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룽꺄뿟따 존자는 꼬살라 왕의 보좌관의 아들이었으며 말룽꺄는 그의 어머니 이름이다. 그는 나이가 들어서 외도 유행승(paribbājaka)이 되었다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출가했다(ThagA.ii.170).
그가 부처님께 명상주제를 설해주실 것을 요청하자, 부처님께서는 그가 젊었을 때에는 물질을 탐하여 놀다나(daharakāle rūpādīsu pamajjitvā)연로해져서야 비로소 숲에 들어와 사문의 법을 행하려는 점(araññaṃ pavisitvā samaṇadhammaṃ kareyyāthā)과 뒤늦게나마 수행에 전념하려는 그가 젊은 빅쿠들의 본보기가 되도록 하며 그를 격려하시기 위해서 가볍게 그를 꾸짖으신 후 명상주제를 말씀하시는데(SA.ii.382~383mālukyaputtasuttavaṇṇanā, 초불연 SN 4권 주 128, 129 참조), 그에 관한 내용이 mālukyaputtasuttaṃ(말룽꺄뿟따 경 SN35.95)이다.
mālukyaputtasuttaṃ (말룽꺄뿟따 경 SN35.95)에 나오는 부처님의 말씀 가운데 "여기도 없고 저기도 없고 이 둘의 가운데도 없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런 표현을 두고 설일체유부 등에서는 중유(중음, antarā-bhava)을 인정하는 근거로 삼았다. 기타 이와 같거나 유사한 표현이 토론장 경(SN44.9)이나 찬나경(SN35.87) 등에 나온다.
그러나 부처님의 말씀은 감각주관인 내가 감각대상을 마주할 때 거기에 욕탐(chandrāga)이 간섭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게 되면['그것에 의함'이 없으면] 식(viññaņā, 마음)이 욕계, 색계, 무색계의 중생세간에 머물지 않고[ '거기에'가 있지 않음] 해탈하게 되며. 그로 인해 깨달음을 성취한 아라한의 식(viññaņā)은 그 어떤 곳을 가정하더라도 머물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 것일 뿐 중유가 있다고 한 것이 아니다.
삭까의 질문 경(SN35.118)이나 빤짜시카 경 (SN35.119), 웨샬리 경(SN35.124)이나 왓지 경(SN35.125), 소나 경(AN35.128), 나꿀라삐따경(SN35.131)등에 의하면 "빅쿠가 육내외입처를 즐기지 않고 환영하지 않고 그것에 묶여 있지 않으면, 그로 인해 그의 식(viññaņā)은 그것을 의지하지 않고 그것을 취착하지 않는다. 취착없는 빅쿠는 완전한 열반에 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이처럼 삶을 완성하여 괴로움을 끝낸 자[아라한]는 표현 가능한 그 어떤 곳을 상정하더라도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언급하신 것이고(완전한 열반에 들게 되면 그의 viññaņā은 그 어디에도 찾을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을 뿐), 나아가 부처님은 '중유'라는 개념조차 사용한 적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중유개념은 인간이 임종한 후 저 세상에 가기 전에 머무는 곳이 있고 그때 남아 있는 자들이 천도제를 지내서 (몸없이 마음 혼자) 중유에 머무는 존재를 악처로 떨어지지 않게 하여 천상으로 인도한다고 할 때에만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부처님은 중생을 오취온[색-수-상-행-식에 취착하는 존재]이라 정의하셨기에 몸없이 마음 혼자 존재할 수가 없고[식과 명색의 서로 조건되는 관계, mahānidānasuttaṃ(대인연경 DN15)이나 mahāpadānasuttaṃ(대전기경 DN14) 참조] 중유를 가정해야 할 의미도 없다.
특히 asibandhakaputtasuttaṃ(아시반다까뿟따 경, SN 42.6)에 의하면, 아시반다까뿟따 촌장이 "서쪽 지방에 사는 자들은 임종한 자를 천상으로 인도한다는데 부처님도 그렇게 하실수 있습니까?"하고 묻는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설명하시는데, 죽은 자는 자신의 업에 의해 천상으로도 지옥으로도 가는 것이지 누군가가 빈다고 해서 기도한다고 해서 갈 곳[행처]가 바뀌지 않고 부처님도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단언하셨다.
따라서 중유를 가정하여 천상으로 인도한다면서 천도제를 지내는 것은 부처님을 빙자하여 부처님을 욕보이게 하는 행위이고 불교가 아니다.
아시반다까뿟따 촌장이 말한 서쪽 지방에 사는 사람이란 인더스강 유역의 편잡지방을 근거지로 하는 바라문교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는 바, 죽은 사람을 천상으로 인도한다는 것은 결국 브라만교[힌두교]를 따르는 것이나 다름없다 할 것이다.
한편 mālukyaputtasuttaṃ(말룽꺄뿟따 경 SN35.95)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말룽꺄뿟따 존자에게 간략하게 명상주제를 말씀하시자 말룽꺄뿟따 존자가 그 뜻을 풀어 게송을 읊고,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 다시 되읊음으로써 그 뜻을 인정하시는데,
그 내용은, 우리가 알지 못하고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는 욕망이 일어나지 않듯이, 형색을 보거나 감촉에 닿게 되더라도 알아차림을 갖추고 있으면 애욕에 물들지 않고 그것을 느낄 뿐이기에 그것에 묶이지 않아서 괴로움을 쌓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과로움의 끝이라 한다.
