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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불교의 末法論 /고영섭​

불교의 末法論 /고영섭

1. 새 천년과 말법

2. 불교의 시간관

1) 시간적 존재

2) 언어적 존재

3. 불교의 삼시론

1) 정법시: 불교의 황금시대

2) 상법시: 형식적 불교시대

3) 말법시: 불법의 멸망시대

4. 마음의 시간

 

 

​1. 새 천년과 말법

 

지난 천년이 가고 새 천년이 오고 있다. 여기서 '가고' '옴'이란 물리적인 존재의 이동이기보다는 심리적인 현상의 변화로 이해된다. 금년 12월 31일 밤 23시 59분과 24시 정각 사이는 1분이라는 흐름이 있을 뿐이다. 이 사이는 단지 비실체인 어떠한 '흐름'만이 존재할 뿐 실체로서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시간은 존재하는 사물의 변화에 따라 인식되는 것일 뿐 존재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시간은 다분히 의식 내적 존재요 언어적 존재라 할 수 있다.

 

또 '새'라고 하는 말에는 이미 '옛'에서 흘러온 시간의 흐름이 전제되어 있다. 시간은 '시(時)의 간(間)', 즉 흐름(時)과 흐름(時)의 사이를 일컫는다. '사이'는 어떠한 공간과 공간의 틈새를 전제로 하는 말이다. 그래서 시간은 공간의 틈새의 반복, 다시 말해서 어떠한 경계와 경계 사이에서 인식된다. 시간은 물리적 존재가 아니라 의식 내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흐름을 그 속성으로 지닌다. 물이 흐르듯 우리는 어떠한 물체의 공간적 변화를 통해 시간을 느낀다. 그러나 마음의 시간은 물리적 이동의 전제 없이도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시간은 언어적 존재요, 모든 존재는 시간적 존재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시간의 이중적 함의가 있다.

 

여기에 하나의 직선이 있다고 할 때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삼세는 우리가 어떠한 지점에 점을 찍을 때 비로소 생겨난다. 아직 오지 않은 현상인 미래와 이미 지나가 버린 현상인 과거 사이에 현재는 자리한다. 그러나 그 현재는 실체가 아니다. 때문에 시간은 우리의 작위 속에 있다. 즉 삼세는 우리의 마음 속에 어떠한 포인트를 전제함으로써만 생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시간관은 물리적 시간관이기보다는 심리적 시간관을 지향한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諸行無常)는 명제는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사실을 심리적이고 인식적인 사실로 환원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것에서 '모든 것에는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諸法無我)는 명제가 생겨난다. 이 사실은 모든 물리적 존재의 실체가 부정됨으로써 가시적 존재는 실체가 없는 어떠한 현상으로 환원되는 것이다. 따라서 '새' 시대의 천년은 '옛' 시대의 천년과의 유비 속에서 언어적으로 존재하며 기억과 의식의 흐름 속에서 인식될 뿐이다. 그러나 불교의 삼시론에서의 말법시에 대한 담론은 이러한 불교의 '무상적 시간론'을 일탈한 해당 시대의 비관적 역사관일 뿐 불교 일반의 논의는 결코 아니다.

 

시간을 실체 또는 실재화 하지 않는 불교에서는 종말론처럼 하나가 끝나고 나면 다시 하나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바라보는 관점, 즉 과저 속에는 이미 현재의 원인이 들어있고 현재 속에는 이미 미래의 원인이 내재해 있다고 본다. 다시 말해서 우리 눈 앞에 벌어져 있는 고통스런 현실 속에는 이미 그 고통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 담겨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초발심 속에 이미 깨달은 이의 삶의 모습이 담겨 있다'(初發心時便成正覺)는 언표는 보살의 행위 속에 부처의 일상적 모습이 투영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과(因果)가 둘이 아니고, 생사(生死)가 둘이 아니며, 자타(自他)가 둘이 아니라고 보는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언어적 존재이자 의식 내적 존재인 시간을 실체화하여 시작과 끝을 설정하는 종말론은 우리의 현실적 고통을 소멸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희론(戱論)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시간의 시작과 끝을 기다리지 않는 '무상의 시간관'에서 볼 때 한중일 삼국에서 전개된 말법사상은 해당 시대의 교단의 박해, 도덕적 타락, 근기의 저열함 등에서 비롯된 지극히 제

한된 역사관이며 불교의 전 시간관 또는 역사관에서의 하나의 변주일 뿐이다.

