상을 기본으로 하여 변형 내지 파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남방 보수전통에서는 12연기를 삼세양중인과설로 이해하는 유부(有部) 의 관점이 연기해석학의 적손(嫡孫)이고, 북방 진보전통에서는 공연기와 유식연 기 및 관계연기가 연기해석학의 적손 자리를 놓고 경합을 벌여왔다. 그런데 이들 네 유형의 연기 해석학은 붓다의 연기법을 얼마나 적절히 그리고 충분히 파악하고 있는 것인가? 네 유형의 연기이해는 분명 상이한 연기해석학이 다. 유부의 관점에 대한 경량부나 대승의 비판, 대승 진영에서의 중관·유식의 상 호비판과 갈등은, 연기해석학 상호간의 차이에 대한 인식을 반영한다. 오늘의 문 저, 혜원 역, 김영사, 1991); 박경준(「초기불교의 緣起相依說 재검토」,『한국불교학』14집, 1989);안성두(「유가사지론의 연기설」, 『불교학연구』5호, 2002.);권오민(「연기법이 불타 자 내증이라는 경증 검토 – 불타 깨달음은 연기법인가?(1)」, 『보조사상』27집, 2007/「사성제 와 12연기 – 불타 깨달음은 연기법인가?(2)」, 『한국불교학』47집, 2009) 등에서 그러한 비 판적 시선을 확인할 수 있다. 3) 권오민은 연기법을 붓다 깨달음의 내용(自內證)으로 간주하는 관행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연기법이 불타 자내증이라는 경증 검토 – 불타 깨달음은 연기법인가?(1)」;「사성제 와 12연기 – 불타 깨달음은 연기법인가?(2)」). 대승교학과 불교학계가 얼마나 공연기 프레 임에 갇혀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시켜 준다. 222 박 태 원 헌학적 시선으로 볼 때, 적어도 문헌적 근거로는 남방전통이 해석학적 우위를 차 지한다. 그러나 비록 남방전통이 니까야를 소의경전으로 삼고는 있어도, 남방교 학에서의 연기이해는 나름대로의 연기해석학으로서 ‘불교의 연기설’로 보아야지 ‘붓다의 연기법’과 등치시킬 수는 없다. 엄밀히 말해 남방교학 자체가 니까야가 전하는 붓다의 언어에 대한 하나의 해석학적 선택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초기불 교 연구자들이 흔히 남방교학이나 주석서에 기대어 니까야 이해의 정통성이나 정 확성을 자부하는 것은 많은 경우 부실한 자신감으로 보인다. 반면에 대승교학은 비록 문헌적 정통성에서 취약함을 보이지만, 그 해석학적 안목이나 가치는 결코 가볍지 않다. 특히 선종 선불교의 안목은 니까야의 선학(禪學)을 탐구하는 데 독 특하고도 중요한 기여를 한다고 생각한다.4) 남/북의 교학전통에 소속된 구도자와 학인들은 이제 자기 전통에서 전승되는 연기설 이해를 붓다의 연기법과 식별하여 탐구할 수 있는 문헌학적 근거를 지니 게 되었다. 남방교학 전통은, 자신들의 연기 이해가 12연기 유형에 국한되고 있으 며, 그 이해조차 붓다의 연기 언어에 대한 주석서와 아미담마 교학의 해석학적 선택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또한 대승교학 전통은 공연기와 유식연기 및 관 계(법계)연기 모두가 붓다 연기법에 대한 해석학적 선택이라는 점을 수긍해야 한 다. 그리하여 ‘붓다의 연기법’과 그에 대한 해석학적 선택인 ‘불교의 연기설’을 구 분하여 탐구할 필요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붓다의 연기법’과 ‘불교의 연 기설’을 그 어떤 전통 해석학적 권위에도 갇히지 말고 탐구해야 한다. 그 어떤 가 능성도 열어놓고 음미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붓다의 연기법’과 ‘불교의 연기설들’ 사이에서 겹침과 어긋남을 동시에 목격한다. 이 글은 특히 어긋남을 주 목하는 하나의 시도이다. ‘니까야/아함의 연기법’ 하면 곧 ‘12연기’를 떠올리게 된 것은, 12연기 유형을 연기법의 유일한 방식이라 이해한 주석가와 교학자들의 ‘연기 이해’에 영향을 받 기 때문이다. 유부(有部) 연기해석학의 프레임(frame)에 갇혀 버린 결과이다. 12 연기설 유형은 고통 구조에 빠진 현재의 생이 어떤 조건인과의 연쇄에 의해 발생 하였는가를 설명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지만, 전생과 현생 및 미래생의 윤회 4) 「정념의 의미에 관한 고찰」(『철학논총』41집, 새한철학회, 2005);「화두를 참구하면 왜 돈오 견성하는가?」(『철학논총』58집, 새한철학회, 2009); 「간화선 화두 간병론과 화두 의심의 의 미」(불교학연구 27호, 불교학연구회, 2010); 「언어, 붙들기와 여의기 그리고 굴리기」(동 아시아불교문화 7, 동아시아불교문화학회, 2011; 「돈점논쟁의 독법구성」(철학논총 제69 집, 새한철학회, 2012); 「돈점 논쟁의 쟁점과 과제 – 해오 문제를 중심으로」(불교학연구 32호, 불교학연구회, 2012); 「돈오의 두 유형과 반조 그리고 돈점 논쟁」(철학연구 46집, 고려대학교철학연구소, 2012) 등을 통해 논자는 이러한 관점을 발전시켜 가고 있다. 