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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

퇴옹 성철(退翁 性徹)의 개혁사상 연구 / 김경집(동국대 강사)​

퇴옹 성철(退翁 性徹)의 개혁사상 연구 / 김경집(동국대 강사)

Ⅰ. 서 언

성철(1912~1993)은 한국 현대불교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의 일생 동안 보여준 많은 행적과 법어는 세간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많은 이야기가 존재하는 것도 그만큼 영향도 컸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그의 생몰연대에서 보이듯이 삶의 대부분은 일제의 강점기와 한국사회가 현대화 되는 과정과 일치한다. 이 시기는 한국불교에 있어서도 외부의 영향으로 전통성을 상실하던 시기이며, 그 과정을 거쳐 현대적 불교로 변모하면서 겪은 내부적 모순을 척결하여야 하는 어려운 시대였다.

그런 현실 세계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온 성철 또한 수많은 질곡을 넘나들었고 그런 가운데 자신의 깨달음을 이루었다. 그런 면에서 부처님 법다운 수행으로 얻은 그의 깨달음의 실제는 무엇이며, 그것을 어떤 방향으로 실천하고자 했으며, 그리고 그 사상적 가치는 한국불교에 어떠한 영향을 남겼는지 이해하는 일은 단순히 그의 생애와 사상만을 정리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성철을 매개로 하여 불교의 깨달음을 근원적으로 이해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불교가 우리 사회에 어떻게 실천되어 현실적 모순을 개혁하고 미래지향적 성과를 이룰 수 있는지 불교의 사회적 가치를 이해하는 작업이다. 그런 의미로 볼 때 한국의 현대불교에 있어 수행과 실천의 師表가 된 성철의 시대인식과 개혁사상은 오늘날 자기 정체성을 찾는 불자들의 좌표가 될 수 있다.

Ⅱ. 생애와 시대인식

1. 탄생과 출가

성철(性徹)의 법호는 퇴옹(退翁)이다. 그는 1912년 음력 2월 19일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아버지 이상언과 어머니 강상봉씨 사이에서 일곱 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이름은 영주(英柱)였다.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들을 정도로 총명하고 책을 좋아하여 세 살 때 이미 어른들이 보는 책을 보았다. 다섯 살 때는 집안 어른을 따라 백일장에 가서 장원을 하였으며, 초등학교 시절에는 ‘서유기’ ‘삼국지연의’ 등 중국의 4대 기서를 사 가지고 돌아오면서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길옆 산모퉁이 양지바른 곳에서 해지는 줄 모르고 읽을 정도였다. 또한 자신이 읽은 내용에 의문이 있으면 숲 속에서 그것을 알기 위해 깊은 명상에 들었다. 그런 독서에 대한 열정은 초등학교를 마치고 서당에서 자치통감을 배운 뒤로 더 이상 교육기관에서의 가르침을 받지 않았지만 스스로 진리를 탐구하기 위하여 모든 경서와 신학문을 섭렵하여 학문을 대성하는 바탕이 될 수 있었다.

자신이 읽은 책을 적어 놓은 서적기에 행복론,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상비판, 역사철학, 남화경, 소학, 대학, 하이네 시집, 신구약성서, 자본론, 유물론 등 동서고금의 철학에 관한 책들을 즐겨 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런 책을 구입하기 위해 집 앞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개구쟁이 짓을 하기도 하고, 유학생이 가지고 온 서적을 비싼 값으로 구입하는 등 학문적 성취에 대한 열정을 지녔다.

청년기에 이르도록 이러한 관심은 지속되었고 학문적 성취를 이루기 위해 시도한 것이 일본유학이었다. 철학에 뜻을 두고 동경으로 가서 공부하였지만 마음에 일치하는 바가 없어 23세에 귀국하였다. 그 후 집에서 독서를 하며 쉬고 있던 어느 날 우연히 한 노승으로부터 영가(永嘉)의 증도가(證道歌)를 얻어 보았다.

책을 보면서 홀연히 심안이 밝아짐을 느꼈고 이를 계기로 지리산 대원사 탑전에서 40여 일을 정진하였다. 이때 태산 같은 의지로 정진하여 대원사에 머물고 있는 다른 출가자들이 경외심을 가질 정도였다.

이러한 구도심은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져 본사인 해인사에서 김법린, 최범술 등 큰스님들이 직접 대원사로 찾아와 출가를 권유하였다. 그러나 당시 출가자들이 가족을 동반한 생활에 호감을 갖지 않아 출가를 망설였다. 그리고 스스로가 참선만 잘하여 도를 이루면 될 것 같이 생각하여 형식에는 그다지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큰 사찰에서의 수행은 다를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어 해인사로 갔다. 머리를 길게 기른 채 선방에 들어 다른 수행자들과 참선을 하면서 그들에게 궁금한 점을 물었으나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았다. 그런 그의 마음을 움직인 분이 동산이었다.

