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아와 윤회의 문제>에 대한 견해 / 무구 김종연
무아(無我)에서 아(我)라는 개념을 단지 '나' 또는 '자아'라는 것에 국한하여 윤회(輪廻)와 결부 시켜 논쟁하는 자체로 인해 우리 범부중생들을 헷갈리게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이러한 무아.윤회 논쟁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며, 그것은 희론(戱論)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불교공부를 하시면서 '나라는 것이 없다' 즉 무아(無我)인데, 왜 윤회하는가? 물론 한번쯤은 이런 의문을 해봤을 겁니다.
윤회는 알다시피 불교의 고유사상이 아니며, 부처님 이전 오래동안 형성되어온 당시 인도의 보편화된 내세사상이며, 이 사상을 불교에서 수용하였습니다. 불교는 이 외에도 인도의 많은 사상을 수용하였습니다.
1. 무아(無我)
'무아.윤회 문제'를 논할 땐 '무아'라는 개념만 가지고 논하기보다 삼법인(三法印)중 제법무아 (諸法無我) 전체개념을 가지고 접근해야한다고 봅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란 '일체의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연기법(然起法)'과 맥을 같이 합니다.
'연기(然起)'란 '인연생기(因然生起)'의 준말로 '모든 것은 인연따라 일어나고 인연따라 소멸한다'는 것이 연기법의 기본개념입니다.
그러므로, 인도 정통 브라만교의 윤회주체로서의 '자아(自我), 즉 아트만(atman)과 불교에 있어 '아(我)'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브라만은 '인간'을 기준으로 하고, 불교는 '모든 존재'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모든 존재는 인연화합으로 잠시 결합되어져 있으며, 인연의 화합의 생이 끝나면 뿔뿔이 흩어집니다.
2. 윤회(輪廻)
윤회란 중생의 업식에 따라 생사를 반복한다는 사상이며, 이에는 윤회주체가 누구인가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브라만의 사상은 고정된 실체인 아트만이 윤회주체이며, 불교는 업의 내세상속으로 인한 연기의 윤회주체라고 말합니다.
이 업식으로부터의 자유로울 때 '해탈 또는 열반'으로 나타납니다. '해탈 또는 열반'이란,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고해(三界苦海)의 윤회바다에서 헤엄쳐 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3. 결론
윤회와 무아의 문제는 서로 결부시켜 보아야 할 것들이 아니라, 이 둘은 독립적으로 각각 따로 떼어놓고 보아야 옳다고 봅니다.
부처님께서는 윤회를 중생의 근기에 맞춰 제도하기 위한 방편교설로 사용하셨다는 것이며 또한 윤회는 '모든 욕망에의 집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저는 무아 또한 윤회와의 결부가 아닌 중도(中道)와의 결부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집착의 떠남'이 중도(中道)이므로, 제법무아에서 무아란 '고정된 실체에 집착하는 것을 떠남'의 가르침을 의미하므로 '무아'의 가르침은 바로 중도로 이해하셔야 될 것이라고 봅니다.
'윤회'는 '중도'로 극복되어야 하며, 중도의 완성은 팔정도(八正道: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에 의해 달성된다고 봅니다. 이는 제 견해가 아닌 초기경전에서 누누히 강조된 내용들입니다. '진정한 중도의 완성'이 '해탈'이며 '열반'이라고 봅니다.
[출처] 오픈백과 : 무아와 윤회의 문제, 무구 김종연(venusl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