붓다의 연기법과 불교의 연기설 223 전생(輪廻轉生)을 인과적으로 설명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12연 기에 대한 삼세양중인과설은, 윤회의 연속을 과거세·현재세·미래세의 시간계열 속에서 인과적으로 설명하고 싶은 시선(들)이 자신(들)의 선호를 붓다의 12연기 언어에 투영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유부의 연기해석학은 ‘연기법에 관 한 윤회언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붓다의 12연기 교설의 의도와 취지가 삼세의 윤회전생을 설명하 려는 것이었다면, 거의 모든 12연기 유형들에 태생학적 설명이 명시적으로 나타 나야 자연스럽다. 그러나 니까야/아함이 전하는 12지 연기설 유형들에서 식지(識 支)를 태생과 관련시켜 설명하는 경우는 극히 일부의 특수유형에 불과하다는 점 은, 12연기의 초점이 삼세윤회의 인과연쇄 설명에 있다고 보는 시선을 수용하기 어렵게 하는 강력한 근거 중의 하나이다. 아울러 행(行)이 ‘지금 여기의 몸’인 오 온(五蘊)의 구성조건으로 명시되고 있다는 점,5) ‘지금 여기의 삶’에서 행(行)에 의 한 조건화로부터 풀려나는 것이 해탈/열반의 관문이라는 가르침이 현생의 수행 지침으로 빈번하게 설해진다는 점은, 12연기를 삼세 윤회전생의 인과연쇄로 읽는 시선의 타당성을 근원적으로 제한한다. 그러나 12연기를 삼세 윤회전생(輪廻轉生)의 조건인과 연쇄로 읽을 근거가 12 연기 연쇄식 안에 있다는 점도 부인하기 어렵다. 식(識)과 명색(名色)의 조건인과 가 그것이다. 심신(心身) 현상의 의미와 그것을 발생시키는 조건들의 철학적/과 학적 이해와 무관하게, 명색을 단순히 생물학적 심신 현상으로 간주하는 한, 유부 (有部)처럼 식을 결생식(結生識)으로 간주하여 현생 범주에 배정하든, 세친(世親) 처럼 ‘행(行)에 의해 훈습된 식의 흐름’으로 간주하여 과거생에 배속시키든,6) 윤 회 태생학적 해석이 불가피하다. 그리고 그 결과, 전생·현생·내생의 삼세(三世)인 5) 유부의 삼세양중 분위연기(分位緣起, 時分緣起)설의 연기해석학은 12연기를, 오온의 12단 계의 존재상태(오온의 12 分位)를 인과적으로 배열한 것으로 본다. 12지 연기의 각 항목은 그 단계의 오온이 처한 가장 현저하고 대표적인 현상만을 특징하여 개념화한 것이라고 보 는 것이다(박창환, 「구사론주 세친 연기관의 연속과 불연속」, 불교학연구 38호, 2014). 유 부가 12연기의 각 항목들을 삼세에 배정하면서 각 지(支)를 모두 ‘오온의 존재상태’로 해 석하는 것은, 니까야의 오온 교설이 행온(行蘊)을 금생 오온의 한 구성조건으로서 명시하 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붓다 자신은 12연기의 각 항 목을 오온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없을 뿐 아니라 행의 극복을 현생 해탈수행의 핵심과제로 서 분명히 한다는 점에서, 유부의 이러한 해석은 12연기를 삼세 윤회전생에 대한 인과연 쇄로 읽고 싶은 그들의 관심을 관철하기 위한 특수한 해석학이지 붓다의 의도에 부합한다 고 보기는 어렵다. 6) 식지(識支)를 중심으로 12연기를 태생학적 재생인과로 해석하는 이론을 둘러싼 유부와 경 량부, 세친의 관점은 박창환의 「구사론주 세친 연기관의 연속과 불연속」에 잘 정리되어 있다. 224 박 태 원 과이든 전생·현생의 이세(二世)인과이든, 12연기를 윤회전생의 조건인과를 밝히 는 연쇄식으로 해석하게 된다. 생각하건대, 12연기에는 상이한 해석학적 선택을 가능케 하는 두 가지 맥락이 중첩되어 있다는 점을 수용해야 할 것이다. ‘현생 고(苦)의 발생을 현생의 경험적 조건들에 의한 인과적 발생으로 포착하는 맥락’ 하나이고, ‘삼세로까지 확장할 수 있는 윤회전생의 조건인과 연쇄를 설명하는 맥락’ 다른 하나이다. 두 맥락 모두 시간계열과 무관하지 않다. 모든 경험적 조건의 인과적 연관은 시간계열에 연루되기 때문이다. 12연기를 윤회 태생학적 발생연기로 해석하는 것을 비판하면 서 시간과 무관한 논리적 인과관계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자칫 이 점을 놓치기 쉽 다. 현존 니까야/아함의 붓다 교설에서 행(行)이 ‘지금 여기의 몸’(五蘊)의 구성조 건으로 명시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다양한 연기지(緣起支) 연쇄식의 대부분에서 윤회 태생학적 언급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아울러 붓다의 진리관을 관통하는 원 리 하나가 ‘경험 가능한 것들을 진리의 대상과 기준으로 삼는’ 경험주의라는 점을 감안할 때, 12연기가 전자(前者)의 맥락에서 구성된 인과연쇄식일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인다. 