 

​2. 불교의 시간관

 

1) 시간적 존재

 

'모든 것은 변화한다'(諸行無常)는 명제는 불교 세계관의 기초가 된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실체는 없다'는 이 말은 모든 현상(존재)은 변화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변화 속에서의 존재는 곧 시간 내에서의 존재를 의미한다. 그래서 '모든 현상' 또는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흘러간다는 이 언표는 어떠한 고정된 현상이나 존재는 없다는 것이며 동시에 모든 존재는 시간적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면 시간이란 무엇인가? 대승 이전, 다시 말해서 근본불교와 아비달마불교에 있어서 시간은 인식의 직접 대상이 아니었다. 우리는 어떠한 사물의 변화에 의해 시간을 인식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시간적으로 변화하고(顯色) 공간적으로 점유하는(形色) 성질을 지닌 존재(사물)의 공간적 이동이나 빛깔의 탈색(脫色)에 의해 시간이 가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말은 나의 삶으로부터 벗어난 어떠한 시간이 이미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물리적으로 변화함으로써 그 변화의 거리를 흐름으로 환산하여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간은 존재의 내재적 원리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억과 의식의 흐름에 의해서도 시간을 인식할 수 있다. 어제 들었던 어떠한 정보가 오늘까지 내 의식의 스크린에 남아있다는 것은 시간이 기억과 의식의 흐름 위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어제까지 정상적이었던 인간이 오늘 아침부터 뇌졸중에 걸렸다면 이 식물인간에게 더이상 시간은 기억되지 않는다. 이런 경우 시간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어떠한 인식대상이 아님이 증명된다. 시간은 의식 내적 존재인 것이다.

 

아비달마 불교의 대표적 부파였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는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존재는 실체적으로 존재한다"(三世實有)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인식의 주관은 실체가 없으나 인식의 대상은 실체가 있다"(我空法有, 法體恒有)고 역설했다. 이에 대해 설일체유부에 매우 비판적이었던 경량부(經量部)는 "현재만이 실재이고 과거와 미래는 실체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現在有體, 過未無體)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들은 시간을 독립된 하나의 실체로 보지 않고 사물의 변화에 즉해서 시간을 인식하는 불교의 시간관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은 공간 이전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변화하는 사물의 이동이 시간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의 변화가 전제되어야만 시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존재는 시간적 존재이자 의식 내적 존재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시간은 임시적 존재(假法, 假有)일 뿐인 것이다. 여기에서 시간 속에서 시간을 초월하려는 불교적 시간관의 실마리가 보인다.

 

​2) 언어적 존재

 

불교에서는 인식의 대상을 시간적 존재(有爲法)와 초시간적 존재(無爲法)로 나누어 설명한다.

 

시간적 존재는 '만들어진'(有爲) 존재이자 법칙성으로서의 존재(法)이며, 초시간적 존재는 '만들어지지 않은'(無爲) 존재이자 시간으로 환원되지 않는 존재(法)이다. 이러한 구분은 다분히 방편적 설정이지만 경험세계와 이상세계를 표현함에 있어 매우 적절한 방식이다. 이것은 진리를 표현하는 두 형식, 다시 말해서 붇다의 교설을 방편적 진리(俗諦)와 구극적 진리(眞諦)의 측면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중관(中觀)의 이제설(二諦說)의 방식과도 통한다.

 

대승 이후의 불교는 대승 이전의 불교와 시간을 달리 이해한다. 대승 이후의 불교는 시간을 언어적 존재(假有)로 인식함으로써 우리의 시간관념을 집착으로 파악한다. 어떠한 고정된 사유나 실체를 부정하는 불교에서 집착은 떨쳐버려야 될 것, 넘어서야 할 것, 초월해야 할 것으로 인식된다. 언어적 존재인 시간을 의식으로부터 독립된 실재로 파악하지 않듯이 대승 이후의 불교는 초월의 범위 내에서 시간을 논의하고 있다.

 

대승의 공사상은 시간의 실체성과 실재성을 철저하게 부정한다. 시간은 시간이라는 관념에 대한 집착으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시간은 존재하는 사물에 즉해서 세워질 뿐이다. 그런데 존재하는 사물은 실체성을 지니지 않기 때문에 시간도 실체성을 지니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중관이나 유식 모두 시간의 실체와 실재를 부정하고 있다.

 

유식에서는 모든 존재는 유식에 의한 존재이며 인식의 흐름 속에서 표상(vijapti)되는 존재이다. 때문에 외계에 실재하는 어떠한 존재는 없다. 시간 역시 외계에 실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인식 내적 존재이다. 그런데 이 '식'은 인식하기(舊唯識)도 하고 전변하기(新唯識)도 한다. 아뢰야식에는 모든 존재를 생성시키는 잠재적 능력(種子)이 있다. 이것을 '나'(자아)라는 것으로 보면 말라식(自我意識)이 생겨나고, 자기가 '오성적으로 인식'한다는 형태를 취하면 육식(六識)이 생긴다.

 

아뢰야식에서는 파악하는 주체와 객체는 아직 종자로서 잠세(潛伏)적이지만, 자아의식과 육식에서는 그 종자가 현세(現行)화하여 주체와 객체의 관계에서 존재가 출현한다. 여기에서 일상의 인식과 선악의 행위가 전개된다. 심층심리와 표층심리의 관계 속에서 보면 아뢰야식의 종자는 원인이 되고(種子生現行), 그것이 현행하여 주체와 객체의 관계로 성립하는 인식 또는 행위는 그 결과가 된다(現行熏種子). 이때 나타난 인식 또는 행위는 영향력을 지니며 그 영향력은 아뢰야식 안에서 새로운 종자가 된다(種子生種子).

