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한국불교심리치료학회에서는 선치료(Zen Therapy)』의 저자이자 세계적으로 불교심리치료로 유명한 데이비드 브레이저(David Brazier) 박사를 초청하여 불교심리치료에 대한 학회를 열었고, 2011년 8월, 일주일 과정의 불교심리치료 워크숍을 2회 진행하였다. 두 차례의 한국방문을 통해서 브레이저 박사는 불교와 심리학이 접목된 불교적 심리치료의 새로운 모델인 타인중심치료(Other-Centred Therapy)의 이론과 실습을 한국에 소개하였다. 이 글에서는 일단 브레이저 박사의 선치료에 나타난 불교심리치료에 대해서 소개해본다.
최근 한국에서 불교와 심리학/심리치료의 관계 및 접목에 대한 관심이 점차로 높아져 가고 있다. 불교학과 수행 전문가들의 심리치료에 대한 관심과 심리학, 정신의학 전문가들의 불교에 대한 관심이 함께 높아져 가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불교와 심리학/심리치료의 접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한 가지 이유는 한국적 상담 및 심리치료의 필요성이 보다 절실하게 요청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서양의 학문으로 수입된 심리학은 20-30년 사이에 한국에서 든든한 뿌리를 내렸다. 서양의 과학적 전통을 잇는 학문의 하나로서 심리학과 그것의 응용인 심리치료 및 상담은 중요한 분야로 확실한 자리를 잡았다.
한국의 불교 및 명상 전문가들의 심리치료에 대한 관심의 고조와 심리치료 전문가들의 불교 및 명상에 대한 관심이 서로 맞물리고 있는 상황의 배경에는 탄생한지 100년이 조금 넘은 서양 심리학에서의 불교 및 명상에 대한 관심과 깊은 관계가 있다.
특히 1970년 중반 이후 서양 심리학계와 정신의학계에서 불교와 명상에 대한 관심이 무르익기 시작하고, 최근 20여 년 전부터 마음챙김 명상(위빠사나)의 임상적 효과가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본 글을 통해서 서양의 인본주의 심리치료와 불교와의 접목을 시도한 대표적인 불교심리치료의 전문가인 데이빗 브레이저 박사의 불교심리학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인본주의 심리학과 불교의 만남
인본주의 심리학은 ‘인간의 내적 과정을 무시한 채, 관찰 가능한 행동만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미국 심리학계를 중심으로 한 행동주의의 기계론적 인간관’과 ‘인간행동은 무의식적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인간을 무의식에 의한 결정론적인 존재로 보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결정론적 인간관’을 비판하면서, 1940년대 후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심리학의 제3세력이다. 인간존중과 인간 잠재성을 탐구하는 심리학의 사조로 대표적인 학자로는 아브라함 매슬로우, 칼 로저스, 프리츠 펄스 등이 있다. 이들에 의해서 상담과 치료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이 증대되었다.
칼 로저스, 아브라함 매슬로우와 프리츠 펄스에 의해 주도된 인간의 잠재성 운동과 제3의 치료 이론의 물결은 1950년대와 1960년대 심리학과 심리치료를 대중화 했다. 심리학과 심리치료를 의료 전문가들의 영역에서 가져와 좀 더 평등주의적 철학을 만들어냈다. 정신분석가와 행동주의자 사이에 위치한, 제 3세대 치료 이론은 자신을 새롭고 차이가 나는 운동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심리학적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환자(patient)가 아니라, 내담자(client, 의뢰인)가 되었다. 이러한 용어의 변화는 칼 로저스에 의해 도입되었다. 이는 전문가들의 권위적인 태도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용어의 변화가 결과에 미친 영향을 보는 것은 흥미롭다. 의료나 치유의 맥락에서 치료를 받는 입장에서, 치료를 소비자의 맥락으로 재위치 시켰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인본주의 심리학/심리치료와 불교와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소개하고자 한다.