그러나 이런 맥락으로 접근하려면, ‘무명-행-식-명색’의 조건인과를 ‘현재생의 현상들’에서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에 대한 철학/생물학/심리학/ 물리학/뇌과학 탐구의 축적물들을 고려하면, 그러한 이해와 설명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인과의 상속(相續)을 해명하려는 노력에서 등장한 경량부와 유식의 종 자훈습설이나 알라야식설도 그 시사하는 바가 유용하다. 12연기를 후자(後者)의 맥락에서 접근하는 것은, 중생 삶의 인과적 전개가 삼세에 걸쳐 연속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자연스럽다. 그러나 12지의 항목들을 전생과 현생 및 미래생에 배정하 여 설명하는 방식은, 니까야/아함이 전하는 붓다 교설의 취지나 내용들과 상당 부분 충돌하여 붓다 교설의 정합성을 훼손한다. 만약 두 가지 맥락을 충돌관계가 아닌 결합관계로 처리할 수 있는 독법을 확보할 수 있다면 출구가 보인다. 이러 한 독법은 조건들의 인과적 상속(相續)을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 것인가에 따라 그 가능성이 결정된다. 유식연기설은 유부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식지(識支)에 초점을 두 고 인과의 상속문제를 식(識)을 축으로 설명하는 해석학적 차별화를 시도한다. 그 결과 종자훈습, 알라야식, 지각경험의 인식론적 성찰, 그에 의거한 해탈체계의 인 식론적 구성 등에 관한 통찰을 축적하면서, 마침내 새로운 연기해석학으로서의 고유성(固有性)을 확보하게 된다. 이러한 유식연기설은 12연기를, ‘지금 여기’의 실존적 고통(苦)을 발생시키는 인식문법 성립의 조건인과 연쇄로서 이해하는 길 붓다의 연기법과 불교의 연기설 225 을 연 것으로 보인다. 유식연기는 12연기를 읽는 시선의 초점을 ‘삼세윤회의 인과 적 해명’로부터 ‘지금 여기에서의 열반’(現法涅槃)의 성취조건인 ‘마음의 문법문 제’로 옮길 수 있는 분기점을 수립한 것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유식의 연기해석 학은 ‘연기법에 관한 인식언어’라 할 수 있다. 공연기 해석학은 연기 정형구에서 ‘상호의존의 관계’를 읽은 후, 그 상호의존성 의 의미가 ‘공성(空性)’의 천명에 있다고 이해한다. ‘자아’로 불리는 현상은 여러 조건들(五蘊)에 의한 발생이고, 그 조건들은 예외 없이 변화(無常)하므로, 불변/ 독자/절대의 본질·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붓다 무아교설의 핵심이 다. 반야/중관의 시선은 ‘조건에 따른 성립/발생’(緣起)이라는 통찰의 핵심의미를 ‘상호의존성’으로 파악하여 무아, 즉 ‘실체/본질적 자아의 부재(不在)’를 입증하는 논거로 채택하는 동시에, ‘공(空)’이라는 존재론적 개념을 연기법의 결론으로 채 택한다. 연기법의 핵심을 ‘공성’으로 치환(置換)한 것이다. 니까야/아함이 전하는 붓다의 연기법은 ‘조건에 따른 성립/발생’이라는 법칙 성을 드러내는 ‘법칙언어’이지, 의존적 ‘존재’나 ‘존재’의 의존성에 관한 기술(記 述), 즉 ‘존재언어’가 아니다. 모든 존재론의 토대는 존재와 비존재를 본질/실체적 으로 지시하려는 ‘있음(有)/없음(無)’이라는 개념인데, 붓다에게는 이 개념 자체가 비(非)연기적인 것으로서 사실적 근거가 없다. 따라서 붓다는 존재론의 토대가 되 는 유/무 개념의 실체주의적 환각을 ‘연기의 법칙’으로써 치유하여 본래의 ‘조건 적 상태’를 드러내려고 할 뿐, 별도의 존재론적 범주나 개념을 수립하지 않는다.7) 그런데 반야/중관은 실체/본질의 존재론을 깨뜨리기 위해 새로운 존재론적 개념 을 선택하였다. ‘공’이라는 개념으로써 ‘있음(有)/없음(無)’의 개념을 비판하고 대 체한다. 비록 희론적멸(戲論寂滅)한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중도를 세워, 개념환각 에서 초래한 본질/실체의 존재론적 사유를 해체하려 하지만, 그 해체의 수단으로 선택한 공성이라는 개념이 존재/비존재의 개념에 대응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결 국 존재론적 범주에 빠져들어 간다. 본질/실체의 존재론을 무본질/무실체의 존 재론으로 치환한 셈이다. 다만 공의 존재론은 본질/실체를 수립하는 ‘자성정립 (自性定立)의 존재론’ 아니라, 그 어떤 실체적 정립도 깨뜨려 버리는 부정의 계 기를 그 내부에 품은 ‘자성해체의 존재론’ 다. 그런 점에서 공연기 해석학은 ‘연 기법에 관한 존재언어’라 하겠다. 