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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

마음의 해석학 : 보조선 사상의 체계와 구조

마음의 해석학 : 보조선 사상의 체계와 구조

인경 / 명상상담연구원

1. 머리말

지눌의 생애에는 세 번의 깨침의 전기가 있었다. 첫 번째는 25세에 창평昌平 청원사淸源寺에서 혜능慧能(638~713)의 ?법보기단경法寶記壇經?을 읽다가 일어났고, 두 번째는 31세에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에서 이통현李通玄(635~730)의 ?화엄론?을 읽고 선과 화엄이 하나임을 자각하였고, 세 번째는 41세 때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대혜종고大慧宗杲(1088~1163)의 ?대혜어록大慧語錄?을 통해서 간화선看話禪을 깨달았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김군수金君綏가 찬한 비명碑銘에 기초하여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의 삼문三門으로 정리한다.1) 이렇게 보면 지눌의 삼문 체계는 일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점진적으로 형성된 것이다. 지눌의 일생은 서로 모순되고 대립되기도 하는 선수행의 중심 문제들을 하나의 체계로 정리해 보려는 고심에 찬 여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삼문의 각 중심 개념은 성적등지문에서는 정혜定慧이고, 원돈신해문은 화엄의 성기性起이며, 간화경절문은 간화看話이다. 그의 많은 저술 가운데 성적등지문은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과 돈오점수頓悟漸修의 뜻을 밝힌 ?수심결修心訣?에서 언급하고 있고, 원돈신해문은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이나 ?화엄절요華嚴節要?에서 논술하고 있으며, 간화경절문은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에서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 삼문을 하나의 체계로 통합하려는 노력은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竝入私記?(이하 ?절요사기?로 약칭)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보조선의 종합이라고 할 수 있는 ?절요사기?에 대한 평가는 양분되어 있다. “?절요사기?는 지눌의 최후 저술로 그의 사상을 종합하고 있는 대표작이다. 그 구성은 논리와 체계가 정연하다”2)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는가 하면, “자신의 사상을 구성하는 다양한 측면들의 상관 관계를 밝히는 종합적인 성찰이 보이지 않는다”3)라는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이런 평가는 그만큼 많은 연구자들이 지눌의 삼문을 일관된 하나의 체계 속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의 반증이기도 하다. 사실 김군수의 비명碑銘 이후, 지눌의 선사상은 삼문에 의해서 이해하려는 시각은 오늘날까지 매우 일반화된 경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역사적으로 보면, 일정한 기간을 두고 이루어진 보조의 삼문을 하나의 일관된 체계로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지눌 자신도 그 자신의 생애 속에서 깨닫고 체험한 다양한 선사상을, ?절요사기?에서 공시적인 하나의 체계로 이해하려고 노력했다고 보여진다. 그렇지만 지눌 자신은 삼문의 관계에 관하여 분명한 자각을 가지고 체계적으로 기술하는 저술은 없다. 서로 모순되고 갈등을 보이는 다양한 선사상을 종합하고 회통하고자 하는 일생의 노력은 있었지만, 자신의 사상을 일관된 체계나 구조를 가지고 논리를 따라 전개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일관된 사상구조를 구성하려 한다면, 그것은 결국은 연구자의 주관적인 의견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보조지눌의 텍스트를 연구하는 해석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방식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하나는 삼문을 각각 따로 혹은 시기적인 차제의 관계로 이해하든지, 아니면 삼문을 재구성하여 하나의 단일한 구조를 구성하는 일이다.

 

그런데 삼문에 대한 전자에 대한 이해는 지금까지 많은 연구가 진행되어온, 매우 보편적이고 실증적인 해석방식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텍스트보다는 해석자의 권한이 강조된 창조적인 해석학적 방법론이다. 본고의 입장은 실증적인 방법에 기초하되, 오히려 해석자의 권한을 존중하는 후자의 방식을 취한다. 그러므로 보조 선사상이 무엇인가를 ‘객관적으로 밝히는’ 일보다는 오히려 보조 선사상에 대한 ‘해석자의 창조적인 이해’를 강조한다.

2. 보조선 연구사와 문제제기

 

보조선을 연구하는데 있어 일단 해석자의 권한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면, 그러면 어떻게 텍스트에 접근하고, 이해하는 길이 효과적일까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본고는 어떤 텍스트이든지, 그것은 하나의 체계이며, 각 관계의 단위들은 상호 긴밀한 관계를 가지면서 통합되어 하나의 구조를 가진다고 전제한다. 이때 ‘체계는 부분과 전체가 유기적인 관계를 가진 구조’라고 정의할 수 있다. 여기서 ‘체계’란 외형으로 드러난 표면적 의미라면, ‘구조’는 텍스트 내면에 숨어 있는, 어쩌면 저자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심층적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본고의 접근 방법론은 텍스트에서 구조를 찾고 그것의 의미를 해석하는 ‘구조적 해석학構造的 解釋學’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김군수의 비명에서 말하는 삼문 체계가 구체적으로 ?절요사기?와 같은 보조의 저술 등에서 구현되었거나 표출되었다면, 이것은 ‘표면에 드러난 외적 체계’에 불과하고, 실제적인 과제는 ‘삼문이 가지는 내적인 관계로서의 구조’를 구성하는 일이라고 본다. 다시 말하면 본고의 방법론이 함축하는 해석자(독자)의 권한이란 삼문 체계의 심층적인 관계를 발견하고, 그것을 하나의 일관된 구조로 드러내는 작업이라는 점이다. 특히 선전禪典의 사상 체계에 관한 연구의 시작은 이런 표면적인 현상을 넘어서 심층에 존재하는 내면적인 관계와 그 체계에 대한 방법론적인 자각4)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조지눌 선사상 체계에 관한 지금까지 학계의 연구 성과를 비판적으로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은 세 가지의 입장이 있다.

 

먼저 가장 일반적인 견해로 ?절요사기?의 삼문은 선禪의 교판敎判이라 이해되고, 수행의 세 가지 방법이라는 입장이다. 교판은 교상판석敎相判釋의 준말로, 다양한 경론經論의 교설들을 자신의 종파적인 입장에 따라 체계화시키는 과정에서 발전된 형태이다. 이런 관점에서 삼문도 수행의 점차적인 과정이나 근기에 따른 다양한 교육적 과목으로 해석한다. 대표적인 경우는 삼문을 교판으로 이해하는 고 이종익 박사5)의 논문이 여기에 속하고, 삼문을 수행의 점차적 과정으로 지눌 사상의 전기․후기로 이해하는 대표적인 경우는 성철스님의 ?선문정로禪門正路?이다.6) 또 이와 같은 단계적인 교판敎判의 관점에서 지눌선 사상의 연구사를 정리한 논문은 심재룡 교수의 「보조선을 보는 시각의 변천사」7)이다. 이 논문은 보조 이후 현대까지 보조선을 보는 시각의 변천을 다섯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교판론적인 이해는 삼문에 대한 하나의 일관된 내적 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개인의 역사 속에서 순서대로 발생한 교화의 방편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이해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은 사상 체계라고 말하지만 ‘여러 측면을 단지 병렬적으로 고찰할 뿐, 그 상호 연관성이나 구조성에는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8) 설사 관계를 설정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시간적인 전후나 수행의 우열로 해석하지, 체계 자체의 공시적共時的 실재성에 대한 관계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본고의 관점과 다르다.

 

두 번째는, 삼문을 하나의 일관된 체계 속에서 이해하려는 태도이다. 여기에서 체계란 단순하게 나열이 아니라 요소나 부분들이 상호 유기적 관계로 만들어진 하나의 내적 관계망이다. 이런 태도는 체계에 대한 분명한 자각을 가지고 그것을 발견하고 구성하고자 한다는 데 있다. 예를 들면 대표적인 경우가 강건기 교수와 길희성 교수이다. 이 경우 ?절요사기?의 사상 체계를 각각 ‘진리관과 실천론’ 혹은 ‘심성론과 수행론’이라는 구조로 파악하고, 비명의 삼문을 모두 실천론이나 수행론으로서 돈오점수의 체계 속에서 이해한다.

 

강건기 교수는 원돈신해문을 돈오에 배대시키고, 성적등지문과 경절문을 점수로 배대시킨다.9) 그리고 돈오점수의 돈오를 해오解悟로 보고, 돈오 이후의 지해知解를 털어 버리는 수행으로 화두話頭를 드는 경절문을 수용한 것으로 이해한다. 반면에 길희성 교수는 돈오에 원돈신해문을, 점수에 성적등지문을 배치한 점에서는 강건기 교수와 입장을 같이한다. 그러나 경절문을 점수문漸修門에 배치하지 않고 돈오문頓悟門에 두되, 해오가 아닌 증오證悟를 성취하는 특유의 길로서 이해한다.10)

 

그러나 이 같은 관점은 체계와 구조를 지향하고 있다지만, 모두를 수행문 혹은 실천론에 배대함으로써 진리관이나 심성론은 제외된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전체의 사상을 수행의 과정인 돈오점수의 관계로 이해하는 접근법으로, 실제로는 삼문이 가지는 내적인 관계를 여전히 말하지 못하고 있다.

 

세 번째는 성적등지문이나 원돈신해문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간화경절문을 독립시켜 지눌선의 사상적 체계 내에 모순이 없는 일관성을 확보하려는노력이다. 이 경우는 버스웰(R. Buswell) 교수와 권기종 교수가 대표적이다. 버스웰 교수는 간화경절문을 다루는 지눌의 태도에 의심을 던진다.

지눌은 ?절요사기?에서 간화선을 두 가지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즉 첫째는 비록 망설이고는 있지만 돈오점수에 편입될 수 있으며, 수증론의 돈오점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독특한 수행법으로서 다룬다.11)

그는 지눌이 간화경절문에 대해서 애매한 양면적인 태도(ambivalence)를 취했다고 본다. ?절요사기?에서 간화선을 기존의 돈오점수 체계에 편입시키는 것과 기존의 수증론과는 전혀 다른 독특한 수행법으로 이해하는 양가적兩價的 태도를 취하였고, 마침내 ?간화결의론?에 이르러서 비로소 간화선을 증오로 해석함으로써 해결했다는 것이다.

 

반대로 권기종 교수는 간화선을 지눌의 선 사상적 특징의 하나로 보는 기존의 시각에 비판적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지눌의 삼문 체계 속에서 선교일원禪敎一元과 교외별전敎外別傳의 모순에 주목하고, ?간화결의론?이 지눌의 저작이 아닐 수 있음을 들어서, 간화선을 독립시켜 지눌의 제자인 혜심慧諶적 요소로 분리시키려는 경향을 보여 준다.12) 이것은 간화선을 지눌선의 돈오점수, 정혜쌍수, 선교일치의 사상 체계에 융합될 수 없는 요소로 보기 때문이다. ?간화결의론?의 진위眞僞 문제를 제기하여 제3문인 경절문을 절단해 버림으로써, 지눌선을 하나의 체계로서 내적 무모순성無矛盾性을 확보하고자 하는 의도로 보여진다.