결국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온갖 대상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 순간 순간에 알아차림(sati)하는 것이야말로 괴로움을 만들지 않는 길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향상으로 이끄는 다섯가지 힘(믿음, 정진, 알아차림, 삼매, 지혜) 중 이러한 알아차림의 힘은 사념처 수행을 통해서 향상하게 되는 것이다.
☸ mālukyaputtasuttaṃ(말룽꺄뿟따 경 SN35.95)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왓티의 제따 숲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그때 말룽꺄뿟따 존자가 세존께 찾아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말룽꺄뿟따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제게 간략하게 법을 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세존으로부터 법을 들은 뒤 혼자 머물며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지내고자 합니다.”
“말룽꺄뿟따여, 이미 늙어서 나이 들고 노쇠하고 연로하고 삶의 완숙기에 이른 그대가 이제서야 여래에게 법을 간략하게 설해줄 것을 요청하니, 참으로 내가 젋은 비구들에게는 무엇을 설하겠는가?”
“선서시여, 저는 늙어서 나이 들고 노쇠하고 연로하고 삶의 완숙기에 이르렀습니다. 제게 간략하게 법을 설해 주소서. 참으로 저는 세존께서 말씀하신 뜻을 잘 이해할 것입니다. 참으로 저는 세존께서 해 주신 말씀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말룽꺄뿟따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대가 보지 못했고 전에도 본 적이 없으며 지금도 보지 못하고 앞으로도 보지 못할, 눈으로 알아야 하는 형색들이 있다면 그대는 그것들에 대한 욕구(chanda)나 탐욕(rāga)이나 애정(pema)을 가지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대가 듣지 못했고 전에도 들은 적이 없으며 지금 듣지도 못하고 앞으로도 듣지 못할, 귀로 알아야 하는 소리들이 있다면 그대는 그것들에 대한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을 가지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대가 맡지 못했고 전에도 맡은 적이 없으며 지금 맡지도 못하고 앞으로도 맡지 못할, 코로 알아야 할 냄새들이 있다면 그대는 그것들에 대한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을 가지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대가 맛보지 못했고 전에도 맛본 적이 없으며 지금 맛보지도 못하고 앞으로도 맛보지 못할, 혀로 알아야 하는 맛들이 있다면 그대는 그것들에 대한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을 가지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대가 닿지 못했고 전에도 닿은 적이 없으며 지금도 닿지도 못하고 앞으로도 닿지 못할, 몸으로 알아야 하는 감촉들이 있다면 그대는 그것들에 대한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을 가지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대가 알지 못했고 전에도 안 적이 없으며 지금 알지도 못하고 앞으로도 알지 못할, 마음 (mano)로 알아야 하는 법들이 있다면 그대는 그것들에 대한 욕구나 탐욕이나 애정을 가지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말룽꺄뿟따여, 그대가 보고 듣고 감지하고 알아야 하는 법들에 대해서 볼 때는 단지 봄만이 있을 것이고 들을 때는 단지 들음만이 있을 것이고 감지할 때는 단지 감지함만이 있을 것이고 알 때는 단지 앎만이 있을 것이다.”
“말룽꺄뿟따여, 그대가 보고 듣고 감지하고 알아야 하는 법들에 대해서 볼 때는 단지 봄만이 있을 것이고, 들을 때는 단지 들음만이 있을 것이고 감지할 때는 단지 감지함만이 있을 것이고 알 때는 단지 앎만이 있으면,그대에게는 ‘그것에 의함’이란 것이 있지 않다. 말륭꺄뿟따여, ‘그것에 의함’이 있지 않으면 그대에게는 ‘거기에’라는 것이 있지 않다. 말룽꺄뿟따여, 그대에게 ‘거기에’가 있지 않으면 그대에게는 여기 [이 세상도]도 없고 저기 [저 세상도]도 없고 이 둘의 가운데도 없다. 이것이 바로 괴로움의 끝이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서 간략하게 말씀하신 뜻을 이렇게 자세하게 압니다.
형색을 보고 알아차림을 놓아버려
아름다운 표상에 마음이 쏠려
애욕에 물든 마음으로 그것을 경험하고
거기에 묶여 있고 만다.
형색에서 생겨난 갖가지 느낌들이 그에게서 자라나
간탐과 불쾌함이 마음을 어지럽히나니
이와 같이 괴로움을 키우는 자에게
열반은 자주 멀다고 하리.
소리를 듣고 알아차림을 놓아버려
아름다운 표상에 마음이 쏠려
애욕에 물든 마음으로 그것을 경험하고
거기에 묶여 있고 만다.
소리에서 생겨난 갖가지 느낌들이 그에게서 자라나
간탐과 불쾌함이 마음을 어지럽히나니
이와 같이 괴로움을 키우는 자에게
열반은 자주 멀다고 하리.
