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붓다 이야기

부처님은 어떻게 머무셨는가? ㅡ 수행의 처음과 마지막(두번째 이야기)

부처님은 어떻게 머무셨는가? ㅡ 수행의 처음과 마지막(두번째 이야기)

 

부처님께서 방법을 얻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하신 사념처 수행 중에서도 '몸에 대한 알아차림'을 닦고 많이 행하라고 강조 하셨고(Kāyagatāsatisutta 몸에 대한 알아차림 경 MN119), 몸에 대한 알아차림 중에서도 '들숨날숨에 대한 알아차림' 많이 닦으라고 하셨다(Kāyagatāsati-vagga 몸에 대한 마음 챙김 품 AN1.21, Ānāpānassatisuttaṃ 들숨날숨에 대한 알아차림 경 MN118)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들숨날숨에 대한 알아차림을 통한 삼매를 두고 '성스러운 머묾(ariyavihāro)' 또는 '거룩한 머묾(brahmavihāro)' 이라고도 하고 '여래의 머묾(tathāgatavihāro)'이라고도 하셨으니, 그야말로 깨달음으로 가는 최상의 지름길이 바로 들숨날숨에 대한 알아차림이다.

주석서에 의하면, 부처님께서는 '들숨날숨에 대한 알아차림'을 통해서 완전한 해탈을 성취하셨다고 하는데, 경전에서는 깨닫고 난 후의 아라한과 부처님(여래)도 들숨날숨에 대한 알아차림으로 삼매에 들어 지금 여기에서의 행복을 누리고 알아차리고 분명한 앎으로 머무신다고 한다.

 

그래서 '여래의 머묾'은 '성스럽고 거룩한 머묾'이고, '들숨날숨에 대한 알아차림'(Ānāpānassati)은 깨달음으로 가는 왕도인 것이다.

한 때 로마사깜비야 존자(sī. pī.에는 lomasavaṅgisa로 나타난다)가 삭까에서 까삘라왓투의 니그로다 원림에 머물 때에, 아누룻다 존자의 형이고 삭까족 왕인 마하나마가 찾아가서 유학이나 여래는 어떻게 머무는지를 여쭙는다. 부처님께서는, 마하나마를 '뛰어난 보시를 하는 자들 가운데 으뜸'이라며 칭송하신바 있다.

※ 법구경 주석서 (DhpA.i.345)에 의하며, 부처님과 동갑인 빠세나디 꼬살라 왕은 부처님과 인척관계를 맺고 싶어서 삭까족의 딸과 혼인하고자 하였다. 비록 속국이지만 자존심이 강한 삭까족은 마하나마와 하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와사바캇띠야 (Vāsabhakhattiyā)를 보냈다. 이들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위두다바(Vidūdabha) 왕자이다. 위두다바 욍자는 커서 까삘라왓투를 방문하였다가 공회당에서 다른 왕족들이 위두다바의 출생의 비밀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격분하였고, 후에 위두다바가 빠세나디왕을 축출하고 왕이 되자 까삘라왓투를 공격하여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참하게 살육하였다고 한다.

그때 로마사깜비야 존자는 '유학의 머묾과 여래의 머묾'은 다르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준다.

 

첫째, 유학인 빅쿠는 성취하지 못한 위없는 '멍에를 여읜 안온'(yogakkhemaṃ)을 바라며 머물고, 다섯가지 장애를 (일시적으로) 제거하여 머무는 반면에, 아라한들은 구경의 앎으로 해탈하였기에 다섯가지 장애의 뿌리를 제거하여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였다고 한다.

 

둘째, 유학인 빅쿠들은 성취하지 못한 '멍에를 여읜 안온'(yogakkhemaṃ)을 바라면서 '들숨날숨에 대한 알아차림을 통한 삼매'(ānāpānassatisamādhi)를 닦고 많이 익혀 번뇌의 소멸로 나아가는 반면, 아라한들은 구경의 앎으로 해탈하였기에 '들숨날숨에 대한 알아차림을 통한 삼매'를 닦고 많이 익혀 바로 지금-여기에서 행복하게 머물고, 알아차리고 올바른 앎을 가진다(diṭṭheva dhamme sukhavihārāya ceva saṃvattati satisampajaññāya ca)라고 한다.

이와 같이 부처님도 '들숨날숨에 대한 알아차림'을 통해 삼매에 들어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머무시는 것이다.

sālasuttaṃ(살라 경 SN 47.4)에 의하면, 아라한도 몸(느낌, 마음, 법)의 묶임에서 벗어나, 집중된 깨끗한 마음(心)으로부터 삼매를 닦아 평정한 마음(心)으로부터, 몸(느낌, 마음, 법)에서 몸(느낌, 마음, 법)을 이어보면서 머문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의 의미이다.