 

이러한 삼문과 지눌선의 체계 문제를 둘러싼 해석상의 논의는 주로 1987년에 설립된 보조사상연구원의 연구발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여기에는 몇 가지 중요한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먼저 텍스트와 해석자와의 관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서구적 전통에서 시작된 해석학과 유사한 인문학적인 논의가 별도로 자생적으로 발생된 것으로 평가되지만, 여전히 우리학계는 해방 이후에 뿌리를 내린 자연과학적인 실증적인 방법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첫 번째의 교상판석적 접근은 삼문을 평면적으로 나열하였지만, 이것은 다양한 중생의 근기와 선적 텍스트에 깊고 옅음이 있다고 전제한다. 그만큼 해석자의 권리보다는 텍스트의 권한을 존중하는 태도라고 보여진다. 말하자면 사상적 체계를 해석하는 데 있어 엄격하게 자료를 검토하고, ‘텍스트 의도’에 충실한 실증적인 태도를 중시한다. 반면에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접근은 상대적으로 해석자의 권한이 보다 강조된다. 아마도 이런 점은 문학 작품이 아닌 선 텍스트에서도 ‘무엇이 적절한 텍스트의 해석법인가’라는 논의를 제공한 의미 있는 일로 받아들여진다.

 

다음은 ‘삼문은 상호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에 지눌선의 중심 문제가 놓여 있음을 다시금 확인시킨다는 점이다. 이것은 결국 텍스트 중심 내용의 체계와 구조에 관한 논쟁을 유발시킨 것이다. 그럼으로써 기존의 이해에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음을 노출시키고 있다고 보여진다.

 

체계나 구조가 의미를 가지려면, 먼저 체계를 구성하는 각 요소들이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가져야 하며, 다음으로는 각 요소들 간에 모순이 없이 합리적으로 통합되어 전체적 구조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절요사기?의 사상 구조를 진리관眞理觀(心性論)과 실천론實踐論(修行論)으로 이분시켜 삼문을 모두 실천론에만 배대시키고, 심성론에서는 배제시킨다는 것은 보조선의 특질을 잘 보여준 점이 있지만, 반대로 각 삼문에 함축된 진리관이나 심성론과의 독자적인 성격은 도외시한 경향이 있다.

 

또 각 삼문을 돈오점수의 체계만으로 이해한 점은 보조선을 일관된 하나의 체계를 구성한다는 장점도 있지만, 여전히 삼문의 각 요소가 가지는 특수성과 그 내적 관계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 않다. 돈오와 점수라는 두 측면으로 삼문을 해석함으로 말미암아, 삼문의 각 요소가 어떻게 결합되고 통합되어 전체 구조를 이루는지를 효과적으로 보여 주지 않고 있다. 돈오점수의 체계는 수행의 ‘과정’을 내포할 뿐이지, 요소로서의 삼문이 상호 작용하여 이루어진 전체의 ‘구조’는 아니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진정한 의미에서 아직 우리는 삼문에 의해서 이루어진, 부분과 전체의 유기적인 체계를 구성하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마지막으로, 삼문 체계 내에서 간화경절문을 어떻게 이해하고 처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이다. 간화선 체계는 지눌의 선사상 체계 내에서 전체적 질서를 깨뜨리는 이단자와 같고, 또 소화할 수 없는 뜨거운 감자다. 이를테면 강건기 교수는 간화선을 돈오점수의 체계에서 점수로 배치하고, 길희성 교수는 증오證悟로 보며, 권기종 교수는 체계 내에서 모순적인 요소인 까닭에 혜심적 요소로 잘라내고, 버스웰 교수는 보조선의 양가적 태도로 이해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올바른 해석을 결정하는가? 보조선의 삼문체계三門體系에서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과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에 대한 이해는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지만, 제삼문第三門인 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에 오면 각기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결국 지눌의 선사상 체계에서 경절문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문제가 ‘체계’로서 그의 선사상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마음의 해석학

 

1) 삼문의 성격

삼문을, 혹은 지눌의 사상 체계를 해석하는 지금까지 가장 널리 알려진 모형은 돈오점수의 체계이다. 즉 돈오점수를 대표적인 지눌 선 사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했듯이, 돈오점수의 체계에 의한 해석은 삼문이 가지는 내적 관계의 전체적인 구조를 ‘그 자체로’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특히 간화선을 적절하게 다루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안은 없는가? 그것이 체계라면, 체계로서의 삼문이 가지는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드러내야 하고, 단순한 표면적인 나열이 아니라 각 부분과 요소들이 만나 구성되는 ‘전체적 구조’를 보여 주어야 한다. 바로 이 같은 의미에서 지눌의 선사상을 온전히 드러내는 해석틀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필자의 이해에 의하면, 지눌 선 사상의 핵심이 되는 한결같은 과제는 바로 마음(心)이다. 지눌은 전 생애를 통하여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고심하였다. 마음의 문제는 그의 모든 저술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주제이다. ?권수정혜결사문?에서는 “미혹과 깨달음이 다르지만 그것(要)은 모두 일심一心에서 비롯된다”13)고 하고, ?수심결?에서는 “부처를 구하고자 한다면 부처는 바로 이 마음이다. 어찌 마음을 멀리서 찾을 것인가?”14)라 하고, ?절요사기?에서도 “근원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자기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15)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지눌의 관심은 바로 마음 자체이며,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이러한 물음에 대한 응답이 지눌에게 있어서는 삼문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 점이야말로 삼문의 내적 관계를 찾고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점이다고 본다. 다기 말하면 기본적으로 삼문은 ‘마음의 해석학’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삼문에 상호 의미 있는 유기적인 내적 구조가 존재한다면, 이 삼문의 체계는 바로 ‘마음을 해석하는 마음의 구조’일 수밖에 없다. 삼문을 이해하는 출발점은 곧 바로 마음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사상이란 것도 결국 마음을 드러내고 실천하는 해석의 형태이다. 만약 종교를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라고 정의한다면,16) 그것은 바로 ‘마음’이며, 마음에 관한 ‘이해와 실천’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할 수 있다.

(1) 도대체 마음이란 무엇인가?

(2) 마음은 자아와 세계에 어떻게 나타나는가?

(3) 마음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이 질문들은 일심을 구성하는 세 요소로서 곧 마음의 존재, 양태(혹은 현상), 작용이라는 세 측면을 나타낸다. 이와 같은 마음의 세 측면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바로 삼문의 의미라고 생각된다.

 

첫 번째의 ‘마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마음의 현상이 아니라 마음 그 본질적 측면을 가리킨다. 이것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언어 이전의 마음 자체를 의미한다. 이는 삼문의 체계에서 보면, 바로 ?간화결의문?에서 제시된 경절문徑截門에 해당된다. ‘경절徑截’이란 ‘곧바로 가로질러 간다’는 의미이다. 경절문은 논리적 이해나 번뇌를 단박 끊어내고 마음 자체의 본래적 바탕으로 즉각 들어가는 방식에 의해서 이름지어진 것이다. ‘활등처럼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 활줄처럼 곧장 들어가는데’,17) 머뭇거림이 없다는 것이다. ‘이 뭣고’(是甚麽)라는 화두는 바로 첫 번째의 ‘마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통한다. 이것은 바로 마음 자체에 대한 의심이나 깨달음을 포함한다.

 

두 번째의 ‘마음은 자아와 세계 속에 어떻게 나타나는가’라는 질문은 깨달음이나 이해의 대상(所悟)으로서 마음의 양태나 현상을 가리킨다. 삼문으로 보면, 깨달음이 세계에 드러난 화엄의 성기설性起設이나, 법계연기설法界緣起說에 기초한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에 해당된다. ?절요사기?에서는 종밀의 심성론인 공적영지심空寂靈知心에 기초하여 제종의 심천득실深淺得失을 분석하고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데, 지눌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깨달음의 대상(所悟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즉 “마음의 본체는 생각을 떠났고, 근본 성품은 청정하여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라고 하는데, 이것은 점문漸門을 주장하는 사람이요 혹은 “머무름이 없어 공적한 앎은 모양을 떠난다”거나 혹은 “마음이 곧 부처”라거나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들은 돈문頓門을 많이 주장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모두 마음의 성상性相을 떠나지 않는다.18)

위에서 말하는 견해들이란 중국선을 ?절요사기?에서 ‘마음(性相)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분류한 북종北宗․하택종荷澤宗․홍주종洪州宗의 입장을 순서대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깨달음의 대상으로서 마음을 해석하는 입장에 따라 분류한 것으로, 북종은 마음의 본체本體를 청정성淸淨性으로 파악하고 망념으로부터 떠남(離念)을 강조하므로 점종漸宗이 된다. 마음의 본래적인 청정성(性)과 번뇌의 존재(相)를 동시에 인정하고, 번뇌를 없애 청정심만을 존재케 하는 것으로 수행을 삼는다. 하택종은 다만 ‘지知’ 일자一字를 중요시하고 마음의 본체를 공적영지로서 이해한다. 번뇌는 미혹했을 때만 번뇌이지, 알고(知) 보면 그 자체는 공적空寂하고 신령스럽다(靈知)는 입장이다. 홍주종은 마조馬祖의 가르침을 의미하는데, 마조는 ‘마음이 곧 부처’(卽心卽佛)라고 하기도 하고,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라고도 말한다.

 

그렇지만, 이들은 결국은 모두 ‘마음을 해석하는 성상性相에 지나지 않다’고 보조는 말한다. 바로 그것은 마음이 자아와 세계에 나타내는 양식인 것이다. 이런 논의는 ?원돈성불론?에서도 이루어진다. ?원돈성불론?에서는 이통현의 화엄론적 해석에 기초하여 “법계의 일체가, 중생의 무명분별을 포함하여 비록 보잘것없는 티끌이라 할지라도, 인연을 따라 나투는 그것이 바로 근본적인 온 법계의 빛나는 지혜(根本普光明智)”19)라고 하고, “부처와 중생의 차별이란 근본보광명지의 상용相用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본래 하나이지만 일으키는 작용이 다양하게 거듭되므로 성기문性起門이다”20)라고 말한다. 여기에 의하면 중생의 자아(理)와 법계의 세계(事)는 상호 다른 내용이 아니다. 그것은 근본보광명지의 상용이며, 리사무애理事無碍이며, 자아와 세계는 부처의 출현, 곧 성기性起로서 이해된다. 결국 원돈신해문의 과제는 깨달음과 이해의 대상으로서 자아를 포함하여 세계(法界)의 본질(性)과 모습(相)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진리관이나 심성론을 포함한다.