 

이때 현행하거나 잠복하는 종자 자체는 순간마다 생멸한다. 그러면서 결국 과거와 미래를 언제나 내장하면서 순간마다 현재의 것으로 재생하여 이어진다. 이것은 시간을 현재를 중심으로 파악하고 그 현재가 순간마다 변화를 더하면서 비연속적으로 연속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유식에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단지 표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해한다. 이것은 아뢰야식 속의 종자가 어떤 외적인 실재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객체로서 현행하고 그 현행된 존재에 대해 과거와 미래와 현재를 가상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일체는 유식'임을 체득하는 순간 이와 같은 가상 구조 위에서 성립하는 모든 일상적 시간관념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모든 집착과 그 잠재적인 힘인 종자를 끊어버릴 때 윤회의 근거인 아뢰야식은 전환하며 거기에서 시간과 관련을 지닌 식의 변화는 정지되고 법계와 깨달음의 세계가 나타나는 것이다. 유식의 시간론은 현실에서 전개되고 있는 미혹의 세계를 마음의 분석을 통하여 설명함으로써 현실세계의 구조를 비연속적인 연속으로 파악하고 아울러 시간의 허구성도 밝혀내게 된다. 따라서 시간은 단지 우리 의식의 스크린에 표상된 허구적 존재이자 언어적 존재임이 드러나는 것이다.

 

​3. 불교의 삼시론

 

불교에서는 모든 것을 시간적 존재이자 언어적 존재로 파악한다. 이 말은 모든 현상(존재)은 시간 내적 존재이자 의식 내적 존재임을 언표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간 이해는 전 불교사상의 철학적 기반이 된다. 그러나 어떠한 사물의 물리적인 변화에 의해 인식되는 시간은 불교 역사 속에서 매우 다양한 변주를 보인다. 붇다시대의 시간 이해와 그 이후시대의 시간 이해가 변모를 보이는 것은 해당 불교인들의 역사관의 변화라 할 수 있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諸行無常)는 명제는 이미 불교인들의 역사관도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붇다가 열반에 들자 붇다의 가르침을 붇다의 생존 당시처럼 이해하기는 불가능해졌다.

 

붇다의 가르침에 대한 그릇된 이해, 그릇된 전승, 그릇된 실천 등도 역시 붇다 당시의 불교도들에 비해 그 근기가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처럼 모든 것이 변화한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변화하고(變, 顯色) 공간적으로 점유하는(碍, 形色) 속성을 지닌 존재의 변화만이 아니라 우리 의식의 변화까지도 언표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불교인들의 비관적 역사관인 삼시(三時)론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법시와 상법시는 이미 인도에서 그 맥락이 보인다. 하지만 말법시에 대한 이해는 특히 중국과 한국과 일본에서 정립된 것이다. 먼저 중국에서 삼시론이 제기된 것은 불교가 공인된 5, 6백년 뒤인 남북조 시대(420~581) 말기부터 수(581~617), 당(618~907) 초기에 집중된다. 이 시기의 중국은 여러 민족이 각축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불교를 신행하면서 다양한 불교사관을 정립하였다. 거기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형성된 형식화, 인습화와 더불어 국가로부터의 교단에 대한 박해를 경험하면서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양해졌다. 삼시론 가운데에서 말법시에 대한 관심이 집중된 것도 이러한 배경 위에서 였다.

 

삼시의 세 번째인 말법시는 해당 시대의 지극히 제한적인 시간 이해, 다시 말해서 정(正)·상(像)의 시대와 달리 말(末)의 시대를 붇다의 가르침의 영향력과 감화력과 실행력의 '쇠락'과 '쇠퇴' 및 악화된 정치·사회·역사적 여러 상황의 반영 위에서 형성된 지극히 비관적인 역사의 기간으로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비관적인 역사관은 특히 중국의 폐불과 훼불의 경험을 통해서 구체화되었다. 중국에서 삼시론을 제기해 온 혜사(慧思)·신행(信行)·도작(道綽)·선도(善導) 등의 말법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명확하게 정립한 자은종의 정초자 규기는 그의 저서 {대승법원의림장}(大乘法苑義林章)에서 이렇게 말했다.

 

부처 입멸 뒤에 삼시가 있으니 이른바 정법시 상법시 말법시이다. 가르침과·수행·깨달음(敎行證)의 셋을 갖춘 것을 이름하여 정법이라고 한다. 단지 가르침과 수행이 있음을 이름하여 상법이라고 한다. 가르침이 있을 뿐이고 나머지는 없는 것을 이름하여 말법이라고 한다.

 

규기가 확립한 것으로 보이는 삼시는 붇다의 가르침과 수행과 깨달음의 세 축을 통해 구분된다. 정법시(500년 또는 1,000년)는 불교의 황금시대를 일컫는 제1단계이다. 이 때는 붇다의 바른 법, 다시 말해서 붇다의 가르침(敎)과 수행(行)과 깨달음(證)이 완전하게 갖추어졌다고 본다. 그 다음의 상법시(1,000년 또는 500년)는 붇다의 가르침을 형식적으로 이해하던 시대라 일컫는 제2단계다. 이 때는 붇다의 가르침과 수행의 시늉에만 머물렀을 뿐 참답게 실행되지 않았다고 본다. 마지막의 말법시(10,000년)는 붇다의 가르침이 쇠락하거나 소멸한 시대라 일컫는 제3단계다. 이 때는 붓다의 가르침만 남았을뿐 수행자와 깨달음이 사라졌다고 본다.

