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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해탈.열반

깨달음에 대한 논쟁

깨달음에 대한 논쟁

 

붓다의 깨달음에 대한 이해에 갑론을박이 있다. 이를 통해 붓다의 깨달음에 접근해보자. 깨달음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현응 스님 - 「깨달음은 원래 붓다와의 문답과 기억의 억념(憶念-마음에 깊이 새김)을 뜻하는 사띠(sati)로 연기(緣起)와 공(空)을 ‘이해하는 깨달음’이었지 궁극적 완성의 ‘이루는 깨달음’이 아니었다. 조사선과 간화선을 봐도 기억을 뜻하는 사띠와 마찬가지로 깨달은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반추해서 ‘이해하는 깨달음’이다. 후기로 갈수록 사띠에 위빠사나, 삼매, 선정들이 결합돼서 ‘이해하는 깨달음’이 ‘이루는 깨달음’으로 고준해지고 연금술처럼 신비화됐지만, 오늘날은 깨달음에 스마트 폰, 다양한 분야의 책들만 봐도 연기와 공의 이해가 가능하다. 독서와 사유야말로 이 현대시대의 사띠이자 간화선이다. 그러니 ‘이해하는 깨달음’은 가능하고 실천의 영역인 역사(사트바, 자비보살행)를 실천하지 못해도 깨달음은 훼손되지 않으며, ‘이루는 깨달음’은 자신도 중생도 구제하지만 그런 사람을 보지 못했다.…

 

부처님은 고행을 통해서도 아니요, 선정을 통해서도 아닌 논리적인 사유와 성찰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다.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설법, 토론, 대화를 통해 얻을 수 있었다. 깨달음은 선정(禪定) 수행을 통해 이루는 몸과 마음의 높은 경지, 즉 신비로운 경지가 아니다.

 

부처님은 가르침을 청할 때 삼매와 선정을 통해 수련하라고 지도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선정이나 삼매 없이도 충분히 깨달음이 가능하다.」

 

이상과 같이 현응 스님은 “선정이나 삼매 없이도 깨달을 수 있다”며 “불교의 요체는 ‘이루는 깨달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깨달음’에 있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치며, 조계종의 간화선(看話禪) 수행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 셈이다.

 

계속해서 현응 스님의 주장이다.

 

현재 한국의 조계종에서 깨달음을 위한 수행은 평생에 걸친 과업이다. 깨달음을 위한 노력은 3개월, 6개월 정도로는 언급조차 할 수 없고, 여러 해가 지나고 수십 년 이상을 참선 수행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수십 년을 투자해도 현실적으로는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이 보기 힘들어 돈오(頓悟)라는 말이 민망할 정도이다.…

 

깨달음은 불교도에게 선결과제이자 기본요건이기 때문에 깨달음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다른 문제에는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기 힘들다.…

 

한국불교에서의 깨달음이란 ‘몸과 마음의 완성된 경지이자 모든 번뇌를 끊고 고매한 인격을 이룬 높은 경지’로서 ‘깨달음’ ‘확철대오’ 등으로 표현한다. 이렇게 정의하는 깨달음은 대단히 추상적으로, 깨달음이란 것을 이렇게 모호하게 설정해서는 이를 얻기 위한 노력의 방법도 불분명하고, 깨달음의 성취 또한 어느 수준의 어떤 것을 말하는지 제대로 알 수 없다. 평생을 노력해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까닭도 깨달음이라는 내용을 잘못 설정했기 때문이다.

 

현응 스님은 깨달음이란 "모든 번뇌를 끊고 고매한 인격을 이룬 높은 경지"가 아니라, "세상을 연기(緣起)의 관점으로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깨달음만큼이나 자비와 실천을 강조한다. 깨달은 사람이 깨달음에 만족하지 않고 실천에 나서는 것은 "존재에 대한 사랑과 연민 때문"이며 "자비야말로 역사적 행위의 원동력으로서 깨달음과 역사를 묶어내는 고리"라는 것이다.

 

현응 스님은 시종일관 사띠와 간화선 모두 대화를 기억하고 잘 성찰해, 이해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맑음과 밝음은 스스로 아는 작용이 비추는 보너스다. ‘간화선은 참구(參句)해야지 참의(參意)해서는 안 된다’는 선사들의 가르침에도 어긋난다. 모두 체험을 강조한 수행법들이다.

 

중국 선불교의 탄생은 인도 승 달마의 도래를 계기로 중국 교학 불교의 이해에 치중한 이론적 천착이나 지적 이해에 갇힌 사변적 불교를 붓다의 깨달음, 실천정신으로 다시 돌이키자는 성찰적 심자각(心自覺)에서 비롯됐다.」

 

그렇다면, 먼저 깨달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본다.

 

유경 스님 - 「붓다는 책에서 볼 수 있는 것들, 의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을 이해하기 위해 출가한 것이 아니다. 어떤 문헌에서도, 어떤 의식의 이해로도 알 수가 없는 문제, 즉 인간이 나고 늙고 병들고 죽어야만 하는 가장 근원적 연유를 밝히기 위해서 출가했다. 붓다는 홀로 깊은 선정과 사유 중에 모든 것은 변해간다는 무상(無常)을 깨달았다. 무상한 중에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도 깨달았다. 의식의 이해 차원을 벗어난 깊은 선정 중에 12연기로 생사의 세계를 통찰했으며, 고(苦)의 원인과 처방을 밝힌 4성제(四聖諦),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중도(中道), 중도로 가는 8가지 바른 길(八正道)을 밝혔다. 붓다의 수행이었던, 사띠(sati)는 37조도품뿐만 아니라, 대승불교의 지관(止觀) 정혜(定慧) 수행, 심지어 다른 종교의 명상수행에도 관통하는 키워드로, 이해(undetstand)가 아니라 마음집중(mindfulness), 깊은 알아차림(awareness)을 뜻했다. 이것은 몸의 감각과 마음의 의식, 무의식이 다 동원된 상태지, 그저 머리로 알아듣고 이해하고 통찰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붓다가 행하던 호흡명상 수행법을 전한 중국 후한시대 안세고의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은 제목이 ‘아나빠나(anapana, 들숨날숨) 사띠(sati, 念, 알아차림awarenesss, 마음집중mindfulness, 마음을 지킴-守意)’의 경전이다. 붓다는 수시로 숲속에 들어 호흡명상을 했으며, 그 명상의 주요 수행법이 사띠(sati,念)인 것이다. 붓다가 호흡을 지켜보면서 선정에 들었다면 간화선자는 화두를 들고 선정에 든다. 호흡이든 화두든 사마타(止)든 위빠사나(觀)든 선정(定)이든 지혜(慧)든 좌선이든 행선이든 알아차리기(사띠)는 모든 관찰, 통찰, 수행, 명상을 관통하는 기저이다. 이 사띠를, 가르침을 외워 기억해 ‘이해하는 깨달음’의 차원에서 해석하는 것은 붓다의 말씀에도 어긋난다. 붓다는 “내가 한 말이라도 그냥 믿지 말고 꼭 스스로 확인해 보라.” 하지 않았는가. 나아가 붓다는 물질의 영역을 관찰하고 비물질의 영역을 관찰해서 소멸의 영역에 이른 이들은 생사윤회에서 벗어난다[수타니파타]고 했다. 물질의 영역은 감각의 영역이고, 비물질의 영역은 정신의 영역이며, 소멸의 영역은 물질과 몸, 정신과 마음의 장애를 모두 벗어난 영역이다. 이것을 어찌 가르쳐서 외우고 전달해서 이해로 깨달을 수 있겠는가. 붓다의 제자들 중 붓다의 말씀을 누구보다 잘 듣고 잘 기억해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던 아난이 깨닫지 못해 오백나한이 모인 결집에도 참석하지 못할 처지라 낙담한 채 베개를 베고 돌아눕다가 깨우쳐서 가까스로 아라한의 결집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일화와, 잘 외운 아난보다는 지혜제일인 사리자에게 법을 부촉했다는 고대 경전인 ❮수타니파타❯의 기록, 그리고 꽃을 들어 보이자(拈花) 미소로 화답한 가섭에게 마음을 부촉했다는 ❮오등회원(五燈會元)❯의 기록의 의미는 무엇이겠는가, 깨달음은 이해가 아니라 체험, 체득이다. 깨달음은 새가 알을 깨고 나온 것과 같기 때문에 절대 다시 달걀 속으로 돌아 갈 수 없다. 중생의 고통을 듣는 관세음보살과 중생의 고통을 건지러 간 지장보살이 어떻게 이해의 차원에 머무르면서 중생들을 구제하지 못해도 나의 ‘이해의 깨달음은 훼손되지 않는다’ 하겠는가. ‘이해하는 깨달음’과 ‘이루는 깨달음’이라는 용어는 형태상 기왕의 해오(解悟)와 증오(證悟)를 풀이한 듯하다. 하나의 삼매를 제대로 이루면 백 천 삼매가 가능해지듯, 참으로 이해한 깨달음이라면 이루는 깨달음으로 변해가는 게 아니다. 자비보살행으로 확장될 뿐이다.

