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철학의 핵심적 전제인 무아론은 참된 나(atman)라는 것이 존 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실체적 자아의 부정이 불교 철학의 다른 개념인 업이나 윤회와 양립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끊 임없이 문제가 제기되어 왔다. 본고는 이러한 무아론과 업의 상충되 는 부분을 식(識) 개념의 분석을 통하여 해소시키고자 한다. 본고에 서는 먼저 불교철학에서 논의되는 업설과 윤회, 무아론에 대한 간략한 관계를 밝힌 뒤, 식 개념의 도입을 통하여 초기불교가 어떤 방식으로 업의 담지를 설명하고 있는지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그리고 이 식 개념이 유식철학으로 나아가면서 어떤 형태로 발전되어 나가는지에 대해 검토한 뒤, 식 개념이 무아론과 업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매개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의를 살펴볼 것이다.
2. 불교철학에서의 업설과 윤회, 무아론의 관계
불교철학은 업 개념을 인도철학적 맥락에서 수용하되 무아론의 전 제 하에서 변용하고 있다. 본래 이 업(karma)의 개념은 브라만 전통 에서 비롯한 것으로, 모든 인도철학에 있어서 절대적인 대전제가 되 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 이 업 개념은 여기서 행위의 인과율과 관련 된 것이다.
인도철학에서의 행위는 서양철학적 맥락에서의 행위와 내용이 다소 다르다. 서양철학의 전통에서 행위가 자연과 자유 사이에 위치하는 것이라면, 인도철학에서의 행위는 순전히 자연적 인과율에 종속된다. 인도철학은 행위를 자연과 무관한 의지가 자연계 내에서 발하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따라서 자유 의지라는 것은 서양철학적 맥락에서처럼 자연과 무관하게 발휘되는 부분이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인과율 내에 종속된 상태에서 제한적으로 발현 가능하 다.
2) 이런 전제 하에서 업은 우주적 근원력, 즉 자연의 인과율의 분 할로 이해될 수 있다.
3) 이러한 업의 인과율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 바로 윤회(samsara)의 세계이다. 이런 전통적인 업의 개념을 불교철학은 무아론과 접목시킨다. 불 교철학에서의 무아론은 윤회에서의 업을 짓는 항구불변한 주체로서 의 나[我, atman]를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변화하는 것이며, 그 렇기 때문에 항구불변한 주체 역시 당연히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밀린다팡하(Milinda-panha)?에 있는 이러한 비유를 통해 불교의 무 아론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보다 확실하게 규명할 수 있다. “그 불꽃은 초저녁과 밤중과 새벽녘의 불꽃과는 다릅니까?” “존재 (法)의 상속이 연속하는 것입니다. 생하는 것과 멸하는 것은 서로 다 르지만, 서로 앞 것도 아니요 뒷 것도 아닌 것처럼, 동시적으로 연속 되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같지도 않고 다른 것도 아닌 그런 것으 로서 마지막 의식에 의해 통섭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등불이 연속 하는 것으로 인식되기 마련입니다].” (Milinda-panha 40)
4)
1) 길희성,?인도철학사?, 민음사, 1984, p. 28 참조.
2) 붓다와 자이나교에 의해 업(행위)의 개념이 윤리화된 이후, 인도철학에서 업의 작용기제는 기계적이지만, 업 자체는 생명체의 의도와 관련되고 있 다. 불교에서는 업을 思業(=의도)으로 정의하고 있는 데에서 이러한 연관성 을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업은 기계론적 방식으로 재생의 조건을 결정하지만, 인간의 자유의지와 관련된 행위의 결정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3) 사사키 겐준(佐佐木現順), 業の思想 , レグルス文庫, 1984, 국역본: 진열, ? 業硏究 -業의 原理와 그 再解釋-?, 경서원, 1988, p. 52 참조.
