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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

윤회 전생, 그 실재론과 유식론적 해석

윤회 전생, 그 실재론과 유식론적 해석

-輪回와 轉生을 중심으로

이학수

 

들머리

 

이소노가미 겐이치로(石上玄一郞), 일본의 종교학자. 1910년 홋카이도(北海道) 삿포로(札幌)에서 출생. 81세(1997)에 마지막 저서인 <윤회와 전생> 출간. 살아 있으면 115세이겠지만 어느 양로원에선가 혹 생존해 있대도 그가 노년에 들어 늘 예감한 ‘기억 상실과 육체의 노쇠에 따르는 인격파탄-노망’ 속으로 사라져 갔을 것이다.

 

4세 때와 곧 이어 고애자(孤哀子)가 되어 동북(東北)지방의 어느 누거(陋居)에서 조모에게 양육되며, 어둡고 가뭇없는 북쪽 바다를 떠도는 부질없는 공상만이 무료를 달래주던 빈곤과 적막의 소년기를 보냈다. 고교 중퇴 후 잇따라 찾아온 저 답답하던 군국주의 시대에는 무력한 저항과 좌절, 굴욕과 통한 속에서 격류에 휩쓸리는 나뭇잎처럼 청춘은 떠내려갔다.

불혹을 넘어서도 의혹은 거세게 일고 번뇌와 망집은 떠날 줄을 몰랐으며, 어느덧 인생의 황혼을 앞에 하면서도 미망의 구름은 걷히지 않고, 진여(眞如)의 달은 도무지 바라보지도 못할 즈음(앞 책을 집필 하던 때)에 이르렀다.

 

지진과 태풍으로부터 어디로도 탈출할 수 없었던 곤고한 섬나라, 끝없이 내려쌓이는 눈과 삭풍에 떠는 살풍경한 고장에서 태어나 활달(豁達)한 삶과는 인연이 닿지 않았던 그는, 우수와 고뇌의 오솔길에서 흔히 자살을 택한 일본적인 사색인과는 좀 다른, 구도 아닌 구지(求智)의 길을 무작정 걸어갔다. 시지포스처럼 자기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가 던져진 그만의 한 생애에 걸쳐 윤회-유전(流轉)이라는 주제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삶과 죽음이 상즉(相卽)하는 듯한 경계인의 시공에서 철학자와 시인의 지성과 감성, 차가운 논리와 그저 살아야 하는 현실 사이를 자괴(自愧)하며 오가고 있는 것 같다.

 

어느 편이냐 하면, 그는 시간적으로나 구조적으로나 육체로부터 독립된 상주불변(常住不變)의 아트만(바라만-braman교에서 atman은 본디 ‘호흡’을 의미했다. 그것이 차차 ‘영혼- 혼령’이라는 뜻으로 전이되고 다시 우주 본체인 브라흐마-brahma-梵-대아大我와 융즉融卽하는 범아일여의 소우주-小我로 됐다)이 없다면 이것은 각자의 행위에 책임질 주체가 없다는 얘기이니, 주체가 없다면 윤회전생도 있을 수 없고, 업(카르마)이라는 응보도 부정될 수 없으며, 누가 무슨 선업이나 악업을 쌓든 육체의 죽음과 함께 소멸될 것이라는, 제법무아(諸法無我) 설과 업(業) 사상의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을 이론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이다.

 

말을 바꾸어, 가소성(可塑性; 압력을 가하면 모양이 변하고 원래대로 되돌아가지 않는 성질, 반죽된 점토가 그 한 예이다)의 원리에서 다양한 점토(粘土) 공작품의 실체(substance), 원 물체-질료(質料-materia)가 없으면 아무 형상(形象-forma)도 만들 수 없다. 즉, 아즉범(我則梵)의 아트만이 없다면 중유(中有; 시간개념)-증음(中陰; 공간개념)에서 49일 동안 머물다 새 형상의 육체를 부여받아-도가(道家)에 따르면 삼신(三神)으로부터, 사람에겐 혼(魂)과 백(魄)이라는 영체(靈體)가 있어서 혼은 육체사후에 승천위신(昇天爲神)해 제사를 받다가 사대(四代)가 지나면 영(靈)도 되고 혹 선(仙)도 되며, 백은 귀지위귀(歸地爲鬼)한다고 신교도(new taoism; 증산도)의 도전(道典)에 기록되어 있다.

 

부연하자면 망자가 예외 없이 바로 중음으로 가서 49일 동안 머물다 전생(轉生)하는 것이 아니고, 여귀(厲鬼; 제사를 못 받는 신명) 외에 사대 봉사(奉祀)를 받은 조상신(명)들은 영이나 선이 되어 천계(天界)에서 발전적 삶을 이어가고, 혹 생시에 통한이 사무쳤던 신명(神明)들은 삼신에게 빌어 조건부 전생(轉生)을 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증산도문(甑山道門)으로선 도비(道秘)-대외비(對外秘)겠지만 전언에 따르면, 현하 수없이 목도되는 선천(先天) 해원(解寃; 미물 곤충의 그것까지도 포함해) 즉, 말세의 한풀이 중 특히 각광받는 연예인 들은 대부분이 전생의 재인(才人), 조선 팔천(八賤) 중 하나인 광대라고, 전생(轉生)할 수 없지 않겠는가.

각설하고, 이소노가미 교수(大坂 成磎女子短期大)의 논지 속으로 들어가 보자.(1

 

1. 설 일체유부(說一體有部) 파의 실재론적 윤회 전생관

 

삼법인(三法印;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으로 함축되는 불교 이전 힌두교의 고(古) 우파니샤드(奧義書)에는 업(業-karma)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신흥불교는 무아(無我)설을 내세우면서도 태고로부터 이어져 온 것으로 간주됐던 카르마에 대한 대중의 속신을 경시하지 못해 그것과 얼마간 타협했다.

이른바 부파(部派) 불교 중에서도 이론이 정치(精緻)하기로 정평인 설일체유부 파는 존재태(being voice)적 아(我)에 대신해 오온(五蘊) 상속(相續)하는 유정(提婆達多)이라는 관념을 도입했다.

‘유정(有情)’이란 ‘찰나에 생멸하는 오온의 지속’을 가리키는 것인데, 마치 마른 들판을 태우는 불길의 불꽃 하나하나는 찰나에 탔다가 꺼지면서도 불길 자체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에 비유된다. 오선지의 음부(音符) 하나하나가 피아노로 연주될 때 저마다의 음역(音域)을 넘지 않지만, 앞뒤의 음역들을 이어가는 멜로디는 연주를 멈추지 않는 한 단절 없는 생성태(becoming voice)를 유지하는 것처럼.