 

이러한 삼시의 역사관이 생겨난 것은 교단 안팎으로부터 비롯된 혼란의 기운을 불법의 쇠멸에 대한 위기로 인식하고 다음 시대에는 언제나 새로운 법, 진실한 붇다의 가르침을 흥륭시키려는 강한 염원 위에서였다. 말법사상이 제기된 것은 이러한 위기의 기운을 교단이 온몸으로 느끼고 있을 정도의 심각성 위에서였다는 점에서 비관적인 역사관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다.

 

​1) 정법시: 불교의 황금시대

 

정법시(500년 또는 1,000년)는 그야말로 불교의 황금시대였다. 붇다가 열반에 든 뒤에도 붇다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에 입각한 수행자와 그 수행을 통한 깨달음이 엄존하던 시기를 말한다. 이 때는 붇다의 교법이 성하고 불도 수행을 열심히 닦는 사람도 매우 많았다. 더욱이 뛰어난 능력을 지닌 수행자가 많았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는 사람도 많았던 시대이다.

 

이 시대는 "세상에 비구가 있어 공경하여 법을 듣고, 공경하여 법에 날카롭게 통하고(通利), 공경하여 법을 지니고, 지닌 법의 뜻을 공경하여 관찰하고, 공경하여 뜻을 알고 법을 알아 법에 따라 행한다." 또 "들은 만큼, 통달한 만큼 법을 널리 다른 이를 위해 설하고, 법을 널리 다른 이에게 가르치고, 법을 널리 다른 이에게 독송시킨다." 다시 또 "승가가 화합을 잘 유지하고, 서로 욕하지 않고, 서로 나무라지 않고, 서로 싸우지 않고, 서로 떨어져 가지 않고, 믿지 않는 자에게 믿음을 만들어 주고 믿는 자의 일부를 떠나지 않게 하는" 시대이다. 그야말로 교단의 대중들이 붇다의 가르침대로 따라 행하는 시대를 말한다. 팔리어 증지부 경전 제8집 제6 [구담미품](瞿曇彌品)에는 붇다의 이모인 구담미를 대표로 한 석가족 부인들에게 팔중법을 엄수할 것을 전제로 출가를 허락한 대목이 설해져 있다.

 

아난이여! 만일 여인이 여래가 설한 법과 율에 대해 집을 나와 출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면, 아난이여! 범행은 오래 머물러 정법은 천년 동안 머물게 된다. 아난이여! 그렇지만 여인이 여래가 설한 법과 율에 대해 집을 나와 출가함으로써, 아난이여! 이제 정법은 오직 오백년만 머문다.

 

이 경문에 의하면 삼시설의 담론에서 정법시는 본디 1,000년간이었으나 여인들의 출가로 인해 상법시와 말법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짦은 500년간으로 줄었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경론에 의하면 정법 500년, 상법 1,000년({대집경})설뿐만 아니라 정법 1,000년, 상법 500년설({비화경}), 정법과 상법 각각 500년({大乘三聚懺悔經}), 심지어 그와 가까운 설({摩訶摩耶經})을 내어 불법의 멸진(滅盡)을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

 

정법과 상법에 대해 나오는 여러 경론의 설에서 공통된 것은 불교교단 내의 수행자들의 타락이나 싸움, 여러 국왕들의 불교 파괴 등 안팎에 걸친 불법 멸진의 여러 상황들이 서로 어울려 정법이 멸망으로 이르게 된다고 설하고 있다. 이후에 전개된 말법사상은 이러한 교단 안팎에서 일어나는 불법 멸진의 기운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처럼 붇다가 말하기를 "가섭이여! 명탁(命濁)·번뇌탁(煩惱濁)·겁탁(劫濁)·중생탁(衆生濁)·견탁(見濁)으로 중생의 선법(善法)이 물러서서 큰스승과 여러 성문(聲聞)을 위해 많은 금계(禁戒)를 제정하고 적은 즐거움(少樂)을 학습시킨다. 여래의 정법이 멸한다고 할 때, 비슷한 상법(像似)이 생긴다. 비슷한 상법이 세간에 나오면 정법은 곧 멸한다.

 

나쁜 세상에 대한 다섯 가지 더러움을 표현하는 오탁(五濁)은 흔히 오재(五滓) 또는 오혼(五渾)이라고도 한다. 첫째의 겁탁(劫濁)은 사람의 수명이 차츰차츰 줄어들어 30세·20세·10세로 되자 굶주림, 질병, 전쟁이 일어나 시대가 흐려짐을 따라 입는 재액을 말한다. 둘째의 견탁(見濁)은 말법시대에 이르러 삿된 견해, 삿된 가르침이 다투어 일어나 부정한 사상의 탁함이 넘쳐 흐름을 말한다. 셋째의 번뇌탁(煩惱濁 또는 惑濁)은 사람의 마음이 번뇌에 가득하여 흐려짐을 말한다. 넷째의 중생탁(衆生濁 또는 有情濁)은 사람이 악한 행위만을 행하여 인륜 도덕을 돌아보지 않고 나쁜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다섯째의 명탁(命濁 또는 壽濁)은 인간의 수명이 차례로 단축되는 것을 말한다.

