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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

무아(anatman, 無我)

무아(anatman, 無我)

 

무아(無我)는 산스크리트어 anātman 또는 nirātman의 역어(譯語)이며 아트만(atman, 自我)에 대비되는 말로 이 말에는 내가 아닌 것非我라는 말과, 나를 소유하지 않은 것無我이라는 두 가지 뜻이 있다.

 

무아(無我)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나(自我)라는 것은 없다는 뜻이며 무아는 연기(緣起), 공(空), 무상(無常) 등과도 긴밀히 연관되는 개념으로, 연속적이며 불변의 실체로서의 자아를 부정한다.

 

아트만(ātman, 我)은 인도의 정통적 철학의 여러 학파에 의해 실재라고 간주된 영원불멸의 본체이고, 고정적 실체이다.

 

불교에 의하면 모든 현상은 생멸변화(生滅變化)하는 무상(無常)한 것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영원의 본체와 실체는 인식될 수 없다. 즉, 영구불변의 실체(實體)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교의 주장은 다른 모든 철학사상으로부터 구별하는 특징이자 불교의 근본사상이다. 나의 존재 유무에 대한 물음에 석가모니는 대답하지 않았다는 무기설(無記說)이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무아는 나의 것, 나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집착을 배제하는 것이다.

 

대승에서는 무아(無我)를 공(空, śunya)이라고 표현했다. 대승의 중도일승(中道一乘)과 일승원교(一乘圓敎) 등의 이론은 모두 공사상을 밑바탕으로 성립했다. 여기서의 공은 아무 것도 없는 단멸공(斷滅空)이나 물질인 색(色)이 멸(滅)해서 아무 것도 없다는 색멸공(色滅空)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색의 자성(自性)이 공하다는 색성공(色性空)을 말한다.

 

색의 자성이 본래 공하므로 모든 법은 서로 연기하여 생하는 것이다.

 

연기가 성립되는 것은 반드시 자성공(自性空)이 근본이 되는 것이다.

 

부처님은 공(空)을 바람과 같다고 비유(比喩)로써 말씀하셨다.

 

바람은 모양을 볼 수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없는 것은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공이란 그 모양을 볼 수는 없지만 결코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붉고 푸른 것을 여의고 따로 공공적적(空空寂寂)을 찾는다면 이것은 외도(外道)이다. 왜냐하면 색(色)의 자성이 공하기 때문이지 색 자체가 아무 것도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되면 있는 것이 없는 것이며 없는 것이 있는 것有卽是無無卽是有으로 통하게 된다. 이것이 중도(中道)이다.

 

부처님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무명에 연하여 행이 있고 행에 연하여 식이 있으며 내지 순수한 큰 괴로움의 무리가 모이느니라. 이 두 변(變)에 마음이 따르지 아니하며 바르게 중도를 향한다. 현성(賢聖)은 세상에 나와 여실히 전도하지 않고 바르게 본다. 말하자면 생(生)에 연(緣)하여 노사(老死)가 있고, 이와 같이 생(生), 유(有), 취(取), 애(愛), 수(受), 촉(觸), 육입처(六入處), 명색(名色), 식(識), 행(行)은 무명에 연하므로 행이 있다.

 

그 무명이 멸한즉 행이 멸하고 내지 순수한 큰 괴로움이 무리가 멸하느니라. 이것을 대공법경이라 이름하느니라. 말씀하셨다.(잡아함경)

 

대공(大空)이란 크게 공한 중도공(中道空)을 말하는 것이지 변공(邊空, 실재하지 않지만 설명을 위하여 가설한 방편 공)이 아니다. 일신(一身)의 진실한 생명체를 뜻하는 명(命)과 육신의 관계를 설명하여 현자와 성인은 명(明)과 몸이 같다거나 다르다고 보지 않으며, 중도(中道)에 입각하여 바르게 보며 그 중도는 연기설(緣起說)에서 유래한다.

 

그러므로 연기 밖에 따로 공이 없고 공 밖에 따로 연기가 없으며, 공 이외에 따로 중도가 없고 중도 이외에 따로 연기가 없다.

 

부처님은 5비구에게 비구들이여, 색(色)은 무아(無我)니라, 수(受)는 무아(無我)니라, 상(想)은 무아(無我)니라, 행(行)은 무아(無我)니라, 식(識)은 무아니라. 비구들이여, 이런 까닭에 소유한 색의 과거, 미래, 현재, 안內, 밖外, 거침麤, 미세細, 열등劣, 수승勝, 멈遠, 가까움近 등은 나의 것我所이 아니며 나我가 아니며 나의 주체我體가 아니니라. 이와 같이 바른 지혜로써 여실히 보아야 할 것이니라. 말씀하셨다.

 

색(色)은 무아(無我)이며 공(空)이라는 뜻이다. 이 경문에서는 제법(諸法)을 구성하는 5가지 요소인 색․수․상․행․식의 오온(五蘊)에 대하여 무아(無我)․무상(無常)․고(苦)의 삼법인을 순서대로 설하고 있다.

 

부처님이 초전법륜에서 나는 중도(中道)를 정등각(正等覺)했다고 선언하셨는데, 그 중도의 내용이 팔정도(八正道)라고 하시고, 그 다음에 사성제와 십이연기를 설하셨다. 5비구가 깨쳐서 부처님의 인가를 받았는데, 부처님이 그 5비구에게 설한 내용이 공(空)과 무아(無我)로 이것이 불교의 가장 근본 진리인 것이다. 오온(五蘊), 12처, 18계는 모두 물질(物質)과 정신(精神)을 말한다. 즉 몸과 마음을 의미한다.