 

이번에는 현응 스님에 대한 수불 스님의 논박이다.

 

수불 스님 - 「진리란 ‘잘 이해하는’ 대상이 아니라 ‘보고 얻고 알고 깨우쳐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의심을 뛰어넘고, 의혹을 제거하고, 두려움 없음을 얻을 수 있다. 이해하는 것만으로 안 된다는 것은 수행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너무나 잘 안다. 이해하는 것만으로 인생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전세계 불교학자들마다 깨달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깨달음이 이해라는 주장은 수행자들을 모두 바보로 만드는 희론이자 책상물림의 말이다.

 

무명(無明)이 사라지면 순차적으로 결국 노사(老死)도 사라져서 괴로움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지만, ‘실제로 무명이 소멸되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언어로 전달될 수 없는 것이다. 말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체득해야만 실제로 무명이 소멸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명만 소멸되면 순차적으로 노사까지도 소멸될 것은 분명하지만, 과연 ‘어떻게 해야 무명이 소멸될 것인가?’ 하는 것은 너무도 현실적인 문제이다. ‘잘 이해하는 것’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다.

 

현응 스님은 연기법을 잘 이해하기만 하면 만사형통인 것처럼 말하지만, 깨닫기 전에는 연기법의 진면목을 바로 알기 어렵다. ‘중도(中道)’는 사무치고 사무쳐서 끝내 통해야 하는 것이지, 이해로서는 도저히 그 실상을 파악할 도리가 없다. ‘깨달음’은 불이법(不二法)에 속하고, ‘이해’는 이법(二法)에 속하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이해하는 것이다’는 말은 곧 ‘상을 여읜 것(깨달음)은 상을 가진 것(이해)이다’라는 무의미하고 모순된 주장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적인 ‘이법’의 논리로 중도의 ‘불이법’을 재단하려는 모든 시도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와 같다. 그렇게 되면 ‘범주오류’에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까지 더하게 된다. 분별망상으로 불이법을 더듬다가 ‘마음’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다고 현애상(懸崖相)을 내어서, 하급의 차원으로 퇴타해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 운운하는 것을 고봉 화상은 ❮선요(禪要)❯에서 ‘원숭이가 장대로 달을 따려한다’고 경책했다.」- 불교닷컴에서

 

다음은 이재열 원장과 김재성 교수의 논박이다.

 

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은 초기경전인 상윳따니까야의 내용을 언급한 뒤, “연기를 깨달았다는 것은 이해가 아닌 체험이고, 그 체험은 선정 수행을 통해 실현된다”며,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을 포함하지만 더 나아가 체험적으로 증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경전에도 부처님은 무색계 사선정과 멸진정에 이르러 연기를 사유하고 새벽에 도를 깨쳤다고 명시돼 있다”며 “현응 스님은 경전의 근거를 무시하고 개인적인 사견으로 연기와 깨달음을 오도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다”고 말했다.

 

김재성 능인불교대학원대 교수는 “오비구가 부처님의 대화로만 깨달은 것이 아니라 선정을 통해 깨달았음이 경전에 분명히 나와 있다고 지적하고, “아난 존자가 기억력이 탁월했지만 아라한과를 얻지 못해 처음 결집에 참여하지 못했던 점도 간과돼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위와 같이 깨달음에 대해 갑론을박하면서도 부정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주로 남방 상좌부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인데, 그들의 주장을 좀 더 들어보자.

 

불교에서는 깨달음이란 없다. 성불에 이르는 모든 길은 붓다께서 6년의 수행 끝에 모두 다 발견하고 깨달아 놓았다. 그것은 바로 팔정도와 바라밀이 바로 그것이다. 팔정도와 바라밀은 불교적 윤리이며 도덕적 지침이자 그 자체가 도덕적 인간의 완성이다. 팔정도와 바라밀은 성불에 이르는 길이며, 그리고 성불로 가는 인간들이 살아가야 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들은 붓다가 발견해 놓은 그 진리를 믿고 그대로 불도를 걸어가면 된다.

 

선불교는 무엇을 더 깨닫겠다는 것인가, 깨닫는다는 말은 다른 말로 이야기 하면 모르는 것을 알게 된다, 또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는 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 선불교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럼 붓다는 거짓말쟁이가 된다. 즉, 붓다가 발견해 놓은 성불에 이르는 여러 길들이 있는데, 그중 많은 부분을 숨겼거나 아니면 붓다가 발견해 놓은 길 말고 성불에 이르는 다른 길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 길을 찾고자 한다는 뜻으로밖에 해석이 안 된다. 붓다가 발견해 놓은 길 이외에 또 다른 길이 있다면, 그리고 그러한 길로 간다면 결코 그것은 불교가 아니다. 그러기에 깨달음을 추구하는 선불교는 불교가 아닌 것이다.

 

선불교가 추구하는 길이 올바른 길일 수도 있고, 붓다가 깨달아 놓은 진리보다 더 좋은 진리일 수 도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달마교나 혜능교 또는 선교라고 하면 된다. 불교라는 이름을 덧붙이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시시비비가 일어날 필요도 없다. 불교는 불교대로 선교는 선교대로 각자의 길을 가면 되기 때문이다. 굳이 선교가 불교라는 이름 속에 파 묻혀서 붓다를 들먹이거나 붓다의 진리를 도용하거나 할 필요가 없다. 지금부터라도 달마교 혜능교 간화교 선교 뭐 이런 이름으로 바꾸면 된다.

 

다음은 김나미 교수의 주장이다.

