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 서머셋 몸
영국 작가 서머셋 몸의 장편소설. 지은이는 고갱의 생애를 연구하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 이 책의 줄거리를 구상했다.
이 소설에는 예술에 대한 정열을 불살랐던 한 남자의 인생이 그려져 있다. 그는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오직 그림에 대한 열정만으로 삶을 이어간다. 책 제목에서 '달'은 예술적 지향을 의미하며 '6펜스'는 세속적인 명성을 상징한다.
P. 83
타인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대체로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사람이 많다. 일반적으로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런 엉뚱한 마음을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뿐이다. 특히 그러한 사람이 대다수의 의견에 반대되는 행동을 기꺼이 하려고 하는 것은 그가 이웃의 찬성에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세상의 인습을 타파하는 것이 곧 그 자신의 인습이 될 때, 세상의 이목(耳目)에 인습을 타파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쯤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런 경우 그러한 행위는 터무니없을 정도의 자존심을 부여해준다. 따라서 위험이라는 불편을 의식하지 않고서도 용기라는 자기만족을 얻게 된다. 타인의 칭찬을 얻고자 하는 욕망은 아마 문명인의 가장뿌리 깊은 본능일 것이다. 때문에 격분한 사회의 도덕적 화살이나 공격에 자신을 노출시킬 만큼 대담하게 인습을 타파하려는 사람일수록 사실은 체면이라는 껍질을 쓰기 위해 가장 먼저 서두를 것이다. 그러므로 세간(世間)의 평판에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고 큰소리치는 인간일수록 나는 그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지에서 비롯된 허세에 불과하다. 그들이 자기들의 조그만 실수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다만 아무도 그들의 실수를 모를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접기 – ider427
P. 72
˝여자들 마음이란 딱하기 그지없군! 사랑, 언제나 사랑뿐이야, 왜 남자가 떠나면 다른 여자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하지. 당신은 내가 한 여자를 위해 바쳐온 일을 다른 여인을 위해 또 다시 재현할 만큼 어리석은 인간으로 보이나?˝ - ider427
P. 91
맥앤드루 부인은 남자들이란 언제나 자기에게 애정을 품고 대하는 여자를 버리는 잔인한 습성이 있는데, 그러한 처지에서 남자가 여자를 버렸다면 그 점에 대한 책임은 여자 쪽에 있다는, 여성들의 공통적인 견해를 공유하고 있었다(감정은 이성과도 관계없는 특별한동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 ider427
P. 100
고생이 사람의 인격을 고상하게 만들어준다는 말은 결코 진실이 아니다. 행복이 그렇게 만들 가능성은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고생은 흔히 사람을 옹졸하고 표독스럽게 만든다. - ider427
P. 59
남편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것은 남편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세상 사람들의 험담을 두려워하기 때문인지 나로서는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그러자 그 부인의 비통한 가슴속에 들끓고 있는 버림받은 사랑에 대한 고뇌는 상처받은 허영심으로부터 오는 고통—— 내 마음에 천한 것으로 느껴지는——과 뒤섞인 게 아닌가 하는 의혹으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나는 아직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모순된 것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성실성의 이면에 얼마나 많은 위선이 들어 있고, 고상함 속에 얼마나 많은 비열함이, 그리고 패륜(悖倫) 속에 얼마나 많은 선량함이 내재해 있는지 나는 아직 알지 못했던 것이다. 접기 – ider427
*인생을 그토록 망쳐놓는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답지 않은 일이지 – 유선경
서머싯 몸 (William Somerset Maugham) (1874~1965)