절대적 무아와 업보의 모순에 관해서는 기원전 2세기경에 아프간에서 인도 서북부를 병합하고, 갠지스 강 상류를 침약 해 샤가라 성(현재의 샬코트)에 도읍한 희랍(希臘; 그리스의 원명인 ‘헬라스’의 한역)계 메난드로스 왕(王)과 나가세나 불교 존자(尊者)의 문답론인 미린다왕문경(那先比丘經)에 밝혀져 있다. 메난드로스 왕의 최대의문은 뭣보다 존자의 무아설에 있다.

 

왕이 묻는다.

“존자여, 만약 인간의 형질이 현세에서 미래세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인간은 악업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데 어떠시오?”“대왕이시여,” 하고 대답한다.

“죽음과 함께 끝나는 현세의 형질과 미래세에서 다시 태어나는 형질은 다른 것이기는 하지만, 미래세의 형질은 현세의 형질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므로 악행자는 악과(惡果)라는 인과응보(因果應報)를 모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가세나 존자는 초저녁 등불의 불꽃과 한밤중 등불의 불꽃은 다르지만 같은 등불임에는 틀림이 없다는 비유를 들고, 그것은 같은 것도 다른 것도 아닌 사상(事像)의 계속이며, 개인의 생존도 인연소생(因緣所生)의 것이므로 현세의 인간과 미래세에 태어날 인간은 불일불이(不一不異)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윤회의 주체가 한 육체에서 다른 육체로 전생(轉生)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고 하면서, 존자는 상주불변의 주체나 불멸하는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또 시간에 관해서도 시간이란, 윤회의 생존 그 자체이며 윤회가 있기 때문에 시간이 있는 것이며, 과거 현재 미래라는 삼세의 시간은 무명(無明)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 설명한다. 그러나 우리가 의문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존자의 ‘다시 태어난다’고 하는 말이다. 여기서 존자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윤회에 의한 전생인데, 어떤 형질을 이어받는다든지 혹은 어떤 불변하는 것이 전생하는 것이라면, 비로소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형질도 이어받지 않고 불멸의 주체도 없는데 어떻게 그것을 ‘다시 태어난다’고 하느냐는 것이다.

지금 한 생존이 끝나고 그것을 연(緣)으로 하여 다른 생존이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만 가지고는, 전자가 후자로 다시 태어났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다시 태어나는 일이 없으면 업의 책임을 짊어질 대상(당사자)이 없어 상식적으로는 윤회도 부정되니까 업 사상을 일관되게 하려면 전생은 필지(必至)의 것이 된다.

그러나 존자의 대답만으로는 나로선 무아설과 업 사상의 모순이 해소됐다고 도무지 생각되지 않는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점은, 업 사상은 원래가 속신(*모든 종교의 기원은 구경에 속신이고, 그것들은 C. G. 융에 따르면 원시인의 유아기적 직관지-무분별지, 소박실재론-naive vealism에 바탕을 두고 있다)에서 나온 것이고, 그와 같은 성격에 비추어 대단히 공리적(功利的; 다중의 현세 유용적이라고 이해해야 될 것 같다. ‘功利主義-고우리시유’라는 일본어 번역발음은 共利, 共益주의라고 한역해야 원의에 가깝다. 벤담의 모국어인 영어 ‘utilitarianism’은 ‘유익 유용 유리’라는 뜻의 라틴어 'utilitas'에서 파생되었다)이라는 점이다.

여기에는 선보(善報)를 받기 선행을 하고 업벌(業罰)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악행을 피한다고 하는 저(低) 차원의 윤리관념이 근저에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여기에 무아설을 기치로 하여 일어난 불교가 그 교리를 철저히 하려면 속언(俗言)에 영합하는 일 없이 그 업보사상을 자율적 윤리 관념으로까지 지양(止揚; 변증법적 합일, 타협, 조화-dialectic transcendence)시키지 않으면 안 됐을 것이다.

그 경우 윤회는 긍정한다고 쳐도 적어도 미래세에 다시 태어난다는 전생 사상을 부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 ‘자율적 윤리관념’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의 행위는 그 결과 여하에 불구하고 행위 그 자체로서 의의를 갖는다’는 관념이다.

즉, 좋은 과보를 받기 위해 선행에 힘쓰는 것도 아니고, 또 엄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악행을 멀리하는 것도 아니다. 아니 거꾸로, 결과로서 어떤 어려운 일을 당할지언정 정의로운(‘정의론’은 복잡하지만) 일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고, 어떤 이익을 받을지언정 부정한 일에 가담하지 못한다고 하는 데에 이르러서 비로소 고도의 윤리 관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닐는지.>>(2

‘업’사상과 ‘무아’설의 지양(止揚)에 동의하는 이소노가미 교수는 현재 마하바라다 경(摩訶婆羅多 經)의 일부에 편입되어 있으나 불교 이전 중 서 인도의 성(聖) 크리슈나에 의해 교설된 성전이라고 전해지는 ‘바가바드 기타(신의 노래)’의 일부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너의 관심을 행위로만 돌려라. 결코 결과로 돌려서는 안 된다. 행위의 결과를 동기로 삼아서는 안 된다. 무행위(無行爲)에 너의 집착이 있어서도 안 된다.

 

요가에 의지해 집착을 버리고 온갖 행위를 행하라. 아르주나여, 성공 불성공을 평등시 하기 때문에 평등만이 요가라고 하는 것이다.

 

행위의 결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항상 만족하며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는 사람은 설령 행위에 종사할지라도 결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다.

 

원망(願望)을 버리고 심신을 제어하며 일체의 소유를 버린 사람은, 그저 신체적 행위만을 하면서 죄에 빠지는 일은 없다.

 

2. 곁가지

 

우리는 윤회(輪回)와 전생(轉生)을 고찰하고자 하는바,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소노가미 교수의 견해대로 윤회와 단순한 전생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전생은 윤회(수레바퀴처럼 끝없이 돌고 돎)가 수반하는 필수 조건이지만, 영혼이(3 특정(고유) 형질의 육체를 떠나 다른 형질(형상과 모든 인체를 구성하는 공통의 화학적 원소, 즉 산소 수소 질소 탄소 칼륨 칼리 염분 유황 인 철 마그네슘 등 ‘창세기’ 인체의 창조 질료인 ‘흙-먼지’의 종합 성분 외에 십인십색의 ‘암흑(미지) 물질’까지 포함될 것이다.