4) 위의 책, pp. 57-58 재인용. 무아론과 업설의 매개로서의 식 119 따라서 이런 무아론 하에서는 항구불변한 주체는 인과율과 관계없 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찰나에만 순간적으로 존재 하는 연속적인 주체들
5)이 역시 인과율에 종속되면서, 동시에 인과율 에 종속되지 않는 역동적인 행(行, sankhara)의 과정을 통해 인과율의 원리에 의해 업을 끊임없이 생산해 내며, 불교철학에서는 이러한 과 정이 바로 윤회의 과정이 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떠 오르게 되는 난점은 이러한 윤회의 연속성을 어떻게 계속해서 변하 는 주체가 담지할 수 있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명료하 게 해결하고자 이 항변하는 주체의 성질을 규명하고자 하는 시도가 제기되는데, 그것이 바로 오온(五蘊) 개념의 도입이다. 이 오온은 윤 회적 맥락에서 인간이 세계와 관계하는 하나의 틀, 즉 범주들
6)로 이 해된다. 이 오온은 이렇게 세계를 받아들이는 제한된 과정이다.
7) 이 러한 과정을 통하여 항변하는 인격적 주체는 윤회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오온에서 업을 담지하게 되는 역할을 맡게 되는 식(識)개념이야말로 업설과 윤회, 그리고 무아론을 연결하는 중심적 인 고리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식 개념은 초기 불교철학의 심신이원론적 특성을 잘 드러내어 보여주고 있는 개념이다.
8) 3. 식(識)의 초기불교적 성격 3.1. 초기불교에서의 식 개념
5) 여기서 이 주체들은 명(名)과 색(色)으로 이루어진, 항구적인 동일성을 가지 지 않는 연속되는 찰나 속에서의 순간적 주체이다.
6) 그리고 이러한 범주는 칸트가 인간만이 가지는 선험적 원리(a priori)로서 범 주를 말하는 것과는 달리 모든 생명체가 세계를 바라보는 틀로 이해된다.
7) Rune E. A. Johansson, The Dynamic Psychology of Early Buddhism, London, Curzon Press, 1979, 국역본은 ?불교 심리학?, 박태섭 역, 시공사, 1996, p. 146. 본서의 주요 내용은 원문과 국역본을 대조하며 읽었다.
8) 이러한 심신이원론적 특성에 대해서는 아래의 식 개념에 대한 규명을 통해 본격적으로 상술하겠다. 120 철학논구 제39집 식(vinnana, vijnana)은 ‘분간하다’라는 뜻의 동사 ‘vijanati’에서 파 생되었듯이 우리의 앎과 관련된 능력이다.
9) 이러한 맥락에서 식은 오온의 한 요소로서 설명된다. 오온은 우리의 여실지견을 제한하는 하나의 ‘조건’으로서의 범주이고, 여기서 식은 이 조건 중 ‘분별심’과 관련된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식은 어떻게 분별하게 되 는가? 초기불교에서 식 개념의 도입은 육근(六根), 육경(六境)과 관련 된다. 육근은 업에 의하여 조건화된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 (身), 의(意)의 여섯 가지 인간의 감각기관
10)이며, 육경은 이 인식능 력의 대상이다. 즉 우리의 감관들은 각각에 해당하는 특별한 자극에 의해 반응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각각의 육경-육근에 해당하는 안 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의 여섯 가지 식이 만들어진다. 이를 육식(六識)이라고 한다. 여기서 식은 이 감관들이 받아들인 질료들을 담는 개별적인 그릇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식은 질료들을 단 지 들어온 그대로 담는 것은 아니다. 식은 ‘분별력’이기 때문이다. 즉, 각각의 육근이 받아들인 감각적 자료들은, 감각 그 자체로 들어 오는 것이 아니라 식의 분별을 거쳐 마음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이러 한 과정을 통하여 불교철학에서 우리의 인식구조는 육근과 식이 함 께 작용하는 심신이원론적 구조로 설명된다.