 

“오늘 한국불교의 문제점 하나를 끄집어 들었다. 우리 불교는 깨달음과 이것에 기인한 수행 풍토로 인해 정도(正道)의 길을 잃었다. 한국불교는 깨달음이라는 묘원한 환상에서 벗어날 때도 됐다. 한마디로 하자면 깨달음 대신 열반이 모든 수행의 목적이 돼야 한다. 깨달음에는 연기법에 대한 통찰이 요구되는 반면 열반은 팔정도 수행이 필요하다. 깨달음은 단지 열반의 선행 조건일 뿐이며 깨달음의 단계부터 시작, 이것을 기반으로 최종의 궁극적 목표인 열반으로 나아가는 구도가 돼야 한다. 그러므로 수행을 한다면 그 수행이 목표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하고 목표 설정을 다시 해야 한다. 열반이 수행의 최종적이자 궁극적인 목적이다. 깨달음만을 수행의 목적으로 삼는 한, 수단과 목적이 전도된 채 삼독에 물든 중생으로 남을 것이다.…

 

우리 불교가 불음(佛音)의 핵심을 놓치고 있다고 보는 것은 깨달음으로 인해 수단과 목적이 전도(顚倒)된 채 수행의 핀트가 잘못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수단과 목적으로서의 깨달음과 열반의 자리가 뒤바뀐 혼란에서 오는 문제이다. 여기서 둘의 상관관계를 말하는 것은 바로 둘의 원위치를 회복시키기 위함이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깨달음은 수단이고 열반은 목적이다. 그런데 우리 불교는 수단이어야 할 깨달음을 목적이라고 하고 있으며 목적인 열반은 설 자리조차 없다. 게다가 간혹 깨달음과 열반을 대등한 것이나 동의어라 하여 ‘열반이 깨달음이다.’ ‘깨달음이 열반이다.’라고도 한다.“

 

다음은 이태승 교수의 깨달음에 대한 주장이다.

 

“‘깨달음’을 불교 수행의 목적이라고 하는 데는 이의가 없지만, 불교의 근본 성격을 지칭하는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정의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지혜의 종교’라고 정의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곧 불교의 근본성격은 깨달음을 통한 지혜의 증득이며, 또한 지혜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깨달음의 종교체험을 통해 심신의 인격이 변화돼, 몸과 말과 정신적인 행위의 일체가 더 이상 번뇌에 사로잡힘이 없는 지혜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 이것이 지혜를 강조하는 불교의 근본목적이 아닐까, 붓다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어 지혜의 눈으로 세상을 본 후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친 것은 더 이상 번뇌가 없는 완전한 인간의 삶이 가능하다는 메시지였다. 그리고 그러한 지혜로운 삶을 위해 중생들로 하여금 수행을 통한 깨달음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것이다. 따라서 깨달음과 수행의 문제는 ‘지혜로운 삶’의 근본성격과 일치가 될 때 비로소 그 의미가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깨달음은 지혜를 일으키는 종교체험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깨달음의 종교체험은 인간의 깊은 의식의 세계와 관계한 의식의 내적 전환, 인격의 변화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이 내면의 의식 세계를 통찰하는 방법이 선정으로, 이 선정을 통해 깨달음을 체험함으로써 지혜의 증득이 이루어진다.“

 

다음은 각묵 스님의 주장이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해서 깨달을 것인가. 이것이 불교의 핵심이다. 초기경전에서는 깨달음을 사성제, 팔정도, 연기, 오온의 무상ㆍ고ㆍ무아의 네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는 것이 사성제이다. 사성제(四聖諦)란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네 가지 진리를 말한다. 초기경전을 보면 부처님은 사성제를 깨달았기 때문에 부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숫타니파타❯ 558번째 게송에 “나는 알아야할 바를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닦았고, 버려야 할 것을 버렸다”는 부처님 말씀이 있다. 알아야할 것을 알았다는 것은 고성제(苦聖諦)고, 닦아야 할 것을 닦았다는 것은 도성제(道聖諦)를 말한다. 버려야할 것을 버렸다는 것은 집성제(集聖諦)다. 부처님께서는 사성제를 꿰뚫어 알았기 때문에 자신을 부처라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성제를 꿰뚫어 아는 것이 바로 깨달음인 것이다.“

 

다음은 다른 분들의 주장이다.

 

“현응스님께서 조계종에서 하안거 동안거 등 그 수많은 세월의 수행기간 동안 사실상 깨달았다고 하는 자를 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시며, 어쩌면 깨달음은 올바른 이해를 통해 얻는 게 아닐까 라고 설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닌가 싶다. 한국불교에서의 깨달음은 실로 공허한 그들만의 꿈이 된지 오래이다.” - 길을걸으며

 

“흔히 선불교에서는 깨달음이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굉장히 신비화시키고 있는데 이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깨달음을 스스로 알아서 그것을 언어로 필설로 표현하지 못한다면 그건 분명히 잘못된 깨달음이거나 불교적인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인 진리는 우리의 상상 생각 사고의 범위 밖에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언어로 표현이 가능한 것입니다. 붓다의 45년 설법이 그것을 웅변적으로 대변하고 있습니다. 붓다는 절대적 진리를 깨달았지만 그것을 유효적절하게 중생들을 위해서 언설로 표현했습니다. 물론 중국의 조사들이나 성철스님도 많은 설법과 책들을 펴냈습니다. 모두 다 깨달음을 자신 나름대로의 언설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승들이 깨달음은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한다는 것은 자가당착이며 자기모순이고 궤변입니다.… 불교의 가르침이란 어느 특정인이나 출가승들만의 전유물이 절대로 아닙니다. 어려운 교리일수록 쉽게 풀어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들으면 바로 바로 이해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진리를 비비꼬아서 어렵게 하고 신비화시켜서 어느 특정인들만의 전유물인양 호도하고 왜곡하는 것은 절대로 불교의 참모습이 아닙니다.“ - 실론섬

 

 깨달음의 단계 : 불교에서 ‘깨달음’(覺, ssk. bodhi)을 이르는 단계는 다양하다. 보리수 아래에서 고타마 싯다르타께서 체득했던 ‘최상의 바른 깨달음(無上正等正覺)에서부터 대승보살의 서원인 발보리심(發菩提心)으로서의 ‘깨달음’, ❮화엄경❯의 보살수행 52위, 유식에서의 보살수도 5위, 그리고 ❮대승기신론❯에서 수행과정의 단계적 깨달음을 말한, 시각(始覺)의 네 단계[四覺]로서 범부각(凡夫覺), 상사각(相似覺), 수분각(隨分覺), 구경각(究竟覺)과 같은 깨달음도 있다.

 

이와 같이 깨달음이란 열반 혹은 해탈과 동의어로서 최종적인 깨달음을 의미하는 경우가 있고, 또 시각(始覺)의 네 단계에서처럼 수행과정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어서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다. → 사각(四覺) 참조.

 

 깨달음의 모순 : ❮금강경❯ 제17분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약유인언(若有人言) 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수보리(須菩提) 실무유법(實無有法) 불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佛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수보리(須菩提) 여래소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如來所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어시중(於是中) 무실무허(無實無虛)」-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한다면, 수보리야, 그는 거짓을 말하는 것이며, 사실이 아닌 것에 집착해 나를 비방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고 할 그 어떤 법도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 대략 이런 말이다.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라고. 즉,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말할 것이다. 물론 그것도 맞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금강경❯에서는 이 당연한 말까지도 위와 같이 부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라거나 ‘여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는 말에 어떤 모순이 있는가.

 

과연 여래는 깨달음을 얻으신 분인가. 그렇지 않다. 깨달음을 얻은 여래 혹은 부처란 없다. 깨달음을 얻은 ‘나’가 있다거나, 깨달음을 얻은 부처가 있다고 한다면 그건 벌써 상대성에 빠진 생각이다. 깨달은 부처가 있고, 깨닫지 못한 중생이 있어서 어리석은 중생이 깨달은 부처님 세계로 나가기 위해 수행을 한다는 생각은 벌써 부처와 중생을 둘로 나누어놓은 생각이다. 부처는 그 어떤 분별의 세계에도 몸을 담고 있지 않다. 생사와 열반, 중생과 부처라는 두 가지 극단 어디에도 부처는 없다. 부처는 어디에 있어야 한다거나, 어떤 상태로 있어야 한다거나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깨달은 자리라는 어떤 존재적인 틀에 부처를 가둘 수는 없다.