 

마지막으로, ‘마음을 어떻게 닦을 것인가’라는 세 번째의 문제는 깨닫고 실천하는 주체(能悟)로서 마음의 작용을 가리킨다. 곧 어떤 마음이 깨닫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변을 포함한다. 이것은 삼문으로 말하면, 깨닫는 마음을 정혜定慧로 이해하는 바로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의 과제이다. 이는 깨달음의 대상적인 출현이 강조되는 원돈신해문과 같은 마음이겠지만, 여기서는 그 주체적인 입장으로서의 마음, 곧 정혜가 강조된다. ?절요사기?에서는 깨달음의 주체로서의 마음(能悟)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깨달음의 주체(能悟)를 밝히려면 들어가는 문이 수천 가지가 있으나, 그것은 다 정혜定慧를 떠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음은 물과 같아 물결이 흔들리면 그림자가 부서지고, 물이 맑고 고요하면 그 작용이 완전해질 것이다. 선정禪定과 지혜智慧가 동시에 없으면, 그는 미치광이요 미련한 사람이다. 두 가지를 함께 고요히 운용하면, 완전한 부처가 될 것이다. 혹자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으로서 생각이나 닦음도 없으며 자취를 떨쳐 버리고 이치를 드러낸다고 하는데, 이것들은 다 선정으로 문을 삼는 것이요, 또 마음을 살피고 마음의 공적함을 알고 생각 없음을 알고 본다고 하는 것들은 다 지혜로 문을 삼는 것이다.21)

이것은 지눌이 실천의 주체로서 마음을 ‘정혜’로 파악하고, 중국선中國禪의 북종․하택종․홍주종․우두종牛頭宗 4종파宗派의 수증론修證論 혹은 실천론實踐論을 각각 정혜로써 분류하고 있는 것이다. 지눌은 정혜가 함께 존재하는 경우는 하택종으로 보고, 상대적으로 정定이 강조되는 경우는 북종, 혜慧가 보다 강조되는 경우는 홍주종으로 간주하는 듯하다. 정혜를 이와 같이 네 가지 형태로 분류한 것은 ?권수정혜결사문?에서도 채택했던 분류 방식이다. ?권수정혜결사문?에서는 일숙각一宿覺 영가스님의 어록을 인용하여 정혜라는 용어 대신에 ‘적적성성寂寂惺惺’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혼침에 빠져 있는 적적불성성寂寂不惺惺,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성성부적적惺惺不寂寂, 망상과 혼침으로 부적적불성성不寂寂不惺惺, 고요한 가운데 참으로 깨어 있는 역적적역성성亦寂寂亦惺惺’의 네 가지로 분류한다.22) ?수심결?에서는 ?육조단경六祖壇經?의 자성정혜自性定慧23)을 그대로 인용하여 돈오점수를 자성정혜自性定慧와 수상정혜隨相定慧로 설명하고, ?절요사기?에서는 돈종頓宗의 자성정혜와 점종漸宗의 이구정혜離垢定慧24)와 구별한다.

 

이상과 같이 결국 ‘삼문은 각각 마음에 대한 지눌의 해석학’인데, 그것은 마음의 실존적 존재를 묻는 경절문, 마음의 성기적 양태에 관한 원돈신해문, 마음의 주체적인 측면은 성적등지문으로 분류하여 이해할 수 있다. 현대 철학적 해석틀로 표현하면, 각각 ‘존재론, 현상론, 실천론’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25) 물론 이 해석틀은 매우 유용한 시사점을 던지기는 하지만, ‘한 마음의 세 현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잘못하면 각각 다른 세 가지 별개의 내용으로 실체화시키는 위험을 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각 요소가 지눌의 텍스트에서 서로 어떤 관계로 묶여서 하나의 구조를 이루고 있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삼문은 구체적으로 상호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필자는 일단 간화경절문이 실존적인 자기 의심이라는 마음의 존재성에 관계된다면, 원돈신해문은 그 깨닫는 마음의 외현인 성상性相에 관한 논의를 다루는 해석틀이며, 성적등지문은 깨닫는 마음의 주체적인 측면인 정혜定慧에 관계된 논의라고 이해한다.

 

이를테면 ‘마음을 깨닫는다’거나 ‘성품을 본다’고 할 때, 여기서 ‘깨닫는다’(覺)거나 ‘본다’(見)고 하는 행위는 행위의 주체적인 작용을 의미한다. 그리고 깨닫고 보는 대상은 바로 분별된 ‘마음’(相) 혹은 그 자체의 ‘성품’(性)이 된다. 이렇게 보면 ‘마음을 깨닫는다’고 할 때는, 깨달음의 대상으로서 소오所悟와 주체로서 능오能悟가 있을 수 있다. 지눌은 이들 두 용어 이외에도 마음의 두 가지 측면을 ?절요사기?에서는 ‘이해(解)/실천(行)’, ‘세계(法)/인간(人) 혹은 자아(我)’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분류한다. 성적등지문이 역사적으로 정혜결사운동을 주도하는 행위로서의 행行, 주체로서의 인人, 깨달음의 작용으로서의 능오能悟의 측면이라면, 그 깨닫는 결과를 외현으로 드러내는 원돈신해문은 ‘이해(解)에 관계되고, 자아(我)와 세계(法)에 해당되며, 깨달음의 대상(所悟)이 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성적등지문과 원돈신해문은 인식이나 깨달음의 정신 현상에서 주 / 객의 관계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적등지문은 주체적인 작용이라면, 상대적으로 원돈신해문은 깨달음의 외현으로서 현상론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이 때 자기 존재의 본질을 묻는 간화경절문은 성적등지문과 원돈신해문 사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고 본다. 하나는 실존적 자기 의심에 의한 주객의 발생을 설명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그 결과로서 주․객을 모두 소멸시키는 방식이다. 실존적인 질문에 의한 마음의 발생과 소멸의 역동적인 관계가 바로 보조선의 구조를 이룬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점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가능하려면, 지눌의 텍스트에서 삼문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가 하는 모델을 찾아보아야 한다. 이것은 결국 보조선의 체계와 구조를 구성하는 일로, 그의 마음에 관한 해석학의 일단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먼저 보조의 삼문이 함축하는 교학적인 기초가 어디에 근거하는지를 검토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2) 삼문의 ?대승기신론?적 이해

 

동북아시아 불교의 공통된 특징은 ‘마음’을 이해(解)하고 실천(行)하는 문제를 중심 과제로 삼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바로 화엄경華嚴經이나 기신론起信論적 패러다임에서 비롯된 것으로 지눌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임영숙 씨의 조사에 의하면,26) 지눌은 자신의 전 저술을 통하여 약 42권에 달하는 문헌들을 인용하고 있다. 그 가운데 ?화엄경? 계통이 가장 많다. 다음으로는 ?기신론?인데 전체적으로 약 22회 가량 인용되고 있으며, 저술별로는 ?절요사기?에서 4회, ?권수정혜결사문?에서 6회, ?진심직설?에서 6회, ?간화결의론?에서 1회, ?원돈성불론?에서 5회이다. 그만큼 지눌이 마음을 분석하는 도구로서 『화엄경』과 ?기신론?에 깊은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 준다. 지금까지 지눌의 화엄 사상은 이통현 장자의 ?화엄론?, 선교일치나 돈오점수는 종밀의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나 ?법집별행록法集別行錄?, 돈오와 정혜등지定慧等持는 혜능의 ?육조단경?, 간화선은 대혜종고大慧宗杲의 ?어록語錄? 등과의 영향 관계를 연구했지 ?기신론?과 지눌 선 사상과의 관계를 다루는 연구는 전혀 없는 실정이다. 이것은 김군수가 찬한 「보조국사비명普照國師碑銘」에서 ?기신론?과의 관계를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필자는 지눌의 삼문 체계, 특히 개별적 성격이 아니라 그 내적 관계는 ?기신론?의 일심이문삼대一心二門三大에 기초하여 해석해야 더 잘 설명된다고 본다.

 

마음을 분석하는 ?기신론?의 가장 큰 해석틀은 일심一心을 생멸문生滅門과 진여문眞如門으로 분류하고 다시 그것을 체상용體相用 삼대三大로 구별하는, 이른바 ‘일심이문삼대’의 분류법이다. ?기신론?은 이런 마음의 분석틀을 통해서 ‘여래의 광대하고 심오한 법의 의미를 총체적으로’27) 통합하여 체계화시키고자 한다. 지눌은 ?절요사기?의 서문에서 “마명馬鳴조사도 말하기를 ‘이른바 법法이란 곧 중생衆生의 마음이다’고 하였으니, 어찌 사람을 속였겠는가”28)라고 하고, 사종선四宗禪의 비판적 수용, 정혜와 돈오점수의 의미에 관한 논의를 끝내고 후반부의 경절문을 소개하기에 앞서 ‘전수문全收門과 전간문全揀門’을 논하는 자리에서, “이른바 법法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의 마음이다. 이 마음이 곧 ‘진여문과 생멸문’의 이문二門과 (體相用의) 삼대三大의 근원이다”29)라고 하여, 다시 한 번 마음에 관한 ?기신론?의 이해의 이란을 드러낸다. 이러한 마음에 관한 ?기신론?의 분류법은 ?절요사기?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중요한 저술에 깊게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면 우선 ?기신론?에서 말하는 ‘일심이문삼대’의 의미에 관하여 검토해 보자.

대승이란 총괄하여 두 가지가 있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하나는 법法이요, 둘째는 의義이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의 마음을 말한다. 이 마음은 일체의 세간법과 출세간법을 포괄하며, 이 마음에 의해서 대승의 뜻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마음의 진여상이 곧 대승의 체를 나타내고, 생멸生滅의 인연상이 대승 자체自體와 상相과 용用(摩訶衍自體相用)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의義라고 하는 것은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일심一心 자체의 체대體大로 일체법一切法이 평등하여 증가하지 않고 감소하지 않기 때문이며, 둘째는 일심의 모습인 상대相大로 여래장如來藏에 한량없는 성공덕性功德을 구족한 까닭이요, 세 번째는 일심의 작용인 용대用大로 일체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착한 인과因果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일체의 모든 부처가 본래 가르친 바이며, 일체의 모든 보살이 여기에 의지해서 여래지如來地에 이르기 때문이다.30)

먼저 이문과 삼대의 관계를 먼저 살펴보면, 여기에는 해석상의 논란이 있다. 삼대(體大․相大․用大)가 모두 생멸문에 속하는가, 아니면 체대는 진여문에 속하고 상․용대만이 생멸문에 속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번역의 문제로 연결되는데, ‘생멸生滅의 인연상因緣相이 대승 자체自體와 상相과 용用을 제시하기 때문’(是心生滅因緣相, 能示摩訶衍自體相用故)이라는 부분을, 위에서처럼 ‘대승 자체와 상과 용’으로 해석하여 삼대를 모두 생멸문에 소속시킬 것인가, 아니면 상대와 용대만을 생멸문에 배치하여 ‘대승 자체의 상과 용’으로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충분한 검토가 있어야겠지만, 양자는 의미상의 차이보다도 해석자의 권한이 강조된 경우로, 그 관점에 따라서 달리 번역된다. 원효는 ?대승기신론․별기?에서 체상용 삼대를 모두 생멸문에 배대하여 해석한다.31)

 

지눌은 이 문제를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육조법보기단경발六祖法寶記壇經跋」의 성상융회性相融會32)나 그의 체용 논리에 기초한다면, 화엄적 입장에서 체대는 진여문으로 상․용대는 생멸문으로 배대하리라 여겨진다.