평자의 ‘반죽된 점토’ 즉 모든 점토 공작품의 동일 질료라는 비유는 비유에 불과했다. ‘비유는 절름발이’ 라는 말 따라 ‘범아일여’라면 모든 인체의 원 물체-‘흙’을 포함하는 제1 원 물체는 무한한 다양성의 질료를 가진 우주본체, 부라흐마일 것이다)의 육체를 취해 새로 태어나는 ‘범(汎) 종교적 전생’과 반드시 업(카르마; 힌두 헬라스 일원에서만 전승되어 온 ‘속신’이라고 이소노가미 교수는 주장)이 따르는 육도 윤회는 미상불 같은 개념일 수 없다.

유명한 ‘직각 삼각형의 삼평방 정리’를 안출한 헬라스의 수학자 피타고라스는 사모스 섬 출신으로 청년시대에 페르시아, 힌두 등 오리엔트를 오래 여행했으며, 동양 여러 종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는 후에 남 이탈리아 크로톤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아카데미 학당을 개설하고, 이미 그곳에 거점을 확보하고 있었던 디오니소스적(감성적) 오르페우스 교와 습합된 아폴론적(이성적) 교단을 이끌었다.

그는 저서로는 아무런 교설도 남기지 않았으나, 아우구스투스 황제 치하의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가 그의 저서 <메타몰호세스>에 쓴 ‘피타고라스의 가르침’에, 육도윤회에 대한 피타고라스의 신념이 투영되어 있다.

 

영혼이 죽는다는 일은 결코 없다. 영혼은 원래 깃들어 있던 숙소를 떠나면 항상 새로운 숙소를 찾아서 거기에 깃들어 삶을 이어간다.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거니와 이 나(피타고라스)만 해도 저 트로이 전쟁이 있던 때에는 아트레우스 아우의 아들(메넬라우스를 말한다)의 무거운 투창을 가슴에 받고 넘어진 판토우스의 아들 에우폴부스였던 것이다.

최근에 아파스의 거리 알고스의 유노 신전에 있는 방패를 보았는데, 나는 그것이 그 무렵 내가 왼손에 들고 있던 방패라는 것을 알아 본 것이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전하지만 무엇 하나 소멸되는 것은 없다. 생명의 숨결은 빙글빙글 돌아 갑에게서 을에게로, 을에게서 병에게로 옮겨가며 차례차례로 육체에 자리를 구한다. 동물의 신체에서 인간의 신체로 옮기는 경우도 있는가하면, 인간의 신체에서 동물의 신체로 자리를 바꾸는 있다. 그러나 결코 죽는다는 일은 없다.

 

한편, 후대의 헬라스 아테네 출신인 플라톤의 서양 합리주의(vationalism; 경험과는 별개로 선천적 본유 이성과 본유 원리가 존재함을 주장)가 피타고라스 학파와 오르페우스 교단의 윤회사상에서 영향을 받았고, 지식은 후천적으로 외입(外入)되는 것이 아니라 망각되고 있었던 전생의 자기 혼이 개시되는 것을 상기하는 것일 뿐이라는, 이른바 상기설(아네무네시스)에 기초한다는 것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기실 그는 ‘냉철한’ 이성(vatio)을 다른 경험론(empivism)의 비조(鼻祖)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경험, 실증, 불가능한 본유(本有) 이성의 존재를 믿은, 이성주의자(vationalist) 아닌 영성주의자(spiritualist)였다.

 

말은 어디까지나 ‘말’을 벗어날 수가 없다. 윤회라는 주제를 잠시 물리고 전생(轉生), 재생(再生), 부활(復活), 환생(還生) 등 일반적으로 별 구별 없이 쓰이고 있는 말들에 대해 결가지 삼아 좀 따져 보기로 하자. 인간은 언어로 사유한다.

먼저, 전생(轉生)과 재생(再生)이 소개한 논저의 본문을 잠시 벗어나 어떻게 다른가. 전생이란, 말 자체의 의미로 한 형질의(인체 아닌) 인간이 다른 형질의 인간으로 (‘다시’가 아니라) ‘달리’ 태어(胎-)나다 라는 뜻이 틀림없지 않을까 한다. 금, 은과 같은 광물이 ‘ㅇㅇ광산에서 난다’고 하지 태어난다(출산- 임산된다)고는 안하지 않는가. 시(詩)적으로는 누군가가 삶의 태도나 방식을 현저히 바꾸었을 때 주위에서 찬탄함직한 수사적 과장법일 수 있다.

재생(再生)이란, 자의(字意)로는 ‘한 인간이 죽었다가 똑같은 형질의 동일인 (同一人)그대로 되살아나다’라는 새김이 된다. 회생이나 소생(甦生, 蘇生)이라는 말도 있지만 이 말은 일반적으로는 가사(假死) 상태에서 심폐소생술 등으로 심장박동과 호흡이 되돌아 왔을 때 쓰이고 있다.

르네상스(renaissance)라는 프랑스 어는 '다시(再)'라는 뜻의 접두사 ‘ve’와 ‘태어나다’라는 뜻의 라틴어 부정형(不定型) 동사 ‘nasci’가 결합돼 전성된 명사로, 직역하면 ‘다시 태어남’ 즉, ‘재 임산(再姙産)’이 된다. 한때 문예부흥 또는 재생(再生- 사이세이)이라고 일역(日譯)돼 쓰이기도 한 이 말은, ‘암흑시대’라는 별칭의 중세(中世-2-12C)에 빈사 상태였던 인간성(humanitas)이 되살아났다고 생겨난 암유(暗喩)인 것 같지만,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라틴어로 ‘nativitas’라고 하듯 ‘nasci’의 원래 뜻은 적어도 중생(衆生; ‘짐승’의 본디 말이라는 설이 있지만)의 출생에 제한됐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젠 폐(廢)타이어가 화학 처리돼 ‘재생타이어’로 다시 태어나게도 됐다.

레인카르네이션(reincarnation)은 불교적 '재생'의 영역(英譯)으로,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임마누엘이 육체(caro)를 부여받아 사람으로 태어난 사건을 '육화(肉化)'라고, 한국 기독교계에서 한역(韓譯)해 쓰는 라틴어 ‘incanatio’에 접두사 ‘ve'를 붙여 종교학자들이 만든 제한적 영어 전문용어로, ’재육화(再肉化-reincarntio)‘와 ’재탄생(再誕生-renativitas)‘이라는 라틴어(로마 가톨릭 성직계의 공용어)는 물론 없다.