생각하건대, ‘연기법’의 초점을 ‘실체나 본질의 존재론적 부재’(무자성)로 이해 7) 『깟짜나곳따 경(Kaccānagotta-sutta)』(S12:15)(각묵 번역『상윳따 니까야』, 초기불전 연구 원, 2009) 226 박 태 원 하여 ‘공’이라는 말로 치환한 순간부터, 붓다의 연기법은 성립/발생의 조건성을 지시하는 ‘법칙언어’에서 조건의존적 존재양상을 지시하는 ‘존재언어’로의 자리이 동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연기의 법칙언어’는 ‘성립/발생의 조건들’과 ‘그 조 건들의 인과적 연관’을 주목하게 하지만, ‘연기법에 관한 존재언어’는 ‘상호조건적 의존관계인 공성으로서의 존재양식’을 주목하게 한다. ‘연기의 법칙언어’로써 본 질/실체에 대한 환각을 치유하는 것과, 공과 같은 ‘연기에 관한 존재언어’로써 본 질/실체 관념을 깨뜨리는 것은, 같은 목적지를 지향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과 정이나 결과가 같지 않다. 이 글에서 더 이상 상론(詳論)하기는 어렵지만, 그런 점 에서 공(空)교학의 등장은 불교사상과 논리의 발전인 동시에, 연기법의 맥락에서 는 초점 이동의 철학적 분기점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초점 이동은 ‘본 질/실체 절대주의’를 ‘공 절대주의’로 치환하는, 절대주의 사고의 또 다른 표현으 로 볼 가능성을 수반한다. 절대주의 사고는 공 교학뿐 아니라 유부(有部)의 사고 에도 깊숙이 개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절대주의적 사유와 연기법적 사유의 차이에 관한 문제는 불학(佛學)의 근본과제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 과제는 ‘붓 다의 연기법’과 ‘불교의 연기설들’ 간의 연속/불연속의 판별문제와 맞물려 있다. 법계연기와 같은 관계연기론은, ‘연기’를 상호의존적 관계로 읽는 시선을 발전 시켜 ‘관계의 세계’를 ‘연기(緣起)와 성기(性起)의 지평’ 등 다양한 지평으로 포착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세계관적 연기해석학이다. 공연기와 마찬가지로 ‘상호의존 의 관계성’을 주목하면서도 ‘공성의 존재론’에서 ‘관계의 세계관’으로 자리를 이동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화엄적 관계연기 해석학은 ‘연기법에 관한 세계언 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Ⅲ. 연기해석학들의 초점이동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imasmiṁ sati idaṁ hoti/此有故彼有 ).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난다(imassuppādā idam uppajjati/此生故彼生). 이것이 없 을 때 저것이 없다(imasmiṁ asati idaṁ na hoti/此無故彼無). 이것이 소멸할 때 저것이 소멸한다.(imassa nirodhā idaṁ nirujjhati/此滅故彼滅).”8)라는 연기법 정 형구야말로 붓다 연기법의 원형사유로서, 모든 연기해석학은 이에 대한 ‘이해의 선택들’이라 생각한다. 연기(緣起, paṭic a-samuppāda)/연이생(緣而生/緣已生, 8) 『십력경(十力經) 1(Dasabala-sutta)』(S12:21)(각묵 번역『상윳따 니까야』, 초기불전 연구원, 2009) 등. 붓다의 연기법과 불교의 연기설 227 paṭic a-samuppanna)/차연성(此緣性, idappaccayatā) 등은 이 연기 원형사유를 담아내는 개념들로 보인다. 이 연기법 정형구는, 12연기를 추상화시켜 압축한 것 이라는 통설과는 달리, 12연기가 이 원형사유의 한 변주(變奏)로 보아야 한다. 연기의 원형사유는, 모든 현상을 ‘조건에 따른 성립/발생’(緣起, paṭic a-samuppāda, paṭic a/緣하여 sam/함께 uppāda/일어남)으로 보아 ‘성립/ 발생의 조건들’과 ‘조건들의 인과적 연관’을 포착하려는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한 다. 따라서 붓다의 연기법을 파악하기 위한 관문은 ‘조건에 따른 성립/발생’이라 는 말의 의미와 초점이다. 이 말의 의미와 초점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연 기해석학의 계보들, 즉 ‘불교의 연기설’들이 갈라진다. ‘조건에 따른 성립/발생’은, 범주 크기로는 가장 넓고 원리 층위(層位)로는 가장 상위(上位)를 차지한다. ‘삼세 에 걸친 윤회전생 조건들의 인과연쇄식’이나 ‘상의적(相依的) 관계의존성’이라는 개념은, ‘조건에 따른 성립/발생’이라는 개념의 부분집합이나 하위개념이다. 그리 고 12연기 유형은 이 원형사유의 무수한 적용들 가운데 하나의 방식이다. 연기법 원형사유의 의미와 위상 및 적용범주와 방식을 제한적으로 소화하고 특화시킨 것 이 ‘불교의 연기설들’ 며, 그러한 해석학적 특화(特化)와 편향성이 교학의 역사 를 통해 나름대로의 권위를 축적시켜온 것일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남/북방의 교학전통과 불교는 연기해석학들의 특수한 프레임에 갇혀, ‘조건에 따른 성립/발 생’이라는 원형사유의 위상과 의미를 혹 상당부분 놓치거나 놓쳐버릴 위험성에 노출된 것일 수 있다. 