깨달음의 대상(所悟)으로서 생각을 떠난 마음의 본체(體)는 모든 법의 성품으로 온갖 묘함(衆妙)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언사를 초월한 까닭에 마음을 잊어 단박 증득한 문(頓證門)에 계합한다. 여기에는 온갖 묘함을 포함하기 때문에 속성(相)과 작용(用)이 왕성하게 일어나는 뜻(義)이 있다.33)

지눌 『절요사기』에서 보이는 이 인용문은 ?기신론?의 삼대에 관한 정의와 매우 유사하다. 전체적인 맥락상의 의미는 마음의 본체(體)가 속성(相)과 작용(用)을 포함한다는 내용이므로, 이런 해석은 지눌이 진여문에 체대를, 생멸문에 상대와 용대를 소속시킬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것은 ‘마음의 진여문은 법의 체體이고, 마음의 생멸문은 상相과 용用’34)으로 보는 종밀의 해석과 상통하는데, 다분히 진여문을 성이나 체로, 생멸문을 상이나 용으로 배대시키는 화엄적 성상性相 혹은 체용體用 구조로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다음으로 삼대는 일심一心이 가지는 세 가지의 특징인데, ‘대大’라고 하는 것은 대승의 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체대는 증가하거나 감소하지 않는 평등한 마음 자체를 가리킨다. 바로 생각을 떠난 마음 바탕을 나타낸다. 상대는 여래장의 한량없는 공덕功德으로, 용대는 일체 세간과 출세간의 착한 인과因果로 정의된다. ?기신론?의 형성에 관한 문헌적 자료론적 연구에 의하면,35) 삼대는 문헌적으로 보았을 때 ?성유식론成唯識論?, ?섭대승론攝大乘論?, ?보성론寶性論? 등과 같은 맥락에서 인도불교사상사로부터 형성된 개념으로 보여진다. ?기신론?의 체상용 삼대와 유사한 개념이 ?성유식론?에서는 ‘실유實有․유덕有德․유능有能’으로 표현되고,36) ?섭대승론?의 용어는 현장玄奘의 번역에 의하면 ‘실유성實有性․공덕성功德性․감능성堪能性’으로 이해되며,37) 진제眞諦의 번역으로는 ‘실유實有․가득可得․공덕功德’이 된다.38)

 

실유는 ‘제법에는 참다운 이치가 있고, 자성이 불성임’(實有自性住佛性)을 믿는 것이고, 공덕은 ‘일체가 다 불성으로부터 나온 것’(引出佛性)임을 믿는 것이며, 감능은 ‘수행의 결과로서 불성에 이른다’(至果佛性)는 것을 의미한다. ?보성론寶性論?에서 보면39) 체대는 진여의 실유적實有的인 측면으로 깨달음(bodhi)을 나타내고, 상대는 여래장의 공덕성功德性을 의미하는 속성(guna)으로, 용대는 여래지如來地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因地)으로서의 행위(karman)로 해석된다.

 

이상의 논서들의 정의에 기초하여 볼 때, 체대는 불성의 존재, 상대는 불성에서 흘러나온 공덕, 용대는 불성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행위를 가리킨다. 즉 체대는 존재론에, 상대는 현상론에, 용대는 실천론에 배대된다.

 

지눌의 경우는 일심삼대一心三大에 대해서 인용을 하지만 구체적으로 삼대만을 정의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위의 『절요사기』에서 보듯이, ?기신론?을 인용하는 그 맥락을 살펴보면 마음의 존재․공덕․행위라는 ?기신론?의 개념과 유사한 내용이 발견된다.

 

첫째 체대體大는 지눌의 이해에 의하면, 마음의 본래적인 측면으로 ‘온갖 묘함을 머금었고’ ‘언사言辭를 초월해 있다’. 그래서 ‘단박 증득하는 문門에 합치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진여의 실유성을 깨달음으로 드러내는 간화경절문의 관점과 통한다. ?간화결의론?에서 제시하는 경절문의 특징은 ‘화두를 참구하여 곧장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교학적인 이해를 ‘사람들에게 알음알이를 내기 때문에 하나씩 일일이 가려낸다’40)는 점이다. 지눌은 ?간화결의론?에서 ?기신론?을 단 한 번 인용한다. 그것은 아래와 같다.

심진여心眞如는 곧 일법계대총상법문一法界大總相法門의 체體이니, 이른바 마음의 성품性品에는 생멸生滅이 없다. 일체의 모든 법法은 오직 망념妄念에 의해서 차별이 일어날 뿐이다. 만약 마음의 생각을 떠나기만 하면, 곧 모든 경계의 상相이 사라진다. 모든 법은 본래부터 언설言說을 떠났으며 문자文字를 떠났고 마음의 걱정을 떠나 필경에는 평등하여 변화가 없고 가히 파괴하지 못한다. 오직 일심一心이므로 진여眞如라 이름한다. 물음: 만약 이와 같다면 모든 중생들은 어떻게 수순隨順하여 능히 득입할 수 있습니까? 대답: 만약 모든 법을 알면 비록 설한다고 할지라도 설하는 주체(能說)나 설하는 대상(可說)도 없으며, 비록 생각한다고 하여도 생각하는 주체(能念)나 생각하는 대상(可念)이 없다. 이를 수순隨順이라고 한다.41)

위 부분은 ?기신론?에서는 「해석분」에서 진여심을 설명하는 부분42)이고, ?간화결의론?에서는 교학敎學에서도 ‘말을 떠나고 걱정을 끊어 들어가는 뜻’(離言絶慮之義)이 있음을 인용하는 대목이다. 이와 같이 지눌은 진여의 이치와 성품이 말을 떠나고 생각이 끊어진 자리임을 인정한다. 설하는 주체(能說)와 설해지는 대상(可說)도 없으며, 생각하는 주체(能念)와 생각의 대상(可念)도 없는 것을 수순隨順이라고 정의할 때, 이것은 화두선話頭禪의 정신과 상통한다. 다만 ‘이름과 모양에 집착하여 심오하게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선과 악, 더러움과 깨끗함, 세간과 출세간을 구별을 모두 타파한다’43)고 말하고, 나아가서 지눌은 ‘설하는 주체와 대상, 생각하는 주체와 대상이 없음을 이해한 연후에 이러한 이해와 생각마저도 떠나 진여문에 들어감을 이치에 증득한 성불(證理成佛)’44)이라고 부른다. 이런 점에서 ‘생각을 떠남’(離念)으로 정의되는 ?기신론?의 체대는 경절문의 교학적 이해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보여진다.

 

그런데 여기에 주의할 점이 있는데, 일심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생각 떠남(離念)은 전혀 다르게 해석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원효는 일심이문삼대에 의해서 중관中觀의 반야적般若的 입장과 유식唯識의 삼성설三性說을 종합․회통하고자 한다. 즉 체대는 중관적인 입장으로 일체의 언설과 생각이 끊어진 반야로서 이해되고, 다시 ‘변계소집성徧計所執性․의타기성依他起性․원성실성圓成實性’의 ?섭대승론?의 유식삼성설唯識三性說에 기초하여 체상용 삼대 모두 생멸문에 배대한다.45) ?기신론?의 ‘생각을 떠남’(離念)을, 만약 ?간화결의론?에서 보여 주는 파병破病의 의미로 이해한다면, 지눌의 경절문은 중관론적 입장을 반영한 것이다. 이런 경우 ‘생각을 떠남’(離念)을 점수의 체계로 이해하는 북종 신수神秀와는 전혀 다른 이해가 된다.46) 그러나 지눌의 해석에 의하면 『기신론』의 이념離念은 ‘점차 닦아가는 문’(漸修門)이 아니라, ‘단박 증득하는 문’(頓證門)에 합치한다.

 

둘째의 상대相大는 ‘진여가 포함하고 있는 온갖 묘함(衆妙)’이라는 부분으로서 곧 여래장如來藏의 한량없는 공덕, 속성을 의미한다. 이것을 법계의 일체가 여래의 출현(性起)이거나 여래로부터 흘러나온 양태라고 이해한다면, 이것은 원돈신해문에 적합하다. 물론 여기에는 ?기신론?의 여래장 사상을 원돈신해문의 화엄적 법계연기法界緣起와 관계시킬 수 있는가라는 심각한 질문이 제기된다. 곧 이것은 화엄적 해석인 원돈신해문을 유식적唯識的 냄새가 나는 ?기신론?의 상대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하는 반론이다. 그러나 이 점은 지눌 자신이 ?원돈성불론?에서 스스로 논증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하다고 본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기신론?의 ‘일심이문삼대’를 둘러싼 해석상의 많은 논쟁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하나의 예가 원효와 법장의 해석이다. 원효는 ?기신론?의 여래장 사상을 유식적인 입장에서 해석하려 하고, 반대로 법장은 가급적이면 원효의 해석을 배격하고 여래장을 화엄 사상과 연결시키려고 노력한다.47)

 

지눌이 이 논쟁에 끼어 든다면 어떤 입장을 취할까? 결론부터 말한다면 지눌은 법장의 화엄적 해석뿐만 아니라 원효의 유식적 입장까지도 모두 일심이문삼대로 수용․회통시킨다. 지눌은 ‘?기신론?에서 말하는 일심一心의 일법계대총상법문체一法界大總相法門體를 화엄의 해인삼매海印三昧로 해석하는’ 법장의 견해,48) ‘시각始覺과 본각本覺을 언급하는’ ?기신론?의 내용,49) ‘중생과 부처가 서로 융합하고 원인(始覺)과 결과(本覺)가 동시임을 주장하는’ 이통현 장자의 ?화엄론?,49) 그리고 ‘부처께서 출현한 이유를 설하는’ ?화엄경?의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 내용50) 들을 차례로 인용하면서, ‘일심, 부처, 그리고 중생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논증해 보려고 한다. 그런 다음에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위의 이치를 다 살펴보면, ?화엄론?과 ?기신론?에서 논한 일심삼대의 의미이다. 자세하고 간략하고 열고 닫음(廣略開合)이 중생의 근기에 따라 다르지마는 다 이것은 현재 범부의 마음(現今凡夫心)에 포섭된 의미이다. 다만 언교言敎에 따라서 날마다 논쟁만 하면서 교만과 승부심으로 세월을 허송하고, 마음을 비추어 보아 깨끗한 행行을 부지런히 닦을 줄 모르니, 어찌 부끄럽지 않는가?51)

여기서 지눌은 법장과 이통현을 인용하면서 ?기신론?과 ?화엄론?의 중심 의미를 일심에서 찾고, 그것을 체상용 삼대로 정리한다. 그래서 ?기신론?과 ?화엄론?의 차별성을 ‘현재의 중생심’(現今凡夫心) 곧 일심으로 회통시켜 논쟁을 멈추고 마음을 관觀하는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지눌은 계속하여 중생심과 부처는 서로 다르지 않기 때문에, “이미 과지果地를 이룬 노사나불盧舍那佛이 중생의 생멸生滅하는 팔식八識 안에 있고 중생도 역시 부처의 지혜 안에 있다”52)고 말함으로써, ?기신론?에 대한 유식적 해석을 화엄과 융회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절요사기?에서도 “의상義湘법사의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로 대변되는 화엄의 진성연기眞性緣起를 언급한”53) 다음에, “유심唯心이나 유식唯識도 다 화엄성기華嚴性起에 기초한 전수문全收門에 속한다”54)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지눌이 유식, 여래장, 화엄의 갈등을 일심의 입장에서 제종파의 대립을 회통시키고 있음을 보여 준다. 각 학파의 이러한 교설적 차이점은 깨달음의 대상으로서의 마음을 이해하는 방식과 시각에서 비롯된 바이다. 그러므로 결국 팔식, 여래장, 법계연기라고 하는 공덕과 속성은 바로 일심에서 흘러나온 상과 용으로, 말하자면 진리 현상론에 관계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눌이 일심으로 ?기신론?과 화엄 사상을 통합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기초는 화엄의 보광명지普光明智와 ?기신론?의 「해석분」에서 말하는 체대의 성격인 대지혜광명大智慧光明이다.55) 대지혜광명은 분명히 여래장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공덕이기보다는 청정심淸淨心으로서 여래장 자체의 성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상대보다는 체대에 소속된다. 그렇다면 성기性起 사상이 중핵을 이루는 원돈신해문은 대지혜광명의 체대에 배대시켜야 하지 않는가 하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필자는 이것도 해석의 한 방법으로 공감한다. 이것은 원돈신해문을 심성론(頓悟)에, 성적등지문을 실천론(漸修)에 배대시키는 기존의 이분법적 분류 방식에 의한 해석이다. 그러나 이것은 삼문 가운데 간화경절문의 입장을 배제한 설명이다. 지눌 사상의 전체적인 체계와 구조라는 입장에서 볼 때 원돈신해문이 분명히 ?기신론?적 체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앞서 지적했듯이 ‘이치의 길과 들어서 아는 지견知見의 병’이 있기에 경절문의 입장에서 보면 ‘원돈문圓頓門은 참의參義’로서 참다운 의미에서 체대가 되지 못한다. 다시 말하면 오직 ‘경절문의 활구’에 의해서만 ?화엄경?의 보광명지와 ?기신론?의 대지혜광명이 온전히 실현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불성의 존재에 대한 믿음은 잘못하면 경험의 영역을 벗어나서, 관념적으로 이해에 떨어져서 실체화시키는 위험이 있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원돈신해문을 ?기신론?에서 말하는 공덕으로서 상대에 배치하고, 불성의 언설적인 이해를 거절하는 경절문을 체대에 소속시킨다. 지눌은 ?원돈성불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화엄의 교학敎學이 이치를 다 설명하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배우는 이들이 언교言敎와 의리義理에 걸리어 뜻을 잊고 마음을 깨달아 보리菩提를 빨리 증득하지 못하는 까닭에 문자를 세우지 않고 마음을 마음으로 전한다. 선문禪門에서는 집착을 부수고 종지宗旨를 나타낸 것만을 귀중히 여기고, 번거로운 말로 뜻을 나열해 놓은 것을 중히 여기지 않는다.56)