또 라틴어 고유명사 'resurrectio'는 예수(jesus)가 죽은 지 사흘 만에 되살아난 사건이 부활(復活-후츠카츠)이라고 일역(日譯)된 대로 쓰이고 있는 말인데, 직역하면 ‘(누웠다가) 다시 일어남’이라는 뜻이 된다. ‘일어나다’라는 뜻인 부정형 동사 ‘surgere'에서 파생되었다. 선택된 기독교인들이 ’최후 심판의 날‘에 저승(종교마다 각기 다른) 어딘가에서 살아있던 영혼(anima)과 죽었던 육신(corpus)이 재결합하여 생시의 형질 그대로 되살아나는 것도 보통 명사 ’resurrectio'라고 한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세상의 어떤 물체(substance)든 똑같은 형질을 잠시도 지속하지 않는다고 보는 불교도와 양자물리학, 세포생물학자들 -인간의 몸은 약 60조(兆)개의 세포로 구성되는데, 매일 누구에게서는 1만개 정도의 세포가 암세포로 바뀌지만, 대부분은 체내 항체들에게 공격당해 폐사하고 새 세포들이 생겨난다는 것이 의학계 보고이다- 이야 어떻게 받아들이건, 세계의 전 기독교인들은 이 ‘부활’이라는 으뜸 교의를 확신하지 않는 한 기실 아무 의미도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예수와 그리스도(christus-基督-‘찌뚜’) 교인들의 부활은 죽기 직전 생시의 형질(그러나 ‘불멸의 몸’으로 생생하게)을 고스란히 지닌 채 되살아났(난)다는 뜻이니까 회생(回生)이나 소생(甦生)이라는 말과 소통할 수도 있겠지만, 뇌사 상태에 있던 환자의 기적적 회생이나 소생이 더 언중(言衆)에 가깝다.

 

티벳의 영적 지도자 달라이라마가 자신의 전생(前生)을 알아맞혔다고 하여 전세(前世)의 달라이라마가 환생했다고 통속적으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의 환생이 진실(verity)이라면 이소노가미 교수의 논리대로 전생이라고 해야(형질이 달라졌으니까) 적절하지 않을까.

 

환생이란, 단순히 ‘죽었던 목숨이 삶으로 되돌아옴’으로 새길 수 있는 말일 것 같다. 생환(生還)이라는 도치(倒置)어와도 소통할 것 같지만 죽은 줄로 알았던, 죽지 않은 동일인(6.25전쟁 국군 포로 등)의 생환이 더 일반적이다. 물론 레테 강을 건넜던 망자의 사흘만의 생환 -평자는 그 실례를 알고 있다.- 이든 환생이건(生과 還은 둘 다 체언도 되고 용언도 된다) 문학작품 속엔 동일하게 수용할 수 있을 터, 출가(出家)와 가출(家出)은 쓰임새가 다르지만.

 

부연하자면, 소생, 회생, 환생은 'revival'이라는 한영(韓英) 사전 역(譯)이 있고, 생환은 'returning alive', 세례를 받고 기독교(주로 개신교) 신앙인으로(靈적으로) 새로 태어남을 뜻하는 ‘rebirth’(신생, 재생)라는 영어도 있으며, 신앙에서 멀어져 영적(靈的)으로 죽었다가 ‘다시 산다(再活)’는 뜻의 부흥(復興-후이고우)이라는 개신교 전용어는 영어 ‘revival'의 일역(日譯)이라는 것을 아는 이가 많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전생(轉生)의 영역이나 나전(羅甸)어 역은 보이지 않는다. 'converted life' 또는 ’turning life'라고 영역해 봄이 어떨지....

 

앞에서 메난드로스 왕과 문답을 주고 받은 나가세나 존자의 ‘다시 태어난다’는 주제로 돌아가 보자. ‘말’의 지평에서 존자는 과연 힌두어(200여개의 방언 집합)로 우리말 ‘다시 태어나다’라는 뜻의 말을 정확히 그대로 썼는지, 아니면 와전(訛傳)이나 오역(誤譯)인지도 모르지만 말 자체의 의미대로라면 ‘다시 태어난다’는 건 세상에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한번 태어난 영아가 모체의 자궁 속으로 되돌아가 재임산 될 수 있단 말인가. 혹 이소노가미 교수의 원저를 우리말로 옮긴이가 일본어 원문 ‘재생(再生-사이세이)’을 독자의 독해 편의를 위해 그렇게 번역한 것은 아닐는지.

 

재생(再生)이라도 그렇다. 존자는 윤회 속에서도 상주불변, 불멸하는 주체, 아트만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즉 윤회 속 개인의 연속적 실체인 아트만이 형질을 바꾸어 전생(轉生)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再) 태어나는(生) 것’이라면서 개인의 생존은 인연소생의 것이므로, 현세의 인간과 미래세에 다시 태어날(재생할) 인간은 불일불이(不一不異)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미래세의 형질은 현세의 형질로부터 생겨난 것이므로 온갖 업의 과보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이에 대해 이소노가미 교수는 나가세나 존자의 ‘다시 태어난다’는 말의 내용은, ‘분명히(되돌릴 수 없는) 윤회에 의한 전생(轉生)’인데 어떤 형질을(단절 없이) 이어받는다든지, ‘어떤 불변하는 것이 전생하는 것이라면 비로소(그제야) 다시 태어나는 것이 가능하겠지만....‘이라고 알쏭달쏭하게 비판했다.

 

여기서, ‘어떤 불변하는 것을 단절 없이 이어받아 격격세(隔隔世) 인연 소생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생물 사회학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봄직하다. 인간은 낙지(落地) 이후부터 생물학적 인간에서 결국 사회학적(환경적) 인간으로 순치된다. 생물학적 유전이란 결국 사회학적 흭득 형질의 유전이 아닌가. ‘사회학적 존재가 유전학적 의식을 결정한다’는 행동주의(behaviorism)적 강변도 그래서 나온 것 아닌가.

 

한편, 도가에선 승천위신(昇天爲神)한 천중(天衆) 가운데 전생(前生)의 여한(餘恨)을 잊지 못해 삼신에게 빌어 전생(轉生)하는 신명(神明)은 전생(前生) 가계(家系)의 조상신명들과 절연(絶緣)하고 새 가계에 태어난다고 하는데, 이 경우 ‘불변하는 어떤 것’의 전생(轉生)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나의 전생(前生)은 격대격지(隔代隔地)의 아무개였다는 이른바 숙명통(宿命通)의 전생담(前生譚)을 우리는 그냥 웃으며 받아넘기지 못한다. 왜일까.

 

이소노가미 교수는 ‘메난드로스 왕의 질문에 대한 나가세나 존자의 대답 내용만 가지고선 무아설과 업 사상의 모순이 근본적으로 해소됐다고는 도무지 생각되지 않는다.’고 결어(結語)한다. 그러나 시공(時空)의 유한(有限)을 살다가는 한 종교학자의 관견(管見)이 반드시 온전한 해법이라고도 보기 어렵다.