 

오탁악세란 바로 이러한 오탁의 모양이 일어나 악한 일이 많은 세상을 일컫는다. 이때 사람의 수명이 8만 4천세로부터 줄어들어서 2만세에 이르면 점차로 오탁의 모양이 많아지게 되는 세상을 말한다. 상법시는 바로 정법이 멸하고 이러한 오탁이 극악에 이를 때를 말한다. 시대적·인간적·사상적으로 모든 정칙이 형식적으로 되어 가짜가 판을 치는 시대이다.

 

따라서 붇다의 가르침이 더 이상 우리의 삶에 진실한 의미로 다가오지 않고 형식적인 겉치레로 바뀌는 시대가 바로 정법이 통하지 않는 시대, 다시 말해서 상법시의 출발인 것이다.

 

​2) 상법시: 형식적 불교시대

 

상법시란 정법과 비슷하거나 닮았을 뿐(像似) 붇다의 가르침이 아닌 시대, 다시 말해서 정법시대와 닮아있을 뿐 붇다의 가르침과 형식적인 수행만이 남아있던 시대를 일컫는다. 이 시대가 되면 수행자는 있어도 그 모두가 능력이 낮고 소질이 약하기 때문에 수행자 가운데에서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 없는 때이다.

 

이때는 "세상에 비구가 있어도 공경하여 법을 듣지 않고, 공경하여 법에 날카롭게 통하지(通利) 않고, 공경하여 법을 지니지 않고, 지닌 법의 뜻을 공경하여 관찰하지 않고, 공경하여 뜻을 알고 법을 알아 법에 따라 행하지 않으며, 들은 만큼, 통달한 만큼 법을 널리 다른 이를 위해 설하지 않고, 법을 널리 다른 이에게 가르치지 않고, 법을 널리 다른 이에게 독송시키지 않으며, 승가가 화합을 깨고, 서로 욕하고 서로 나무라고 서로 싸우고 서로 떨어져 가고, 믿지 않는 자에게 믿음을 만들어 주지 않고 믿는 자의 일부를 떠나게 하여 능히 묘법(妙法)을 망실은몰(忘失隱沒)시키는" 시대이다.

 

붇다의 가르침을 듣고 진실하게 이해하고 실행하지 않고, 일반 대중들에게 알려지지도 않고 승가 안에서 서로 싸우게 될 때 정법(불교)은 소멸하고 상법시대로 이어져 끝내는 말법시대로 전개된다는 것이다.

 

앞으로 오백년 뒤에 모습이 비슷한 사문이 있어, 옷과 용모는 사문과 비슷해도 계(戒)는 비슷하지 않고 정(定)은 비슷하지 않고 혜(慧)는 비슷하지 않다.

 

상법시대의 수행자는 정법시대의 수행자와 외모나 용모가 비슷하지만 참다운 수행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는 이가 없는 시대가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말하면 이 때는 불교를 지탱하는 불법승 삼보와 경율론 삼장과 더불어 또하나의 중심 축인 계정혜 삼학이 붇다의 가르침 그대로 지켜시던 정법시대와 조금도 비슷하지 않고 제대로 닦는 수행자도 없는 지극히 형식적이고 번쇄한 시대라 할 수 있다.

 

(붇다의) 입멸 뒤 오백년의 정법이 멸할 때에 마땅히 비구가 있어, 성품은 탐착을 품고 맹리(孟利)와 탐욕은 그 마음을 비추어 무너진다.

 

정법이 멸한 뒤, 상법시대의 수행자는 모두가 이익을 맹렬하게 쫒는 마음이 눈앞을 가리어 자신의 참다운 마음을 바로 보지 못한다. 우선 눈 앞에 보이는 것만을 쫒기에 성품은 탐욕으로 가득차서 참다운 수행을 하지 못한다. 더우기 소소한 법에 집착하여 깨달음의 길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된다.

 

이들 성문은 성문법과 불법에 집착하여 오백년을 지난 뒤, 각각 분별 오(백)부가 있어 이로부터 제법의 결정상을 구함으로써 스스로 법에 집착하여 부처를 알지 못한다.

 

이 때의 수행자들은 부파불교시대의 수행자들처럼 불법에 대한 이해가 지극히 형식적이었고 번쇄한 철학으로 떨어져 정법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정법이 아닌 '가짜' 불교의 이해시대였던 것이다. 진실하지 않은 불교, 사이비 불교시대는 정법이 해이해지고 나태가 합리화되기 마련이다. 오온은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고,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근본불교의 가르침이 어느새 실체화되어 형상을 통하지 않고는 불법을 만나지 못하는 형식적 불교시대였다. 이러한 기운이 일

천 년간 지속되는 사이비 불교 이해의 시대를 말한다.

 

​3) 말법시: 불법의 멸망시대

 

말법시란 붇다의 가르침만 있을 뿐 수행자와 깨달음이 없는 시대를 말한다. 이 시대는 붇다의 교법은 있지만 수행하는 사람들의 능력이 약해지고 삿된 가르침이 두루 퍼져 실제로 불도 수행을 권하는 사람이 없게 된다. 더욱이 모두가 삿된 가르침에 빠져 악인이 되고 그 결과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 없는 시대가 된다.