위 인용문은 선종禪宗에 서서 화엄을 이해하는 지눌의 입장을 잘 보여 주고 있는데, 단순하게 나열된 이론 체계는 결코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이론이 아니라 ‘말을 잊고 뜻을 얻으며, 다시 뜻을 잊고 마음을 요달하는’,57) 이른바 ‘법계法界를 단박 증득한 자리’(頓證法界處)58)를 중요시한다. 여기서 법계가 원돈문이라면, 그것을 단박 증득한 자리란 다름 아닌 경절문이다. 이점을 필자는 바로 보조선에 있어서 화엄과 간화선의 위치에 관한 매우 중요한 해석의 갈림길이라고 본다.

 

마지막 세 번째 용대用大는 “마음에 온갖 묘함이 있기에, 상용相用이 왕성하게 일어난다”고 하는 대목에서 엿볼 수 있는데, ?기신론?에서 말하는 ‘교화敎化의 착한 인과’이고, ?섭대승론?에서 말하는 ‘여래지에 도달할 수 있는 업業, 행위行爲’를 가리킨다. 이것은 수행의 주체적인 측면을 말하는 성적등지문에 해당된다. 수행론에 관한 ?권수정혜결사문?의 논의에서 ?기신론?을 직접 인용한 경우는 4회이다. 그것은 아래와 같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법을 듣고도 두려운 생각을 내지 않는다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바로 부처의 종자를 이어 반드시 제불의 수기를 받으리라.59)

말하지 않았던가. 모든 대승의 경전을 간단하게 요약한다면 ?기신론?에서 “이른바 법法이란 중생심이다. 이 마음이 세간과 출세간 법을 다 포섭한다. 이 마음에 의거하여 대승의 뜻을 드러낸다”고 했다. 이것은 오직 중생이 자기 마음의 영묘자재靈妙自在함을 알지 못하고 밖으로 찾을까를 염려한 까닭이다.60)

소위 깨달음의 의미란 마음의 바탕이 생각을 떠났고, 생각을 떠난 것은 허공과 같아 두루 미치지 않는 바가 없다. 이 법계의 일상一相은 곧 여래의 평등한 법신法身이다. 만약 중생이 능히 생각 없음을 관한다면, 곧 부처의 지혜를 향하리라.61)

?기신론?에서 보지 못했는가. 행行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지혜로 관찰함이지 이 분별하는 마음으로 하지 말라. 사된 견해에 떨어져도 항상 정념을 닦고 취하거나 집착하지 말라. 가르침이 이와 같거늘 어찌 마음을 등지고 부처의 깨달을 구하고자 하는가?62)

첫 번째의 인용에서 ‘대승의 가르침에 대한 두려움을 내지 말라’고 하는 것은 믿음과 수행의 공덕을 말하는 대목이며, 두 번째 인용문의 ‘중생심이 대승의 뜻이니’ 하는 것은 수행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나타내고 있으며, 세 번째는 ?기신론?에서 ‘법계가 곧 여래의 평등한 법신임을 알아 지혜로써 지관수행止觀修行하라’는 수행의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는 「입의분」에서 인용한 바로, 그것은 정혜와 동류인 지관止觀이고, 마지막으로 ‘사된 견해에 대치對治하는 법’은 수행의 길에서 만날 수 있는 오류를 지적한 것이다. 이것들은 한결같이 선법善法을 발하고 여래지에 이르는 행위로서 용대의 뜻을 거듭 강조한 것이다. ?기신론?을 인용하는 방식도 「입의분」의 중생심을 중심으로 대부분 수행을 권하는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이나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에서 인용하여 성적등지문의 성격과 충분히 통한다.

 

이상으로 지눌의 삼문을 ?대승기신론?의 일심이문삼대와의 관계 속에서 고찰하여 보았는데,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실유實有―체대體大―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존재론

일심一心 ???공덕功德―상대相大―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현상론

??감능堪能―용대用大―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실천론

이것은 일심을 세 가지의 특질로 분류하되 체대와 경절문은 불성의 존재성에 기초하고, 상대와 원돈신해문은 여래장의 공덕과 법계의 연기를 나타내며, 용대와 성적등지문은 불지佛地에 이를 수 있는 지관이나 정혜를 가리킨다. 여기서 경절문은 기존의 이해 방식으로는 실천론에 해당된다. 그래서 경절문이 불성의 존재를 전제한 질문이기는 해도 불성을 깨닫는 방법인 까닭에, 실천론에 배대시키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결절문뿐만 아니라, 다른 두 문인 원돈문이나 성적문도 결국은 동일한 실천론으로 이해된다. 그렇게 되면 마음의 존재론과 현상론은 제외되고, 그 결과로 실천론 역시 온당한 설명이 불가능하게 된다. 물론 화두는 방법론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활구活句로서의 화두는 단순하게 수단이나 방법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그 자체로 존재이며 목적으로 이해된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사량분별의 사구死句이지 결코 살아있는 지금 여기의 활구活句가 아니다.

4. 삼문의 유기적 관계

위에서는 보조선의 삼문이란 ‘마음의 해석학’이라는 전제 아래 그것의 교학적 기초를 ?기신론?의 일심이문삼대의 구조에서 찾아보았다. 만약 이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면, ?기신론?의 「해석분」에서 보여 주듯이 ‘진여문의 체대’로부터 ‘생멸문의 상대와 용대’가 흘러나오고 반대로 ‘생멸문의 상대와 용대’는 ‘진여문의 체대’에 의해서 통합되는, 두 가지의 회통 방식이 존재한다. 원효는 일심에서 제종의 종지宗旨에로 나가는 전자의 방식을 ‘연다’(開)고 하고, 다양한 종지에서 하나의 핵심(要), 한 맛으로 돌아오는 후자의 방식을 ‘닫는다’(合)라고 표현한다.63)

 

이와 유사한 방식이 지눌에게서도 발견된다. 삼문이 상호 관계하여 만들어 내는 내적 구조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는데, 하나는 경절문으로부터 인식의 주체와 대상이 되는 성적등지문과 원돈신해문으로 나아가는(廣)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인식의 주체와 대상으로서의 성적등지문과 원돈신해문이 경절문에 의해서 동시에 부정되어 통합(略) 내지 회통되는 방식이다. ?절요사기?의 용어로 표현한다면, 전자의 방식은 전수문이고 후자의 방식은 전간문이다. 저술로는 전자는 ?수심결?에서 찾을 수 있고, 후자는 전간문으로 ?절요사기?나 ?간화결의문?의 방식이다.

 

물론 이 두 구조는 지눌 스스로가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텍스트 심층에 흐르는 무의식으로 실재한다고 필자는 이해한다. 바로 이점이 본고의 핵심된 해석자(독자)로서 권한 행사이다.

1) ?수심결?의 전수문全收門

지눌과 ?기신론?의 근본적인 질문은 ‘모든 사물의 근원, 혹은 부처와 조사의 본질로서 마음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이 질문은 동북아시아 불교의 중심 과제로 마음을 생멸문과 진여문으로 분류하는 ?기신론?적 패러다임에 기초하지만, 지눌에게 있어서 이것은 단순한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매우 절박한 실존의 문제였다. 지눌 텍스트의 서문에서 자주 나오는 바로 이 점을 간과한다면 지눌의 참된 모습을 놓칠 위험이 있다. 그리고 지눌에게 있어 평생을 고심하고 심열을 기울였던 ‘마음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의식은 결국 ‘이 뭣고’와 같은 화두라는 형식으로 귀결된다.

 

지눌에게 있어 마음의 그 자체로서 ‘마음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의식이 화두라는 형식으로 처음 나타난 저술은 ?수심결?이다. ?수심결?의 중심 과제는 바로 근원적인 마음바탕의 자리(一心體大)를 깨닫는 것이었다.

【질문】불성이 몸에 있다면, 어찌하여 저는 지금 불성을 보지 못합니까?

【대답】그대의 몸 안에 있는데도 그대 스스로 보지 못할 뿐이다. 온종일 그대가 배고프고 목마를 줄 알며 춥고 더운 줄 알며 성내고 기뻐하는데, 끝내 이것은 무슨 물건인가?(竟是何物) 육신은 지․수․화․풍 네 가지 인연이 모여서 된 것으로 그 바탕이 완고하여 감정이 없거늘, 어떻게 보고 듣고 느끼고 분별하겠는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그것이 바로 그대의 불성이다.…… 옛 성인이 도에 들어가는 인연은 이와 같이 명백하고 간단하여 수고를 덜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공안으로 말미암아(因此公案) 믿음과 앎이 생긴다면(若有信解處), 그는 곧 옛 성인과 손을 잡고 함께 갈 것이다.64)

이 인용문은 ?수심결?에서 첫 번째 질문에 대해 답변한 대목이다. 여기서 화두의 형식은 ‘끝내 이것은 무슨 물건인가?’(竟是何物)라는 부분이다. 같은 단락 끝에 가서는, 성인들이 도에 들어가는 두 가지의 인연(이견왕과 바라제 존자의 대화, 어떤 스님과 귀종화상의 대화)을 들고, ‘도에 들어가는 인연’을 공안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말하는 공안이란 바로 화두를 의미한다. ‘끝내 이것은 무슨 물건인가?’(竟是何物)라는 화두는 화두의 정형적인 형태 가운데 하나인 ‘이것은 무엇인가’(是甚麽)와 같은 종류이다. 지눌의 정의에 의하면, 화두는 ‘도에 들어가는 인연’이다. 우리는 화두라는 인연을 통하여 ‘도道’에 들어간다. 화두 곧 ‘이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나 의심이 없다면 마음에 관한 인식(解)뿐만 아니라 깨달음(悟)과 닦음(修)도 없다. 그래서 공안으로 말미암아 믿음과 앎의 자리(信解處)가 생긴다고 한 것이다. 여기에 근거한다면 간화경절문의 공안, 즉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이것은 필경 무슨 물건인가 라는 질문에 의해서, 믿음과 앎의 자리(信解)로서의 원돈신해문과 정혜와 돈오점수에 의한 성적등지의 실천문實踐門이 성립됨을 알 수 있다.

