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선사·백련사 결사운동의 전개와 추이
13세기 전후 불교계의 양상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신앙결사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주도세력의 출신성분이 이전과는 달리 대부분 지방사회의 향리층이나 독서층이라는 점이다. 이는 13세기 전후 시기가 고려 불교사의 전환기였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가령 지눌과 요세의 경우, 각각 황해도 서흥군의 독서층과 경상도 합천의 호장층 출신으로서 불교계를 주도한 인물들인데, 이는 이전의 문벌귀족이나 왕족출신이 불교계의 주도세력으로 부각되던 단계와는 달리 지방사회의 향리층과 독서층의 자제들이 불교계의 중추세력으로 등장하였음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지눌과 요세를 계승한 다음 세대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특히 주목되는 인물들은 수선사의 2세 주법인 혜심(1178∼1234년)과 백련사의 2세인 천인(天因, 1205∼48년)과 4세인 천책(天 , 1206∼?) 등을 들 수 있다. 혜심은 전남 화순 출신으로 속성은 최씨이며, 그의 부는 향공진사였다. 1201년(희종 4)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에 들어갔으나 그의 모친 배씨의 죽음을 계기로 하여 1202년 지눌의 제자로 입문하였다. 이러한 혜심의 경우에서도 그가 지방사회의 독서층 출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천인의 속성은 박씨이며 충남 연산 출신인데, 1221년(고종 8) 17세 때 진사과(국자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그해 겨울 고예시(考藝試)에 제일로 뽑혔으나 그 뒤 예부시를 포기하고, 1228년에는 동사생 허적, 진사로 뽑혔던 신극정과 더불어 요세에게 입문하였다. 이 사실로 보아 천인도 혜심과 마찬가지로 지방사회의 독서층 출신임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천책의 경우에서도 동일한 출신 성격을 발견할 수 있다. 천책은 바로 천인과 함께 요세에게 입문한 진사 신극정이다. 그는 경북 상주 관내의 산양현(지금의 문경군)에서 출생했으며, 이 지역의 토호세력인 신씨 가문 출신으로 국자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고, 그 뒤 예부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이어 관로에 나아갈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나 포기하고 1228년 23세 때에 요세의 제자로 입문한 인물이다.
이와 같이 지방사회의 향리층·독서층의 자제들이 13세기에 접어들면서 대거 불교계에 투신한 것은 당시 사회에서 상당히 일반화된 현상으로 추측되며, 고려시대를 통해 볼 때 이 시기에만 보이는 두드러진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문벌체제하에서 귀족적·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또 무신체제하에서 부용(附庸)적인 성격을 지닌 유학에 대한 회의와 반발에서 나타난 현상이 아닌가 추측된다. 역설적으로 이들 유학자들이 수선사와 백련사 등의 결사운동에 참여하게 된 이면에는 사상적으로 당시의 유학의 분위기에서 해결할 수 없는 사상체계를 수선사와 백련사 계통에서 표방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 구체적인 사상내용에 대한 언급은 여기서 피할 생각이지만 굳이 한마디로 말한다면 당시 13세기 동아시아의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가장 선진성을 지닌 사상을 표방한 인물들이 바로 지눌과 요세를 비롯한 결사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이라는 사실이다.
이들 신앙결사를 지원한 단월의 출신을 살펴보면 비록 수선사가 최우 집정기 이후에 가서 최씨정권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게 되었지만, 이들 결사가 결성되는 과정에서는 결사의 주도세력과 마찬가지로 지방사회의 토호층과 독서층이 중심이었다. 백련사는 1216년 전남 강진의 토호층인 최씨가의 지원에 의해 강진의 만덕산에 결사를 결성하였으며, 수선사의 경우도 결성 초기에는 인근 지역의 향리와 지방의 민들이 주요한 단월이었음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소수의 문벌귀족이나 왕실에 의해 독점되던 사상계의 주도권을 지방사회의 향리층과 독서층, 나아가 일반 민들까지도 공유할 수 있는 사회로 전환하게 된 것은 13세기 전후에 야기되었던 사회변동과 함께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 신앙결사운동은 13세기 중반의 대몽항전기를 거쳐 원지배기로 접어들면서 서서히 퇴조하였다. 수선사는 최충헌 집정 말기부터 시작하여 최우 집정기에 이르러 불교계를 주도하는 대사원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 당시 수선사를 주도한 인물은 혜심이었다. 혜심 이후에도 이러한 분위기는 계속 유지되어 수선사 제4·5세인 혼원(混元)과 천영(天英) 단계에는 절정에 이르렀다가, 최씨정권이 몰락한 1258년 이후에는 가지산문의 일연 계통이 부각됨으로써 서서히 퇴조하였다[미주 33].