 

paṭhamakaṇḍakīsuttaṃ(가시덤불경1 SN52.4) 및 dutiyakaṇḍakīsuttaṃ(가시덤불경2 SN52.5)에서도 '유학이나 무학(아라한)은 어떻게 머물러야 하는가'를 묻는 사리뿟따 존자의 질문에 아누룻다 존자는 사념처에 들어 머물러야 한다고 대답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ambapālivanasuttaṃ(암바빨리 숲 경SN52.9 )에서는, 웨살리의 암바빨리 숲에 머물 때에 사리뿟따 존자가 아누룻다 존자의 안색이 고요하고 맑고 빛난다고 하자, 아누룻다 존자는 사념처에 들어 많이 머문다고 하고, 이에 사리뿟따 존자는 아라한들은 사념처에 마음이 잘 확립되어 많이 머문다고 응답한다. 그러고 보면, 사념처는 수행의 시작인 동시에 마지막이다.

들숨날숨에 대한 알아차림을 통한 삼매를 닦고 많이 익히면 네가지 알아차림의 확립[사념처]을 완성하고, 네가지 알아차림의 확립을 닦고 많이 익히면 일곱가지 깨달음의 고리[칠각지]를 완성하고, 칠각지를 닦고 많이 익히면 명지와 해탈을 완성한다(paṭhamāanandasuttaṃ 아난다경 1 SN53.12).

※ [수행의 기본적인 체계]

--------------- citta (마음) --------------

[다섯가지 장애 <======> 칠각지]

---------------------------------------------

《》

사념처 수행

(사념처 수행, 특히 '들숨날숨에 대한 알아차림'으로 마음을 덮고 있는 다섯가지 장애를 제거하면 칠각지가 드러남)

(들숨날숨에 의한 알아차림으로 삼매에 듦 = 여래의 거룩한 머묾)

kaṅkheyyasuttaṃ(혼란스러움 경 SN54.12)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로마사빰비야 존자는 삭까에서 까삘라왓투의 니그로다 원림에 머물렀다.

그때 삭까 사람 마하나마가 로마사깜비야 존자에게 찾아갔다. 가서는 로마사깜비야 존자에게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삭까 사람 마하나마는 로마사깜비야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하나마]“존자시여, 유학의 머묾과 여래의 머묾은 같습니까? 아니면 유학의 머묾과 여래의 머묾은 다릅니까?”

[로마사깜비야 존자] “벗이여, 마하나마여, 유학의 머묾과 여래의 머묾은 같지 않습니다. 유학의 머묾과 여래의 머묾은 다릅니다.

“마하나마여, 유학인 빅쿠들은 아직 성취하지 못한 위없는 멍에를 여읜 안온(yogakkhemaṃ)을 원하며 머뭅니다. 그들은 다섯 가지 장애를 (일시적으로) 제거하여 머뭅니다. 무엇이 다섯일까요?

소유적(탐욕적)사유[감각적욕망]에 대한 욕구의 장애 (kāmacchandanīvaraṇaṃ)를 제거하여 머뭅니다. 악의의 장애(byāpādanīvaraṇaṃ)를 제거하여 머뭅니다. 해태와 혼침의 장애(thinamiddhanīvaraṇaṃ)를 제거하여 머뭅니다. 들뜸과 후회의 장애(uddhaccakukkuccanīvaraṇaṃ)를 제거하여 머뭅니다. 의심의 장애(vicikicchānīvaraṇaṃ)를 제거하여 머뭅니다.

벗이여, 마하나마여, 유학이 빅쿠들은 아직 성취하지 못한 위없는 멍에를 여읜 안온(yogakkhemaṃ)을 원하며 머뭅니다. 그들은 다섯 가지 장애를 (일시적으로) 제거하여 머뭅니다.”

“벗이여, 마하나마여, 그러나 아라한들은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할 바를 다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최고의 선을 실현했고 삶의 족쇄를 부수었으며 바른 구경의 앎으로 해탈하였습니다. 그들은 다섯 가지 장애를 제거하였고 그 뿌리를 잘랐고 줄기만 남은 종려나무처럼 만들었고 존재하지 않게 하였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하였습니다. 무엇이 다섯일까요?

소유적(탐욕적)사유[감각적욕망]에 대한 욕구의 장애 (kāmacchandanīvaraṇaṃ)를 제거하였고 뿌리를 잘랐고 줄기만 남은 종려나무처럼 만들었고 존재하지 않게 하였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하였습니다.

악의의 장애(byāpādanīvaraṇaṃ)를 제거하였고 ......pe......

해태와 혼침의 장애(thinamiddhanīvaraṇaṃ)를제거하였고 ......pe......

들뜸과 후회의 장애(uddhaccakukkuccanīvaraṇaṃ)를 제거하였고 ......pe......

의심의 장애(vicikicchānīvaraṇaṃ)를 제거하였고 그 뿌리를 잘랐고 줄기만 남은 종려나무처럼 만들었고 존재하지 않게 하였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하였습니다.

벗이여, 마하나마여, 아라한들은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할 바를 다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최고의 선을 실현했고 삶의 족쇄를 부수었으며 바른 구경의 지혜로 해탈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와 같이 다섯 가지 장애를 제거하였고 그 뿌리를 잘랐고 줄기만 남은 종려나무처럼 만들었고 존재하지 않게 하였고 미래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하였습니다.”