3.2 초기불교에서의 식 개념과 업의 관계 따라서 이러한 초기불교적 맥락에서 식은 우리가 외부에서 받아들 인 질료들을 담는 그릇으로, 인과율에서 대우주인 세계가 소우주인
9) 위의 책, pp. 67∼74. 10) 여기서 의식은 앞의 전오식(前五識)과는 다소 구분되는 사유작업의 구성적 측면을 나타내는 것이겠지만, 넓은 의미에서 의식을 우리의 육체적 조건에 있어서의 두뇌의 작용으로 본다면, 육체적 조건의 맥락에서의 받아들인 감 각자료들을 개념화하고 종합화하는 ‘두뇌의 감각방식’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의식을 설명하는 것이 보다 초기불교에 서의 육근을 바라보는 관념과 더 잘 부합하는 것이라고 본다. 오히려 전오 식과 의식을 구분하는 관점은 유식의 관점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무아론과 업설의 매개로서의 식
121 인간 안으로 들어와 주관 안에 구성되는 계기이다. 이런 맥락에서 식 은 인간을 인과율의 세계 내에 포섭하는 근본적인 능력이 된다. 식의 내적 조건으로서의 6근 역시 이미 업에 의한 인과율에 의해 조건지 어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식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우리 안 에 가져오지도 않는다. 식은 근본적으로 분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식은 분별을 통해 우리를 끊임없이 인과율의 세계로 끌어 들인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식은 이런 인과율의 세계로 우리를 끌어 들임과 동시에 분별력을 통해 주관 안에 세계를 구성한다. “눈에 보이는 색(色)들이 있다. 색은 욕망을 일으키고 쾌락을 주며 기쁘게 만든다. 사랑스럽고 흥분을 일으킨다. 수행자가 색을 사랑하고 형체를 환영하고 그것에 집착하면……그의 식은 색에 의존하게 되고, 색 위에 세워진다.……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그는 자유를 얻는다.” (Samyutta-nikaya IV 102.)11) 식은 근본적으로 오온의 구성요소로서, 다른 오온의 구성요소들과 함께 작용하여 성장하고 증가하고 풍부해진다.12) 즉 식은 심상이나 감각, 행위 등에 의지하고 이것들을 모음으로서 발전하고, 이렇게 함 으로써 식은 이러한 인과율의 세계의 대상들을 끊임없이 받아들임으 로써 업의 과보를 받는 주체로 기능하게 된다.13) 그리고 이러한 식 의 작용이 바로 12연기법에 있어서의 취(取, upadana)가 된다. 그리 고 이렇게 만들어진 취에 의해 조건지어져서 업을 받기에 적합한 재 생의 장소를 취하는 유(有, bhava)가 이어지며, 나아가 윤회에서의 재 생(再生)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4. 초기불교 맥락에서 식 개념의 난점
11) 위의 책, p. 78.
12) 위의 책, p. 71. 오온은 근본적으로 집착하는 것에 의해 모이고 쌓이는 것 이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위의 책, p. 77. 참조.
13) 위의 책, p. 72. 122 철학논구 제39집 그러나 이렇게 초기불교적 맥락에서의 식 개념은 중요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이 식이 우리의 의식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만 발현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의식 활동을 하지 않 는 상태, 수면상태나 무의식 상태에서 식은 작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 인다. 왜냐하면 식은 이러한 상태에서 어떤 감각적 자료도 받아들이 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태를 설명하지 못하는 식 개 념은 업의 연속성을 설명하는 데는 다소 명료하지 못한 어려움이 있 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의식과 의식 사이에서 식은 연속되기보다는 단절되는 것으로서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기불교에서 논하 는 식 개념만을 가지고서는 이러한 업의 단절의 난점을 충분히 해명 해 주지 못한다. 둘째로 이러한 식 개념은 윤회의 관점에서 전생과 현생, 현생과 내생을 연결할 때 어떤 식으로 업이 전달되는가에 대해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비록 식이 불교 초기경전에서 재생 시에 모태 로 들어가고 죽을 때 신체를 떠나는 것으로 설명되면서 단절되지 않 는 흐름으로 지속하는 것처럼 여겨지기는 했지만
14), 여전히 초기불교 에서의 식은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단멸적인 개념이다. 따 라서 식이 업의 과보를 받는 주체라면, 전생과 내생 사이에서 이 식 에 의해 업의 과보가 연속적으로 전달된다는 것[윤회]은 식의 단멸성 과 상충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초기불교적 개념으로서 식과 윤회 간의 연관에 대한 물음 은 아비달마 불교에서 정립된 단층적 의식 구조에서 보다 명확하게 그 문제점이 드러났다.