 

부처는 깨달은 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깨어 있음’을 의미한다. 깨달았다는 것은 완전히 무아(無我)를 깨달았다는 뜻이다. 즉, ‘내가 없음’을 온전히 자각한 것, 구경무아(究竟無我)인 것이다. 무아가 곧 깨달음일진대, 어디에 깨달은 ‘나’를 붙일 수 있을 것인가. 무아, 내가 없는데, 어디에 깨달은 ‘나’를 내세울 수 있는가. 깨달음이라는 것은 어떤 존재에게 오고 말고 하는 문제가 아니다. 누구든 깨어있는 순간 바로 부처인 것이다. 깨어있는 순간, 오직 깨어있음의 빛만이 있을 뿐, 나와 너라는 상대개념도 사라지고, 생사, 중생과 부처라는 분별 또한 사라진다. 바로 그 것, 깨어있음, 그것이 바로 부처다. 그러므로 ‘깨달으신 부처님’이라는 별도의 실체를 상정한다면 그것은 무아도 아니요, 깨달은 부처, 깨닫지 못한 부처라는 분별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스스로 ‘나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면 그는 깨달음을 얻은 ‘나’에 갇혀있기 때문에 깨달았다고 할 수 없다. ‘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아(我)’는 깨닫지 못한다. 무아(無我)만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무아는 말 그대로 무아, 내가 없음이며 텅 비어 있음이고 무상(無常)과 무아(無我), 무자성(無自性)과 공(空)이기 때문에 주체를 내세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깨달았다’는 말이 얼마나 큰 모순인가. 깨달을 내가 없음을 아는 것이 깨달음일진대 스스로를 깨달음의 주체로 생각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것은 스스로의 무명을 드러내는 일일 뿐이다.

 

그러니 어떤 사람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한다면 그는 거짓을 말하는 것이다. 여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없다. 여래라는 주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그 어떤 깨달음의 상태를 얻어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여래’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얻음’도 없다. 그렇기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는 말은 완전히 거짓이다. 언어 자체에 큰 모순이 담겨 있는 표현이다. 그렇게 말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깨달음’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며, ‘깨달은 자’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고, ‘얻음’에 집착해 있는 것이다. 사실이 아닌 것에 집착해 여래를 비방하는 것과 같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어떤 사람이 있다면 그는 여래가 아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여래를 비방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 여래는 없다. 또한 여래가 얻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그 어떤 법도 없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어떤 특정한 법이 아니다.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그 어떤 법이 없다. 여래가 얻은 법이라는 것은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는 것이다. 여래가 어떤 법을 얻었다면 그것이 참된 것, 실다운 것이라는 말인데, 여래가 얻은 법은 실다운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헛된 것 또한 아니다. 실다운 법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 헛된 법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

 

누구나 말할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라고, 그러나 얻을 깨달음이 없다. 깨달음이라는 것을 어떤 실체적인 것, 진리다운 어떤 것으로 생각지 말라. ‘어떤 것’으로 고정지어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깨달음이 아니며 진리도 아니다. - 법상 스님

 

이는 ‘깨달음’이라는 어떤 상을 설정해두고 그 깨달음을 얻기 위해 집착하는 오류를 경계해서 한 말이다. 열심히 정진해서 늘 깨어 있으면 저절로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지 ‘깨달음’이라는 정해진 그 어떤 것은 없다는 말이다.

 

 깨달음이란 : ‘깨달음’이란 불교역사 2600여년 가운데 가장 많은 질문이고, 가장 답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불교 용어 중에 ‘깨달음’이라는 말만은 유독 우리말이다. ‘부처님 오신 날’처럼 아름다운 우리말이다. 하지만 참으로 애매한 추상적인 말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꿈(미망)에서 깨어나 본래의 상태(진실)를 회복한다거나 그릇된 견해나 편견 선입견 등을 깨트려 본래의 참된 면목을 드러낸다는 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에 대해 무엇을 깨달은 것인지 깨달음의 대상과 내용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 지혜의 종교라고 한다.

 

‘붓다(buddha)-불타(佛陀)’는 말 그대로 ‘깨달은 자’라는 뜻이다. 불교도의 이상인 열반(혹은 해탈)은 절대자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 의해 성취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깨달아야 하는가, 그런데 문제는, 붓다의 깨달음은 다른 유일신교의 종교와 달리 지역과 시대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해석되고 변용돼 왔다는 사실이다. 2천 6백여 년에 걸친 불교사상사는 바로 무엇을,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탐구와 해석의 도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권오민

 

불교에서 ‘깨달음’을 표현하는 말에는, 깨달음, 열반, 해탈, 확철대오, 혜오, 증오, 증득, 돈오, 돈증, 대각, 정각, 도피안, 득도, 달도, 견성, 성불, 등각, 무상정등각, 구경각, 묘각,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원돈, 원각, 원적, 적멸, 멸도, 적정, 한소식… 등 수십 개가 있다. 이러한 현상은 단 한 마디로 ‘깨달음’을 표현하기가 힘들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깨달음을 얻은 상황에 따라 그 표현하는 방법도 달라짐을 나타내기도 한다.

 

깨달음, 해탈이란 탐(貪)ㆍ진(瞋)ㆍ치(癡)의 소멸이고, 괴로움에서 벗어남이며, 그것은 곧 불교의 핵심 가치인 무상(無常)ㆍ무아(無我)ㆍ공(空)에 대한 이해를 깨쳤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특히 선불교에서 깨달음은 궁극적 완성을 이루는 것을 의미해서 ‘몸과 마음의 완성된 경지이자 모든 번뇌를 끊고 고매한 인격을 이룬 높은 경지’로서 ‘확철대오’해 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것을 뜻한다. 즉, 깨달음은 이해가 아니라 체험, 체득이고, 깨달음은 이해의 영역을 포함하지만 더 나아가 자기초월을 체험적으로 증득해야 함을 말하게 됐다.

 

그런데 ❮수타니파타(경집/經集)❯에서 붓다는 왜 자신이 깨달은 사람인가 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밝히신 바 있다. “나는 알아야 할 바(苦聖諦)를 알았고, 닦아야 할 바(道聖諦)를 닦았고, 버려야 할 것(滅聖諦)을 버렸다. 바라문이여, 그래서 나는 붓다(깨달은 사람)이다.-수타니파타 558게” 이는 곧 깨달음은 ‘사성제를 철견(徹見)’하는 것이란 뜻이다.

 

그리고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 등에서 붓다는 연기법을 통해서 정각을 이루셨다고 적고 있다. 그러므로 깨달음이란 ‘연기법을 깨달은 것’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그리고 연기의 가르침은 무아(無我)와 같은 말이다.

 

이와 같이 깨달음을 일컫는 용어도 다양하고, 이를 정의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깨달음의 특징들을 통해 깨달음의 정의에 접근해야 하겠다.

 

① 위의 내용들을 종합해볼 때, 일단 불교에서 깨달음이란 ‘사성제 ·연기·무아를 깨달아 탐ㆍ진ㆍ치, 그리고 고(苦)에서 벗어나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겠다.

②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또 하나는 ‘깨닫는다’는 것은 무엇을 새로 말들어낸다는 창조적인 행위가 아니라, 이미 있어온 진리에 대한 발견이라는 점이다. 붓다는 연기법을 설명하면서, “연기법은 내가 지은 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이 지은 것도 아니다. 여래가 세상에 나오건 나오지 않건 간에 이 법은 존재의 이법(理法)으로서 존재와 더불어 있어 온 것이다.”라고 하셨다. 여래는 다만 이 법을 자각해서 바른 깨달음을 이루었을 뿐이란 말이다.

③ 이와 같이 초기불교에서 깨달음이란 ‘진리에 대한 눈뜸’이었다.