인본주의 심리학/심리치료와 불교를 접목시킨 대표적인 심리치료자는 영국의 데이빗 브레이저r박사이다. 2010년 처음, 한국불교심리치료학회(cafe.daum.net/kabp)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자신의 불교심리치료에 대해서 소개한 적이 있고, 2011년 8월에 다시 방한하여 14일간의 불교심리치료 전문가 워크숍을 이끌었다. 그는 1995년, '선 치료' Zen Therapy를 통해서 서양 심리치료와 초기불교 및 아비담마, 선불교 및 정토사상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불교전통과의 접목을 시도하고 있다. 이후 그는 1997년, 느끼는 붓다The Feeling Buddha, 2001년, 새로운 불교 The New Buddhism, 2005년,
사랑하는 사람은 편히 죽는다 Who Loves Dies Well, 2009년, 사랑과 그 실망 Love and Its Disappointment을 저술하며, 불교심리치료이론을 발전시켜왔다. 그는 파트너인 캐롤라인 브레이저와 함께 타인중심치료(Other-Centred Therapy)라는 불교의 세계관과 가치관에 입각한 불교심리치료의 이론과 실천 체계를 정립시켰다.
브레이저박사는 1970년경, 처음 선불교를 접하면서 선이 가진 심리치료적인 힘을 경험한다. 하루 종일 수행을 하고 지도자와의 면담에서 “보고할 내용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궁극적 진리에 대해 무엇인가 말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으로 느껴졌고, 이 질문으로 세상을 보는 시각이 전환되어 “새들이 노래하고 있군요.”라고 대답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브레이저는 근본적으로 인생의 방향이 바뀌었다고 한다.(선치료, 11-12쪽). 이후 초기경전과 아비담마에 대한 개인적인 연구와 티베트 불교, 선불교(일본 임제종), 정토불교 등 다양한 불교전통을 배우고 실천하였다. 1981년에 아미다 트러스트라는 단체를 설립하여, 현재까지 이 단체를 이끌고 있으며, 1995년부터 이 단체의 프로그램은 불교정신에 근거한 신행과 다양한 사회참여를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브레이저는 1978년에 스리랑카의 뿐나지 Punnaji 스님이 발표한 심리치료로서 불교Buddhism as A Psychotherapy(http://purifymind.com/BuddhismAsPsycho.htm)에서 ‘불교가 종교나 철학으로서 뿐만 아니라, 심리치료로서 현대세계에 소개된다면 부처님의 메시지는 올바르게 이해될 것이다.’고 한 말에 영향을 받았고, 심리치료자이자 불교도, 그리고 사회활동가로써 전세계를 무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브레이저의 <선치료>는 불교와 심리치료를 연결하기 위한 노력의 일차적인 성과인데, 그의 기본적인 심리치료 입장은 내담자 중심치료의 창시자이자 인본주의 심리치료의 대표자의 한 사람인 칼 로저스 Carl Rogers의 상담법이라고 할 수 있다. 로저스가 말하는 상담자의 세 가지 핵심적 치료 태도인 무조건적 긍정적 존중, 공감적 이해, 진솔성을 각각 불교의 3 가지 선근(善根)인 탐욕 없음(無貪), 분노 없음(無瞋), 어리석음 없음(無痴)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시각은 상담자 태도란 곧 불교의 선근(善根)을 갖추는 것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慈]과 연민[悲]과 지혜라는 세 가지 덕목이 바로 탐진치가 없는 삼선근(三善根)으로 보고 있다.
