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십대제자-지혜제일 사리불 ①
▲ 사리불의 아름다운 어머니 사리와 총명한 아버지 티샤 그리고 사리불의 외삼촌 구치라의 젊은 시절 모습이다. 구치라가 만삭의 누나에게 장차 태어날 조카가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세른 세 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예수님의 제자는 12명이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 어부 베드로와 배신자 유다의 이름은 알면서도 정작 부처님의 제자들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바가 없다. 부처님은 서른다섯에 깨달음을 얻은 이후 여든의 나이로 열반에 이를 때까지 장장 45년에 이르는 긴 세월 동안 신분의 귀천이나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진리에 이르는 길을 가르치셨다. 그리하여 부처님께 귀의한 후 생사를 벗어나 사과(四果)를 이룩하고 최고의 경지인 해탈을 성취한 아라한이 무려 1,200명이었다고 한다.
120 : 1, 10대 제자가 되기 위한 경쟁률
이 1,200명 중에서 뛰어난 아라한이 500명이었다고 하며 그 500명 안에서 으뜸이었던 10명의 제자를 10대제자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아라한이 된 제자 1,200명 중 뛰어난 500명에 들어가려면 약 2.4:1의 경쟁률을 뚫어야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이다. 그 500명 중에서 10대 제자 안에 들려면 50:1이라는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어야 한다. 즉, 처음 1,200명의 아라한 전체를 놓고 보자면 에서 으뜸가는 10명이라고 하면 120:1이라는 엄청난 경쟁률이다.
이 정도라면 지옥 같다거나 살인적이라고 불리는 입시나 취업 경쟁률을 너끈히 뛰어넘을 정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 10대 제자라고 불리는 분들은 두말할 것 없이 최고 중의 최고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경쟁이 오직 실력으로 승부가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10대 제자의 출신을 살펴보면 인도 최고 계급인 바라문부터 최하위 천민 계급의 수다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물론 출가자는 부처님께 귀의할 때 이미 세속의 계급이나 재산, 지위 등을 모두 버리고 오직 수행자로써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세속의 습관이나 시선으로부터 단번에 자유로워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10대 제자 중에 천민 계급 출신이 있다는 것은 그래서 더욱 의미가 있다. 반대로 부처님의 속가 신분은 제2계급에 속하는 찰제리였지만 10대 제자 중에는 속가에서 부처님보다 높은 신분인 바라문 출신도 많았다. 이 또한 타고난 계급이나 신분이 아닌 스스로의 선택과 행동이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하신 부처님의 말씀이 교단 내에서 얼마나 잘 지켜졌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부처님께 귀의한 첫 번째 10대 제자, 사리불
아함경 여래의 제자품에서 부처님은 많은 비구들 앞에서 직접 자신의 제자들을 칭찬한다. 그때 부처님은 사리불에게 이런 칭찬을 하셨다.
“비구들이여, 위대한 지혜를 가진 내 제자들 중에서 사리불이 으뜸이다.”
실로 사리불은 부처님의 제자가 된 후 열반할 때까지 교단의 중심적인 인물로써 활약할 뿐 아니라 법화경이나 화엄경 등 대표적인 경전에 항상 언급되며 수많은 천신, 인간, 비구, 중생 등 각 대중들 사이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이끄는 독보적인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사리불은 과연 부처님에게 어떤 제자였으며 어떤 사람이었을까.
사리불은 당시 중인도의 강대국이었던 마가다국 바라문 출신이다. 당시 마가다국은 빔비사라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빔비사라왕과 부처님은 평생에 걸쳐 깊은 우정을 나누었는데 특히 빔비사라왕은 부처님이 출가하여 아직 깨달음을 얻기 전 이미 인연을 쌓았고,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룬 후 승가가 생기자 최초의 사원인 ‘죽림정사’를 기증하기도 했다. 이 빔비사라왕이 다스리는 마가다국에서 부처님은 세 명의 중요한 제자를 얻는다. 그들이 바로 10대 제자 중 상수제자인 사리불과 목건련 그리고 부처님의 뒤를 이었던 의발제자 마하가섭이다.
반야심경을 통해 익숙한 이름, 사리자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다섯 가지 쌓임이 모두 공한 것을 비추어보고 온갖 괴로움과 재앙을 건지느니라. 사리불이여...”로 시작하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은 여느 경전들처럼 ‘여시아문(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으로 시작되지 않고 오로지 부처님의 일방적인 말씀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총 270자로 구성된 짧고도 완전무결한 이 아름다운 경전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부처님의 상수제자인 사리불이다.
사리불(舍利弗)은 산스크리트어 이름 샤리푸트라(Sariputra)를 음역한 것이다. 샤리푸트라(Sariputra)를 의역하면 ‘사리의 아들’이라는 뜻이 된다. 그래서 사리불은‘사리자(舍利子)’로도 불린다. 부처님은 반야심경을 설하시며 사리자의 이름을 두 번 부른다. 반야심경을 독송하다보면 저절로 익숙해지는 이름이 바로 사리불이다. 그렇다면 먼저 사리불에게 이름을 준 부모님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
촉망받는 바라문 가문에서 태어난 사리와 티샤의 아들
‘사리’는 사리불의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의 이름이다. 그녀는 ‘니타라’라는 뛰어난 브라만의 딸이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용모가 아름답고 특히 새처럼 푸르고 깊은 눈을 지녔다고 하여 ‘사리(Rupasari)’라고 불렸다. 사리가 한창 아름답게 성장했을 때 남인도 지방에서 젊은 ‘논사(論師)’로 이름난 바라문 출신의 ‘티샤’라는 청년이 ‘니타라’를 찾아왔다. 뛰어난 두 바라문은 각자의 지식과 철학을 놓고 뜨거운 논쟁을 벌였고 마침내 티샤가 니타라를 이겼다. 이에 왕은 ‘니타라’가 다스리던 마을을 ‘티샤’에게 내렸다.
당시 학문이나 철학으로 왕에게 인정을 받은 바라문들은 왕으로부터 하사받은 마을이나 지역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그런 경우 바라문의 이름을 그대로 마을의 이름이 되었고 니타라처럼 논쟁에서 패배하지 않는 한 왕에게 받은 재산은 대대손손 세습되곤 했다. 그래서 바라문들 사이에서는 논쟁이 매우 중요했고, 뛰어난 논사들은 매우 존경을 받았다. 젊은 논사 티샤는 마가다국에서 단번에 유명해졌다. 남인도에서 온 티샤는 니타라가 다스리던 마을을 받은 후 니타라의 아름다운 딸 사리와 결혼하여 마가다국에 정착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오래지 않아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가 바로 사리불이다.
사리가 첫 아이(사리불)를 임신했을 때, 남동생이자 역시 유명한 논사(論師)였던 구치라(사리불의 외삼촌)가 찾아왔다. 그는 사리에게 ‘누님의 아이는 장차 훌륭한 인물이 되어 나 같은 사람은 감히 따르기도 어려울 것이다’라고 예언을 했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구치라는 훗날 사리불에 의해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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