참선을 통해 확신을 가졌던 영주는 그를 보고 비로소 참다운 수행자를 만났다는 생각과 함께 스승으로 모시고 싶은 생각이 들어 삭발수계 하였다. 그 때가 25세가 되던 1936년 봄이었다.

동산을 은사로 출가한 성철은 그 해 운봉화상에게 비구계를 받았다. 그 후 범어사 금어선원에서 하안거를 시작으로 범어사 원효암, 통도사 백련암, 범어사 내원암, 등 제방의 선원에서 수행하였다. 28세인 1939년에는 경북 은해사 운부암에서 하안거, 다음해인 1940년에는 금강산 마하연에서 수행하였다. 마침내 29세가 되던 이 해에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마침내 어둠을 타파하고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을 이룬 후에도 보임의 과정은 치열하였다. 30세가 되던 1941년에는 송광사 삼일암과 수덕사 정혜암의 선방에서 각각 하안거와 동안거를 마쳤다. 그 다음 해인 1942년에는 충남 서산 간월암에 있는 만공스님의 토굴에서 안거를 마치는 등 수행의 행각은 끊임없었다.

이 시기의 수행은 더없이 혹독하였다. 그것이 세간에 알려진 장좌불와이다. 1944년 문경 대승사로 옮겨 수행하면서 택한 방법으로 잠을 잘 때도 눕지 않는 것이다. 이 수행은 당시 수행정신이 해이해진 불교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이후 8년간 계속되었다. 이런 성철의 구도는 봉암사 결사에서 꽃을 피웠다. 전쟁으로 봉암사 결사가 해체되자 그는 월내 관음사로 피해 수행하였다.

1955년 이후 종단의 정화라고 하는 소용돌이 속에서도 동요하지 않고 정진하였다. 그것이 동구불출이다. 대구 팔공산 파계사 암자인 성전암에서 10년 동안 철망을 치고 신도들의 접근을 막고 수행하였다. 10년의 수행으로 자신의 세계가 완숙해진 성철은 1965년 김용사에서 대중들을 모아놓고 자신의 생각을 세상에 전하기 시작하였다. 1967년 해인총림 방장에 추대되면서 자신의 불교관을 백일 동안 발표하여 무량중생을 교화하였다. 그 후 해인사에 머물면서 1981년 대한불교조계종 제7대 종정, 1991년에는 제8대 종정에 재추대되어 종단의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성철의 수행은 참선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해인사에 머물면서 종문의 이론서인 선문정로를 저술하였고, 불교에 대한 자신의 교학관을 담은 법문집, 그리고 몸소 선정하고 번역한 선림고경총서를 발간하여 선종의 이해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와 같이 한 평생을 수행으로 일관하여 선풍을 드날린 성철은 평생 계율에 엄격한 무소유의 삶을 살다가 1993년 11월 4일 세수 82 법랍 58세로 입적하였다.

2. 구도와 시대인식

성철의 생애는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가 1912년 음2월 19일 출생하여 득도할 때까지의 시기로 탄생과 성장의 기간이다. 두 번째는 1936년 봄 해인사에서 득도하여 제방을 두루 편력하면서 깨달음과 장좌불와, 부처님 법대로 살고자 했던 봉암사 결사, 그리고 팔공산 성전암에서 철망을 치고 10년을 동구불출 하던 수행의 기간이다. 세 번째는 1967년 해인사 초대 방장에 추대되면서 시작한 백일법문으로 중생을 교화하고, 1981년 제7대 종정과 1991 제8대 종정에 추대되어 불교의 가르침을 펴는 한편 자신의 강론과 종문의 핵심어록을 발간하여 한국불교 선종의 토대를 닦다가 1993년 11월 4일 열반에 든 기간이다.