그는 만일 심리치료를 약간의 기법을 배운 뒤에 돈을 벌 수 있는 일자리이라고 생각하면서 치료자가 내면의 공간을 마련해놓지 않을 때 빠질 수 있는 병폐를 지적한다. 그는 심리치료자가 되기 위해서는 삶에 대한 검증을 통과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자만심을 내려놓는 법을 배워서 마음의 공간을 정화해야 한다고 한다.(선치료, 32쪽)
불교의 불성(佛性)에 대한 믿음과 인간의 성장가능성을 강조하는 인본주의는 같은 입장이라고 하면서도 인간이 실존적인 딜레마에 있다는 점에 대해서 인본주의에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한계점도 지적한다. 선(禪)은 생태학적인 관점에서는 자아도취에 빠질 수 있는 인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자아초월 심리학(Transpersonal Psychology의 입장에 가깝다.
브레이저 박사는 선(禪)불교의 공안(公案)은 심리치료와 윤리(5계)를 결합시킨 것이라고 한다(4장). 내담자가 가져오는 풀 수 없는 문제(윤리적 갈등 또는 딜레마)를 공안으로 생각하여, 좀 더 솔직하게 자신의 자아와 대면하도록 인도한다. 살생 등을 삼가는 5계를 지니는 것은 자신의 삶을 찾는 방법이며, 남을 돕는 것이 자신을 돕는 것임을 이야기하면서 심리치료자는 대승의 보살임을 역설한다.(p.52) 따라서 괴로워하는 내담자를 돕는 상담 및 심리치료는 불교에서 말하는 보살행으로 여겨진다. 한편 정신분석가와 보살은 신경적 자극을 받지만 이를 알아차리고 내담자를 돕는데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이동식 박사의 도(道) 정신치료의 입장을 인용하기도 한다.
심리치료자는 기쁨(piti, 喜), 마음집중(samadhi, 定), 마음챙김(sati, 念)을 통해 평정(upekkha, 捨)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하여 평정으로 바탕으로 자애(metta, 慈)와 연민(karuna, 悲)과 지혜(pañña, 慧)를 성숙시켜야 한다고 역설한다(5, 6장). 이러한 덕목을 갖추어야 내면의 공간을 확보하게 되고, 자기 정화를 바탕으로 한 상담 및 심리치료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2부의 불교심리학에서는 팔리 아비담마의 핵심적인 가르침이 24조건(緣)설을 바탕으로 불교와 심리치료의 공통점을 탐색해 간다(part 2: Buddhist psychology, pp. 75-188). 근본원인, 대상관계, 우월관계, 연상, 순서적인 연상, 함께 발생, 상호조건 등의 불교의 조건론과 서양심리학을 대비시켜가면서 불교심리학과 서양심리학의 유사성을 제시한다.
예컨대, 불교의 근본 인연(Root Relations, Hetu)은 탐, 진, 치에 의해 조건 지워지고, 그 반대의 것들인 무탐, 무진, 무치에 의해 조건 지워지지 않는데, 무탐, 무진, 무치는 칼 로저스 이론에서 상담자의 3가지 태도와 유사하다고 한다. 대상 인연 (Object Relations, Arammana)의 경우에는 마음의 상태는 주의 대상에 의해 조건 지어지는데, 브레이저 박사의 타인 중심 접근이 이 입장과 유사하다. 이와 같이 아비담마 교학에서 제시하는 24가지 조건을 심리치료와 비교하면서 대조하고 있다.
브레이저는 유식사상의 8식설을 통해서 자아 콤플랙스인 7식 자아의식과 오랜 시간 동안 우리가 만들어온 모든 집착과 업을 저장하고 있는 무의식인 8식을 설명한다. 7식은 에고 콤플렉스에 의해 통제되며, 에고 콤플렉스는 모든 것을 자기 방어적 혹은 자기 확장적인 방식으로 조직하려고 애쓴다. 조건적인 마음 상태인 7식과 8식은 함께 작용하여, 6식이 존재의 본성인 불성(佛性)을 보지 못하게 한다. 마음의 조건화 작용이 중지되면, 7식이 쉬게 되고, 8식도 잠잠해져 마음은 불성의 빛으로 가득차게 된다. 이 때 그 의식은 이 빛으로 주변세계를 비추게 된다. 이 빛이 바로 대지혜이다.(7장)
브레이저는 불교의 근본적인 목적이 탐진치라는 3불선(不善)의 뿌리를 없애는 데 있음을 <선치료>에서 자주 강조한다. 이 덕목은 로저스가 말하는 상담자가 갖추어야 하는 세 가지 태도와도 일치하기 때문에 불교 수행과 상담가가 되는 일은 같은 일이 된다고 한다.