 

워낙 직관지(直觀知)의 영역에 속하는 윤회전생 설이 과학적 결정론일 수 없고, 불가지론자인 B. 러셀의 말을 빌린다면 ‘과학은 언제나 미지의 바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교수는 철학자와 시인의 어간(於間)에서 푸념한다.

 

<원래 ‘아(我)’라는 주체가 없고 일체의 (생)존재가 불생(不生; 제행무상이므로)이라면 어떻게 하여 죽음이나 (업보가 따르는) 윤회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가령 ‘제법무아’를 깨달을 지라도 우리는 현세에 있는 한 쉽사리 아집(我執)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아집이 있기 때문에 걱정도 하고, 사랑하고, 분노하고, 질투하고, 애석해 하고, 두려워하면서 잠시도 마음을 편하게 갖지 못한다.

 

이 일 자체, 즉 육취(六趣)가 있음으로써 윤회는 나에게 허망한 것이 아니라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는 현실이다.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에서는 대소(大小), 광협(廣狹), 일다(一多), 염겁(念劫)의 구별이 없기 때문에(그는 구경에 유식론자이다) 제법(諸法)에 아(我)가 없고 시간에 삼세(三世) 없고 윤회도 역시 허망하다.>

 

3. 아트만, 그 업(業) 사상과 무아(無我)설의 거멀 못

 

세상에는 무한한 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우주(宇宙; 四方上下謂之宇 往古來今謂之宙-회남자), 다른 하나는 인간의 무지이다. -아인슈타인

 

우리가 우주의 질료(質料-materia)에 대해 아는 부분은 4%에 불과하고 나머지 96%는 암흑(미지) 질료(물질-matter, 에너지-energy로 구별하고 있으나 영어 ‘matter'의 조어는 라틴어 ’materia'이고, 물질과 에너지는 단절 없이 상호 변환되며, 물질은 소립자 즉 아원자들로 구성되고, 에너지는 ‘소립자들의 소나기’ 곧 ‘파동’이라는 관점으론 물질과 에너지는 ‘둘’이 아니다. 질량불변의 법칙과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뫼비우스의 띠’ 위에서 물질과 에너지의 호환되는 양이 피차 가감되더라고 그 총량은 불변이므로 같은 내용이 된다)이다. -NASA(미 항공우주국)

 

인간의 무지가 무한하다는 아인슈타인의 단언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없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상대성 이론이 끝(최종해법)이 아니고 더 알아야 할 게 있다’고 얼마전 NA-TV(국회방송) 심야 과학 프로그램에서 몇몇 세계적 이론물리 천문학자들에게, 리포터가 인터뷰한 30개 문항에 가까운 질문에 대한 답변 중, 한 내용과는 상관없이 20세기의 세계 물리학계를 이끌었던 아이슈타인도 물리학으로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이 있음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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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크로니시티(synchronicity). ‘우연의 동시 일치’, ‘비 원리적 원리’, ‘비인과적 관련’이라고 C.G. 융이 자기의 이 신조어를 요약 설명한대로, ‘창조론’을 전제한 유태, 기독교계 과학자들의 ‘유예된 결정론’이라고나 할까. 아인슈타인이 워낙 초자연적이어서, 물리학으로 해명할 수 없는 것이라고 즉답을 회피한 이 미과학(未科學)의 목록 중에는, 이른바 ‘기브온 사건(여호수아,13)이나 모세가 홍해를 염력(psychokinesis)으로 일거에 양분(兩分)한 역사적 사건 등, 주관적(집단 신앙적) ’심증‘은 가기에 상대적 사실(fact)로는 받아들이지만, 학자라는 공인의 입장에선 절대적 진실(verity)이라고 타인에게 강변할 수 없는 사례들이 많다.

 

본고와 관련해 그 밖의 신크로니시티 가운데에는 전거한 도불(道,佛)가의 숙명론도 포함된다. 나가세나 존자는 아마도 도가에서 말하는 육신통(六神通) 중 하나인 이 숙명통(자신과 남의 전생을 꿰뚫어 투시함)에 든 도승이 아니었을까.

도승(道僧)은, ‘절대적(초월적) 아(我)’의 대칭(對稱)인 ‘비아(非我)’를 부정할 뿐, 상대적 ‘무아(無我)‘는 절대적으로 부정하지 않는 신(新) 실재론-신(新) 도교의 관심대상이며, 아(我)가 ‘아’임을 인식하는 ‘나’마저도 부정해 버려 어차피 업보윤회도 부정해야 하는 순수 선(禪) 학자들로선 경시(輕視)의 대상일 뿐이다.

 

상대적 무아를 프로이트 류 정신분석학에서는 ‘앰비밸런스(ambivalance)'라는 전문 용어로 대치해 놓았다. ’등가성(等價性)의 양분(兩分) 심리현상‘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이 ’이중(二重) 자아(自我)‘ 현상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며, 이것이면서 동시에 저것이기도 한(此則彼 彼則此)‘, 양가성(兩價性)의 자아, 곧 확정적 무아 아닌 석가불(釋迦佛)의 이른바 ’네티‘적 무아이면서 동시에 네티(neti)적 유아(有我)를 임상심리학의 시각으로 적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스위스의 정신병학자 J.브로이어는 정신분열증 환자의 심성을 관찰하다가 상반된 감정, 욕구, 의지, 행동이 동일인에게 병존하는데 더구나 이것을 정신병자뿐 아니라 정상인들에게서도 볼 수 있으며, 생물 일반의 근본적 경향이라는 데에 착안했다. 예컨대 감정의 앰비밸런스의 경우, 누구를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기분이 작동함과 동시에 그것과 정반대인 증오와 혐기의 기분이 고개를 들며, 의지의 앰비밸런스의 경우, 무슨 일을 꼭 해야 한다는 강박을 받으면 다른 한편으론 어떻게든 이를 피하려는 반(反) 의지가 동시에 작동하는 것 따위가 그것이다.

 

이와 같은 양면 심리현상은 명백히 모순된 것이지만 두 길항(拮抗)하는 무의식적인 감정과 의지의 에너지는 역학적 평형성을 가지면서 인격(personality)을 형성한다. 프로이트는 19세기 중엽에 물리학자 헤르만 폰 헬름홀츠가 발견한 에네르기 불멸의 법칙을 퍼스낼리티의 앰비밸런스(인격의 양면성)로 환치했다. 그에게 두 갈등하는 힘의 진위(眞僞) 또는 선악(善惡)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며, 둘 다 우주에 내재하는 역학적 필연으로서의 사실(facts)일 뿐이다.