④ 그러던 것이 대승불교, 특히 선종(禪宗)에 와서는 ‘자기 자신의 본성을 바로 봄으로써 부처가 된다[견성성불(見性成佛)]’는 개념으로 바뀌었다. 깨달음이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할 ‘자기 자신의 발견’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불성(佛性)을 깨달아 자기 자신이 본래 부처였음을 깨치게 되면 그대로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이 ‘견성성불’은 자기 마음을 바르게 가져, 자기 자신이 곧 부처임을 깨쳐야 한다는 선종(禪宗)의 이치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이다.

⑤ 그리고 깨달음이라는 것은 마음의 전환을 뜻한다. 즉, 깨달음이란 해탈(解脫)을 의미하며, 해탈은 온갖 번뇌와 고(苦)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워진, 해방과 자유의 개념을 나타낸 말이다. 이는 마음 상태가 바뀐, 자기초월을 의미하며, 불교수행과 실천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⑥ 깨달음은 윤리도덕을 초월한다. 왜냐면 깨달음은 윤리나 도덕과 같은 그런 관념하고는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분명히 해 둘 것은, 깨달음은 윤리도덕을 초월하지만, 깨달은 인간은 윤리도덕 안에 있다. 깨달은 인간은 가장 윤리도덕적인 인간이란 말이다. 때문에 깨달음이라고 하는 경지는 윤리도덕을 초월하지만 깨달은 인간은 윤리도덕 안에 있다. 그것이 열반의 상태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나라 불교의 문제점 중 하나는 인간이 지켜야 될 근본도리를 지키지 않고 마치 깨달음이 따로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하여 윤리도덕을 파괴하는 것을 깨달음처럼 생각해서 그것을 마치 깨달은 자의 매력처럼 이야기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극히 잘못된 모순이다. 가장 윤리도덕적인 사람이 깨달음을 얻은 자이지, 깨달음과 윤리도덕의 파괴는 전혀 관련이 없다.

⑦ 깨달음이란 ‘내가 추구하고 탐구하고자 하는 궁극의 진리를 확연히 깨친 것’을 말한다. 즉, 참선을 하든, 간경을 하든, 염불을 하든, 나를 비롯한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존재는 어떤 원리로 존재하는 가를 확철대오(廓徹大悟) 함을 깨달음이라 한다.

⑧ 그런데 불교라는 종교적 입장에서는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도 단계가 있다.

그 첫 번째는 지적 단계이다.

두 번째는 정서적 단계이다.

마지막은 행동적 단계이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 머리로는 알겠는데, 가슴이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지적단계의 깨달음은 있으나 정서적 단계의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것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붓다는 ‘깨달음 지상주의자’가 아니다. 오로지 깨달음의 결과로서 자비심이라고 할 수 있는 보리심의 참된 보살의 실천, 즉 보리행을 강조한 분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깨달음’이란 것을 단순히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설명한다는 것은 온당치 않다. 그렇게 되면 미국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 영화에서 미국을 본 것을 가지고 미국 전문가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⑨ 깨달음이란 부처님도 알려줄 수 없고, 스승도 알려줄 수 있는 게 아니다. 오직 본인만이 수행과정을 통해 스스로 체험하고 체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불교에서 깨달음이란 용어가 다방면에 쓰이기 때문에 혼란을 겪는다.

⑩ 원래 깨달음이란 붓다 수준의 정각(正覺)을 말하고, 그 외에 소소한 알음알이가 타파되는 과정을 견처(見處)라 하고, 한 소식했다, 초견성했다고 하는 것이 온당한 표현일 것이다.

⑪ 깨달음은 탐ㆍ진ㆍ치의 번뇌가 소멸되는 것이다. 다만 수행과정에서 수행자의 업장(業障)이 소멸될수록 많은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된다. 이때 그런 과정을 점검하고 바른 수행의 길을 제시할 수 있는 스승이 있다면 수행자는 옆길로 새지 않고 바른 수행의 길로 빠르게 갈 수 있다. 그러한 조건을 갖추지 모한 수행자는 소소한 자신의 체험을 깨달음으로 착각하고 스스로 높여서 남의 스승 노릇을 해, 마구니의 길로 인도한다. 그리하여 눈 먼 자가 눈 먼 자를 이끌어서 같이 구렁텅이에 빠지듯이 스승과 제자가 함께 마구니 함정에 빠진다.

⑫ 특히 수행자가 조심해야 할 경우는 견처, 한 소식, 초견성의 경지가 올 때이다. 이때는 어지간한 경전(經典)을 해석할 수 있게 되며, 조사어록(祖師語錄)도 무슨 뜻인지 알게 되고, 모든 사물을 볼 때마다 그 이치를 알기 때문에 그 이치를 표현하는 게송(偈頌)이 저절로 튀어나오므로 게송을 입에 달고 산다. 그리하여 모든 사회규범이 우습게 보이므로 방탕해질 수도 있고, 어린 아이처럼 순수해지기 때문에 애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또는 미친 사람처럼 쏘다니기도 한다. 이는 수행자 자신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관념이 모두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이때가 수행자에겐 가장 위험한 시기이다. 이때 올바른 스승이 바로 잡아주지 않으면 수행자는 자칫 마구니의 길로 빠져버릴 수 있다. 흔히 막행막식 하는 현상은 그래서 생긴다.

⑬ 깨달음의 본질은 앎이다. 다만 깨달음은 앎은 앎이되 일반적인 앎과는 다른 특별한 앎이다. 여느 앎이 사성제(四聖諦)라는 틀 밖에서 얻어지는 앎인데 비해 깨달음은 사성제라는 틀 안에서 얻어지는 앎이요, 여느 앎이 타인ㆍ타물을 대상으로 추구해 얻는 앎인데 비해 깨달음은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추구해 얻는 앎이며, 여느 앎이 점진적으로 얻어지는 이지적(理智的)인 앎인데 비해 깨달음은 훌쩍 뛰어오르듯이 비약적으로 성취되는 직관적(直觀的)인 앎이다. 정리해서 말하면, 깨달음을 통해 드러나는 진실은 이런저런 논란이 붙을 수 없는 자명한 진실이다. - 김정빈 ❮경❯

 

이와 같이 깨달음이란 우리가 아는 일상에서 쓰는 뜻하고는 완전히 다르다. 일상에서 깨닫는다는 말은 문득 알았다는 뜻이지만 불교에서 깨달았다는 말은 알기는 안 것이지만 의식으로 안 것이 아니고 무의식마저 다 없어져서 만법의 본질을 요달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실지로 스님들은 깨닫는다는 말보다는 견성(見性)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깨달으면 바로 영원한 자유인인 것이다. 곧바로 붓다 행이다. 일초직입 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라 한다.

 

다음은 깨달음에 대한 조성택 교수의 글이다. 요약이지만 많은 시사점이 있다.

 