 

말법시대는 이렇게 붇다의 가르침의 영향력과 감화력이 급격히 쇠퇴하고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실천력의 쇠퇴, 시대의 변화에 따라 급격히 악화되는 불교적이지 못한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여러 상황의 반영에 의해 불법이 멸망해가는 때이다. 말법이라는 비극적인 역사관이 정립되었던 것은 '교단과 교법의 어려움'(法難)과 더불어 현실적 인간들의 신행과 근기가 엷어지고 작아졌기 때문이다.

 

말법사상에 대한 최초의 예는 중국 천태종 2조인 남악 혜사(南嶽 慧思, 515~577)가 44세(558년)에 저술한 {입서원문}(立誓願文)에서 보인다. 여기에는 붓다의 입멸을 주(周)나라 목왕(穆王) 54년(기원전 948)으로 비정하고 그 다음 해부터 삼시를 계산하여 정법 5백년, 상법 1천년, 말법 1만년이라고 했다. 더욱이 자신이 태어난 515년을 말법 82년으로 셈하기까지 한다. 혜사가 말법에 대해 이렇게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그가 여러 나쁜 논사(惡論師)들과 자주 논란하다가 그들에게 살해당할 뻔했던 일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혜사는 살해의 위기를 통해 오히려 불도로의 정진의 서원을 새롭게 새워 여러 악논사들과 악비구(惡比丘)들이 넘쳐 어지러운 만큼 이들 악논사들과 악비구들이 진실한 불교도가 되도록 염원하면서 이 글을 쓴 것이다. 그는 나름대로의 계산법에 의해 정·상·말 삼시의 기준을 마련하고 미래에 우리를 이끌 스승(當來導師)인 미륵불이 이 세상에 나와 일체중생을 교화할 때에 계승되도록 서원하였다.

 

삼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당시의 경론으로는 {마하마야경}, {잡아함경}, {선견율비바사론}, {중론}, {대지도론}, {비화경} 등이 한역되어 정법과 상법시대에 대한 이해의 지평이 마련되었고, 뒤이어 나련제야사(那連提耶舍)가 번역한 {대방등집경}(大方等集經) [월장분](月藏分, 566년 번역)에 의해 말법시에 대한 이해가 보다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대집경} '월장분'의 [법멸진품](法滅盡品)에서 설하는 법멸(法滅)사상과 [분포염부제품](分布閻浮提品)에서 말하는 5·5백년설은 한중일 삼국의 말법사상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법멸진품]에서는 출가 비구의 파계행위를 밝히고 속인과 같은 배덕(背德) 행위가 미치는 영향에 대해 설하고 있다. 또 국왕, 신하, 사문, 바라문, 비사(毘舍, 食血肉鬼), 수다라(首陀羅)가 투쟁을 좋아하기 때문에 제천의 노여움에 의해 천재지변이 일어나며 이 세계는 사막과 같이 황망하게 된다고 한다. 다시 또 비구와 비구니(僧尼)의 파계 배덕에 의해 불교가 쇠하고, 그 결과 국토는 혼란하고 재해가 일어나서 마침내 법멸의 시대가 온다고 설한다.

 

[분포염부제품]에서는 붇다의 입멸 이후의 연차를 5백년을 한 기간으로 다섯 기간으로 나누어 해탈 견고(解脫 堅固), 선정 견고(禪定 堅固), 다문 견고(多聞 堅固), 탑사 견고(塔寺 堅固), 투쟁 견고(鬪爭 堅固)의 시대로 이름 붙이고 있다. 이 다섯 기간 중 앞의 네 기간은 정법과 상법시대에 해당하고 마지막 기간인 5백년은 투쟁 견고의 말법시대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이 마지막 투쟁 견고의 때에 이르면 붇다의 가르침은 쇠퇴하고 파계승이 나타나 법답지 못한 이들이 수행자의 이름을 빌려서 횡행하는 시대가 된다고 설하고 있다. 이러한 법멸 시대에 대한 예언상은 모두 당대 현실 사회의 타락한 모습을 극복하기 위한 날카로운 진단에서 비롯된 역사관이라 할 수 있다.

 

신행(信行, 540~594)이 정립한 삼계교의 가르침은 정법·상법·말법의 기치를 높이 내거는 이른바 말법사상의 강조와 분위기를 달리하지만, 내용적으로는 {대집경} 등에 의한 붇다의 입멸을 기준으로 하는 제3계 시(時)인 오늘 이 시간의 인간 존재의 말법적인 자아욕구 중심적인 존재방식을 깊이 추구하여, 그 시(말법시)와 기(機, 극히 사악한 인간)가 상응하는 삼계불법을 특별히 제창한 것이다. 즉 그것은 '대근기행법'(對根起行法)이라하여 현실의 인간존재(機根)에 대응(對)하여 주체적 실천(行)을 어떻게 해야(起) 하는가를 확실하게 역설한 것이다. 이와같이 극히 주체적이고 실천적인 보진(普眞) 보정(普正)의 동행자적 실천불교로 보이는 도작 이후의 정토교와 격돌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을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혜사에 이어 말법사상을 새롭게 재천명한 사람은 위에서 언급한 삼계교의 신행 뿐만 아니라 정토교의 도작(道綽562~645), 율종의 도선(道宣, 596~667), 자은(법상)종의 규기(窺基, 632~682) 등이다. 이들은 말법사상을 불교의 또하나의 역사관으로 정립시켜갔다.