냄새를 맡고 알아차림을 놓아버려
아름다운 표상에 마음이 쏠려
애욕에 물든 마음으로 그것을 경험하고
거기에 묶여 있고 만다.
냄새에서 생겨난 갖가지 느낌들이 그에게서 자라나
간탐과 불쾌함이 마음을 어지럽히나니
이와 같이 괴로움을 키우는 자에게
열반은 자주 멀다고 하리.
맛을 보고 알아차림을 놓아버려
아름다운 표상에 마음이 쏠려
애욕에 물든 마음으로 그것을 경험하고
거기에 묶여 있고 만다.
맛에서 생겨난 갖가지 느낌들이 그에게서 자라나
간탐과 불쾌함이 마음을 어지럽히나니
이와 같이 괴로움을 키우는 자에게
열반은 자주 멀다고 하리.
감촉에 닿고 알아차림을 놓아버려
아름다운 표상에 마음이 쏠려
애욕에 물든 마음으로 그것을 경험하고
거기에 묶여 있고 만다.
감촉에서 생겨난 갖가지 느낌들이 그에게서 자라나
간탐과 불쾌함이 마음을 어지럽히나니
이와 같이 괴로움을 키우는 자에게
열반은 자주 멀다고 하리.
법(dhamma)을 알고 알아차림을 놓아버려
아름다운 표상에 마음이 쏠려
애욕에 물든 마음으로 그것을 경험하고
거기에 묶여 있고 만다.
법에서 생겨난 갖가지 느낌들이 그에게서 자라나
간탐과 불쾌함이 마음을 어지럽히나니
이와 같이 괴로움을 키우는 자에게
열반은 자주 멀다고 하리.
알아차리면서 형색을 보고 형색에 물들지 않는 자는
애욕에 물들지 않은 마음으로 그것을 느끼고
거기에 묶이지 않는다.
그는 형색을 보아 느낌을 받더라도
괴로움은 사라지고 자라나지 않나니
이와 같이 알아차리며 유행하네.
이와 같이 괴로움을 키우지 않는 자에게
열반은 가깝다고 하리.
알아차리면서 소리를 듣고 소리에 물들지 않는 자는
애욕에 물들지 않은 마음으로 그것을 느끼고
거기에 묶이지 않는다.
그는 소리를 들어 느낌을 받더라도
괴로움은 사라지고 자라나지 않나니
이와 같이 알아차리며 유행하네.
이와 같이 괴로움을 키우지 않는 자에게
열반은 가깝다고 하리.
알아차리면서 냄새를 맡고 냄새에 물들지 않는 자는
애욕에 물들지 않은 마음으로 그것을 느끼고
거기에 묶이지 않는다.
그는 냄새를 맡아 느낌을 받더라도
괴로움은 사라지고 자라나지 않나니
이와 같이 알아차리며 유행하네.
이와 같이 괴로움을 키우지 않는 자에게
열반은 가깝다고 하리.
알아차리면서 맛을 보고 맛에 물들지 않는 자는
애욕에 물들지 않은 마음으로 그것을 느끼고
거기에 묶이지 않는다.
그는 맛을 보아 느낌을 받더라도
괴로움은 사라지고 자라나지 않나니
이와 같이 알아차리며 유행하네.
이와 같이 괴로움을 키우지 않는 자에게
열반은 가깝다고 하리.
알아차리면서 감촉에 닿고 감촉에 물들지 않는 자는
애욕에 물들지 않은 마음으로 그것을 느끼고
거기에 묶이지 않는다.
그는 감촉에 닿아 느낌을 받더라도
괴로움은 사라지고 자라나지 않나니
이와 같이 알아차리며 유행하네.
이와 같이 괴로움을 키우지 않는 자에게
열반은 가깝다고 하리.
알아차리면서 법을 알고 법에 물들지 않는 자는
애욕에 물들지 않은 마음으로 그것을 느끼고
거기에 묶이지 않는다.
그는 법을 알아 느낌을 받더라도
괴로움은 사라지고 자라나지 않나니
이와 같이 알아차리며 유행하네.
이와 같이 괴로움을 키우지 않는 자에게
열반은 가깝다고 하리.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서 간략하게 말씀하신 뜻을 이와 같이 자세하게 압니다.”
“장하고 장하구나, 말룽꺄뿟따여, 그내는 내가 간략하게 말한 뜻을 자세하게 알았으니 참으로 장하구나.
(위의 말룽꺄뿟따 존자의 자세한 해석을 인정하시며 다시 되읊음으로 생략한다)
말룽꺄뿟따여, 그대는 내가 간략하게 말한 뜻을 이와 같이 자세하게 알아야 한다.”
말룽꺄뿟따 존자는 세존의 말씀을 기뻐하고 감사드린 뒤 자리에서 일어나 세존께 절을 올리고 오른쪽으로 세 번 돌아 경의를 표한 뒤에 물러갔다.
그때 말룽꺄뿟따 존자는 혼자 머물며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스스로 독려하며 지냈다. 그는 오래지 않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집에서 출가하는 목적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살다운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물렀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실다운 지혜로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