 

이 점은 ?수심결?의 전체 내용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를 조사해 보아도 알 수가 있는데, ?수심결」은 총 9개의 질문에 의해서 구성되었고, 그것의 중심 내용을 삼문과 대조하여 나누어 보면 아래 표와 같다.

 

碑銘의 三門
?修心訣?의 科目
간화경절문
序文. 心何遠覓
問 1. 入道因緣公案
성적등지문(頓悟漸修)
問 2. 頓悟漸修大意
問 3. 頓悟漸修無妨害詳說
원돈신해문(頓悟)
問 4. 自心一念廻光
問 5. 空寂靈知
問 6. 入道一門 ―― 返聞汝聞性
성적등지문(漸修)
問 7. 漸修要義, 無修而修
問 8. 定慧等持
問 9. 自性定慧與 隨相定慧 結論

위의 표는 ?수심결」의 논의가 간화경절문에 의해서 원돈신해문과 성적등지문이 발생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을 혹자는 ?수심결?의 중심 사상은 돈오점수의 체계이며, 돈오는 원돈신해문에 해당되고 점수는 성적등지문에 해당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물론 이것도 ?수심결」을 읽는 해석의 한 방법이다. 그러나 필자는 ?수심결」에서 보조가 大慧宗杲를 인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수심결」은 간화경절문에 대한 인식이 확립된 지리산 상무주암 이후에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수선사修禪社에 주석한 시기의 저술로 보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위 표에서 보여주는 ?수심결?의 과목이 함축하는 일차적인 의미는 ‘마음이란 무엇인가’라는 간화선看話禪적인 문제의식에서 원돈신해문과 성적등지문이 성립된다고 본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이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공안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 곧 그대로 불성임을 깨달음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중생심이 그대로 부처의 성품이라고 한 점은 바로 ?기신론?에서 강조한 내용이다. 인식의 주체와 인식의 대상이 따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양자는 다만 하나의 작용이다. 다시 말하면 성적등지문과 원돈신해문, 돈오와 점수는 동일한 마음이다. 그래서 깨달음의 내용으로서 ‘보고 듣고 하는 작용’이 그대로 ‘불성 곧 여래의 출현’이 되는 것이다. 즉 인식 주체로서의 ‘작용’(見․用大)이 그대로 인식 ‘대상’(性․眞如相)이 되고, 반대로 깨달음의 대상인 ‘공적영지의 마음’(性․相大)이 그대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작용’(見․用大)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경절문(公案․體)

↙ ↘

원돈신해문(空寂靈知․相) ↔ 성적등지문(定慧等持․用)

(頓悟) (漸修)

위에서 →표는 발생의 방향을 표시하고, ↔ 표는 상호 동일한 관계를 표시한다. 곧 경절문의 ‘존재’에서 원돈신해문의 ‘공덕’과 성적등지문의 ‘행위’가 흘러나옴을 의미하고, 공덕과 행위는 상호 일치의 관계에 있음을 말한다. 만약 미혹된 상태라면 아는 자와 알려지는 대상이 대립되어 있겠지만, 깨닫는 순간 주객主客은 일치한다. 원돈신해문과 성적등지문은 결국 마음의 서로 다른 두 측면일 뿐 별개의 실체는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보는 것(見分)이 곧 그대로 성품(性相分)인 것이다. 양자는 결국 같은 마음이다. 이것이 돈오이다. 이 때 원돈신해문과 성적등지문은 대립 관계가 아니라 상즉상입相卽相入의 관계가 된다. 인식은 곧 대상이 되고, 대상은 그대로 인식과 하나이다. 분별된 양자는 ‘이뭣고’ 하는 공안에 의해서 하나로 통합된다. 그래서 돈오와 점수는 바로 간화선에서 흘러나온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또 경절문의 방법으로 ‘도에 들어가는 좋은 인연’에 관한(?修心訣? 問6) 하나의 예가 있다.

“제 분수에 맞춘다면, 어떤 것이 공적영지의 마음입니까?” “그대가 지금 묻는 그것이 바로 그대의 공적영지하는 마음인데, 왜 돌이켜보지(廻光返照) 않고 밖으로만 찾는가? 내 이제 그대의 분수에 따라 바로 본심을 가리켜(直指本心) 깨닫게 할 테니, 그대는 마음을 비우고 내 말을 들으라. 아침부터 저녁에 이르도록 보고 들으며 웃고 말하고 성내고 기뻐하며 옳고 그른 온갖 행위를 한다. 말하라. 필경 누가 그렇게 온갖 행위를 하는가?”……“이치에 들어가는 문은 많으나 그대에게 한 문을 가리켜 근원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그대는 까마귀 울고 까치 지저귀는 소리를 듣는가?” “네, 듣습니다.” “그대는 그대의 듣는 성품을 돌이켜 들어 보라. 얼마나 많은 소리가 있는가?” “이 속에 이르러 어떤 소리도 어떤 분별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허공이 아닌가?” “본래 허무하지 않으므로 환히 밝아 어둡지 않습니다.” “어떤 것이 허무하지 않는 실체인가?” “모양이 없으므로 말로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65)

여기서도 지눌은 간화경절문에 대한 분명한 자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공안을 ‘도에 들어가는 인연’이라고 할 때, 그것은 바로 선문답 같은 대화로서의 인연이다. 대화 가운데 의심과 분발심을 촉구하는 결정구가 있다. 그것은 바로, ‘말하라. 필경 누가 그렇게 온갖 행위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이 절박한 질문에 의해서 먼저 온갖 분별을 떠난, 공적하고 신령스런 밝음에 계합하는 것이다. 바로 웃고 성내고 시비하는 온갖 행위의 작용(用)이 바로 공적영지의 마음(心性)이라는 자각에 이른다. 이런 자각은 바로 대화 속의 질문, ‘그대가 듣는 성품을 돌이켜 보라’는 회광반조廻光返照에 의해서 가능한 내용이다. 그래서 마침내 ‘묻는 그것이 바로 영지靈知’이고, ‘인식(解)과 실천(行)’, ‘자아(人)와 세계(法)’, ‘주체(能悟)와 객체(所悟)’가 서로 다르지 않은, ‘본래적 의미(體大)의 마음자리’에 계합한다. 이것은 원돈신해문에서 말하는 중생과 부처가 다르지 않는 보광명지의 경험이다. 이렇게 보면 ?수심결?에서 제시하는 깨달음의 발생 과정은 ‘경절문(看話)→돈오(空寂靈知)→점수(定慧)’의 순서임을 알 수 있다.

2) ?절요사기?의 전간문全揀門

?절요사기?는 보조의 만년의 저술로 가장 오랫동안 고심한 끝에, 바로 입적하기 전해(1209년)에 발표되었다. 이것은 종밀의 저술에 대해서 사기私記를 한 주석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어, 보조 자신의 독창적인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서로 융합할 수 없는 선사상을 하나의 체계 속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의 결과라고 보고 싶다. 서문에서 그 주요 내용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목우자牧牛子는 말한다. 하택신회는 지해종사知解宗師로 조계의 적자가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깨닫고 이해한 바가 높고 밝아서 수행을 결택하고 이치를 분별하는 일이 분명하였다.…… 그래서 지금 교敎에 의해 마음을 깨달으려는 사람을 위해 번거로운 말을 버리고 가르침의 요점만을 가려 뽑아서 관행觀行의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 내가 보기에 요즘의 수심하는 사람들은 문자가 돌아가는 취지에 의하지 않고 바로 비밀한 뜻을 전한 것만을 도道라 하면서, 혼침 속에 앉아 졸기도 하고 정신이 산란하여 어지럽기도 한다. 그러므로 오직 여실如實한 가르침에 의지하여 수행의 근본과 지말을 분명히 결택하여 자기의 마음을 비춰 보아 항상 관조觀照하는 공부에 그릇됨이 없게 하노이다.…… 지금 (제종의 深淺을 다루는) 묘抄에서 하택종荷澤宗을 먼저 둔 것은 관행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먼저 자신의 마음이 미혹하거나 깨닫거나 영지靈知가 어둡지 않아 본 성품이 변하는 일이 없음을 깨달은 뒤에 모든 종을 두루 살펴보면, 그 근본 뜻이 다 사람들을 위한 선교방편이 있음을 알게 하고자 함이다.…… 또 관행하는 사람이 비고 신령하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의리에 걸릴까 걱정하기 때문에 끝에 본분종사本分宗師의 경절문徑截門 언구言句를 간략히 끌어와 지견知見의 병을 씻어 버리고 몸을 빼어 살 길이 있음을 알게 하였다.66)

이 서문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제종諸宗을 융회融會하려는 시도이다. 여러 종파가 있지만 그 근본 뜻은 다 사람들을 위한 방편의 문임을 알게 한다는 융회가 그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지눌은 회통에 있어, 왜 하필 하택종을 기준점으로 선택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밝힌다. 일반적으로 하택신회荷澤神會는 혜능의 적자嫡子가 되지 못한 지해知解의 종도로 중국 후기의 선종사禪宗史에서 평가되고 있다.67) 그러나 지눌은 하택종을 깨달음과 이해가 높고 밝으며 수행의 결택이 분명하다고 재평가하면서 후학들이 마음의 근원을 알지 못한 채 각 종파의 언적言迹만을 따라 잘못된 이해를 낼까 경계하여 하택종을 맨 처음에다 내건다고 말한다. 이것은 지눌이 하택종의 입장을 ‘방편적’으로 수용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그럼으로써 지눌은 근원의 일심一心을 알지 못한 채 잘못된 견해로 취사取捨의 쟁론만을 일삼는 제종파의 견해를 융회시키는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선교일치의 사상을 표방한다는 점이다. 교를 의지해 깨달음에 들어가는 이들이 번거로운 말을 버리고 가르침의 핵심으로써 관행觀行의 귀감으로 삼고자 함이며, 금일 문자에 의지하지 않고 단지 비밀로 전하는 곳만을 도道로 삼으면서도 실제로는 혼침 속에 앉아서 졸고만 있는 이들이 여실한 가르침(如實言敎)을 의지함으로써 깨달음과 닦음의 공부가 잘못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는 선禪과 교敎를 양변兩邊으로 삼아서 상호 비방하고 마음의 근원을 잃어버리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이 같은 견해는 지눌의 일관된 입장으로 ?권수정혜결사문?에서도 ‘다만 침묵만 지키고 있는 치선자癡禪者나 오직 문자에만 매달리는 광혜자狂慧者’68)를 비판하면서 정혜쌍운定慧雙運을 언급하고 있다.

 

셋째는 간화경절문의 방식을 제시한다. 지눌은 본분종사本分宗師의 언구言句를 지견의 병을 씻는 출신활로出身活路라고 본다. 곧 관행하는 이들이 생각을 잊고 마음을 비워 밝게 하지 못하고, 개념적인 이해나 이치들(義理)에 머무를까 걱정하기 때문에 간화선을 제시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본분종사의 언구’란 언어의 길(語路)과 뜻의 길(義路)이 끊어진 무분별지無分別智의 활구活句이고, ‘개념적인 이해나 이치들’(義理)이란 ?간화결의론?에서 자주 말하는 ‘원돈신해문의 사구死句’를 가리킨다.