브레이저는 말한다. 선(禪)에는 초기불교의 욕망을 멀리하는 은든자의 입장과, 타인의 괴로움을 느끼면서 타인에게 봉사하는 것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는 대승불교의 보살도와, 우리가 겪는 모든 경험을 축복으로 재구성함으로써 순수한 영역[淨土]으로 직접 들어가는 밀교의 탄트라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10장) 초기불교, 대승불교, 밀교라는 세 가지 수행을 심리치료에 사용할 수 있도록 변형시키면, 좋은 씨앗 찾기(심층적으로 관찰하기), 정체감에 대한 인식 바꾸기(부정적 경험과 동일시하지 않고, 내면의 청정한 생명에너지 발견하기), 유익한 마음의 비전 세우기(내면의 에너지의 방향을 자신과 타인의 이익을 위해 재조정하기)가 된다.
브레이저는 선(禪)에서 깊이 듣는 것을 배우고,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을 배우며, 감사한 마음으로 알아차리는 것을 배운다고 한다. 이런 수련은 단순히 심리치료 기법을 50분간 적용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이것은 단지 관념이 아니라, 존재의 길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심리치료란 충만한 생동감을 체험하는 만남이며, 가슴에서 가슴으로 이루어지고, 예측할 수 없는 내면의 과정을 따라 전개된다고 한다. 그리고 나에 대한 집착을 더 잘 내려놓을수록 치료를 위한 좋은 조건을 더 성공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게 되며, 근본적인 치료의 원리는 사랑과 이해 즉 자비와 지혜라고 하면서, 우리의 과제는 마음 내면에 있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한다.(18장)
선의 반야는 자애[慈]와 연민[悲]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지혜가 표현되는 방식으로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의 사섭법(四攝法)을 제시한다. 보답을 바라지 않고 베풀어주는 보시, 다른 사람에게 자비로운 존경으로 가득찬 말을 하는 애어, 타인에게 이익이 되게하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는 대자대비로 가득한 동사는 바로 사랑이자 지혜로서 불교수행자 뿐만 아니라, 심리치료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 된다.(19장)
브레이저는 마음으로 만들어낸, 환상으로 가득 찬 세상을 지혜로 보면, 모든 것은 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한다. 무상을 이해할 때, 우리는 자신을 우울하게 하는 대상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게 된다. 죽음이나 상실은 더 이상 우리에게 문제가 되지 않게 된다(21장). 그는 마지막 장에서 인간 공동체 안에서의 조화뿐만 아니라, 자연과의 생태적인 조화를 강조하는 불교의 입장을 통해 참다운 심리치료는 개개의 인간뿐만 아니라 온 지구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지에 대한 비전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선치료>를 마무리 하고 있다.
선을 포함한 모든 불교전통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의 하나는 진정한 공동체의 재창조라고 하며, 수행을 지원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상가(sangha)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진정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정신질환을 예방하는 것이며, 심리치료는 관계에 의존함을 강조하면서, 최근 서양의 심리치료는 공동체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선(禪)의 삶을 사는 사람은 홀로 있다할지라도 공동체 속에 함께 있는 것이고, 다른 사람과 함께 있어도 홀로 있는 것이라고 한다. 브레이저는 불교수행공동체이자 불교심리치료 교육기관이자 사회활동단체인 아미다 트러스트를 만들어 활발하게 활동해오고 있다.
이처럼 불교교리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수행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 그리고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브레이저에게서 인본주의적 심리치료와 보살행을 결합한 불교심리치료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