이와 같은 생애를 한마디로 평가한다면 현대불교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생애가 일제강점기를 시작으로 격변의 과정을 겪었던 한국불교의 흐름과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애 가운데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자신의 수행을 정립한 시기로 일제강점기, 미군정, 그리고 동족상잔과 급격한 사회변화 속에서 불교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 변화를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1876년 개항과 함께 들어온 일제는 1910년 합일합방 이후 한국불교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침략을 합법화하는 정책을 꾀하였다. 그 가운데 1911년 6월 조선총독부 제령 7호로 반포된 사찰령과, 9월 1일부터 시행된 전문 8조로 된 사찰령시행규칙에 의해 한국불교는 30본산제로 규정하면서 각 본사의 주지는 총독의 승인을 얻어 임명하였다. 그러면서 일제는 1,300여 불교사찰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런 한국불교의 규제와 통치는 일제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일제의 강점기가 끝난 8.15 해방은 민족적 차원에서 큰 전환기였다. 그렇지만 그런 변화를 예견하지 못해 美軍政이라는 또 다른 지배에 직면하게 되었다. 해방 후 3년간 실시된 군정은 우리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8.15와 함께 38선 이남을 지배하게 된 미국은 한국에 진주하자 기독교적 정책과 문화로 한국 국민의 가치관에 일대 변화를 초래하였다. 미군정이 불교에 대한 지식과 한국불교에 대한 상식에 전무했던 관계로 그들은 불교정책의 대부분은 일제의 사찰령을 그대로 답습하였다.

이와 같은 미군정의 정책 속에서도 시대적 인식을 가지고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의 경력을 가졌던 인물들이 일제의 잔재를 없앤다는 명분으로 종단이나 지위의 명칭을 바꾸고, 본산제를 폐지하면서 행정구역 13개 도에 따라 교구를 두어 교무원을 신설하는 등 새로운 시대에 부응한 제도가 모색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혁신은 하나의 형식에 지나지 않자 1946년 여러 단체들이 연합하여 친일불교의 청산과 여러 가지 건설적인 개혁을 개진하였다. 그렇지만 1947년 5월 이후 한국사회에 좌․우익의 이념대결이 일어나자 불교계 또한 분열되기에 이르렀다.

성철의 생애 후반부는 산업화에 따른 사회적 변화 속에서 종단 내의 정화운동과 불교의 대중화라는 특징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일제하에서 비롯된 잔재를 없애고 승가의 전통을 회복하고자 시작한 정화운동은 1955년 8월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를 시작으로 1961년 비구승들이 모든 중요 사찰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한 대법원 판결과, 1962년 4월 조계종과 태고종으로 나누어질 때까지 한국불교의 근본을 바꾼 승단의 개혁이었다.

그 정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양측의 양보와 정부의 중재가 있었지만 협의로써 끝내지 못하고 세속적 법에 근거하여 분열된 것은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화운동이 진행되는 동안에 급성장한 기독교의 활동은 불교계 포교에 큰 부담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정화운동이 끝난 후 본격적인 산업화가 계속된 한국사회는 의식의 변화와 다종교 사회로 접어들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불교는 자체의 모순을 치유하는 한편 타종교와의 경쟁에서 교세를 지켜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리게 되었다. 불교는 신앙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신앙적 공동체와 대중적 포교 방안에 있어서 정책과 기획이 부재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타종교는 교육기관의 설립과 함께 신도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서적의 발간 등 적극적 선교활동과 조직적 움직임으로 교세확장을 도모하여 교세의 저변을 확충해 갔다. 한국불교도 산업화이후 사찰의 수와 교직자의 수 그리고 신도의 수에서 일정부분 증가가 이루어졌지만 연령별 비례로 볼 때 노령화되고 있으며, 미래의 불교를 이끌어갈 10대와 20대의 비율이 타종교에 비해 현격하게 적은 양상이다.

이와 같이 성철의 생애는 일제에 의한 불교 본질의 변모와 미국의 점령으로 인한 기독교의 급성장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스스로의 분규와 내부적 모순 등 각가지 어려운 조건들이 산재한 시기이다. 다시 말해 종단의 역사가 외적 영향으로 크게 변모한 시대와 일치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스스로 모순을 거부하기도 하고, 지도하는 위치에선 과감하게 바꾸고자 노력하였다. 그런 노력의 목표는 승단의 본분을 지키는 것으로 자신의 삶에서 일관되게 보이듯이 부처님의 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계행과 승단의 구성원을 키워내는 교육이었다.

그는 승가의 일원이 될 때부터 수행자의 본분에 대해 깊이 인식하였다. 당시 사원의 수행자들이 일반인과 다름이 없이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 거부감을 보인 것이 그러한 예이며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었을 때는 누구보다도 철저한 수행과 연마로 일관하였음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다.