붓다는 이 ‘조건에 따른 성립/발생’이라는 원형사유를 가히 전방위적(全方位 的)으로 일관되게 적용한다. 붓다 삶의 모든 범주와 내용이 이 원형사유에 의해 직조(織造)되고 있다. 사성제만 해도 그 전형적 사례이다. 고·집성제는 ‘고(苦)라 는 현상과, 그 현상을 성립/발생시킨 조건들 및 그 인과적 연관’을 밝히는 고·집 연기이고, 멸·도성제는 ‘열반과, 그것을 성립/발생시키는 조건들 및 그 인과적 연 관’을 밝히는 멸·도 연기이다. 따라서 사성제는 ‘사정제 연기’라 불러도 된다. 이 렇게 보면 붓다 교설 내에서의 최고위상이 연기법이냐 사성제이냐를 따지는 일은 무의미한 논쟁이 된다.9) 니까야/아함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붓다의 바라문 혈통주의 비판도 연기법의 한 적용이다. 붓다는 본질적 순혈주의에 의한 인간 및 계층차별론을 견지하는 바 라문의 관점을 비(非)본질의 연기적 혼혈론으로 비판한다. 불변의 본질을 계승한 9) 권오민의 「연기법이 불타 자내증이라는 경증 검토 – 불타 깨달음은 연기법인가?(1)」;「사성 제와 12연기 – 불타 깨달음은 연기법인가?(2)」)는 연기법과 사성제를 별개의 것으로 간주 하여 전개하는 논의이다. 228 박 태 원 혈통의 우월성을 경험적/사실적 근거 없이 주장하는 바라문의 순혈주의에 대해, 붓다는 출생의 생물학적 조건, 계층의 유동성 등 관찰과 검증이 가능하며 변화하 는 경험적/사실적 조건들을 논거로 혈통이 본래 연기적 잡종성이라는 점을 일깨 워준다.10) 본질적 순혈주의에 대한 붓다의 비판을 단지 바라문 전통에 대한 종교 적 대립으로 읽어버린다면, 연기법이 지닌 삶과 세계치유의 의미와 범주를 부당 하게 제한하는 것이 된다. 바라문을 정점으로 삼아 위계적으로 차별화된 혈통주 의적 신분차별 체계는, 특정집단의 이익과 기득권을 정치·사회·경제를 비롯한 모 든 영역에 배타적이고 영속적으로 관철시켜 가려는 본질주의 보편 이데올로기이 며, 붓다의 연기적 사유는 이 본질주의 이데올로기를 해체한다는 점에서 세계치 유의 원천이기도 하다.11) 한 가지 사례만 더 확인해 보자. 흔히 붓다는 고행을 비판한다고 알려져 있다. 붓다 당시에도 그러한 인식이 널리 펴져 있었을 것인데, 앙굿따라 니까야는 이와 관련한 외도들의 비판과 붓다의 응답을 전하고 있다. 그 기록에 따르면, ‘붓다가 고행을 무조건 비난한다’고 항변하는 외도들에 대해 붓다는, ‘고행에 대한 자신의 평가는 조건적’이라면서 그 평가의 조건을 밝히는 동시에, 자신의 모든 판단은 언 제나 ‘조건에 따라’ 행하는 것이지 무조건적으로 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한 다.12) 개인과 사회의 온전한 지평(實在, reality) 회복을 겨냥하는 연기법의 초점을 ‘연기의 법칙언어’로써 포착하느냐 아니면 ‘연기법에 관한 윤회/인식/존재/세계 의 언어’에 의해 파악하느냐 하는 것은, 철학적으로나 실천적으로 간과하기 어려 운 차이가 있다. 생각하건대, ‘붓다의 연기법’과 ‘불교의 연기설들’ 사이에는 초점 의 다양한 자리이동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불교의 연기설들’, 그 연기 해석학 들은, 비록 ‘조건에 따른 성립/발생’이라는 연기 원형사유의 중요한 ‘부분 의미들’ 을 포착하여 나름대로 정교하게 이론화시키는 기여를 하지만, 동시에 간과할 수 없는 ‘초점 이동’을 수반하고 있다. 삶과 세계의 문제들을 연기법으로 이해하고 풀어가고자 할 때, 연기법의 원형사유에 초점을 두어 ‘연기의 법칙언어’에 의거하 는 것과, ‘불교 연기설들’의 프레임으로 접근하는 것은, 통하면서도 어긋난다. 붓 10) 앗쌀라야나의 경(Assalāyanasutta)(M2:147)(전재성 번역 맛지마니까야, 한국빠알리성전 협회, 2009). 유사한 내용의 설법이 에쑤까리의 경(Esukārīsutta)(M2:177), 바쎗타의 경 (Vāsețțhasutta)(M2:196), 쑤바의 경(Subhasutta)(M2:196)에도 등장한다. 11) 논자는 「‘깨달아 감’과 ‘깨달음’ 그리고 ‘깨달아 마침」에서 연기법의 치유력을 깨달음의 문제와 관련시켜 거론한 바 있다. 12) 『왓지야마히따 경(Vajjiyamāhita-sutta)』(A10:94)(대림 번역 앙굿따라 니까야, 초기불전 연구원, 2006) 붓다의 연기법과 불교의 연기설 229 다의 연기법은 본질/실체주의의 ‘무조건/절대의 시선’을 치유하여 삶과 세계의 온전함을 구현하는 목표로 수렴된다. 이 목표는 모든 ‘불교의 연기설’ 공유한다. 문제는 치유의 방식 및 내용에서 발생한다. ‘붓다의 연기법’과 ‘불교의 연기설들’ 사이에 발생한 초점의 이동, 그로 인한 차이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일까? 예를 들어 보자. 갑과 을이 서로를 향해 “너는 나쁜 사람이다”라고 비난한다. 서로 ‘무조건’적으로 “네가 나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양자 모두 상대방의 말을 수용할 수가 없게 되어 불화만 커진다고 하자. 