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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교

밀교와 정토신앙

밀교와 정토신앙

 

①밀교와 정토신앙

 

밀교와 미타정토(彌陀淨土)는 인도에서 대승불교운동의 양대 소산으로서, 그 성립 당시부터 서로 무리없이 교섭될 수 있는 역사적 배경과 사상적인 조건 속에서 출발되었다. 그러므로 고려시대 법화신앙과 미타신앙을 주축으로 하여 백련사(白蓮社)를 결사하고 천태종풍(天台宗風)을 크게 떨쳤던 요세(了世)는 매일의 일과로서 준제주송(准提呪誦) 1,000편과 미타염불 1만 번을 하여 수행을 하였다.

 

이러한 요세의 수행을 통하여 천태사상과 밀교와 정토신앙이 서로 무리 없이 접근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경우 밀교의 진언과 정토의 염불이 외형적으로는 무리 없는 접근으로 파악되지만, 그것이 개인적 깨달음의 내용에서는 접근이 아닌 원융성(圓融性)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요세가 진언염송과 미타염불을 통하여 수행 일과를 하였다는 것은 밀교와 정토의 조화로운 융섭적 신앙(融攝的信仰)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고려 밀교의 조류는 요세의 경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고, 요세와 거의 같은 시대에 팔공산 거조사(居祖社)에 있었던 원참(元旵)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원참은 1298년 현행서방경(現行西方經)을 집록하여 미타정토의 왕생(往生)을 아미타본심미묘진언(阿彌陀本心微妙眞言)의 염송만으로 충분히 가능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그리하여 고려나 조선에서는 밀교가 진언을 매체로 하여 정토신앙과의 상호 교섭 관계를 밀접하게 맺게 되었다. ≪현행서방경≫은 1448년 김천 직지사(直指寺)에서 개간된 것을 비롯하여, 1531년 하동 쌍계사(雙磎寺), 1556년 황해도 신광사(神光寺), 1710년 하동 칠불암(七佛庵)에서 각각 개판되었다.

 

그리고 선사였던 석실(石室)은 실제로 이러한 신앙을 널리 펴는 데 힘을 기울였던 고승이다. 그리고 1668(현종 9) 보현사(普賢寺)에서 개판된 진언집(眞言集)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개판되어 널리 사용되었던 염불작법(念佛作法) 일용작관법(日用作觀法) 비밀교(秘密敎)등에는 무량수불설왕생정토주(無量壽佛說往生淨土呪)를 비롯하여 결정왕생정토진언(決定往生淨土眞言아미타불심주(阿彌陀佛心呪무량수여래근본다라니(無量壽如來根本陀羅尼무량수여래심주(無量壽如來心呪) 등 많은 정토관계의 진언이 있어 실제 의식상에 응용되고 있었다.

 

1644년 동래범어사(梵魚寺)에서 개판된 불정심관세음보살대다라니경(佛頂心觀世音菩薩大陀羅尼經)의 간기에서 이 다라니 법문은 수양의 미묘한 문이요, 정토왕생의 첩경이라고 하였다

.

이와 같이, 우리나라에서의 밀교는 고려 말기부터 정토신앙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고, 그것은 점점 시대가 흐름에 따라 개인의 신앙에서는 물론이요, 교학과 사상 면에서도 서로가 깊은 융합적인 관계로까지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정토신앙이 밀교 화된 ≪현행서방경≫ 등이 저술되어 조선시대에 널리 신앙되었으며, 많은 밀교의식에서뿐만 아니라 일반 불교의식에서도 밀교화된 정토관계 진언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밀교계의 현상은 한국의 밀교와 정토가 신앙·교학·사상·역사의 측면에서 원융한 습합을 이루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② 밀교와 선

 

밀교와 선 또한 정토와 마찬가지로 신라 말기부터 깊은 교섭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신라 말 도선은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의 동리산(桐裏山) 2세로서 밀교의 여러 가지 작법의식(作法儀式)을 선의 수행법에 응용하여 불교의 일반화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전통 속에서 고려의 요세는 매일의 일과에서 선을 하고 남은 시간에 진언지송과 미타염불을 하였거니와, 고려 말에는 선수행의 방편인 1,700공안(公案)이 모두 아자(阿字)에서 나온 것으로 보았다.