이런 마음가짐이었기에 평생 계율을 엄격히 하여 평생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젊었을 때는 16년간 생식으로 일관하였으며, 40여 년간 소금끼가 없는 적은 음식만으로 지내면서 옷은 광목과 마포 이외에는 입지 않았다. 그런 무소유의 정신은 자신이 사는 건물의 단청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런 계행에 대한 성철의 의지는 봉암사 결사 때 자운으로 하여금 범망경을 연구하여 한국불교의 계율을 확립하도록 한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Ⅲ. 개혁관의 방향

1. 새로운 신앙관 정립

한국불교는 조선조 배불정책을 거치면서 그 신앙적 형태가 많이 달라졌다. 교학연찬, 참선수행, 대중포교라고 하는 근본적 의미를 상실하고 쇠락해진 교단을 유지하기 급급했다. 많은 사원들은 불교의 의례를 부족한 재원을 보충하기 위한 기복적 형식으로 이끌어 갔다. 여기에 일본불교는 수행풍토마저 변모시켜 한국불교를 참담한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

이런 시대를 겪어오면서 불교신자들도 자연히 자신의 본성에 있는 불성을 찾는 일보다 불교는 단순히 복을 비는 종교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런 불자들의 인식을 바꾸고자 한 것이 바로 성철의 자기를 바로 보는 신앙관이다. 다시 말해 기복적인 신앙에서 자신을 찾는 신앙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성철이 남긴 법문 가운데 많은 부분이 바로 이것을 지적하고 있다. 구원되어 있는 자신을 바로 보자는 견해이다. 우리의 존재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하며, 유형․무형 할 것 없이 우주의 삼라만상이 자기라서 모든 진리는 자기 속에 구비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자신의 존재가 물질만능에 휘말리어 본 모습의 거룩하고 숭고함을 보지 못하면서 끊임없는 욕심에 눈이 멀어 암흑세계를 헤매는 비극이 계속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본모습은 먼지가 덮여있는 구슬과 같아서 먼지가 아무리 쌓여도 구슬은 변함없으므로 먼지만 닦아내면 본래 깨끗하고 구슬은 찬란하게 빛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때를 닦아내는 방법으로 제일 빠른 것은 참선을 해서 화두를 바로 깨치는 것이다. 그 때 거울에 있는 일체의 때가 벗겨져 본 거울이 나타나서 광명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왔음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자성을 깨치는 일을 강조한 성철은 신도들이 부처님께 드리는 불공 또한 물질적인 공양이 아니라 주위를 밝혀주는 불공이 참다운 불공임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지금까지 불공을 행하는 수행자는 불공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고 절은 불공을 가르쳐 주는 곳이며 불공의 대상은 부처님이 아니고 일체중생이라는 내용이다.

그런 불공에 대해서 꼭 돈으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몸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남을 도와주는 것 모두를 불공으로 보았다. 버스 속에서 노인이나 어린이에게 혹은 병든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해주는 것, 또 정신적으로 고민을 하고 있는 사람이나 혹은 어떤 사람을 좋은 길로 인도해 주는 것 모두가 불공이라는 것이다.

그런 불공 가운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불공을 특히 강조하였다. 첫째, 물질을 베푸는 것으로 굶주리고 헐벗으며 병든 자의 고통과 슬픔을 구하는 일이다. 그래서 부처님께 바칠 시주금도 절을 찾아가는 도중 불우한 사람을 만났을 때 외면하지 말고 정성껏 그를 도와주라고 하였다. 법당의 부처님 공양도 중요하지만 항상 먼저 국토의 불우한 이웃을 돕는 것이 참 불공이기 때문이다. 둘째, 타인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고, 버스 안에서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 등 타인을 위한 환희심의 육체적 봉사이다. 셋째, 법공양으로 불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법을 설하여 삶에 있어서 용기와 희망을 심어주는 일이다.

이런 마음으로 집안의 부모님, 거리의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 발밑에 가는 벌레, 머리 위에 나는 새 등 넓고 넓은 우주 등 천지의 모든 것이 다 부처님이기 때문에 정성을 다하여 섬기자고 하였다.

이러한 성철의 신앙관에 대한 개혁은 불교계의 내면적 성숙을 추구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불교계가 스스로 청정해지고자 노력한 것도 그런 이념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참여하지 않았다. 불교계가 사회적 인식을 높이려면 스스로 자기 모순을 제거해야만 한다는 것이 정화에 대한 소신이다. 그 방법은 자신의 정화에서 시작하여 제도개혁을 이루고 마침내 중생제도로 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정화는 밖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하는 것이며, 타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율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서울에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산중에서 얻어지는 것으로 확신하였다.