 

보리달마(菩提達摩-bodhi dharma)는 9년 동안의 면벽참선 끝에 무엇을 얻었을까. 절대자아 없음을 진각(眞覺)한 순간에 절대무화(絶對無化) 했을까.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인 그가 이조(二祖) 혜가(慧可)를 깨우쳐 주었던 것처럼 마음(mind, 우주심은 'Mind') 즉 자아를 자각하는 주체(res cogitans)가 어디에도 없다면 자아 밖으로 나가든 들어오건 -C.G. 융은, 자아 밖을 내다보면 꿈을 꾸게(집단 환상 속으로 들어가 자아 상실) 될 것이요, 안을 들여다보면 꿈을 깨게 될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결국 꿈속에 있는 것이고 꿈을 깬다는 것은 결코 자증(自證) 될 수 없다.

 

<(전체가 함께 꾸는) 꿈속에 있으면서 그게 꿈- ‘꿈’이란 말은 언제부터 그 절대적 자의(自義)을 갖게 되었을까 -인줄 어떻게 알며(강물의) 흐름 속에서 (물 분자의 하나로 전체와) 함께 흐르며(냇가의 국외자가 아닌 한)어떻게 그 흐름을 알겠는가. -이문열

 

그런데, 달마 조사(祖師)가 시해선(尸解仙) 되어 생시의 자기 모습을 후인들에게 ‘보이셨다’는 일화(逸話; behind story)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입증될 수 없는 낭설이라고 일소에 부쳐 버릴 것인가. 설인(雪人)을 목격한 사람을 만난 사람들의 전설처럼, 끝없이 떠돌아다니는 환시(幻視) 논란으로 치부해 버릴 것인가. 사도 요한이 팟모스 섬에서 무아(無我)-아즉범(我則梵) 중에 목격(묵시- revelation)한 것도 착시(錯視)였을까.

 

만일 포스트모더니즘(post modernism-후기 근대주의)의 시각대로 세계는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보는 대로’만 존재하는 것이고, ‘확실한 것은 나변에도 없다’면 이 아날로그(analogue; 이성언어의 의미해체)와 팍디베르소(facdiverso; 여럿이되 서로 다른 진실, 십인십색)는 자기(나) 인식의 확실성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되었을 터이지만, 전체의 인식(공유인식- 개념-conception)에 대한 불신을 의식적으로 강화하는 만큼, 상대적으로 더욱 왜소해지는 자기 존재의 고유성- 정체성을 자기기만(self deception) 하면서까지 현시하려 드는 듯한 인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물론 이 역설적 자기 난국을 벗어나려는 잠정적 방편으로 각종 대소(大小) 이데올로기(이데아+로고스=半神半人이념) 집단에 편승해 보지만 무시로 각자위심(各自爲心)해 동이불화(同而不和)하는, ‘우리’라는 공동체(community) 아닌 동일체(同一體-identity)는 실체-substance(‘아래-sub’에 ‘서다-stare’라는 라틴어 결합사에서 파생한 영어로 ‘저본底本’이라고 직역해도 어떨까 싶다)없이 부유할 뿐이고 제법유아(除法唯我)는 필경 ‘뻐꾸기 둥지’로 아니면 오늘의 ‘사과나무’를 심고자 각가지 힐링(healing-본디는 심령치료였다), 탐식(貪食), 탐승(貪勝), 탐미(貪美)...여행을 분주히 떠나고 있다.

성즉기(性卽氣), ‘아침에 기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으리라’(朝聞氣夕死可矣)?

 

석가불은 팔고(八苦) -생로병사의 사고(四苦) 외에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불득고(求不得苦), 오온성고(五蘊盛苦)를 더해- 에서 벗어나려면 아집(我執)을 버려야 하고 아집이라는 무명(無明-avidya)으로부터 헤어나려면 ‘무아’부터 진각해야 한다고 설법했다.

 

아(我)는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오온(색, 수, 상, 행, 식)의 가합(假合)일뿐이며 ‘나’라는 감각의 주체를 찾기 위해 ‘주어진-data’ 여러 ‘감각-sentatio’ 자료(感覺所與-sense date)를 따르다(法) 보면 세상에 항상성(恒常性)을 가진 형질은 아무것도 없고 일체는 아(我)도 무상(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임을 오득(悟得)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기실(其實), 석가불에게 아(我)의 초월적 존재가 가능한가 하는 인식론적 과제는 관심 밖이었으며,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당면한 현세고로부터 해탈하도록 하기 위해 ‘네티(neti)’적인 ‘상대적 무아’를 깨우쳐 준 것인데, 후대의 불교도들이 이 ‘무아’에만 집착한 나머지 오히려 아(我)의 존재의미를 더 부각시키게 된 것은 사상사의 아이러니라고 이소노가미 교수는 지적하고 있다.

 

이를테면, 붓다(석가불)는 ‘아즉범(我則梵)’이고 따라서 ‘무아즉무범(無我則無梵)’이라고 가르쳤지만 ‘절대무아’를 강변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만일 그랬다면 그의 육체사(肉體死; 무여열반) 후 그와 함께 대우주-브라후마(梵)도 절대무화(絶對無化)했을 것이다. 그러나 입멸 후에 승천위신(昇天爲神), 선화(仙化)한 석가불은 두솔천(兜傘天-tusita deva)에서 선관(仙官)으로 발전적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게 전언이다.(증산도 도전에서)

 

그러면, 석가불은 선화(仙化) 전에 실재론적 윤회전생 설을 분명히 부정했는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붓다(석가불) 입멸후 백년이 지나 교단에 분열이 일어났고 신도들은 보수파로 간주되는 상좌부(上座部)와 진보파인 대중부(大衆部)로 갈라져 갔다. 신념에 바탕을 두었는지 어느 시대에나 흔히 있는 교단 내부의 권력 투쟁에 기인한 것이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표면상으로는 양파 간에 가로놓인 종교관의 근본적인 대립 때문이었던 것으로 되어있다.

 

양파 사이에는 존재론, 시간론, 불신론(佛身論) 등에 상당한 간격이 있었던 것 같다. 예컨대, 상좌부가 실재론적 경향을 가지면서 시간에 대해서도 과거, 현재, 미래 삼세(三世)를 항유(恒有)라고 본데 비해, 대중부는 연기(緣起)의 이법(理法)에 따라 일체 법을 찰나 생명으로 보았고, 삼세에 대해서는 현재만이 실유(實有)이고 다른 것은 무체(無體)이거나 아니면 삼세의 어느 것도 가환적(假幻的)이라고 본 것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불신론(佛身論)에 관해서 예를 든다면, 상좌부에서 붓다는 이미(무여) 열반에 들어 회신멸지(灰身滅之) 했다고 교설한데 비해, 대중부는 붓다의 신체적 형질이 초인적이었음을 강조했다.>

 

이소노가미 교수가 인용한 저자 불명의 전거(典據) 내용을 놓고 보면, 실재론적 경향의 상좌부가 윤회전생 설을 소박하게 견지한데 비해, 유식(唯識; 오로지 관념)론적 관점의 대중부는 이를 가환적, 관념적인 내용으로만 해석했을 것 같다.