잘못된 이해의 이유와 내용을 파 악하고 사실에 부합하는 온전한 이해로 나아가는 힘은, 진리를 추구하는 구도자 들이 확보해야 할 핵심능력이다. 깨달음과 진리의 성취는 이 능력과 정합적(整合 的)일 수밖에 없다. 갑과 을이 이 다툼을 공사상으로 풀어보려 한다고 하자. 그들은 ‘너’ ‘나쁘다’ 등의 개념이 공하다는 것을 성찰하여 ‘너와 나’ ‘좋음과 나쁨’의 분별에 매이지 않 으려 할 것이다. 무실체/무본질의 공성을 성찰함으로써, 실체나 본질로 보는 분 별과 그것에서 발생하는 독단이나 독선에서 풀려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 한 변화가 과연 사태의 진실을 회복하고 문제를 해결한 것일까? 오해를 수정하여 바로잡고, 엇갈리는 주장을 조정하여 불필요한 다툼을 치유하는 문제해결이 이루 어진 것일까? 분별을 내려놓고 독단/독선을 거둘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사실에 부합하는 이해로 나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조건이다. 그러나 충분하지는 않다. ‘분별하지 않는다/독선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과, ‘사실대로 이해한다/적절하 게 판단한다’는 것은, 결합되어 있기는 하지만 범주가 다른 문제이다. 분별하지 않고 독선에 붙들리지 않지만,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거나 적절하게 판단하지 못할 수 있다. 사실대로 이해하고 적절하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연관된 조건들’을 포착하고 ‘그 조건들의 인과관계’를 파악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모든 현상이나 문제를 ‘조건에 따른 성립/발생’으로 보고 ‘성립/발생의 조건 들’과 그 ‘인과적 연관’의 포착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연기법의 생명력 이다. 따라서 붓다의 연기법에는 두 가지 초점이 있다. 하나는, ‘조건에 의한 성립 /발생’이라는 말에서 본질주의/실체주의가 안고 있는 ‘무조건/절대/독자/불변’ 의 사고방식과 허구를 해체하는 능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조건들의 인과적 연관’을 포착하여 잘못되거나 바람직하지 못한 인과연관을 수정함으로써 문제를 풀어내는 것이다. 붓다 자신은 연기법의 이 두 가지 의미를 실존의 모든 영역에 적용시켜, 해탈/열반의 길을 여는 동시에 세계의 치유를 시도하고 있다. 연기법의 핵심을 ‘상호의존의 공성(空性) 천명’으로 간주한 공연기는, 붓다의 230 박 태 원 연기법이 지니는 두 가지 초점 가운데 하나에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독자/절대의 사고방식과 본질/실체의 허구를 깨뜨리는 힘은 계승했지만, 성립/ 발생의 조건과 그 인과적 연관을 포착하려는 시선을 품는 데는 결핍이 생긴 것으 로 보인다. ‘너는 나쁜 사람’이라는 주장에 대해 ‘너’ ‘나쁨’이라는 개념의 비실체 성/공성을 성찰하게는 하지만, ‘나쁜 사람이라는 판단을 발생시킨 조건들과 그 조건들의 인과적 연관’을 포착하려는 시선을 살리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만 약 연기법의 두 가지 초점을 모두 품는다면, ‘나와 너, 좋음과 나쁨’에 대한 무조 건/절대/실체/본질적 규정과 분별을 놓아버릴 뿐 아니라, ‘나/너’의 자아관념, ‘좋음/나쁨’의 판단을 성립시킨 조건들과 그 인과적 연관도 살펴, ‘나와 너’ 구별 의 ‘조건적 유효성과 허구성’, ‘좋음과 나쁨’ 판단의 ‘조건적/제한적 타당성과 부 당성’을 읽어내는 능력이 향상된다. 그 결과 자기견해의 수정과 보완, 다른 견해 의 ‘조건적’ 비판과 수용이, 구체적 내용을 갖추면서 향상하게 된다. 구체적 문제 해결의 원천능력이 발달하는 것이다. 구체적 문제해결력을 높여 견해의 배타적 충돌을 치유하는 실존 화쟁(和諍)의 길은 그럴 때 선명해진다. 이러한 문제는 비단 공연기 해석학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삼세양중연 기, 유식연기, 관계(법계)연기 해석학에서도 같은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만일 이 런 지적이 타당하다면, ‘붓다의 연기법’과 ‘불교의 연기설들’ 사이에 발생한 초점 이동이 초래한 문제점을 주목해야만 한다. 불교의 연기설들은 붓다의 연기법이 지닌 의미와 생명력을 발굴하는 동시에 제한시켜 온 측면이 있다. 연기법에 의한 삶과 세상의 치유, 개인과 세계의 연기법적 합리화를 향해 전방위적(全方位的)으 로 작동해야 할 붓다의 연기 깨달음을, 혹 특정한 해석학적 프레임 안에 가두어 버린 것은 아닌가 물어볼 필요가 있다. 종교적 배경을 기반으로 강력한 해석학적 권위를 확보한 ‘불교의 연기설들’은, 그들의 프레임으로 연기법의 삶/세계 치유 력을 제한 내지 왜곡시켜 버리지는 않았는지를 묻게 된다. Ⅳ. 