이런 소신의 결과 1954년 청담이 불교정화에 뜻을 세우고 동참을 권유할 때 성철은 당시의 정화에 대해 묵은 도둑을 쫓아내고 새 도둑을 앉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정화의 방향이 절 재산을 찾기 위한 목적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단순히 경제적 목적 때문에 대처승을 쫓아내고 비구승이 절을 차지하는 일이라면 정화라고 할 수 없다. 진정한 정화를 바란다면 사찰의 재원을 비구도 대처도 아닌 사회에 주고 비구는 걸식하며 수행에 힘쓰는 것이 부처님의 법을 찾는 정화이며 그런 정화라면 참여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결국 정화가 처음의 뜻과 다른 양상으로 끝나면서 종풍이 훼손되는 결과를 야기하였다고 평가하였다.

성철의 신앙적 개혁이 두드러진 점은 전통적으로 행해지고 있었던 여러 관습들의 척결이었다. 그것이 부처님 법대로 수행하고자 했던 결사였다. 1947년 문경 희양산 봉암사에서 선종 본래의 종풍을 회복하고 옛 총림의 법도를 이 땅에 되살리고자 결사를 주도하였다. 이곳에 뜻을 같이하는 도반과 젊은 수좌들이 운집하였다. 그들은 어려움이 있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수행할 것을 약속하였다. 당시 이 결사에 참여한 인물들을 살펴보면 청담, 향곡, 자운, 월산, 혜암, 법전 등으로 그들은 해방 후 급격한 사회변화 속에서 종단을 지켜가며 불조의 정법을 드러냄으로써 교단의 초석을 세웠다. 봉암사 결사는 여러 해 실행되다가 6․25 전쟁 때문에 불가피하게 무산되었다.

이와 같은 결사는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당시 승가의 분위기에서 본다면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리고 신앙적인 면에서 여러 가지 개혁이 시도되었다. 우선적으로 신앙의 대상이 정리되었다. 봉암사 결사를 행하면서 처음으로 실시한 대중공사는 바로 법당정리였다. 그것은 사찰 안에 있는 비불교적인 요소들을 제거하는 일로 칠성단, 산신각 등과 법당 안의 칠성탱화, 산신탱화, 신장탱화 등을 없앴다.

사실 이런 개혁적 방향은 오래 전부터 불교의 변화를 주장한 개혁론에서도 주장된 사항이다. 특히 유신론으로 유명한 만해는 여러 의례 가운데에서도 천왕․조왕․산신 등을 亂信이라 하여 마땅히 개혁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그리고 여러 佛․菩薩들도 통합하여 신앙적 대상을 개혁하자고 주장하였다.

만해의 사상을 계승한 이영재도 그의 혁신론에서 각가지 불상과 신중그림만이 불교라고 생각하고 받드는 것은 타락이요, 변질이요, 모순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신앙심리로 이루어진 상징물들은 여러 가지로 표출할 것이 아니라 인간의 표상적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한 가지를 선택한다면 신앙적 폐단도 없애고 본존의 통일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런 주장 이외에도 신앙생활에서 아무런 비판 없이 사용하던 것에 대해 전통적 방법을 추구하였다. 우선 사찰에서 쓰는 용품을 재정비하여 가사, 장삼, 바리때를 새롭게 만들었다. 당시 많이 사용하던 나무 발우는 부처님 법에 맞지 않으므로 질그릇이나 쇠발우로 바꾸고자 하였다. 그러나 질그릇은 깨지기 쉽고 쇠는 무거워 실용적이 못하자 다시 목발우로 환원되었다. 당시 수행자가 입던 가사 장삼은 일본불교의 영향으로 모두 비단제품의 호사스런 것들이 대다수였다. 이것을 붉은 색에서 괴색으로 바꾸고, 장삼은 송광사에 보존되어 있던 보조국사의 장삼을 모본으로 하여 바꾸었다.

이런 결사의 생활은 지금까지의 승가생활을 크게 변화시켰다. 그것은 의식주 모두를 직접 해결하는 생활로의 변화였다. 스스로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아야 한다는 청규를 지켜나갔다. 이런 올곧은 수행은 수행자에 대한 인식을 높일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신앙관의 개혁에는 타종교의 이해도 포함될 수 있다. 성철은 세간에 자신의 목소리로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할 때 불교에 대한 독단으로 타종교를 배척하지 않았다. 오히려 타종교 또한 인간 존재의 가치추구에 필요한 부분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것은 다종교 사회라는 현실의 모습을 간파하고 있는 데에서 나온 견해였다.