 

이와 같이 서문의 내용은 제종융회諸宗融會, 선교일치, 간화경절문으로 정리되는데, 그 특징은 종합과 회통성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세 가지의 편집 방향은 그대로 ?절요사기?의 내용에 반영되어 있다. ?절요사기?의 주요 내용은 (1) 사종선四宗禪의 비판과 수용, (2) 정혜定慧와 돈오점수의 의미, (3) 전수문전간문全收門全揀門, (4) 경절활구徑截活句의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상세하게 분류하면 아래와 같이 열 가지로 나눌 수가 있다.

구분
三門
?節要私記? 科目
節要와 私記
원돈신해문
(四宗禪受容과 批判)
1. 總序
2. 諸宗의 大義總判
3. 諸宗의 深淺得失
성적등지문
(頓悟漸修義)
4. 頓悟와 漸修
5. 頓敎와 漸敎
6. 悟後漸修
(全收全揀門)
7. 對治邪見
8. 全揀門全收門
附記
간화경절문
(看話徑截門)
9. 徑截活句
10. 總結

위 표에서 보듯이, ?절요사기?의 전체 과목科目은 역시 삼문으로 구성할 수 있다.69) 이는 간화경절문에 의해서 심성론과 수증론을 논의되는 ?수심결?의 논의방식과는 달리, ?절요사기?는 원돈신해문의 심성론과 성적등지문의 수증론을 먼저 언급한 이후에 간화경절문을 제시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왜 지눌은 종밀이 부기하지 않았던, 경절문을 부기附記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점에 대해서 지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위에서 든 법문은 모두 말에 의해 이해하고 깨달아 들어가는 이를 위해서 법法에는 수연隨緣과 불변不變의 두 가지 이치가 있고, 사람에게는 돈오頓悟와 점수漸修의 두 가지 문이 있음을 자세히 분별한 것이다.…… 그러나 말에 의해서만 이해하고 몸을 바꾸는 길을 알지 못하면, 아무리 온종일 관찰하여도 지해知解의 속박을 받아 쉴 때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말을 떠나 지해를 아주 버리는 사람을 위해 종밀스님이 숭상한 바는 아니지만 경절徑截의 언구言句를 간단히 인용하여 몸을 빼어 낼 한 가닥 활로活路를 알게 하려는 것이다.70)

여기에 의하면 깨달아 들어가는 데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말을 따라 들어가는 ‘뜻길’(義路)이요, 다른 하나는 아예 말을 떠나 몸으로 깨달아 들어가는 ‘몸길’(出身活路)이다. 경절문의 입장에서 보면 법계연기의 세계(法)를 가리키는 원돈신해문이나 실천의 주체가 되는 성적등지문은 한갓 뜻 길로만 들어가는 까닭에 여전히 지해知解의 속박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 즉 그것은 살아 있는 몸길이 아니라 ‘죽음의 길’(死句)이다. 그래서 위 표에서 보듯이, 지눌은 원돈신해문과 성적등지문의 논의를 끝낸 다음 잘못하여 말 길이나 뜻 길에 떨어지는 경우를 대치對治하고 간揀하고자 다시금 종밀스님이 숭상한 바는 아니지만, 경절문을 다시 언급한다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경절문은 원돈신해문과 성적등지문을 포기하는 것인가? 삼문의 관계 속에서 경절문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필자가 보기에는 지눌이 오히려 경절문을 도입한 것은 원돈신해문과 성적등지문에 더욱 철저하게 증입하여 회통시키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만일 성품(性)과 모양(相)에 걸림이 없으려면, 반드시 한마음을 단박 깨달아야 할 것이요, 만약 단박 깨달으려면 반드시 의해義解에서 걸리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본체를 밝혀 영지靈知를 가리키는 것은 완전히 가려내는 문(全揀門)에 있다. 그런 까닭에 본분 종사들이 단련하는 깨달음의 문에는 영지마저 없애는 것이 가장 묘하다.…… 만약 의해에서 철저히 벗어나 한 마음을 단박 깨달았으면 비로소 그 마음은 온갖 이치를 포함하면서 언사를 초월하여 완전히 수용하고(全收門) 완전히 배제함(全揀門)에 자재하여 걸림이 없을 것이다.71)

공적영지의 원돈신해문(法)에 걸림이 없으려면, 성적등지문의 주체적 측면(人)에 반드시 돈오가 요청된다. 또 돈오가 참다운 돈오가 되기 위해서는 깨달음의 대상에 대한 의해義解가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돈오는 깨달음의 세계(法)와 깨닫는 주인(人)을 하나로 ‘체험하는 현상’이다. 법계연기(法)는 단박 깨닫는 주체로서의 돈오를 요청하고, 깨닫는 주인(人)은 말길이나 뜻길을 완전하게 벗어나 세계와 일체됨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것은 ?수심결?에서 말하는 ‘인식의 주체와 객체가 하나됨’의 의미로서의 돈오이다.

 

?절요사기?의 돈오는 이와는 달리 ‘인식의 주관과 대상(能所)을 떠남’(離能所觀)72)을 의미한다. ?절요사기?에서는 ?수심결?에서 언급한 공적영지마저 없애야 하고, ‘자성정혜自性定慧까지도 뜻길의 흔적이 남기에’(自性定慧 尙有滯於義用之迹)73) 온전히 가려내어야 한다고 말한다. 만약 온전히 가려내지 못한다면, “이미 마음을 깨달았다고는 하나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온종일 마음을 비추어 보지만 항상 깨끗함에 구애를 받고, 한 물건이 공함을 관觀하면서도 언제나 경계에 속박을 받는다.”74) 그러므로 ?절요사기?의 방식은 경절문을 통하여 원돈신해문과 성적등지문을 온전히 가려냄(全揀門)으로써 양자를 철저하게 통합하여 회통하는 것이다. 이것은 ‘중관적中觀的 부정否定75)’의 방식으로서 ?금강경金剛經?의 즉비卽非 논리76)에 기초한다. 공적영지나 정혜는 공적영지나 정혜의 의해가 없을 때, 곧 공적영지와 정혜를 부정함으로써 바로 공적영지와 정혜가 드러남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절요사기? 말미에 부기附記한 ‘경절문의 회통 방식이고 존재 이유’이다.

 

그럼으로써 끝내는 ?절요사기? 서문에서 말한 ‘자기의 근원적인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자기 근원의 본래적인 ‘일심으로 회귀回歸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자기 마음의 근원을 깨달아야 하고, 그것은 반드시 의해에 걸리지 않은 채 근원된 마음자리로 잘 복귀해야 한다.

선문禪門의 경절문은 ‘처음부터 들어서 아는 것’, ‘말길’이나 ‘뜻길’에 해당되지 않으므로 곧바로 의미없는 화두로써 다만 들어가다가, 홀연히 화두가 확 하고 한 번 터져 나면 앞에서 논한 일심의 법계가 훤하고 뚜렷하게 밝아지리니.77)

여기서 말하는 ‘일심법계一心法界’란 다름아닌 ?기신론?과 ?화엄경?에서 말하는 마음의 근원으로서의 중생심이다. 그것을 펼치면 ‘체상용 삼대’의 의미가 된다. ‘생각을 떠난’ 체대는 ‘온갖 묘한 이치를 포함한’ 상대와 ‘언사를 초월한 깨달음의 작용’으로서 용대의 의미를 가진다. 이들은 서로 다른 마음이 아니다. 앞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온갖 묘한 이치를 포함한’ 상대는 원돈신해문의 법계연기나 공적영지에 해당되고, ‘언사를 초월한 깨달음의 작용’으로서 용대는 성적등지문의 돈오나 정혜에 상응한다. 이 양자는 서로 별개가 아닌, ‘상즉相卽 혹은 상입相入’의 연기緣起 관계로 결합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돈오와 정혜의 성적등지문은 공적영지와 법계연기를 그 대상으로 하고, 원돈신해문의 공적영지와 법계연기는 돈오와 정혜에 의해서 주체화된다. 그러나 이 양자간의 통합에 지해의 흔적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일심법계의 체대를 말할지라도 차별상差別相이 있는 상대에 머물 뿐, 말 길과 뜻 길로부터 초탈하여 본래적 의미의 체대로 돌아올 수 없다. 그러므로 이렇게 요청된 경절문의 화두는 원돈신해문과 성적등지문을 부정하고 온전히 간揀해 감으로써 ‘홀연히 확 하고 한 번 터져 나면서’, 그것들을 하나로 훤하게 회통시켜 ‘바로 드러내는’ 방식이 된다.

 

이 때의 경절문은 인식적 실천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오히려 존재 그 자체라고 해야 옳다고 본다. 인식이나 실천이라는 노력이 있으면 그것은 지해이지 화두가 아니다. 화두는 실천이나 인식으로써 불지佛地에 나아가는 가능성의 행위가 아니다. 화두는 곧 불지의 존재 자체이다. 그래서 화두는 참구자에게 ‘화두가 밥을 먹고 옷을 입고, 화두가 오고 화두가 가는’ 방식으로 경험된다. 이런 의미에서 특히 ?절요사기?나 ?간화결의론?의 경절문은 불지에 나아가는 용대의 실천문보다는 체대의 존재론에 배대된다고 본다.

 

이상의 논의를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경절문(公案․體)

(廣․開) ↙ ↘ (全收門)

원돈신해문(空寂靈知․相) ←→ 성적등지문(定慧等持․用)

(略․合) ↘ ↙ (全揀門)

경절문(公案․體)

위 표에서 ‘↔ ’표는 대립 관계나 상즉상입의 관계를 나타내고, ‘→ ’표는 넓히고 열거나 닫아 통합하는 방향을 가리킨다. ?수심결?의 방식은 경절문의 공안으로부터 원돈신해문과 성적등지문에로 나아가고(廣․開), 다시 온전히 거두어들이는(全收)의 길이다. 그러나 ?절요사기?의 방식은 다양한 차별을 하나로 모으고(略․合), 잘못된 이해를 온전히 가려내는(全揀) 길이다. 그래서 지눌의 삼문이 가지는 내적인 관계는 일심으로부터 출발하여 온전히 다시 일심으로 회귀하는 구조를 보여 주고 있다. 이 구조는 일심의 발생과 소멸의 역동적인 내적 관계를 보여주는 것으로, ‘일심의 체상용구조’ 혹은 삼문에서 간화선이 그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까닭에 ‘간화선 체계’라고 부를 수 있겠다. 이는 원돈신해문과 성적등지문과의 관계를 잘 설명하는 돈오점수 체계가 가지는 의해義解의 흔적을 철저하게 가려냄으로써, 오히려 돈오점수 체계를 포섭하고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수심결?의 공안과 ?절요사기?나 특히 ?간화결의론?의 화두의 의미에는 차이가 있다. 공안의 본질은 질문하는 사람과 질문의 대상이 일치한다는 점이다. ‘이것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할 때, 일반적인 질문은 ‘이것’이 가리키는 대상이 질문하는 ‘사람’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 그러나 화두로써 ‘이것이 무엇인가’라고 할 때는 전혀 다르다. ‘이것’이란 바로 자기 자신의 심성心性을 가리킨다. 질문하는 자도 바로 자신의 마음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화두의 인식은 결국 ‘자기 인식’이다. 자기에 관한 인식 자체가 그대로 실천 행위(頓悟)임을 보여 준다. 그것은 ‘마음이 마음을 묻고’, ‘스스로가 스스로를 보는 것’이다. 대상과 주체가 사라지고 오직 깨어 있는 순수 직관, 반야(prajna)만이 존재하게 된다. 이 ‘깨어 있는 순수 직관’이란 것이 바로 ?수심결?의 ‘회광반조’이다.