“깨달음의 역사는 인종적ㆍ문화적 경계를 넘어 확산된다. 대승불교는 동아시아에서 다시 진화해 선불교를 낳았다. 선불교에서는 불ㆍ보살(佛菩薩) 외에 조사(祖師, master)라는 존재가 ‘깨달음의 존재’로서 등장한다. 조사들은 깨달음이란 ‘멀리서’ 혹은 ‘오랜 세월에 걸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당장’ ‘지금 여기에서’ 얻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조사들은 ‘마음이 곧 부처요(心卽佛)’, ‘자신의 본성을 보는 것이 곧 깨달음(見性卽佛)’이라고 가르친다. 스승으로부터 제자로 이어지는, 사자상승(師資相承)하는 선종(禪宗)의 역사는 깨달음의 전승에 관한 기록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출ㆍ재가를 막론하고, 깨달음이라는 ‘체험’을 불교의 요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확철대오(廓徹大悟)의 최종적 깨달음만을 유효한 불교수행의 목표라 생각하고,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이라고 여기는 ‘깨달음 지상주의자(至上主義者)’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의 많은 불교인들은 - 출ㆍ재가를 막론하고 또 직접 수행을 직하든 하지 않든 간에 - 근기나 수행의 방식을 따지거나 우선순위를 논할 뿐 ‘깨달음’은 여전히 중요하고 불교의 중심이며 요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깨달음을 ‘체험’이라고 하거나 혹은 ‘체험된 깨달음’만을 유효한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불교라는 종교는 불가피하게 개인화, 밀실화 될 것이며, 깨달음은 소수 선택된 자들의 ‘특권’이 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이후 한국불교 전통에서 소위 ‘깨달은 자’의 말과 행위에 있어 역사적ㆍ사회적 타당성은 중요하지 않다. 어떤 행위를 하든 어떤 법문을 하든 그것들은 전적으로 ‘깨달음의 표현’이다. 그 표현과 내용이 용납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어리석은 중생이라서 그럴 뿐이다. 때로 세간에서 깨달았다고 믿고 있는 어떤 선지식의 ‘깨달음’이 유효한 지에 대해 의심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수행의 정도가 낮은 자가 판단할 수 없는 문제로 유보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 한국불교에서 깨달음은 소수의 선택된 자들만이 체험할 수 있는 영역으로 ‘특권화’ 돼 있다. 그리고 그 특권화 된 영역을 거론하는 것은 오늘날 한국불교계에서 금기시 된다.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불교인들 스스로가 언설로써 평하기를 거부하는 ‘금기의 영역’이다. 종단에 비판적인 재가지식인들이나 활동가들조차도 종단의 ‘권력’과 ‘금력’에 대한 비판은 서슴지 않으면서, ‘깨달음의 영역’에 대한 의심과 비판은 ‘스스로’ 삼가하고 있다.

 

사실 이 문제의 폐해는 출가 스님의 경우보다 재가자들의 경우가 오히려 더 심각하다. 가장 큰 문제는 “깨닫지 못한 내가 뭘 할 수 있겠나”라고 하는 낮은 자존감이다. 낮은 자존감을 가진 불교인들에게 ‘세속’은 수행의 현장이 아니라 수행의 ‘걸림돌’로 여겨진다. “선방에서 몇 철을 수행해도 깨달을까 말까인데 세속에서 사는 내가 뭘 할 수 있겠나”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많은 재가불자들이 수행의 주체가 아니라 출가자들의 수행을 지켜보고 관전평을 하는 ‘관중’이 되고 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어느 스님이 깨달았다더라” 혹은 “못 깨달았다더라” “A 스님보다 B 스님의 깨달음이 더 크다” 등의 관전평도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깨달음은 신비한 ‘무엇’이 돼버리기도 하고 일상적 체험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신비의 경지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리고 은연중에 깨달음을 스님들에게 기대하고 심지어 요구하기도 한다. 또한 깨달음의 문제는 소통의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한국의 많은 재가신자들은 스님의 말씀을 이 지상의 언어가 아니라 ‘깨달음’의 초월적인 언어로 받아들이고 싶어 한다. 소위 큰 스님의 말씀일수록 그런 기대감이 더 두드러진다. 뭔가 특별한 메시지를 고대한다. 불행한 일이다. 일상적 소통과 대화가 불가능한 지경이다.

 

이러한 상황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알쏭달쏭한 법문이 때로 더 큰 대중적 반향을 일으키는 것이 현대 한국불교의 한 진경(眞景)이다. 못 알아듣는 것은 듣는 이의 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때로 고개를 주억이며 알아듣는다고 믿게 하거나 스스로 믿는 수밖에 없다. 오늘날 한국불교는 어쩌면 이런 불통의 상황 속에 스스로 은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아니면 이런 불통의 상황을 적절히 신비화해 오히려 자신을 숨기는 은폐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된다.

 

그렇다면 과연 불교의 깨달음이 일종의 ‘체험’이며 이 체험이 불교의 요체인가이 물음에 답하기에 앞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깨달음이 단지 종교적 체험으로만 머문다면 불교는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종교라는 덫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개인의 문제 - 때로 불교전통에서 말하는 생사의 문제 - 가 결코 작은 문제이거나 사소한 문제인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개인은 개체로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며 사회와 결코 무관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불교라는 종교가 개인의 생사문제에만 국한된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제도적 종교로서의 존립근거를 없애는 일이며 연기와 무아를 핵심으로 하는 불교의 세계관과도 맞지 않는 일이다.”

 

이상과 같은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나 깨달음은 여전히 불교 수행자의 이상이요 목표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부처님 이래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불교전통에서 ‘깨달음’은 단지 어떤 경지에서 경험하게 되는 특수한 체험만을 의미하지 않으며, 그에 이르는 '수행의 전 과정'을 포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음에 자기초월이 이루어지고, 그것이 행으로 이어지는 것까지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냉난자지(冷暖自知)’라고 했다. 즉 깨달음의 세계는 자신이 직접 체험해 봐야 안다는 뜻이다. 불법(佛法)은 남에게 배워서 깨닫는 것이 아니라 몸소 체험해야 깨닫는다는 말이다.

 

“깨달음을 과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진리의 변하지 않는 존재성과 연기적으로 펼쳐지는 모양이 너무도 정확하고 명백하기 때문에 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의식의 관점에서 깨달음을 얻지 않고 추상적으로 진리를 생각으로만 그려내는 불확실한 존재성을 직접 경험하게 함으로써 존재의 진실을 올바로 알리기 위해서이다. 깨달음은 진리에 대한 직접적인 경험이다. 의식을 넘어선 직접적인 앎이다. 직접 스스로의 마음으로 스스로의 마음을 보는 것이다. 법(法)을 지접 맛을 보는 것이다.- 카페 ‘言下大悟’에서

 

다음은 ❮깨달음의 문제❯에 대한 강병조 교수의 글이다.

 

우리나라 선(禪)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중시한다. 무엇을 깨달을 것이며 깨닫고 나면 어떻게 되는가. 먼저 깨달은 상태에 대해서 간단히 논하고자 한다.

 

선사들은 참선하는 동안에 나타나는 시공간 개념을 초월한 몸의 상태나, 작은 물소리도 크게 들리는 지각의 변화나, 화두의 의문이 풀리는 어떤 해답을 깨달음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이러한 생리적 또는 심리적 현상은 오랜 참선 후에 생길 수 있는 뇌의 상태에 불과한 것이라고 현대 의학은 말한다.

 

한 예를 여기 소개한다. ❮뉴스위크❯에 실린 ‘신경 신학(neuro-theology)’이란 제목의 내용 일부이다. 제임스 오스틴(James Austin) 박사는 미국 보스턴에 사는 신경과 교수이다. 그는 참선을 오래했으며 이날도 참선하면서 영국 템스 강가에 서 있다가 이상한 경험을 했다. 오스틴은 갑자기 그가 지금까지 경험한 것과 다른 어떤 깨침(enlightenment)의 느낌을 받았다. 주위의 물리적인 세계와 구분된 그의 개인 존재(individual existence)의 느낌은 밝은 새벽에 아침 이슬처럼 증발돼버렸다. 그는 '사물이 있는 그대로(as they really are)' 보였다고 말한다. '나, 나에게, 나의 것(I, me, mine)'의 감각은 사라졌다는 것이다. '시간은 존재하지 않았고, 나는 영원한 존재라는 느낌이 들었다. 오래된 동경, 혐오,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나 자신을 불어넣으려는 생각은 사라졌다. 나는 사물의 종국적인 성질(the ultimate nature of things)을 이해함으로써 아름다워졌다고 그는 말했다.