그러나 제법무아가 상대적일 수밖에 없듯이 육도 윤회에 대해서도 ‘네티(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이것이면서 동시에 저것이기도 하다)’적 모호한 입장을 취했으리라는 것을 유추하기 어렵지 않다. 예컨대 한 바라문(婆羅門)이 붓다에게 “귀신(지옥의 문지기 등)이 실재하느냐”고 묻자, “네티(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했으며, 즉석에서 “그러면 실재하지 않느냐”란 질문에도 역시 “네티(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한 후, 당혹해 하는 바라문에게 “바라문이여, 세상은 귀신의 실재에 큰소리로 동의 한다”고 ‘세상’에 단답(單答)을 전가했다. 그러니 2백여 방언으로 구전되던 그의 설법 내용이 백년 후에 상좌부와 대중부에 따라 해석 대립의 차이를 보인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오늘날 중국이나 일본의 일부 선종을 제외하고 특히 한국의 경우, 이론적으로는 화엄 -유식을 표방하는 대부분의 대승- 불가에서, 제법무아설과 실재론적 육도 윤회설이 대승(大乘)이라는 지평에서 범연(泛然)한 동행 현상을 보이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국 유식불교계의 한 선지식이었던 법정(法頂) 스님은, 그의 수필집들 중 한 두 행간에서 “...다음 생에는 ㅇㅇ로 태어나고 싶다”고 농언일 수 없는 진심 토로를 하고 있으며, 다른 대목에선 실재론적 한국 무속의 난립을 개탄하고 있다.- 또 불교방송의 프로그램 중 <백팔번뇌의 대 참회문> 가운데 ‘오직 내가 들은 것만을 옳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참회하며...’라는 발원문이 있는데 ‘여시아문(如是我聞; 내가 들은 바는 이와 같다)’이라는 유식파의 공안(公案; 옛 중국 관공서 공문의 제목을 선가에서 차용)과 소통하지 않을 것 같다.

 

이소노가미 교수는 또 논저의 다른 부문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상좌부가 아비달마(阿毘達摩)에 중점을 두고 불교교학의 울창한 이론체계를 세워 올린데 비해, 대중부는 서민의 편에서 실천윤리를 생명으로 했는데, 후세에 이를 상좌부는 소승 불교라 불렀고 대중부는 자리이타(自利利他)를 지향하는 대승불교로 발전했다>고 모종의 전거(典據)를 인용하고 있다.

 

여기서 잠깐 짚어야 할 게 있는 것 같다. 즉 석가의 입멸 후 스리랑카, 타이, 미얀마 등에 정착한 별칭 ‘남방불교’야 말로 개인의 해탈을 지향하는 소승불교(hinayana buddhism)이고 중국, 한국, 일본 전래의 ‘북방불교’는 상구보리(上求菩提)와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병진을 지향하는 명실상부한 자리이타의 대승불교(mahayana buddhism)라고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는 점이다.

 

부연하자면 티벳 불교 즉, 라마교의 원류인 벤교는 몽골의 샤머니즘이 유입되어 토착화했고, 현존하는 한국의 무속(샤머니즘)은 실재론적인 정토종(淨土宗) 불교와 많이 습합돼 있다는 게 종교학자들의 견해이다.

 

물론 반드시 대승이 옳고 소승이 그른가 하는 문제는 좀 더 따져 보아야 할 논의거리이긴 하다. 만약 원력(願力)으로 태어난 보살(bodhisttva)들이 상구보리 끝에 감청한 범천(梵天)의 응답이 <부처를 죽여라(투사-pyojeetion, 하지말라)>라면 그저 업력(業力)으로 태어나 자유(vimutti; 자기사유)에 따라 살아 갈 뿐인 중생(sattva)에게 ‘-해야한다’고 하화(下化)를 시도한다면 이는 보살 달마의 말 따라 남의 자유를 구속(비록 그것이 황금사슬이라고 할지라도)하는 것이 된다. 여기서 <각자의 행위는 행위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갖는다>는 성 크리슈나의 잠언은 재음미할 말 하다.

 

결과나 목적에 집착하지 않고, 행위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갖는 행위는 노자(老子)의 ‘무위(無爲)’와 소통한다. 물론, 과이부득이(果而不得已)하고 방하착(放下着)한 행위는 노자나 크리슈나와 같은 혹 유선(或 有善)한 선성자(善性者)에겐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것(그것도 노자나 크리슈나가 살던 시공에서나 있을법한)이겠지만 유영철과 같은 혹 유악(或 有惡)한 유전적 악성자(惡性者)를 두고 보면, 유전학이나 창조 진화론을 도외시할 수 없는 아포리아(aporia; 난제)이다.

 

노장(老莊)이나 크리슈나의 시대에 현대 물리, 생물, 의학적 창조 진화론이나 유전학이 없었던 것을 간과해선 안 된다. 만일 노자나 크리슈나가 유영철과 동종의 유전자를 갖고 있었다면 ‘마음가는대로, 물 흐르듯 무위하라’고 무책임한 대 사회적 발언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소노가미 교수에 따르면, 상좌부에 속하는 설일체유부 파(派)가 본체는 삼세에 걸쳐 항유(恒有)하는 실재론적 관점을 견지한데 대해, 그 후대의 유식론적 중관파(中觀派)는 <삼세(三世)는 실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존재가 있고서야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지, 시간이 선재하고 그로 말미암아 존재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며, 결국 생사유전(生死流轉)이 있는 데에는 시간은 있을 수가 없고, 시간은 연기(緣起)의 계열이며 그러나 어떤 존재이건 공(空)이기 때문에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되는 것>이라고 논박했다.

 

여기서 거두절미하고, 만약 우주가 무시무종(無始無終)하다면 어떤 존재이건 공(空)일 수 없다. 무슨 얘기냐 하면 ‘창조주의 우주창조 이전에 시간은 없었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얘기가 아니고, 선,면,입체의 3차원 공간(宙)과 시간(宇)은 4차원 시공 연속체(time space solid)이고(아인슈타인)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의 양면인데, 시간과 공간을 분리 해 ‘시간은 존재가 없고서야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라고 주장한 기원전 5세기경의 중관파(인도)는 분명히, 중국 송대 선사들의 진공묘유(眞空妙有) 즉 가시적 물체(色)는 유이불유(有而不有; 있는 것 같지만 항성을 가진 실체가 아닌 허유))이고 비가시적 공간은 무이불무(無而不無; 없는 것 같지만 기실 단절 없이 상호 변환되는 물질과 에너지, 소립자들과 이들이 어네지로 끊임없이 파동 치는, 빈틈없는 연쇄구조물의 바다)라는 인식론에 못 미쳤던 것 같다.