 

선과 밀교의 융섭은 조선시대에 와서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능엄경 楞嚴經≫은 ≪금강경≫과 더불어 선종의 소의(所依:한 종파의 근본을 이룸.)가 되는 경으로서, 이 경전에는 능엄주가 수록되어 있다.

 

1668년 묘향산 보현사에서 계정(戒淨)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모든 진언들을 모아 진언집(眞言集)을 간행하였는데, 여기에 정본능엄주(正本楞嚴呪)가 들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 능엄주는 선승들도 아침저녁의 의식 때 염송하였으며, 밀교에서도 이 능엄주를 많이 지송하였다.

 

이처럼 선과 밀교가 서로 융섭된 관계로 발전하자, 휴정(休靜)은 선가의 의식집인 ≪운수단 雲水壇≫을 편찬하였다. 그리고 선을 교설할 때의 의식집인 설선의(說禪儀)를 저술하여 밀교의 각종 의식법과 함께 필요한 진언까지도 적절히 도입하여 선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선과 밀교는 신라 말기부터 서로 깊은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으며, 고려와 조선시대에 와서는 그러한 관계가 교학적이나 의식 면은 물론, 신앙 속으로까지 융섭 되어 어느 일면에서는 서로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➂ 인왕경 (仁王經)

 

우리나라 호국불교의 근본경전이다. ‘법화경’ ‘금광명경(金光明經)’과 더불어 호국삼부경(護國三部經)으로 유명하다. 원명은 인왕반야경’ ‘인왕호국반야바라밀경’ ‘인왕반야바라밀경으로 불린다.

특히 신라와 고려 때부터 호국과 국가 번영을 위해 열었던 인왕백고좌회(仁王百高座會)의 근거가 되는 경전이다. 인왕백고좌회는 100개의 불상과 100개의 보살상을 모시고 100명의 법사를 초빙해 인왕경을 강한다. 아울러 100개의 등()100개의 향()100개의 꽃으로 공양하고 장엄한다.

인왕경은 28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품(序品)은 파사닉왕(波斯匿王)을 중심으로 한 인도의 16대 왕이 부처님과 문답하는 광경이 서술되어 있다. 본론인 2품부터 7품까지는 반야가 잘 지켜져야 하는 이유인 내호(內護)와 외호(外護)에 대해 밝히고 있다. 결론인 8품에서는 불멸후 정법(正法)의 쇠멸을 예언하고 있다. 아울러 7()이 멸하고 7()이 생하도록 16대 왕에게 반야의 법문을 수지하도록 당부하고 있다.

인왕경은 국가의 흥성과 번영이 불교의 수행과 직결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인왕경과 인왕백고좌회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일의대수(一衣帶水)의 관계라 할 수 있다. 인왕경 독송의 공덕은 호국을 뛰어 넘어 호복 호신까지도 가능하다고 믿게 되었다.

고려시대 때는 평화시에도 빈번하게 인왕백고좌회가 열렸다. 이 책의 번역서로는 구역이라 불리는 구마라습(鳩摩羅什)인왕반야바라밀경’ 2권과 신역이라 불리는 불공(不空)인왕호국반야바라밀경’ 2권이 남아 있다. 주석서로는 중국 수나라 길장(吉藏)인왕경소(仁王經疏)’ 6권과 신라 원측(圓測)인왕반야경소(仁王般若經疏)’ 6권이 2대 주석서로 꼽히고 있다. 이 밖에도 신라 대현(大賢)인왕경고적기(仁王經古跡記)’ 1, 예원(禮元)인왕경주(仁王經注)’ 4권과 인왕경과(仁王經科)’ 1권이 있다.

 

[주석]

인왕경, 인왕백고좌도량의 준말로, 높은 스님을 초청하여 법을 청하는 것을 이르는 말.

신라․ 고려 때, 100개의 사자좌(獅子座)를 갖추고 100명의 고승을 초청하여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을 강설하고 독송하면서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던 의식에서 비롯된 말.

613(신라 진평왕 35년) 7월에 수나라 사신 왕세의(王世儀)가 왔을 대 황룡사에 백고좌를 차리고 원광법사 등을 맞아들여 경법을 말한 것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이다.

2021. 03. 20()

대한불교 조계종 청암사 청암 엮음

출처: 밀교란. 밀교 경에 대해서.

출처:https://studybuddha.tistory.com/1369 [불교 용어 사전]

출처: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사전

[출처] 불교, 밀교와 밀교 경이란! (148회) 청암 스님|작성자 김용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