 

오스틴 박사가 신경과 의사가 아니었다면 아마 그 순간을 불교에서 말하는 깨침의 순간으로 생각했거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비스러운 경험으로 해석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고 자기가 경험한 것을 뇌 회로로 설명했다. 위협감을 모니터하고 공포심을 등록하는 편도체(amygdala)의 활동이 감소해야만 한다. 공간 지남력(指南力)을 담당하고, 자신과 세계를 분명하게 구별하게 하는 두정엽 회로는 조용해져야만 한다. 시간 지남력을 담당하고 자의식(self-awareness)을 느끼게 하는 전두엽과 측두엽의 회로는 분리돼야만 한다. 개인(selfhood)의 고등기능으로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잠깐 중단되거나, 용해되거나, 의식에서 삭제되는 것 같다.

 

오스틴의 이 논문은 1998년 MIT출판사가 ❮선(禪)과 뇌(Zen and the Brain)❯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불교신문❯ 2008년 10월 22일자에는 부산 해운정사 조실 진제 스님이 용맹정진에 참가한 사부대중에게 "부모에게 나기 전에 어떤 것이 참 나던고?"라는 화두를 내렸다는 기사가 실렸다. 진아(眞我)를 찾으라는 이 화두를 여래장이나 불성처럼 불변하는 실체가 상주한다는 여래장사상을 따라 존재의 배후에 있는 그 무엇을 찾으라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어불성설(語不成說)에 불과할 것이다. 불변하는 실체는 없는 것이다.

 

필자는 '석가모니가 깨달은 것'을 우리 불자들이 다시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욕심 때문에 생기는 고통을 없애려면, 자연이 기능하는 원리(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원리)를 깨달아 욕심을 적게 부리며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 깨달음이란 자연법칙을 제대로 아는 것을 말하고, 무지에 의한 고통에서 해방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죽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편안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바로 해탈이요 열반이며, 이런 상태가 깨달은 상태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진리를 미리 알고 바르게 살아서, 편안히 자기 죽음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난 해탈이요 열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불교는 종교인 동시에 철학이요, 과학이며, 심리학이고 정신수양의 도(道)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인간 싯다르타는 생존 당시 연기(緣起), 무아(無我), 사성제(四聖諦), 삼법인(三法印), 팔정도(八正道), 공(空)사상, 중도(中道) 등 아주 과학적인 깨달음을 얻었다. 현대 과학에 맞지 않는 교리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석가모니의 과학정신을 현대과학으로 재해석하면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된다. 원래의 석가모니의 과학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한국불교 개혁의 가장 시급한 과제이다. 한국불교는 이제 위에 열거한 비불교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석가모니의 깨침과 근본 가르침 즉 연기, 무아, 사성제, 삼법인, 팔정도, 공사상, 중도사상 등으로 돌아가야 한다. 혹시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현대과학에 맞지 않는 교리가 있다면 석가모니의 과학정신을 받아들여 현대과학에 맞게 재해석하면 된다. 이와 같은 개혁은 석가모니의 원래의 가르침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지 결코 개혁이 아니다.

 

이어서 다음은 각묵 스님의 깨달음에 대한 반론이다.

 

“깨달음의 경지도 정확한 언어표현으로 표현돼야 한다. 비불교적인 언표를 사용하면서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대승이라느니 최상승이라느니 하는 것은 단지 감언이설일 뿐이다. 오히려 깨달음을 신비화하고 절대화하는 모순을 범하게 된다. 깨달음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느니 깨달아봐야 스스로 안다느니 하는 것도 깨달음을 호도하는 무지몽매한 말이라고 생각된다. 부처님께서는 불교의 창시자며 불자들의 스승이고 사표인 분이다. 그분 부처님께서는 결코 애매한 언표나 존재론적인 실체를 상정하는 어떤 언어표현도 사용하지 않으셨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은 사성제를 철견하는 것, 팔정도를 실현하는 것, 오온ㆍ12처ㆍ18계의 무상ㆍ고ㆍ무아를 통찰하는 것, 12연기를 순관ㆍ역관하는 것 등으로 명쾌하게 말씀하셨다. 부디 ❮대승기신론❯과 같은 후대의 논서를 절대시해서, 그것을 바탕으로 초기불교를 잘못이해하거나 폄하하거나 깨달음을 절대화하는 듯한 태도는 버리기 바란다.”

 

다음은 김나미 교수의 주장이다.

 

“오늘 한국불교의 문제점 하나를 끄집어 들었다. 우리 불교는 깨달음과 이것에 기인한 수행 풍토로 인해 정도(正道)의 길을 잃었다. 한국불교는 깨달음이라는 묘원한 환상에서 벗어날 때도 됐다. 한마디로 하자면 깨달음 대신 열반이 모든 수행의 목적이 돼야 한다는 점이다. 깨달음에는 연기법에 대한 통찰이 요구되는 반면 열반은 팔정도 수행이 필요하다. 깨달음은 단지 열반의 선행 조건일 뿐이며, 깨달음의 단계부터 시작, 이것을 기반으로 최종의 궁극적 목표인 열반으로 나아가는 구도가 돼야 한다. 그러므로 수행을 한다면 그 수행이 목표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하고 목표 설정을 다시 해야 한다. 열반이 수행의 최종적이자 궁극적인 목적이다. 깨달음만을 수행의 목적으로 삼는 한, 수단과 목적이 전도된 채 삼독에 물든 중생으로 남을 것이다 .”

 

꼬삼비(kosambi) 비구 사건 : 부처님이 성도하신 후 10 안거 때 인도 북부 꼬삼비 지역에서 승가의 분쟁이 일어났던 사건이다. 꼬삼비 지방의 고시따 수도원에는 각기 오백 명의 제자들을 거느린 학식과 덕망이 높은 두 비구가 살고 있었다. 이 두 스승 비구 중 한 비구는 계를 가르치는 율사였고, 다른 한 비구는 경을 가르치는 강사(講師)였다. 그런데 이 둘 사이에 사소한 문제로 시작된 분쟁은 두 비구 집단 사이의 분쟁으로 확대됐고, 부처님의 만류조차 듣지 않았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분쟁하는 비구들에게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훈계하셨다. ― 맛찌마 니까야 ❮수번뇌경(隨煩惱經)❯

 

『다툼을 일삼는 자들은 여러 목소리를 내면서 아무도 자신이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승가가 분열할 때도 아무도 자신의 허물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현명한 대화는 잊어버리고 말꼬리만 물고 늘어진다. 입이 움직이는 대로 마음대로 지껄여 무엇에 이끌려 그러는지 그것을 모른다.

 

“나를 욕했다, 나를 때렸다, 나를 이겼다, 내 것을 훔쳤다.”라는 이런 생각을 품은 자, 그들의 원한은 끝나지 않는다.

 

“나를 욕했다, 나를 때렸다, 나를 이겼다, 내 것을 훔쳤다.”라는 이런 생각을 품지 않는 자, 그들의 원한은 영원히 멈추리.

 

참으로 이 세상 어디에서나 원한은 원한으로 결코 그치지 않는 법, 원한은 원한을 비움으로 그치게 되는 것이 만고의 진리이다. 여기서 우리가 제어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니 이것을 아는 자들은 그 분쟁을 그만둘 것이다.

 

뼈를 부수고, 생명을 빼앗고, 소와 말과 재물도 약탈하고, 왕국을 침략하는 그런 자들도 화합하는데, 어째서 그대들은 그러지 못하는가.

 

만일 그대 믿는 지혜로운 벗과 현명한 도반을 만나거든 모든 위험을 극복하고 그와 함께 만족하고 마음 챙기며 길을 가라.