15) 아비달마론자들은 찰나에만 존재하며 끊임 없이 변화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던 초기불교에서의 6식 개념만을 가 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6식 개념의 단층적 의식 구조에서 업의 담 지자 문제를 명확하게 규명해 내지 못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이런 문
14) 안성두, 마음이 작용과 잠재성: 불교 유식학의 알라야식 개념의 형성과 그 의미 ,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11. p. 1. 15) 손영산, 초기유식에 나타난 현상적 인간의 의식구조 -?해심밀경?의 ‘집 수(執受)’를 중심으로- , 서울대학교 대학원, 2008, p. 27. 유식론에서 식 개념의 변용은 주로 이 논문을 참조하였다. 무아론과 업설의 매개로서의 식
123 제점에 직면하여 설일체유부의 득(得) 개념이나 개아론자들의 뿌드갈 라(Pudgala) 개념 등의 보론을 통하여 업의 연속성을 규명해 내고자 시도하였으나, 결국 이들이 도입한 이러한 개념들의 도입은 불교의 대전제인 무아론과 상충되는 개념으로 귀결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 다. 오직 경량부의 종자론만이 유식론에서의 알라야식 개념과 연관되 어 이러한 업의 담지와 윤회의 문제를 규명해 줄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게 되었다.
5. 유식학파에서의 식 개념의 확장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러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던 초기불교에 서의 식 개념은 결국 대승불교에 이르러 경량부의 종자론에 일부 영 향을 받은 유식론에서 인간의 잠재성까지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확장 된다. 이 잠재의식의 도입은 앞서 지적되었던 우선 유식론은 식을 초 기불교적 맥락에서 보다 확장시켜 업의 적극적인 담지자로 끌어올림 과 동시에 심리학적 과정과 다소 유사한 초기불교의 심신이원론적인 식 이론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려 관념론적 차원으로 변용하 기 시작한다. 초기불교가 6식에서의 6근과 6경을 감관과 감각대상으 로 이해하면서 식을 이러한 감각질료들의 분별과정으로 본다면, 유식 론은 이러한 감각대상으로서의 6경이 실재하는지의 여부를 문제로 삼으면서 동시에 관념론으로 이행하였다. 경량부는 6경이 실재하는지는 알 수 없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분별이 작용하는 식을 통해서만 감각대상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대상이 실재하는지의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유가행파는 감각이 식에 의해 분별된다는 관점에서 한층 더 나아가, 우리의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이 모두 마 음 내부에 있으며, 단지 그것이 주체와 대상으로 나뉘는 이유는 인식 작용에서 능동적 작용과 수동적 대상으로 나뉘는 것일 뿐이라고 주 장한다.
16) 이러한 주장은 아비달마론자들이 무아론과 업설을 양립할 124 철학논구 제39집 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한 고민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들은 단멸하 는 6식의 개념을 통해 무아론을 보존하면서 이러한 문제를 부분적으 로는 해결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업이 누구의 업인가라는 업의 보존 기제와 그것의 식과의 관련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는 여전 히 만족할만한 해결을 내려 주지 못한다. 찰나의 조건에 의해 순간적으로 구성된 현상적 존재자들의 흐름 속에서 구성된 순간적인 인식은, 비록 무아론과 업의 양립이라는 문 제를 해결할 수는 있었으나, 한편으로 이 업이 누구에게 귀속되는가 의 문제는 여전히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 현상적 존재자들은 인과의 흐름 속에 위치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찰나의 조 건에 순간적으로 구성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따 라서 이 존재자들은 잠재적 경향성조차 지니지 못하는 무의미한 것 으로 전락할 위험을 항상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존재자들이 의 미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형태가 되었건 간에 ‘자의식’으 로 불릴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하고, 이를 통하여 업의 연속성을 끌 어낼 수 있어야만 한다.
