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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

윤회 ‘사실’인가,‘사상’인가

윤회 ‘사실’인가,‘사상’인가

 

불교의 논의 가운데 윤회(輪廻)는 흥미롭지만, 한편으로는 믿기 힘들다는 비판을 받는 부분이다. 그간 불교학자들 사이에서도 아예 분석대상이 되지 않았다. 최근 계간 ‘불교평론’ 가을호는 ‘윤회, 사실인가, 믿음인가’라는 주제로 윤회사상이 가진 철학적 의미를 분석, 흥미진진한 논의를 제공하고 있다. ‘여러번 생을 반복한다’는 대단히 매력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혹하기도한 이 윤회사상을 소장 불교학자와 철학자들이 어떻게 현대적 의미로 재생산해 내고 있는지 살펴본다.

김형준(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는 ‘고대문명사회와 인도에서의 윤회’에서 죽음이라는 인간의 불안전성, 그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이 윤회의 개념형성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김교수에 따르면, 윤회는 인도만의 개념은 아니고 서양에서도 미라를 만든 이집트인들의 환생개념이 있었다.

그리스의 플라톤도 ‘파이돈’에서 윤회사상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고, 유대교의 카발라(중세 유대교의 신비사상)와 초기 기독교에서도 윤회가 널리 인정됐다. 기독교에서 윤회개념이 금지된 것은 “여러 번 생을 반복하며 마침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윤회의 이상적 관념이 황제나 교회 또는 기독교 사제들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권위를 약화시킬 수 있는 위험한 요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김 교수는 분석한다.

불교의 윤회사상이 부딪히는 논리적 공세 중 하나는 “생과 생을 거듭하는 윤회는 ‘불변·불멸의 실체적 자아’를 전제로 하는데, 이러한 실체를 부정하는(무아·無我) 불교가 어떻게 윤회를 주장하느냐”는 질문이다.

안옥선(순천대 철학과) 교수는 ‘초기불교에서 본 무아의 윤회’란 글에서, “비실체론적 관점에서 윤회는 반드시 자아간의 동일성(identity)을 전제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자아들간 연속성(continuity)만 전제돼도 가능하다”라고 설명한다. 즉 ‘무아의 윤회’라는 것인데, 윤회는 업·행위(karma)의 윤회일 뿐, 이 과정에서 업의 작용에 따라 매순간 무상하게 모습을 바꾸어 가는 업의 자아가 있을 뿐”이라는 설명이다.

불교를 연구하는 저명한 학자 중에 윤회를 부정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비판불교운동을 일으킨 일본 고마자와 대학의 마쓰모토 시로 교수는 고려대장경연구소 주최 학술대회에서 윤회를 부정했고, 선(禪)연구 권위자인 고형곤 박사도 공개적으로 비슷한 주장을 편 바 있다.

이에대해 김성철(동국대 불교학과) 교수는 ‘윤회의 공간적·시간적 조망’이란 글에서, 이는 서구인들에 의해 시작된 인문학적 불교학의 논리 때문이라고 비판하고, 윤회를 논증하는 방법으로 “‘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 무한히 재생한다’는 윤회의 사실성을 확신하게 해주는 실마리는 바로 ‘연기(緣起)’의 자각에 있다”고 주장한다. 쉽게 말해 행복과 고통 역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남에게 고통을 주는 악업을 지을 경우 그와 반대로 작용하는 내가 느낄 고통이 연기적인 대립쌍으로 함께 발생해야 한다는 것. 그것은 시간이 경과한 다음 생(이숙과·異熟果)에 나타나며 필연적으로 윤회가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최은영(철학·고려대 강사) 박사는 ‘윤회 없는 불교는 가능한가’라는 글에서, 불교에서 말하는 3계·4생·6도의 구체적 윤회의 세계는 고정된 개념에 의해 시설된 것이 아니라 마음의 변화에 의해 시설된 것이므로 고정불변의 세계로 이해해선 안된다고 말한다.

그는 과거의 업도 무상성을 담보하고 있고 고정불변이 아니기 때문에 기계적으로 윤회를 이해할 것이 아니라 인과의 변화성을 중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윤회사상조차 당대 인도 대중들의 깨우침을 위해 설파된 것이다.

석가가 유언에서 ‘나는 한 말도 설한 적이 없다’고 한 것도 시대와 공간과 대상에 따른 변화를 인정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으며, “현대의 문명과 과학이 발달된 정보화 사회에 부처님께서 출현하셨더라도 과연 현실을 저버리라고 했을까?”라고 최 박사는 묻고 있다.

엄주엽기자 ejyeob@munhwa.com

[출처] 윤회 ‘사실’인가,‘사상’인가|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