연기해석학 전통들의 과제 그리고 원효 붓다의 연기법이 겨냥하는 것은, 온전한 연기적 통찰력(明知)이 조건이 되어 드러나는 해탈/열반의 지평이라는 점에서, 긍정지평임이 분명하다. 진리다운 내 용의 온전한 구현을 ‘긍정’이라 칭하면 말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붓다는 이 긍 정지평을 확정적 언어로 표현하지 않는다. 해탈이나 열반이라는 용어도 ‘속박으 로부터 풀려남’ ‘탐진치의 불길이 꺼짐’의 의미이므로, 부정적 상태의 해소를 ‘조 붓다의 연기법과 불교의 연기설 231 건으로 발생하는’ 긍정내용을 지시하는 조건적 기술법(記述法)이지, 긍정내용을 언어에 본질처럼 안치하는 확정기술법이 아니다. 사선(四禪) 국면에 대한 기술에 서 등장하는 ‘기쁨’(pĩti, 喜)이나 ‘행복’(sukha, 樂) ‘평온’(upekkhā, 捨) 같은 긍정 용어도 그 전후맥락을 보면 조건형 기술이다. ‘어떤 조건들을 갖추면’이라는 조건 문에서의 경험현상을 지칭하는 것이지, 명칭이 품고 있는 본질을 규정하려는 확 정적 기술이 아닌 것이다. 붓다는, 긍정내용이든 부정내용이든, 모든 현상을 언제 나 ‘연기적’으로, 다시 말해 ‘조건적으로’ 기술한다. 연기법을 언어용법에서도 관 철하고 있는 것이다. 붓다가 긍정내용을 확정적 언어에 담지 않으려는 것은, 연기법의 언어적 관철 일 뿐 아니라, 확정적 언어용법에 수반하는 ‘자아환각이나 본질/실체 관념의 증 식(增殖)가능성’을 예방하려는 고려일 수 있다. 예컨대 ‘진정한 자아(眞我)’나 ‘대 아(大我)’ 같은 용어는 이미 범람하는 절대/실체의 아뜨만 관념과 쉽게 결합할 수 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그런 용어를 회피했을 수 있다. 그러한 확정적 언어용법 은 연기 지평을 왜곡할 수 있는 ‘부절적한 언어용법’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 다. 그리고 언어에 대한 붓다의 이러한 태도는 진리구현의 긍정지평을 확정적 언 어로 확인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갈증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수행의 목표와 근거 를 확정적 긍정언어로 적극적으로 제시할 때라야 목표를 향한 구도자의 성취의지 와 대중 설득력이 확보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붓다의 언어방식이 못내 아쉬 웠을 것이다. 붓다의 연기법적 언어용법과 용어선택의 세심한 고려는 대승불교의 과감한 시 도로 인해 그 연속성이 교란된다. 대승불교는 ‘진여(眞如)’ ‘불성(佛性)’ ‘여래장(如 來藏)’ ‘진심(眞心)’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 등의 긍정 확정형 명사들을 과감하 게 채택하면서 종래의 갈증을 해소하려고 했다. 수행목표나 근거에 대한 명료한 긍정적 제시의 필요성, 대중적 호소력의 확보 등이 고려되었을 것이다. 수행의 목 표와 근거를 긍정 확정형 용어로써 명시하려는 대승의 시도는, 붓다가 그토록 비 판하고 경계하는 실체/본질주의의 덫을 스스로 설치한 것이기도 하다. 이른바 여 래장비불설(如來藏非佛說) 논란도 여기서 발원(發源)한다. 생멸 변화하는 모든 현 상의 근거이자 그 현상의 기저(基底)에 존재하는 불생불멸의 그 무엇, 마음의 심 층에 존재하는 불생불멸의 바탕이면서 생멸하는 세계를 창출하는 원점. - 그것이 여래장/진여/자성청정심/진심/일심이며, 개별 존재들의 우주적 동일성과 보편 성의 근거라고 읽는다면, 유식/여래장의 언어는 실체/본질을 선호하는 존재 형 이상학의 불교적 위장(僞裝)이 되고 만다. 여래장/본각/진심 등의 긍정 확정형 용어와 연기법의 결합은 깨달음의 문제를 일종의 ‘본체 신비주의’로 변질시킬 수 232 박 태 원 있다. 연기 깨달음의 지평을 현상 너머의 신비영역으로 올려버리고, 연기법을 ‘본체-현상적 발생인과’로 변질시켜, ‘지금 여기’의 경험세계를 조건인과적으로 치 유해 가는 연기법 본래의 실존치유력을 훼손 내지 마비시켜 버릴 수 있다. 연기법 이해에 있어 ‘조건에 따른 성립/발생’에 초점을 두는 것과, ‘12연기적 조건인과의 연쇄체계’(삼세양중인과설과 유식연기설)나 ‘상호의존의 공/관계‘(공 연기/화염연기)에 초점을 두는 것은, 그 의미의 범주와 층위가 다르다. ‘조건에 따른 성립/발생’이라는 ‘연기의 법칙성’은 ‘연기법에 관한 윤회/인식/존재/세계 의 언어’를 부분집합 내지 하위원리로서 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반대는 아니다. 연기해석학들은 모두 ‘조건에 따른 성립/발생’의 통찰에서 파생되었지만, ‘성립/ 발생의 조건들과 그 인과적 연관’의 파악에는 취약하다. ‘12연기적 조건인과의 연 쇄체계’에 관한 윤회/인식 해석학의 프레임에 갇히면, 12연기나 유식연기의 조건 인과 연쇄식 이외의 실존의 무수한 조건인과 양상들과 문제들에 대해서는 무관심 하거나 무력할 수 있다. 