※ 유학인 빅쿠들은 삼매에 들면서 다섯가지 장애를 일시적으로 떨쳐버림(viveka)에 들 수 있으나, 불환자가 되어야 kāmacchanda(탐욕적사유의 욕구)와 byāpāda(악의)와 kukkucca(후회)를 제거하게 되며, 아라한이 되어야 thinamiddha(해태와 혼침), uddhacca(들뜸)이 제거된다.

[로마사깜비야 존자] “벗이여, 마하나마여, 그런데 이러한 방법으로도 유학의 머묾과 여래의 머묾이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때 세존께서는 잇차낭갈라에서 잇차낭갈라의 밀림에 머무셨습니다. 거기서 세존께서는 빅쿠들을 불러서 말씀하셨습니다.

 

‘빅쿠들이여, 나는 석 달 동안 홀로 앉고자 한다. 하루 한 끼 탁발음식을 가져다 주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가까이 와서는 안된다.’라고

그때 세존께서는 그 석 달을 보내시고 홀로 앉음으로부터 일어나셔서 빅쿠들을 불러서 말씀하셨습니다.

“빅쿠들이여, 만일 외도 유행승들이 그대들에게 ‘벗들이여, 사문 고따마는 안거를 날 때 어떻게 머물면서 많이 지냅니까?’라고 질문하면 그대들은 그 외도 유행승들에게 ‘벗들이여, 세존께서는 안거를 날 때 들숨날숨에 대한 알아차림을 통한 삼매(ānāpānassatisamādhinā)에 머물면서 많이 지냅니다.’라고 설명해야 한다.라고”

“빅쿠들이여, 여기 나는 알아차리면서 숨을 들이쉬고 알아차리면서 숨을 내쉰다(sato assasāmi, sato passasāmi).

※ 부처님은 완전히 평화로우시고 항상 알아차림 (sati)이 확립되어 현전하기에 대념처경에서처럼 sato va assasati sato va passasati(오직 알아차리면서 들이쉬고 오직 알아차리면서 내쉰다)라고 하지 않고서, va(eva, 오직, 단지, 오로지) 붙이지 않은 것이고, 아래의 ③ 이하에서는 대념처경 등에서 나타나는 sikkhati (시도한다, 익힌다) 대신에 pajānāmi(분명히 안다, 꿰뚫어 안다)라고 나오는 것은 부처님은 더 이상 익혀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① 숨을 길게 들이 쉴 때는 길게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숨을 길게 내 쉴때는 길게 숨을 내쉰다고 분명히 안다.

② 숨을 짧게 들이 쉴 때는 짧게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짧게 내 쉴때는 짧게 숨을 내쉰다고 분명히 안다.

③ '온 몸을 경험하면서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온 몸을 경험하면서 내쉰다고 분명히 안다.

④ ‘몸의 형성작용[身行]을 고요히 하면서 숨을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몸의 형성작용을 고요히 하면서 숨을 내쉰다고 분명히 안다.

⑤ '희열을 경험하면서 숨을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희열을 경험하면서 숨을 내 쉰다고 분명히 안다.

⑥ '행복을 경험하면서 숨을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행복을 경험하면서 숨을 내쉰다고 분명히 안다.

⑦ 마음의 형성작용[心行]을 경험하면서 숨을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마음의 형성작용을 경험하면서 숨을 내쉰다고 분명히 안다.

⑧ 마음의 형성작용을 고요히 하면서 숨을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마음의 형성작용을 고요히 하면서 숨을 내쉰다고 분명히 안다.

⑨ 마음을 경험하면서 숨을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마음을 경험하면서 숨을 내쉰다고 분명히 안다.

⑩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숨을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숨을 내 쉰다고 분명히 안다.

⑪ 마음을 집중하면서 숨을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마음을 집중하면서 숨을 내쉰다고 분명히 안다.

⑫ 마음을 해탈하게 하면서 숨을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마음을 해탈하게 하면서 숨을 내쉰다고 분명히 안다.

⑬ 무상을 관찰하면서 숨을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무상을 관찰하면서 숨을 내쉰다고 분명히 안다.

⑭ 탐욕의 빛바램[이탐]을 관찰하면서 숨을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탐욕의 빛바램[이탐]을 관찰하면서 숨을 내쉰다고 분명히 안다.

⑮ 소멸을 관찰하면서 숨을 들이 쉰다고 분명히 알고, 소멸을 관찰하면서 숨을 내쉰다고 분명히 안다.

⑯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숨을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숨을 내쉰다고 분명히 안다.

‘빅쿠들이여, 바르게 말하는 자가 말하기를 ‘성스러운 머묾’이라 하거나 ‘거룩한 머묾’이라 하거나 ‘여래의 머묾(tathāgatavihāro)’이라 하는 것은 바로 이 들숨날숨에 대한 알아차림을 통한 삼매를 두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라고 바르게 말하는 자는 말해야 한다.’라고.”

“벗이여, 마하나마여, 이러한 방법으로도 유학의 머묾과 여래의 머묾이 다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출처] 부처님은 어떻게 머무셨는가? ㅡ 수행의 처음과 마지막(두번째 이야기)|작성자 Kusal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