17) 이런 찰나적 존재로서 법이 인과의 흐름 을 구성하고 있다는 아비달마론자들의 전제를 받아들인 유식학파는 이러한 업의 담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 서 유식학파가 새롭게 발견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의식이 쉽게 제거되지 않으며, 새로운 어떤 종류의 식이 이런 자아의식의 근 거가 된다는 것이었다.
18) 한편 업의 상속이나 윤회의 주체 문제는 현상적으로 인간의 인식 경험이 어떻게 축적되는가에 관련되어 있다. 이 축적이라는 것은 따 라서 결국 ‘기억’,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언어의 문제를 포함해서의 문제이다. 그러나 초기불교에서의 6식은 찰나의 감각경험과만 결부되 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마음 안의 것을 상속하는 것과는 구 분된다. 즉, 6식은 찰나적 감각과 결부되어 있기만 한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심리적 측면에서 업과 연속성을 가지기 힘들다. 따라서 초기 16) 같은 논문, pp. 21-22. 17) 같은 논문, pp. 34-35 참조.
18) 같은 논문, pp. 34-35 참조. 무아론과 업설의 매개로서의 식 125 불교에서 12연기법에서의 취와 유에 있어서의 식의 작용은, 감관에 대한 인식능력과 결부된 것으로서의 식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것으 로 변할 수밖에 없다. 식은 취와 유의 작용에 있어서는 감관들에 의 해 이미 분별된 질료들만을 가지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 서의 식은 찰나적으로 생멸하고 작용하는 6식에 대한 개념만을 가지 고서는 충분히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런 난점들로 인해 자의식의 연속성 문제와 인식 경험의 상속에 있어서 기존 6식 개념과의 괴리를 해소시키기 위하여 도입되는 것이 바로 유식론에서의 제8식인 알라야식[阿賴耶, alaya識]개념이다. 유식 론자들은 인간의 잠재의식을 통하여 인간 의식구조를 6식의 단층적 구조에서 무의식을 포함한 중층적 구조로 변용시킴으로써 윤회주체와 업의 연속성 문제를 다른 차원으로 돌려 해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19) 그렇다면 이 알라야식 개념은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을까? 알라야 식은 ‘어디에 부착되어 있다’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우리의 잠 재의식을 의미한다. 이 잠재의식은 6식의 작용을 위한 원인적 조건, 즉 연속되는 자아를 유지시켜주는 잠재의식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연속성을 통해 이러한 모든 업의 종자를 보존하는 장(藏)의 의미에서 일체종자식이다.
20) “제 팔식을 心이라고 한다. 모든 존재의 종자를 모아서 모든 존 재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제 칠식을 意21)라고 한다. 제 팔식을 연 으로 해서 항상 살펴 思量하여 나[我]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나머 지 여섯 가지를 육식(六識)이라고 한다. 각각의 육경(六境)에 대해 거칠게 움직이고 끊어지기도 하면서 (육경에 대한) 요별 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22) 19) 같은 논문, pp. 37-38 참조. 20) 안성두, 같은 논문, p. 3.
21) 여기서의 의는 6식에서의 의식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22) ?解深密經疏?제 3권, X21, 239b. “第八名心, 集諸法種, 起諸法故. 第七名意, 緣第八識, 恒審思量, 爲我等故. 餘六名識. 於六別境, 麤動間斷, 了別轉故.”, 손영산, 같은 논문 p. 40 재인용. 126 철학논구 제39집 알라야식에는 모든 존재의 가능태가 잠재되어 있다. 여기서 존재란 실재로서의 존재가 아닌 정신적인 이미지를 나타내는 가능태이다. 이 알라야식에 의해서 모든 세계의 구성과 인식이 기초되는 것이다.