또 공/관계 해석학의 프레임에 지배되면, 존재의 공성(空 性)과 무분별 및 의존적 관계에만 집중한 나머지, 역시 다양한 실존문제들의 ‘성 립/발생 조건들과 그 인과적 연관’ 파악에는 취약하여 문제해결 능력에 결핍이 발생한다. 남방과 북방의 연기해석학들이 제공해 온 연기적 개안이, 일상의 실존 문제들을 ‘조건인과적’으로 파악하여 개인과 사회를 ‘조건인과적 합리성’으로 치 유하는 힘으로 이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불교전통에서 ‘수행’이나 ‘깨 달음’의 문제가 흔히 일상이나 사회의 문제와 괴리되어 버린 것은, 근원적으로 ‘붓다의 연기법’과 ‘불교의 연기설들’ 사이에서 발생한 초점의 이동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니까야/아함에서 확인되는 붓다의 언행은 연기 통찰에 의한 세계의 ‘조건인과 적 치유’, 다시 말해 ‘연기법적 합리화’였다고 본다. ‘연기법적 합리화’라는 말은, 개인과 사회에 관한 관점과 행위들 및 그에 의거하여 수립된 질서나 제도를 ‘무조건적/절대적 사고’로써 왜곡하려는 본질주의/절대주의/실체주의의 허구와 오 염을, ‘조건인과적 사고’로써 간파하고 수정하며 치유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연기법적 합리화는, 해탈이라는 궁극적 문제풀이 뿐만 아니라 일상과 세계의 모든 실존문제를 사실관계에 맞추어 유익하게 풀어가는 해법이다. 따라서 연기법은 모든 실존치유의 근원적 힘으로 작동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 신분·계층· 인종·성·지역·국가·시장·종교·이념의 통념·관행·질서·제도를 장악하여 오염시키는 ‘무조건/절대/본질적 사고’의 허구와 폭력을 간파하고 치유하는 것이 연기법 의 실존치유력이다. 붓다 자신도 이 연기 해법을 개인의 해탈 문제뿐만 아니라, 신분·혈통·신념·종교·직업·언어 등 모든 실존문제에 일관되게 적용하여 풀어가고 붓다의 연기법과 불교의 연기설 233 있다. 연기법을 개인의 존재해탈 해법으로 국한시키려는 경향은, 연기법의 제한 이나 왜곡일 수 있다. ‘불교의 연기설들’은 모두 이러한 문제점에 명시적으로나 암묵적으로 연루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불교의 연기설들’을 계승해 온 전통은 연기법 본래의 실존치유력을 복원시켜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원효(617-686)를 다시 보게 된다. 흥미롭게도 그는 『대승기신 론』의 이문(二門)을 ‘조건적 발생의 인과계열 구분’이라는 의미로 읽어, 불교교 학의 통섭(通攝)적 소통과 견해다툼의 치유(和諍) 작업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마음지평을 두 계열로 식별하는 기신론의 이문(二門, 心眞如門과 心生滅門)은, ‘삶/세계의 왜곡과 오염을 발생하는 조건인과의 계열’(生緣起)과 ‘본래의 온전함 으로 되돌리는 조건인과의 계열’(滅緣起)을 시설하는 12연기의 구조를 계승한 것 으로 볼 수 있다. 만약 생멸문과 진여문을 각각 ‘생멸하는 현상’과 ‘불생불멸의 본 체’로 간주하고, ‘현상을 떠나 본체로 귀환하는 것이 기신론 이문의 의미’라고 읽 어버리면, 이문 본래의 연기법적 의미는 퇴색 내지 변질되어 버린다. 기신론에 대 한 전통 주석들과 현대의 이해가 이런 식의 독해에서 얼마나 자유로운지 의문이 다. 문(門)을 ‘조건인과의 계열’로 본 후, 문(門)식별에 의한 ‘견해의 조건적 이해’ 는 교학적 독단과 오해, 주장의 배타성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 원효의 생각이 었고, 그는 이러한 ‘문(門) 식별의 담론(談論)’을 ‘화쟁’에 적용하고 있다.13) 원효 가 교단이나 출가 승려의 제도적 관행과 권위에 갇히지 않는 행보를 펼칠 수 있 었던 힘도, 승려라는 신분이나 교단이라는 제도마저 ‘조건적으로 발생한 현상’으 로 볼 수 있는 ‘문(門) 식별’의 연기 통찰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불교 연기설들’ 의 전통 속에서 ‘붓다 연기법’ 본연의 실존치유력을 포착하는 한 사례를 원효에게 서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원효의 사례를 연기법 실존치유력 복원의 모델 로 삼을 수는 없다. 니까야/아함이 전하는 ‘붓다의 연기법 언어들’을, ‘불교 연기 설들’의 해석학적 전통과 권위에 안주하거나 갇히지 않고 탐구해 가는 철학적 태 도가 가장 신뢰할만한 길잡이일 것이다. 13) 『원효의 십문화쟁론 –번역과 해설 그리고 화쟁의 철학-』 (박태원, 세창출판사, 2013)은 이러한 관점의 산물이다. 234 박 태 원 참고 문헌 1. 원전류 전재성 번역 맛지마니까야,,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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