 

부처님께서 몸과 마음을 색․수․상․행․식으로 표현하실 때는 물질보다 정신을 세분하여 심(識)과 심소(수․상․행)로 설명하신 것이고 몸과 마음을 12처나 18계로 설명하실 때는 물질을 좀 더 안․이․비․설․신으로 세분하고 정신을 의와 법과 의식으로 설명하신 것이다. 그래서 오온과 12처, 18계가 상호 의존하여 연기하는 것이 아니고 물질과 정신이 여러 원인에 의해 또 새로 생기는 조건에 의해 상호 의존 연기하는 것이다.

 

몸과 마음은 매 순간 자신에게 부딪치는 대상(色)에 대하여 그것을 받아들이고 아는 마음인 수․상․행(心所)과 식(心)이 일어난다.

 

예를 들면 아름다운 바이올린 소리(聲, 6경, 色)가 흘러나오면 즉시 귀(色, 耳, 6근. 色)가 그것을 접수하여 아름답다는 생각(想)과 좋다는 느낌(受)으로 그 소리를 집착하는 의도(行)를 일으키며 그 소리를 듣는 마음(識, 6식)이 일어난다.

 

그래서 몸과 마음, 물질과 정신은 찰나에 생하는 조건에 의해 생기고 다시 찰나에 그 조건이 소멸하면 몸과 마음, 물질과 정신이 멸하며, 즉시 새로운 조건에 의해 다시 새로운 오온(12처, 18계)이 생멸하며 흐르는 것이 연기이며 이것이 실제 우리의 삶의 실상이다.

 

이런 자신의 실상을 직접 수행을 통해서 경험하고 이해하여 체험으로 바르게 이해될 때 우리는 자신의 몸과 마음, 세간의 모든 것(財․色․食․名․睡)에 대하여 그것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실체 없음을 알아 모든 번뇌(貪․瞋․癡)로 부터 벗어날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항상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깨어있는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지켜보아 오온의 실상(性品)인 무상, 고, 무아를 보고, 오온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해탈 열반을 가르치셨다.

 

이것은 초기 불교(上座 佛敎)의 핵심이론이며 그 방법으로 8정도라는 해탈 열반으로 가는 바른 길을 제시하셨다.

 

부처님 열반 후 후대(後代)에 이 가르침을 근거로 공(空)사상(五蘊 皆空 渡 一切苦厄)이 일어난 것이다.

 

그 뿌리는 아함경전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불교는 그 핵심에 오온(五蘊)이 있다. 항상 자신의 오온, 몸과 마음, 물질과 정신, 6근과 6경, 6식의 상호작용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데 있다.

 

아함경(阿含經)에는 오온무아설(五縕無我說)이 있는데, 거기에서는 색(色)은 무상(無常)이다. 모든 무상한 것은 고(苦)이다. 고(苦)인 것은 무아(無我, anātman)이다. 무아인 것은 사(私)가 아니다. 사(私)는 무아가 아니다. 무아는 사(私)의 아(我, 아트만)가 아니다. 이처럼 있는 그대로 바른 지혜를 가지고 보아야 한다고 설명하고, 수(受)․상(想)․행(行)․식(識)에 관해서도 위의 정형구(定型句)에 의해 기술하고 있다.

 

무아설(無我說)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我)라고 생각하는 것 안에는 아무런 실체적인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실천 주체로서 자기의 존재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아(無我)라는 부정(否定)에 의해 자아에의 집착을 멸(滅)하고 그것을 초월함으로써 자기의 진실한 모습을 발견하려고 하는 것이 무아설의 취지이다.

 

소승에서는 인간존재에 대해서 무아를 말하지만(人無我) 그것을 구성하는 법(요소)의 존재는 부정하지 않는다.

 

대승에서는 상주(常住), 자기동일성(自己同一性), 자재력(自在力)의 속성常一․主宰을 지닌 아트만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여 무아는 무자성(無自性)으로 설명되었으며, 나아가 공관(空觀)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인무아(人無我)뿐 아니라, 법무아(法無我, 이때의 법은 모든 사물을 의미함)라는 말을 낳게 되었다.

 

소승의 무아설을 아공법유(我空法有)라고 말하고 대승의 그것을 아법이공(我法二空) 또는 인법이공(人法二空)이라고 말한다.

 

모든 것은 연기(緣起)의 이치에 따라 상호관련 속에서 변하면서 임시로 그렇게 존재할 뿐이라 한다. 불교의 이러한 사상은 종교적으로는 무신론(無神論)의 입장을 뜻하며, 윤리적으로는 나와 너의 구별을 넘어서 절대적인 선(善)을 실천하는 자비생활로 나타난다.

 

이름이나 명칭은 그 대상을 변화하는 사물로서가 아니라, 고정된 사물로, 그리고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결합체가 아닌 실체라고 믿게 하는 힘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격적 개체라는 표현 뒤에 육체 속에 존재하는 영원불변한 실체라는 간과하기 쉽지만 의미심장한 단서가 따라다니게 되는 것이다. 즉 부단히 변화 중에 있으며, 어느 정도 독립적인 기능을 하는 현상으로서의 자아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이며 불변의 실체로서의 자아가 부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대상을 고유명사나 보통명사로 지칭하더라도 그것들의 연기적 성격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면 문제가 없다. 문제는 명사가 아니라, 그러한 명사를 사용하면서 우리가 취하는 심리적 태도인 것이다.

 

무아가 부정적인 표현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내용이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염세적(厭世的) 세계관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고, 허무주의를 표방하는 것도 아니다. 없는 것을 없다고 말한 것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온(五蘊)을 근거로 영속적이고 변치 않는 자아가 존재한다는 미망과 집착은 생각보다 오래되고 또 질긴 것이다.

[출처] 무아(anatman, 無我)|작성자 kyoungahn

[출처] 무아anatman, 無我|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