백련사도 요세 이후 천인, 천책에 의해 계승되었으나 원지배기인 1284년에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의 원찰인 묘련사가 건립됨으로써 백련사의 사상적인 전통이 변질되었다[미주 34]. 백련사 출신인 경의(景宜)와 무외(無畏)가 묘련사에 참여한 것을 볼 때 백련사의 본래적인 성격이 변질·해체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묘련사를 뒤에 원지배기에 대표적인 권문세가로 부각된 조인규(趙仁規) 가문이 무려 4대에 걸쳐 4명의 승려를 배출함으로써 장악하였으며, 나아가 조씨 가문은 묘련사뿐 아니라 차츰 천태종 교권까지도 좌우하였다. 이 같은 현상은 원지배기의 정치·사회상을 반영한 것으로, 자각·반성운동으로 일어난 결사운동이 계승되지 못하고 변질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 것이라고 하겠다.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신앙결사가 우리 역사상 사회운동의 차원에서 존속한 시기는 13세기 전후에 걸친 몇십 년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수선사 계통의 지눌·혜심과 백련사 계통의 요세·천인·천책 등이었다. 12세기 이래로 지방의 토호층과 독서층, 일반 민들이 보수적인 문벌귀족체제에서 유리되면서 한편으로는 성장기반을 서서히 구축해가던 잠재적인 저력이 궁극에는 사회변혁의 동력으로 작용하게 되는 13세기 전후에 실천적인 결사운동이 전개되었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그러면 이러한 결사운동이 남긴 역사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첫째는 사회계층적인 측면에서 볼 때 보수적인 소수의 문벌귀족체제에 의해 장악되고 있던 불교계의 제반 모순을 지방의 토호층과 독서층들이 자각·비판하고 이에 대한 개혁을 시도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신앙결사를 주도한 몇몇 명승(名僧)의 노력도 중시해야겠지만 이보다 사회구조적인 측면의 변화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는 소수의 독점에서 상대적으로 다수에 의한 공유체제로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13세기의 고려사회가 처해 있던 대내적인 모순을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나기도 했으며, 아울러 30여 년간에 걸친 이민족과의 항전을 치러낼 수 있는 저력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사상사적 측면에서 볼 때 결사운동을 주도한 지도자들이 표방하고 있는 이념적인 지표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수행과 교화라는 두 방향으로 점철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어느 한쪽에만 경도되기 쉬운 현실을 감안할 때 중요한 교훈을 던져주는 것이다. 수행은 선사상이든 천태사상이든 출가인들의 본분이지만, 교화는 자기가 몸담고 있는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풀어나갈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이므로 실천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 양자는 관념적인 차원에서 머물 것이 아니라 수레의 양바퀴처럼 함께 하면서 실천의 장에 우뚝 서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모습을 결사운동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셋째는 신앙결사를 운동적인 차원에서 인식하다 보면 철학면(교리면)의 발전은 경시하기 쉬운데, 당시 수선사와 백련사를 주도한 인물들의 불교철학은 최고의 수준이었다는 사실이다. 단적으로 13세기 전반에 수선사가 간행한 선적(禪籍)을 보면 단순히 중국의 저술을 다시 간행한 것이 아니라 종합·정리한 것이 의외로 많음을 알 수 있다. 또 백련사도 천태·법화계통의 불서를 절요(節要)하고 쉽게 이해하도록 정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불교철학을 다수가 쉽게 공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신앙적인 의도가 작용한 것이지만, 이러한 시도는 철학면에서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여야 가능한 것이다. 신앙결사 단계에 구축한 이러한 철학면의 발전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불교철학의 자기화(自己化) 단계에 이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또한 13세기에 몽고와의 항전을 치르면서도 대장경을 주조한 사상적인 맥락과도 통하는 것이다. 당시 대장경 주조는 다각도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철학면에서 일정수준에 도달해야만 가능했던 것이다.
[출처] 수선사·백련사 결사운동의 전개와 추이|작성자 불교사상신앙수행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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