【질문】어떤 방편을 써야 한 생각을 돌려 문득 제 성품을 깨닫습니까?

【대답】다만 그대 자신의 마음인데, 다시 무슨 방편을 쓰겠는가? 이미 제 눈인데 왜 다시 알려고 하는가? 만약 알려고 하면 더욱 얻을 수 없다. 다만 알 수 없는 것임을 알면, 그것이 곧 성품을 보는 것이다.78)

공안은 밖으로부터 근원적인 자기에게로 회광반조이고 인식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자기 인식이기 때문에, 그것은 알려고 하면 더욱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그것은 ‘알지 못함의 앎’(無知而知)이고, ‘알았으나 알지 못함’(知而無知)으로 표현된다. 이렇게 ?수심결?에서 제시하는 화두의 의미는 성적등지문(能悟)과 원돈신해문(所悟)을 하나로 통합하는 전수문의 의미를 가진다. 이 때의 마음은 진여 그 자체이기 때문에 주객主客․생사生死․자아自我와 세계가 분별되기 이전, 마음의 근본 자리를 가리킨다. 그러나 ?절요사기?나 ?간화결의론?의 화두는 ‘인식’이 그대로 ‘실천’인 ?수심결?의 발생론적인 의미의 화두와는 다르다. 그것은 주객과 객관의 일치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그것은 생각의 주체도 없고 객체도 없다고 하는 것까지도 부족하다. ‘쓸어 버리는 것까지도 쓸어 내는’ 그것은 일체를 부정하고 간揀하여, 화두 자체만 존재해야 하는 화두이다.

만일 경절의 이치를 알려고 한다면 반드시 한 생각을 막았다가 ‘한 번 확 터뜨려야’(爆地一破) 비로소 생사를 알 수 있고 그래야 깨달아 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79)

무자화두는 한 덩이 불과 같으니 가까이 가면 얼굴을 태워 버린다. 여기에 불법佛法의 지해知解가 붙을 자리가 없다. 그런 까닭에 이 무자화두는 알음알이를 깨뜨리는 도구(器仗)이다. 만약 깨뜨리는 주체와 대상, 취함과 버림을 간택하는 견해가 있다면, 어찌 온전히 다만 화두 드는 사람이라 하겠는가?80)

?절요사기?나 ?간화결의?에서 제시하는 화두는 ?수심결?에서 제시하는 공안이 가지고 있는 인식론적인 의미가 없다. 그것은 그 자체로 ‘한 덩이의 불’이며, 잘못된 견해를 무너뜨리는 ‘칼날의 도구’(器仗)이며, 다만 그 ‘살아 있는 구句’이다. 그래서 일체의 인식과 인식의 대상을 부정하여 가려내는 전간문이다. ?수심결?의 공안은 회광반조를 생명으로 한다. 그러나 ?절요사기?나 ?간화결의론?에서 제시하는 화두의 생명은 의심 덩어리다. 그래서 그것은 ‘한 번 땅이 확 하고 폭발하는 것’(爆地一破) 같은 화두이다. 보다 철저하게 자아自我의 식정識精을 폭파하여 그 자체로 일심법계一心法界가 된다.

그러면 화두를 중심으로 한 ?수심결?의 전수문과 ?절요사기?의 전간문은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지눌은 성품을 깨닫지 못하고 “완전히 가려내기만 하는 것은 ‘말을 떠난 견해’에 걸리고, 일체를 수용하기만 하는 것은 ‘원융圓融하다는 견해’에 걸린다”81)고 한다. 그러므로 양자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가져야 한다.

완전히 가려내는 문(全揀門)이란 다만 본체를 밝혀 마음의 성품은 본래 항상 공적하여 모든 대상을 뛰어넘었음을 바로 가리킬 뿐이요 취하거나 버리지 않으니, 이것은 완전히 거두는 가운데 완전히 가려내는 것(全收中全揀)이다.82)

전수문은 모든 것을 불성의 드러남이나 작용으로 수용하는 것은 좋지만, 상견常見이나 일상성의 말길이나 뜻길에 떨어질 위험이 있다. 반대로 전간문은 일체를 가려내고 부정하기 때문에 극단으로 밀고 가면, 단멸斷滅이나 무기공無記空이나 형식적인 의례에 떨어질 염려가 있다. 양자는 상보성의 원리에 의해서 통합되어야 한다. 의해를 가려내는 가운데 일체의 현상과 작용을 수용하고(全揀中全收), 일체의 현상과 작용을 수용하는 가운데 온전히 가려내는 문(全收中全揀)을 함께 세워야 한다. 그 때야 비로소 지눌의 간화선은 다음과 같이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눈빛 온 우주를 덮어 버리고

콧구멍 속에는 백 억의 몸을 감추었네.

우리 모두 장부라, 누구에게 굴복하리.

이 푸른 하늘 아래 사람을 속이지 말라.83)

5. 결론

 

본고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텍스트를 읽는다고 하는 것은 각 의미 단위들이 만나서 이루는 내적 구조를 발견하는 일이다. 지눌의 텍스트를 해석하는 데는 다양한 접근 방법이 있겠지만, 본고에서는 지눌 선 사상의 전체적인 체계와 구조라는 관점에서 읽고자 했다. 체계란 전체를 이루는 각 부분과 요소가 관계를 가지며 만들어 내는 구조라고 정의할 수 있다. 체계는 밖으로 드러난 표면적인 모습이라면, 구조는 외형의 모습을 결정하는 내적 관계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각 요소는 독립되어 존재할 수가 없다. 그것들은 전체적인 구조와 관련 속에서 의미를 가진다. 굴뚝․집․울타리는 독립된 의미를 가지겠지만, 그것들은 전체적으로 외적 형태뿐만 아니라 각 요소가 결합되어 있는 방식에 의해서 각자의 역할과 의미가 분명해진다. 이와 같이 지눌의 텍스트를 읽는 데 있어서 본고는 텍스트가 지니는 각 의미 단위가 상호 어떻게 만나 전체적 구조를 형성하는지에 관심을 둔다. 그런데 구조는 밖으로 드러나 있지 않기 때문에 해석자에 의해서 발견되고 구성되어야 할 성격이다. 이런 점에서 텍스트는 해석자의 발길을 기다리는 ‘열린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지눌의 사상 체계와 구조를 해석하는 지금까지 가장 널리 알려진 유형은 돈오점수의 체계이다. 즉 돈오점수를 대표적인 지눌 선 사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돈오점수의 체계에 의한 해석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삼문을 오직 실천론적 과정으로만 파악하기 때문에 현상론에 관한 입장은 소홀하게 다룰 수밖에 없는데, 돈오점수에 의한 삼문의 해석은 삼문 자체의 상호 작용에 의해서 구성된 전체가 아니다. 특히 돈오점수의 체계로는 간화선이 야기시키는 모순과 갈등을 구성 요소로서의 삼문과의 관련 속에서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두 번째, 지눌 텍스트를 구성하는 성적등지문, 원돈신해문, 경절문의 중심 내용은 공안․심성․정혜인데, 이것은 마음의 ‘존재․양태․작용’ 세 가지 측면에 상응한다. 체계란 요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관계 구조이다. 지눌에게 있어 요소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원천은 바로 ‘마음’이다. 그의 텍스트는 기본적으로 마음에 관한 해석이다. 지눌은 평생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고심하였다. 이런 까닭에 그의 선 사상은 ‘마음의 해석학’이라고 할 수 있다.

 

지눌은 마음을 해석하는 데 있어 ?기신론?의 일심이문삼대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철학적 중심 문제를 일심에 두고, 마음을 진여문과 생멸문의 구조(體用 혹은 性相)로 분석하거나 마음을 존재․양태․작용이라는 세 가지 성격에 의거하여 설명하려 했다. 마음의 존재․양태․작용이라는 삼대는 경절문․원돈신해문․성적등지문라는 삼문의 형식으로 드러나는데, 이 점은 그의 모든 저술을 통괄하는 체계라고 할 수 있다. 경절문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근본적 마음자리로 곧장 들어가는 깨달음(Bodhi)으로서의 체대이고, 원돈신해문은 깨달음이 드러난 양태와 공덕功德(Guṇa)인 상대로서 그것은 일진법계가 그대로 부처의 출현이라고 이해되며, 성적등지문은 용대로서 깨닫는 주체의 실천 작용과 행위(Karma)로 정의된다. 물론 여기서 원돈신해문의 근본보광명지나 ?기신론?의 대지혜광명은 체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원돈문은 지견知見의 병病을 가질 수 있기에 오직 경절문에 의해서만 언사言辭를 초월한 체대의 진정한 모습이 드러난다고 본다. 그러므로 경절문은 체대에, 원돈신해문은 상대에 배치한다.

 

세 번째, 위 삼문이 가지는 상호 유기적 관계는 두 유형이 있다. 삼문은 지눌의 텍스트 속에서 상호 관계를 가지면서 유기적으로 변형된 구조를 만들어 낸다. 하나는 ?수심결?의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절요사기?나 ?간화결의론?의 방식이다.

 

?수심결?의 방식은 전수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마음의 온갖 공덕과 작용을 다 수용하고 허용하기 때문이다. 원돈신해문과 성적등지문은 깨닫기 전에는 인식의 대상과 주체로 상호 대립 관계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경절문의 공안에 의해 인식과 대상이 하나로 됨으로써 양자는 하나로 통합된다. ‘이 뭣고’라고 질문함으로써 인식하는 자아가 그대로 법계가 되고, 그 세계는 바로 근본 마음자리의 출현임을 경험한다. 이것이 돈오이다. 이 때 원돈신해문과 성적등지문은 대립 관계가 아니라 상즉상입相卽相入의 관계가 된다. 즉 돈오와 점수는 바로 간화선에서 흘러나온다.

?절요사기?나 ?간화결의론?의 방식은 일체를 모두 잘라내는 전간문의 형식을 보여 준다. 여기서는 일체의 말길과 뜻길을 의해로서 부정한다. ?수심결?에서 말하는 원돈신해문의 공적영지도 없애며, 성적등지문의 자성정혜까지도 철저하지 못하다고 비판한다. 인식과 대상을 모두 간할 뿐만 아니라 오직 불덩이 같은 화두가 확 터지는 일파一破를 중시한다. 그러나 이것은 ?수심결?의 입장이 변화된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정함으로써 더욱 철저하게 일심의 법계에로 회귀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삼문이 상호 작용하여 만들어 내는 두 가지 형태의 관계 구조는 상보적 관계를 가져야 한다. 일체의 현상과 작용을 수용한 가운데 온전히 가려내고(全收中全揀), 말길과 뜻길의 의해를 온통 가려내는 가운데 일체의 현상과 작용을 수용한다(全揀中全收). 삼문이 만나서 만들어 내는 이 두 방식의 구조에서, ‘넓히고(開․全收) 통합하는(合․全揀)’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경절문의 공안이다. 그러므로 결국 필자는 지눌 선 사상의 체계와 구조를 일심에 바탕을 둔 ‘간화선 체계’라고 이해한다. 간화선 체계는 원돈신해문과 성적등지문과의 관계를 잘 설명하는 돈오점수 체계의 의해를 초극하여 보다 넓은 입장에서 포섭․회통한다고 할 수 있다.

출처 : 명상상담

글쓴이 : 거울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