 

만일 그대 믿는 지혜로운 벗과 현명한 도반을 만나지 못하거든 왕이 정복한 영토를 버리고 떠나듯 홀로 가라. 마치 숲 속을 거니는 코끼리처럼. 차라리 혼자 갈지언정 어리석은 자와 함께하지 말고 혼자서 가라. 악행을 하지 마라. 마치 초연하게 숲 속을 거니는 코끼리처럼.』

이 게송을 남기신 뒤 부처님은 홀로 꼬삼비를 떠나 빠릴레이야까(Parileyyaka)숲으로 들어가셨다. 그러자 부처님의 충고도 듣지 않는 스님들의 행동에 분개한 재가자들이 석 달 안거 동안 꼬삼비 승가에 대한 공양을 거절했고, 석 달 동안 고생을 한 비구들은 안거 후 부처님을 찾아가 사죄를 하게 된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다음의 게송을 읊으셨다.

 

“만일 진실하고 지혜로우며 덕 높은 벗을 만나거든 그와 함께 즐겁게 살며, 마음 집중을 잘 수행해 삶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라. 그러나 만일 진실하고 지혜로우며 덕 높은 벗을 만나지 못하거든 마치 왕이 한번 점령한 땅을 미련 없이 포기하듯 홀로 자유로이 살아가라 …

그럴 때는 차라리 홀로 살아가라. 어리석은 자와는 벗이 될 수 없느니라. 다만 홀로 살아갈지니 악행을 범함이 없이 자유로이 숲속을 거니는 저 코끼리처럼.“

 

꼰단냐(빠알리어 안나 콘단냐/AnnKondanna) : 카운딘야(Kaundynya)라고도 하며, 한역해서 교진여(驕陣如) 혹은 아야교진여(阿若驕陳如), 구린(拘隣)이라 하기도 한다. 부유한 바라문 가문 출신으로 관상학의 대가였던 그는 태자가 정등각자가 될 것을 예견하고 출가하기를 기다렸다가 다른 네 명과 함께 출가했으며, 이들을 다섯 비구라고 한다. 즉, 석가모니가 출가한 뒤 정반왕(淨飯王)이 석가모니의 소식을 알기 위해 밀파한 다섯 사람, 석가모니를 수행해서 함께 고행을 했던 다섯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다.

 

부처님 초전법륜(初轉法輪) 당시 다섯 비구 중 최초로 깨달음을 증득한 사람이다. 당시 부처님은 “꼰단냐는 깨달았다-완전하게 알았다(annasi vata bho kortanno)”라고 두 번이나 외치셨다고 하며, 그래서 그는 안냐꼰단냐(완전하게 안 꼰단냐)로 불리게 됐다. 그리고 5일 뒤에 ❮무아상경(無我相經, Anattalakkhara-sutta)-S22i59❯을 듣고 아라한이 됐다고 하며,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첫 번째 비구이기도 하다.

 

그래서 ❮앙굿따라 니까야❯ 일집(AⅠ:14:1-1)에서 ‘구참 비구 제자들 가운데서 으뜸’으로 불리고 있다. 꼰단냐 존자는 혼자 한거하기를 좋아해 대중처소에는 아주 드물게 나타났으며, 부처님보다 먼저 히말라야의 찻단따숲(chaddanta-bhavana)에서 반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 초전법륜(初轉法輪, Dhamma-cakka-pavattana), 다섯 비구(五比丘) 참조.

 

꿈반다(Kumbhanda) : 부단나(富單那)라 한역한다. 초기경전에 나오는 불교를 수호하는 천신의 일종으로 프레타(Preta)와 더불어 수미산 남쪽에 거주하며, 남섬부주(南贍浮洲)와 사찰의 남쪽을 지키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의 권속이다. 수미산 남쪽에서 증장천왕의 통치를 받는 꿈반다는 숲이나 산에 감추어진 보물을 관리하는 천신으로 큰 위신력을 지니고 있어, 우리가 건강하고 행복하도록 보호해 준다고 한다. 원래 꿈반다(Kumbhanda)는 배가 부른 모습을 하고 욕심이 매우 많은 아귀로서 사람의 정기를 빨아먹는 귀신이었으나 불교에 귀의해 증장천왕 부하의 천신이 됐다.

 

끽다거(喫茶去) : ‘차나 한 잔 마시라’는 말이다. ‘끽다(喫茶)’는 차를 마시라는 말이고, 거(去)는 명령형 조사이다. 당나라 때 ‘무(無)’자 화두로 유명한 조주 종심(趙州從諗, 778년∼897년) 선사가 차(茶)를 선(禪)의 경지로 끌어올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선문답에 유래된 말이다. 그리하여 끽다거(喫茶去)는 다선일미(茶禪一味), 다선일여(茶禪一如)의 극치를 보여주는 꽤 까다로운 공안으로 유명하다.

 

『봄에는 아름다운 온갖 꽃이 만발하고 가을에는 밝은 달이 비추네.

여름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겨울에는 흰 눈이 날리도다.

쓸데없는 생각만 마음에 품지 않으면 이때가 인간세상의 좋은 시절이로다.

春有百花秋有月 夏有凉風冬有雪

若無閑事掛心頭 便是人間好時節』

 

조주 선사의 오도송(悟道頌)이다. 깨달음을 얻게 되면 형식이나 절차에 구애받지 않는 법이다. 따라서 문답도 격식이나 예상을 뛰어넘는다.

 

조주 선사가 나이 80에서 120세에 입적할 때까지 관음원(觀音院)에 머물던 때의 일이다. 어떤 수행승 두 사람이 그를 찾아와 절을 올리며 이렇게 물었다.

“불법의 큰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에 조주 선사는 대답 없이 되물었다.

“전에 이곳에 온 일이 있었는가?” 하시니, 한 수좌가 대답하되,

“와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하니, 선사께서 말씀하시되,

“그럼 끽다거(喫茶去) - 차나 한 잔 마시게”라 하셨다. 그리고 옆에 같이 온 수행승에게 물었다.

“그대는 이곳에 와 본 적이 있는가?” 그러니 그 수행승은 답했다.

“예, 전에 한번 와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선사는 또 말했다.

“그럼 자네도 차 한 잔 들게나(喫茶去).”라고 했다.

 

그러자 그 선문답을 듣고 있던 원주(院主)가 의아해 하며 선사께 여쭈었다. “스님께서는 와 본 적이 있다는 수행자에게도 차를 권하고, 와 본 적이 없다는 수행자에게도 똑같이 차를 권하시니 어인 일입니까?” 그러자 원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선사가 큰 소리로 원주! 하고 불렀다. 이에 놀란 원주가 엉겁결에 예! 하고 대답을 하니, 선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원주, 그대도 차 한 잔 들게나(喫茶去).” 그러자 이번에는 옆에 있던 시자(侍子)가 말했다.

“스님께서는 누가 무엇을 물어도 끽다거 하시는데, 도대체 요령이 통하지 않는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이에 조주 선사는 말했다.

 

“옳도다. 너도 끽다거(喫茶去)!” 그 순간 시자는 문득 활연대오(豁然大悟) 득도(得道)했다고 한다. 곧 넓게 트인 골짜기처럼 마음이 활짝 열리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다.

 

한 잔의 차를 마시는 것은 같을지라도 마시는 사람에 따라서 그 찻잔을 만지는 따스함도 느끼는 차 맛도 즐기는 차향도 약간씩은 다르듯이 깨달음도 스스로 깨우치라고 조주 선사가 끽다거(喫茶去)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조주 선사가 ‘차나 한 잔 마시라’고 한 것은 수행승들에게 주는 공안으로서, 일체의 관념과 분별을 다 여의고, 일체를 다 내려놓고, 쓸데없이 이런 저런 걸 묻지 말고, 차나 한 잔 마시고 가라. 네가 묻고 싶고, 듣고 싶은 말은 너 속에 다 들어있는데, 엉뚱한 곳에 와서 뭘 묻고 찾으려 하느냐 하는 말인 듯하다. 그러니‘너의 주인공은 어디에 두었느냐, 정신 차려라’ 하는 뜻이기도 하다.

[출처] 깨달음에 대한 논쟁|작성자 임기영불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