23) 이러한 알라야식에서 종자들이 발현하는 것을 대상으로 해서 더 상층 부의 식, 제7식의 작용이 있게 된다. 제 7식은 말나식(末那, manas)이 라고 불리는 것으로, 이러한 알라야식의 종자들을 통해 허상으로서의 나[我]라는 생각을 일으킨다. 즉 알라야식의 이러한 종자들이 말나식 에 의해 응집되어 허상으로서의 ‘나’를 구성해 내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6식의 표층적 의식과 더불어 심층적 측면을 가진 7식, 8 식이 함께 설명되는 유식론의 중층적 의식 구조가 성립한다. 이러한 유식학파의 중층적 의식 구조는 무아론과 업설이 양립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면서, 표층적 치원에서뿐 아니라 심층적인 지 평에서 식과 업설을 통합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가능케 했다. 먼저 6 식이 표층차원에서 찰나의 감각 자료들을 받아들여 우리 안에 어떤 감각과 업의 근거들을 만들어 낸다면, 알라야식이 이를 잠재의식의 차원에서 끌어들여 업을 담지하게 됨으로써 업의 연속성 문제가 해 결된다. 다음으로 이러한 알라야식의 작용에 의해, 그 상층부에 있는 제 7식인 말나식이 작용함으로써 자의식이 만들어지게 된다는 설명 을 통하여 이 자의식은 결국 나[我]이고, 식의 작용에 의해 만들어진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이렇게 도입된 알라야식과 말나 식이라는 새로운 식 개념을 통해 유식론의 관념론적 세계관과 인식 주체, 그리고 업의 담지와 무아론의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것이다.
24) 6. 나오며: 식 개념의 의의 초기불교에서 유식론까지 이어지는 식 개념의 변천 과정은 우리의 23) 손영산, 같은 논문, p. 40. 24) 중층적 의식 구조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은 손영산의 위의 논문, pp. 37∼44 를 참조하라. 무아론과 업설의 매개로서의 식 127 정신을 여러 가지 중층적 범위까지 확장시켜 보다 다양한 층위에서 정신현상을 설명하고자 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특히, 식 개념은 무아론과 업설의 연결 고리로서 주체와 인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 해서는 가장 중요한 개념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유식론은 초기불교에 서의 심신이원론적 구조에서 애매하게 남아 있는 업의 외부존재성의 문제를 극단적인 관념론적 구조로 변용시켜 해소시켜 버림으로써, 불 교에서의 무아론과 업설의 모호한 관계를 궁극적으로 해소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유식론의 식 개념은 이러한 잠재의식의 영역을 논의의 장에 끌어들임으로써, 윤리적 탐구의 영역에서도 새로 운 계기를 마련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윤리가 욕구능력과 관계된 것이라면 이러한 욕구의 기저에 어떤 잠재의식이 있는가에 대한 고찰이 수반될 수 있을 것이며, 이 우리가 의식적으로 제약하거 나 움직일 수 없는 무의식의 세계를 윤리학이 어떻게 포섭할 것인지 에 대한 물음을 유식론은 추가적으로 제기하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 가 유식학에서 알라야식 도입의 핵심적 계기이다.
128 철학논구 제39집 참고문헌 길희성, ?인도철학사?, 민음사, 1984. 사사키 겐준(佐佐木現順), 業の思想 , レグルス文庫, 1984, 진열,?業硏 究 -業의 原理와 그 再解釋-?, 경서원, 1988.(역서) 손영산, 초기유식에 나타난 현상적 인간의 의식구조 -?해심밀경?의 ‘집수(執受)’를 중심으로- , 서울대학교 대학원, 2008. 안성두, 마음의 작용과 잠재성: 불교 유식학의 알라야식 개념의 형 성과 그 의미 ,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11. Johansson, R., The Dynamic Psychology of Early Buddhism, London, Curzon Press, 1979. , ?불교 심리학(The Dynamic Psychology of Early Buddhism)?, 박태섭 역, 시공사, 1996.(역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