그 같은 견해는 종정이 된 이후 신년사로 발표되기 시작하였다. 불기 2528년(1984) 갑자년 신년사에서는 천당․지옥․성인․악한이 그 본래 면목은 다같이 광명의 덩어리라고 하였다. 여기에는 눈부신 태양이 푸른 허공에 높이 솟으면서 우주에 무한하고 영원한 광명이 넘쳐 있는 깨달음의 세계가 전제되어 있다. 그 다음 해인 불기 2529년(1985) 을축년 신년사에서는 성인과 악마는 부질없는 이름이며 공자와 도척이 손을 맞잡고 태평성세를 축복하는데 이는 허황한 환상이 아니고 일체의 참모습을 말함으로써 눈을 감고 앉아서 어둡다고 탄식하는 사람들에게 광명의 문이 활짝 열려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이런 내용으로 볼 때 인간의 분별심에 의해 선악이 구별되면서 성인과 악마라는 존재가 나타나지만 그런 마음에서 벗어나 광명의 세계를 알면 일체의 참모습을 알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불기 2531년(1987) 부처님 오신 날 법어에서는 더 나아가 사탄이 곧 부처라고 하는 내용을 발표함으로써 불이(不二)의 경계를 보이고 있다.

사탄이여! 어서 오십시오.

나는 당신을 존경하며 예배합니다.

당신은 본래 거룩한 부처님입니다.

사탄과 부처란 허망한 거짓 이름일 뿐 본모습은 추호도 다름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미워하고 싫어하지만 그것은 당신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부처인 줄 알 때에 착한 생각 악한 생각, 미운 생각 고운 생각 모두 사라지고 거룩한 부처의 모습만 뚜렷이 보게 됩니다.

그리하여 악마와 성인을 다같이 부처로 스승으로 부모로 섬기게 됩니다.

이어 1991년 제8대 종정에 추대된 다음 해인 불기 2536년(1992) 병인년 원단 신년법어에서도 타종교와 분별을 중지하는 내용을 발표하였다.

노담(老聃)과 공구(孔丘)는 손을 잡고 석가와 예수 발을 맞추어 뒷동산과 앞뜰에서 태평가를 합창하니, 성인․악마 사라지고 천당․지옥 흔적조차 없습니다.

장엄한 법당에는 아멘 소리 진동하고, 화려한 교회에는 염불소리 요란하니 검다 희다 시비 싸움 꿈속의 꿈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들을 살펴볼 때 성철이 평소 지니고 있던 종교의 구분은 인간이 본래 지니고 있는 분별심에 의한 구분이지 한 생각 돌려 마음이 자신의 주인공임을 깨닫게 된다면 어느 종교인이든 인간구제에 필요한 사실로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마음이 자신의 주인공임을 깨닫고 중생제도의 원력을 세우는 종교는 정도이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사도가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타종교와의 관계에 대한 내용은 성철의 저서 모두에서 일관된 것은 아니지만 수행자들에게 행하던 결제나 해제의 법어가 아닌 일반신도인 대중들에게 하는 법어 가운데 타종교에 대한 이해를 당부하는 내용이 많은 것은 중생들의 분별 때문에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이 훼손됨을 경계하는 마음에서 제시된 개혁안으로 생각된다.

2. 교단개혁의 방향

성철의 생애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1912년 음2월 19일 출생하여 1936년 봄 해인사에서 득도하여 제방을 두루 편력하며 깨달음을 얻고 장좌불와와 부처님 법대로 살고자 했던 봉암사 결사 그리고 팔공산 성전암에서의 10년 동구불출과, 1967년 해인사 초대 방장을 시작으로 종단의 지도자가 되어 1993년 11월 4일 열반에 들 때까지 무량중생의 화도와 자신의 강론과 종문의 핵심어록을 발간하여 한국불교 선종의 토대를 닦은 것까지 현대불교의 산증인이다.

이런 생애를 거친 성철은 무엇보다도 당면하고 있는 승가의 문제점을 개선하고자 노력하였다. 수행풍토의 정립, 승가의 교육 조직, 그리고 불교의 사회적 역할 등 여러 면에서 개혁적인 방안을 제안하였다. 그 가운데는 성과를 거둔 부분과 생각으로 끝난 부분이 있다. 그렇지만 성과의 유무를 떠나서 이런 점은 근대부터 면면히 흘러온 불교계의 개혁정신과 일치하고 있다.

성철은 불교 교단의 사회적 위치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시각이다. 근본적으로 불교가 일반 사회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낙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현실을 방치하게 되면 나중에는 탈락하게 되고 존재할 수 없음을 우려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그 해결 방안으로 제시한 것이 불교인의 자질 향상이다. 그것은 도제 교육의 기본 조건으로 어느 단체든지 그 장래는 2세 교육에 있으므로 딴 종교에 비해 현저하게 뒤떨어져 있는 불교계로서 2세에 대한 철저한 교육은 절실하다는 것이다.