 

중국의 도작은 정토교 통설의 교판인 1) 난이(難易) 이도(二道)의 교판 2) 성정(聖淨) 이문(二門)의 교판, 3) 돈점(頓漸) 이교(二敎)의 교판 중 두 번째인 성정 이교의 교판 속에서 말법사상을 주장했다. '난이(難易)의 이도(二道)'가 수행에 있어서의 '어려움과 쉬움'(難易)', '더딤과 빠름'(遲疾), '괴로움과 즐거움'(苦樂)이라는 관점에서 나눈 것이라면, '성정(聖淨)의 이문(二門)'은 말법이라는 시대의식 위에서 인간능력의 '우등함과 열등함'(優劣), 소질의 '강함과 약함'(强弱)이라는 시각

에서 붓다시대의 가르침을 구분한 것이다.

 

도작 등 특히 정토교에서 제시한 말법시에 대한 담론은 정토교의 위상을 정립하기 위한 시도라 보여진다. 붇다의 교설을 일정한 시간과 방법과 내용 등에 따라 자리매김하는 해석틀이었던 교상판석이 수당시대 이후로는 "가장 뒤에 오는 장작이 가장 위에 오른다"는 후래거상(後來居上)의 논리로 뒤바뀌어 자종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방편으로 전환되었다. 정토교 역시 이러한 교판의 기반 위에서 자종의 교판을 정립했다. 정토교의 이러한 교판은 말법의 시대에 상응하는 유일한 교법은 바로 정토교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맥락은 일본 법연(法然)의 정토교로도 이어진다.

 

중국의 여러 사상가들이 밝힌 말법시에 대한 규정은 지극히 제한적이지만 한 시대의 불교의 역사관임은 분명하다. 불교의 무상의 시간관에서 일탈한 이러한 역사관은 불교의 역사관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교단 안팎에서 자행되는 폐불과 훼불의 위기감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 속에서 비롯된 역사관이라 할 수 있다. 삼시론 중에서도 말법시에 대한 담론이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진단을 뒷받침해 준다. 말법시에 관한 담론은 정법시에 대한 갈구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

다. 자은종의 개창자 규기는 '여래 멸후 후오백세'(如來滅後 後五百世)에 대한 경문에 대해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후 오백 세란 말하자면 석가 입멸 후 정법 오백년·상법 천년·말법 만년이다. 아직 비구니의 출가를 허락하기 이전에는 정법 천년이다. 법에 3종이 있으니 이른바 가르침(敎)·수행(行)·깨달음(證)의 법이다. 그 가운데에서 정법이 머무르는 때는 3종이 있고, 상법이 머무르는 때(住時)는 깨달음의 법이 없어 다시 깨달음(果)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단지 가르침과 수행이 있을 뿐 정법시와 유사하므로 상(像)이라고 이름한다.

 

말법시에는 오직 가르침(敎)이 있을 뿐 수행(行)과 깨달음(證)이 없다. 가령 지계 수행자가 있어도 대개는 명예(名聞)와 이익(利養)을 위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후(後)라고 하는 것은 곧 세 번째 오백년, 후정법멸시이다.

 

규기는 가르침과 수행과 깨달음의 법이 정·상·말 삼시론이 성립되는 근거이며 특히 '여래 멸후 후오백세'의 의미는 바로 말법시의 법멸에 대한 예시임을 밝혀냄으로써 불법 그대로 이해되고 실천되던 정법시로의 회귀를 갈망하고 있다. 그러면 말법시에는 어떠한 현상이 생기는지를 경론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지금 무릇 어리석어 대부분이 온갖 고기(諸肉)를 즐기니 죄 중에서도 커서 이것을 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잡는 자의 판매는 단지 고기 먹는 사람을 위하여 하고, 필시 먹는 자가 없으면 역시 도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알아야 하니 먹는 자는 도살하는 업에 동조하여 살생의 몫에 젖는 것이니 경계가 되지 않겠는가. 그러니 대승의 말을 공부하는 자가 술과 고기의 사용을 알고 행하는(行解) 것은 곧 대승과 소승 2교에 받아들여지지 않고, 스스로 도살하는 행위 안으로 들어간다. 천마 외도들마저도 술과 고기를 먹지 않는다.