 

만약, 절대무 속에 존재(being)했을 우주 창조주를 배제한 절대무로부터는 아무 것도 나올 수 없으니까, 시간과 공간은 선후(先後) 없이 시작 없는 처음부터 공존해 왔을 것이다. 따라서 ‘어떤 존재이건 이건 공(一切 皆空)이기 때문에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되는 것’이라는 말은 ‘말이 안 되는 말’이 된다. 진공(眞空) 즉, 절대 무공간은 절대 무시간과 함께 처음부터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다. 열역학 제 1법칙과 에너지-질량보존의 법칙대로라면.

 

“존재(宇宙)는 무한히 소급된다.(머레이)”

 

“우주 시작은 빅뱅이 아니었다. 원인은 반드시 결과에 앞선다. 그런데 결과인 빅뱅 이전에 원인인 시(공)간은 존재치 않았다. 빅뱅은 원인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났을 사건이지만 시공간은 빅뱅에서 파생된 것이다.(싱)”

“블랙홀이 있어야 빅뱅이 가능하다. 불랙홀은 폭발하기 마련인데 그게 빅뱅이다.”

 

“초우주 안에 다(多) 우주가 존재한다. 다 우주(multiverse)가 존재한다면 블랙홀 -천문학의 고전이론에 따르면, 최초의 별들은 2개의 수소가 융합하여 1개의 헬륨으로 되는 원자 핵 융합을 한다. 그 결과 막대한 빛과 열을 방출하며 대부분의 별은 수 십 억년이나 이 상태를 지속한다. 그러나 별들도 수명이 있어서 이윽고 노년기인 백색 왜성이 되어 조용히 빛나다 서서히 식어가서, 마침내 흑색왜성으로 몰락해 자신의 중량을 이지지 못해 짜부라진다.

 

별들의 질량(mass constant; 항성의 덩어리)이 태양의 2-3배 이하로 줄어들면 밀도는 상대적으로 높아져, 물의 밀도의 1백 조(兆) 내지 1천조 배나 되는 중성자별이 된다. 그래도 이 별은 ‘파울리의 배타원리’에 따라 완전히 와해되지는 않고 그 크기를 유지하다가 최종 크기(질량)의 직경이 약 10km정도 이하로 줄어들어 (우리) 태양 질량의 약 3배 이하로 줄어들면 중성자의 무게조차 감당치 못해 질량의 반경이 제로(0)로 줄어들면 밀도와 비중은 무한대로 늘어난다. 이런 상태를 존 휠러 교수(프린스턴 대)는 ‘검은 구멍(biack hole)'이라고 명명했다-도 여럿 있을 수 있고, 만약 빅뱅이 블랙홀의 폭발이라면 다 우국회방송 심야 프로그램 중에서 윤회전생 설은 유식파인 이소노가미 교수가 그 기원을 속신(俗信)으로 보고 경시한 것과는 다른 시각으로 이후로는 재고되어야 할 신(新) 과학의 과제가 아닐까. 신트로니시티, 그 영원한 미(未)과학의...

 

뭣보다, 이소노가미 교수가 화엄경과 현수대사(賢首大師) 법장(法藏)의 ‘화엄오교장(華嚴五敎章)’ ‘십세융법이성문(十世融法異成門)’ 등을 원용한 대로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 향하는 방향성을 가진 흐름이나 지속이 아니라 현재에서 현재로 흐르는 영원한 지금의 환류(還流)>라면 틈(隔), 입·출구 없는 물돌이(河回)처럼 유클릿 기하학적 평면 정원(正圓) 속의(물의) 흐름과 같은 것일 텐데 거기엔 ‘흐름(流)’이 이미 처음부터 정지되어 있으므로 ‘환류’라는 말은 가언(可言), 불가성어(不可成語)가 아닐 수 없다. ‘우주 외 존재자’가 아니면 사용불가한 말이다.

 

나선(螺旋) 못(釘) 형(型)의 홈을 따라 나선회(螺旋回) 중인 물처럼 일방성의 계류(繼流) 가운데엔 시간의 신구(新舊) 교행(交行)이 있을 수 있다. 일념(一念) 만년(萬年)을 넘어 무한년(無限年)할 수 없는 한, 나선상(螺旋狀) 시간 흐름의 시종(始終)을 조망(眺望)할 수 없는 한 그 누가 일방성의 영원한 선류순환(旋流循環; 이소노가미 교수가 논저의 말미에서 사용한 말)을 또한 말할 수 있겠는가. 우주 본체, 브라흐마(brahma) 외엔. 아니, 브라흐마(‘성장하다’라는 뜻의 'brih'에서 파생되었다) 자체도 영원한 나선상 진화체(進化體) 아닌가.

 

“해(日) 아래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솔로몬, 전도서)”

그러나 우주라는 '장(場-field)' 속에서 존재는 생멸한다. 가시적 생멸 속에 삼세(三世)가 실재하지 않는다고 할 것인가. 찰나를 살다가는 인간으로선 역시 할 수 없는 말이다.

 

공간(중관파가 ‘존재’라고 정의한) -천지(객사)는 시간- 과객과 더불어 끊임없이 간다(行). 북송(北宋)의 역학자 소강절(邵康節)이 계산한 대로 우리 태양계가 나선상(螺旋狀) ‘우리 은하’의 중심 주위를 12만9600년 주기로 나선상 공전을 하면서 생장염장(生長籢藏)의 사계(四季) 변화, 즉 선류(旋流) 순환진화를 하며 129,600나누기2=68,000년의 선천(先天; pre world)이 곧 끝나고 68,000년의 후천(後天; post world)-50,000년은 ‘지상선경’으로 운위되는 후천 인류생존기, 그 후 다른 성수로의 대 이주기 후 나머지 18,000년은 빙하기)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대전환기에 육도윤회도 종료된다고 석가불 이하 어느 고승, 대덕, 선지식이 말했던가.

 

그 대답 여하에 신(新) 실재론 -신(新) 도교-미륵(彌勒)불교에 의지하는 본소고의 에필로그(epilogue)가 따를 것이다.

 

경남문학 2015여름(통권111)

[출처] 윤회 전생, 그 실재론과 유식론적 해석 -輪回와 轉生을 중심으로|작성자 불교공부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