그런 인식에서 현재 종무 행정을 이끌고 가는 교단의 조직인 중앙통제기구의 개혁을 촉구하였다. 중앙기구는 총무원의 임원 진영이 바뀌어도 영향을 받지 않도록 양심적이고 신심 있는 수행자들로 구성되는 특별기구가 설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도적인 개혁이 없으면 승려는 부정과 비행을 저질러 죄짓게 되어 사회적으로 지탄받고 불교는 망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그와 같은 한국불교의 난제인 승가교육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 승가대학의 설립이다. 그는 어느 불사보다도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다가오는 경쟁사회에는 수행자가 강원을 졸업한 것만으로는 사회적 지위가 낮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예견한 것이다. 지금처럼 승니를 전국의 교구 단위에서 임의적으로 배출해서 교육시키지 않는 상태로 방치해둔다면 종단의 앞날은 암담해진다고 판단하였다. 그런 교육에 대한 염원은 승니들의 교육적 수준이 낮기 때문에 세인들이 천하게 보는 경향이 크게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승니가 중생을 교화하는 민중의 지도자가 되려면 불교를 깊이 공부하여 전문적인 지식과 수행이 겸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 존경받고 미래사회를 예견할 수 있는 승니를 만들려면 문턱을 높여 자질이 우수한 사람들이 출가하도록 하고, 이어 교육과 수도를 엄격히 시켜 승가의 교육제도를 개선하자는 것이다. 구체적인 방안은 현재 사찰의 강원을 국가가 인정하는 대학 과정으로의 승격이었다. 성철은 다음과 같은 조건을 구상함으로써 자신의 염원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보여주고 있다.

첫째, 사미․사미니계의 수계 대상자는 고등학교 졸업 이상으로 해야 한다. 고졸 이하의 학력 소지자가 절에 왔을 때는 고등학교 과정까지 절에서 이수시킨 다음 사미․사미니계를 받도록 한다.

둘째, 사미와 사미니계를 수계한 자는 문교부에서 공인 받는 4년제 승가대학을 설립하여 입학시키고 철저히 공부를 하도록 한다. 승가대학을 졸업한 후, 각기 능력과 취미에 따라 종무행정도 하고 참선도 하고 포교도 한다.

마지막으로 승가대학의 교육은 지행합일의 철저한 신행 교육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것은 승가의 교육에 있어 철저한 신행 교육이 없으면 오히려 부작용이 됨을 알고 있었다. 일제 때 일본에 유학한 승려와 해방 후 종비생들이 환속한 것은 모두 지식만 가르치고 승려생활을 철저히 가르치지 못했던 예로 보았다.

이것은 교육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부처님의 정법을 계승하는 수행자란 사실을 일깨워주는 방향이 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영원한 자유를 위하여 정진에 또 정진이 필요한 것이지 세상에 명리를 생각하지 말하는 당부였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우리 사회가 너무나 물질에 치우쳐 있고 과도한 물질은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보았다. 그 원인은 서양의 물질문명을 맹종한 데에서 나타났으므로 이 병을 고치려면 전통적인 동양정신문화를 새로 복구시켜 정신이 위주가 되어 물질을 지배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면 인간은 자기를 상실하여 약육강식의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물질이 없으면 생존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동양정신이 주가 되고 물질이 종이 되도록 하는 것이 옳다는 그의 사상과 괘를 같이 한다.

그런 계획이 실제로 진행되면서 뜻있는 신도의 기부가 이어졌고, 해인사의 건물을 임대사용 형식으로 서류를 갖추어 승가대학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당시 사학문제가 사회의 물의를 빚어 허가가 중지되어 학교 설립은 무산되었다. 그렇지만 그 이념은 오늘에 이어져 중앙승가대학 설립에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인식과 함께 사원경제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거론하고 있다. 성철의 경제관에 의하면 지금처럼 사찰 수입을 주지 혼자 임의로 사용하도록 한다면 승려의 비행과 부정을 막을 길이 없음을 지적하였다. 그것은 돈 많은 절과 주지 등 몇몇이 나누어 먹는 식으로 하면 불평불만이 생기고 서로 좋은 절의 주지를 하려는 암투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승려의 비행을 막고 사찰수입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불교중흥을 이루려고 한다면 제도적 개선이 우선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그런 방안 가운데 하나가 재정의 중앙 집중이다. 그것은 모든 수입을 중앙으로 집결시켜 불교 전체를 위한 방향에서 사용될 때 큰일을 할 수 있고, 모든 승려가 평등하게 혜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불교를 위한 사업을 하더라도 불평불만은 해소되고 좋은 절의 주지하려는 싸움도 없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 방안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제안하였다. 우선 중앙에서 총계되는 사찰수입은 교육․수도 등의 종단 전체적인 사업을 위한 예산편성에 입각하여 집행하자는 것이다. 각 사찰의 일반운영에 따르는 운영비 및 인건비 등도 중앙의 편성예산에 의해 하달 집행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승가대학, 총림, 선원 등 승려의 교육, 수도, 연구기관이 없는 각 사찰의 전 수입은 중앙에 올리고 중앙에서 배당 받은 일반 운영비에 의해서 관리 운영하며, 주지를 비롯한 관리담당 승려는 중앙에서 그 인사권을, 사찰보수는 주로 시주해서 한다는 방안이었다.