 

자기가 살고 있는 당대를 정법과 상법이 아닌 말법시대로 규정했다는 것은 도선(道宣) 자신이 불교의 황금시대였던 정법시대를 얼마나 갈구했는가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불살생계를 제1덕목으로 하는 수행자에게 있어 지계는 자신의 정체성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행자들이 온갖 고기를 즐기는 현실을 도선이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이 참다운 지계수행의 모습을 얼마나 갈망하고 있었는가를 잘 보여주는 구절인 것이다. 특히 그가 남산 율종의 창시자였다는 사실에서 이 지적은 계율을 잘 지키는 것만이 참다운 불교이자 정법의 불교를 여는 지름길임을 역설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금 말세에 따르는 사람은 정교(情巧)를 의무로 한다. 얻음(得)은 복경(福敬)에 있어도 잃음(失)은 법식(法式)에 있다. 다만 한 자나 한 치(尺寸)의 길고 짧음을 물어 눈과 귀의 다 갖춤(全具)을 논하지 않으며 값(價)의 날카로움과 뭉뚱함을 다투고 이바지(供)의 두터움과 엷음을 잰다. 술과 고기를 보고 탐욕하며 속세의 일에 힘써(俗務) 몸은 정결하지 않으며 마음은 오로지 이로움에 미친다. 부처의 상을 세워도 또한 위령(威靈)이 고갈되기에 이르고, 보살의 모습은 비유하자면 음녀의 모습과 비슷하며 금강의 모양은 한결같이 질투 많은 여자의 모습을 넘지 않는다.

 

모든 종교의 타락은 교단 내에서 정한 규율조차 지키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성직자나 신자를 불문하고 해당 종교가 제시하는 '절제'와 '금욕'적 삶의 방식을 지키지 않고 '무절제'와 '욕구'에 따르는 삶을 살 때 그 종교는 사회와 불화하고 국가의 기반은 흔들리게 마련이다. 도선(道宣)의 말법론에는 그가 말법시의 역사관에 서서 참다운 사회를 구현하려고 했던 모습이 담겨있다.

 

말법 오탁의 시대는 비관적 역사관의 극단적 모습이지만 도리어 새로운 불교시대, 즉 불교의 황금시대였던 정법시로의 회귀에 대한 희원을 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교의 무상의 시간관으로의 복귀를 희구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적 존재이자 의식 내적 존재이며 언어적 존재로의 복귀를 통해 시간관념에 대한 온갖 집착을 떨쳐버리고 바른 삶, 팔정도행과 바라밀행의 삶을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4. 마음의 시간

 

그런 의미에서 불교의 시간은 '마음의 시간'이자 '무상의 시간'이라 명명할 수 있다. 고통 속에 이미 고통의 소멸의 길이 있고, 원인 속에서 결과를 보는 불교의 시간 이해에서 볼 때 말법이란 우리 마음의 극단적인 상태의 한 흐름을 표현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적 인간들과 보살적 인간들은 저마다 자신의 심리적·물리적 욕망을 절제함으로써 시간관념을 해결할 수 있다. "나의 욕망 공간의 확장이 남의 욕망 공간에 대한 장애(희생)를 최소화(현실적 인간) 내지는 무화(보살적 인간)시키는 인식의 틀"로서 '연기'(緣起)를 이해할 때 우리 '마음의 지옥'에서 드러난 한 흐름인 말법은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불교에서 바라보는 무상의 시간관은 나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인 오온(五蘊)이 무상하고(無常), 괴롭고(苦), 실체가 없고(空),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非我, 無我)는 인식 위에서 출발한다. 다시 말해서 무상의 시간관은 탐냄(貪)과 성냄(嗔)과 어리석음(癡)을 멸한 열반(涅槃)의 상태를 지향한다. 따라서 연기(緣起)·무자성(無自性)·공(空)·자비(慈悲)의 관점 위에서 전개되는 불교의 시간관에서 바라볼 때 한중일 삼국에서 형성된 말법사관은 지극히 한시적인 역사관이라 할 수밖에 없다.

 

불교에서 시간은 실체가 아니고 실제도 아니다. 어떠한 사물의 변화에 따라 우리 의식의 스크린에 투영된 하나의 표상(vijapti)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정법시와 상법시와 말법시라는 삼시론은 불교 교단의 안팎에서 자행된 폐불과 훼불에 대한 위기감 속에서 형성된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역사관일 뿐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시간은 어떠한 사물의 변화에 의해 인식되는 비연속적으로 연속되는 인식의 흐름 속에서 표상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직면하고 있는 고통 속에는 이미 고통 소멸의 새싹이 소생하고 있는 것이다. 고통을 느끼는 순간 이미 그 고통은 변화하여 고통 속에는 소멸의 길로 변화할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고통은 그 고통을 실체화함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다. {반야심경}에서 "오온이 모두 실체가 아님을 꿰뚫어보고 모든 괴로움과 액난을 건넜느니라"라는 가르침은 모든 괴로움과 액난의 원인은 곧 오온을 실체라고 파악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때문에 존재를 실체화하지 않는 한 고통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종말론의 병폐는 바로 언어적 존재이자 의식 내적 존재인 시간을 실체화 함으로써, 다시 말해서 '시작'과 '끝'을 실체시함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불교의 무상적 시간관에서는 어떠한 고정 불변하는 실체는 없다. 모든 것은 인과관계 속에서의 존재요, 시간적 존재이며, 언어적 존재이자 의식 내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중일 삼국에서 특별히 논의된 불교의 말법론은 불교의 전 역사에서 바라볼 때 지극히 제한적으로 논의된 '비관적 역사관의 한 담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불교의 시간은 '무상의 시간'이자 '마음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by 育士道(육사도) | 2005/07/03 16:09 | 育士道(육사도) | 트랙백

[출처] 불교의 末法論|작성자 불교사상신앙수행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