성철은 불교가 사회저변에 확대되기 위한 방안으로 법사제도를 생각하였다. 불교의 대중화가 실현되려면 포교에 적극적이어야 하는데 인력에 있어 지금의 비구승만으로는 충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부족을 해결하고자 제안한 것이 법사제도이다. 그것은 타종교의 지도자처럼 결혼하지만 평생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불법을 사회에 펼치는 일을 천직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양성하여 포교활동에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제도이다.

그리고 법사의 양성을 위해 다음과 같은 방안을 제안하였다. 먼저 승가대학에서 가르쳐 배출하고 나중에는 법사 양성을 전문으로 하는 대학을 세우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법사는 지식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원력과 신심을 가지려면 그런 교육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단시간 내에 법사가 필요할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양성할 것을 제안하였다. 먼저 현재 비구승으로 법사가 되고자 한다면 환계법을 실시하여 법사로 활용하는 것이고, 두 번째로 대학생 불교연합회 출신 등 일반대학 졸업자가 법사가 되고자 할 때는 법사 자격고시에 합격해서 1년 동안의 수련을 거쳐 법사로 임명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른 종단의 승려가 본 종단의 법사가 되고자 할 때에는 그 자격심사를 거쳐서 법사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 방법으로 양성된 법사는 전문적인 수행자가 아니므로 계율적으로 수행자의 계를 받을 필요가 없고 오계와 보살계만 받고 비구승을 보좌하여 포교와 교화를 담당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계획을 볼 때 비록 종단의 사정으로 실행되지 못하였지만 성철이 포교에 대해 얼마나 고심하였고, 그가 산중에 수행하면서도 불교의 사회적 발전을 위해 고심하였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Ⅳ. 결 어

성철의 생애는 일제에 의한 불교본질의 변모와 미국의 점령으로 인한 기독교의 급성장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스스로의 분규와 내부적 모순 등 각가지 어려운 조건들이 산재한 시기이다. 다시 말해 종단의 역사가 외적 영향으로 크게 변모한 시대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는 모순을 거부하고 과감하게 바꾸고자 노력하였다. 그런 노력의 목표는 승단의 본분을 지키는 것으로 부처님의 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올곧은 수행풍토의 정립이었다. 본인 스스로 이런 마음가짐으로 평생 계율을 엄격히 하여 평생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그런 시대인식을 바탕으로 종단의 현안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 가운데 불교신앙적인 측면에서 제시한 개혁방안 지금까지 관습적으로 행해온 신앙관을 전환하자는 내용이다. 그것은 불공의 개념을 바꾸는 인식으로 신앙적 대상에게 행하던 불공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봉사하는 불공의 제시였다.

그것은 한국불교가 사회를 위한 신앙으로 전환됨을 의미한다. 또한 본인 스스로 부처님 법대로 살고자 실천한 결사에서 여러 불필요한 신앙적 대상을 정리하여 승가의 수행풍토를 변화시켰다.

이런 신앙적 개혁은 다종교 사회에 형성한 한국사회에 있어 인간존중의 인식은 불교만이 아닌 모든 종교에 있음을 강조하여 보편적 진리의 세계관을 정립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중도적 인식을 바탕으로 깨달음에 대한 이해가 정립된 다음 다른 종교를 이해할 때 오히려 한국불교의 가치가 부각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제시된 방안이라 할 수 있다.

성철은 교단의 미비한 점에 대해서도 많은 개혁적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한국불교가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 그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불교계 스스로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모순의 극복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구체적인 방향을 살펴보면 재화의 올바른 사용과 조직의 투명성, 교육을 통한 우수한 수행자 양성을 통해 미래 사회에 대한 방향을 예견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더 나아가 재가자로서 포교를 담당할 인재의 양성을 통해 한국불교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이 해결한다면 불교의 사회적 지평이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출처] 퇴옹 성철(退翁 性徹)의 개혁사상 연구|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