세계적 문호 중 가장 능숙한 이야기꾼의 하나인 서머싯 몸은 1874년 프랑스 파리에서 영국 대사관 법률 고문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8세 때 어머니가 사망하고 2년 뒤 아버지마저 세상을 뜨자, 영국의 교구 목사인 작은아버지 밑에서 성장했다. 사립 중등학교 킹스 스쿨에 입학했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그만둔 후, 독일 하이델베르크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이후 런던의 성 토머스 병원 부속 의과 대학에 입학했지만, 의사보다 작가가 될 꿈을 품고 1897년 첫 소설 『램버스의 라이자』를 발표하며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의업을 포기하고 소설과 희곡 집필에 몰두했으며, 1908년 그의 희곡 네 편이 런던 웨스트엔드의 극장에서 동시 상연되면서 극작가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1915년 자신의 정신적 발전의 자취를 더듬은 자전적 성장 소설 『인간의 굴레』를 출간했으며, 1919년 화가 폴 고갱의 전기에서 모티프를 얻어 쓴 소설 『달과 6펜스』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크게 주목받았다. 그밖에 1921년 단편집 『나뭇잎의 떨림』을 출간하면서 단편 작가로도 명성을 쌓았으며, 이후로도 10권이 넘는 단편 선집을 더 출간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몸은 영국 정부의 요청으로 비밀 요원이 되어 스파이 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1917년에는 볼셰비키 혁명을 저지하라는 임무를 받고 혁명이 진행 중이던 러시아에 잠입하여 활약하기도 했다. 당시의 체험들을 바탕으로 1928년 연작 소설집 『어셴든, 영국 정보부 요원』을 출간했다. 몸이 자신의 실제 경험에 허구를 가미하여 집필한 이 작품은 현대 스파이 소설의 원조이자 고전으로 평가된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과자와 맥주』(1930), 『면도날』(1944) 등의 소설들과 「약속의 땅」(1913), 「공전」(1921) 등의 희곡들, 『서밍 업』(1938), 『작가 수첩』(1949)을 비롯한 회고록과 에세이 들이 있다. 몸은 1965년 프랑스 남부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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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광기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는 지극히 평범한 주식 중개인이었다가 40이 훌쩍 넘은 나이에 뜬금없이 그림을 그리겠다고 파리로 건너간다. 아내 에이미를 비롯한 가족 친지들은 갑작스런 그의 가출을 두고 다른 여자와 정분이 난 것이라고 단정할 정도로 화가로의 그의 변심을 눈치 채지 못했다.
파리에서의 찰스의 생활은 극빈의 삶 그 자체였는데, 그림을 배우고 그리는 이외 안락함이나 명성 같은 것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당대 화가들이나 대중에게 스트릭랜드의 그림은 전혀 주목받지 못했지만 딱 한 사람 그의 천재성을 간파한 화가이자 평론가 스트로브는 찰스의 괴팍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곁에서 그를 돕는다. 스트로브는 작고 뚱뚱해서 스트릭랜드의 조롱거리가 되기 일쑤였어도 모든 걸 감수하고 바보스러울 정도로 스트릭랜드를 옹호한다.
한 번은 스트릭랜드를 오랜만에 찾은 스트로브가 거의 아사 직전까지 몰린 그를 본 후, 아내 블란치의 눈물어린 반대를 무릅쓰고 스트릭랜드를 자기의 집으로 옮겨 간병하기에 이른다. 스트릭랜드는 몸이 점차 회복되자 스트로브의 화실까지 점령하는데, 스트로브에게는 더 청천벽력인 것은 스트릭랜드를 그토록 혐오하던 그의 아내가 스트릭랜드에게 연정을 품게 되고, 스트릭랜드가 떠나자 자살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점이다.
종적을 감춘 스트릭랜드는 그 후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타히티 섬으로 들어가 원주민과 생활하게 된다. 17세의 원주민 소녀 아타와 살림을 차린 그는 죽을 때까지 그림만 그리다가 나병에 걸려 온몸이 뭉게진 채 죽어갔다. 심지어 죽기 1년 전부터는 시력마저 잃은 채...
화자는 철저하게 관찰자의 입장에서 스트릭랜드와 그의 주변 인물들을 서술한다. 더러는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것도 있고, 많은 부분은 이런 저런 사람의 전언을 모은 것이다. 온갖 미담으로 스트릭랜드를 신성화하지 않으면서,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영웅적 행동을 조작하지 않으면서 상식적으로 불가사의한 인물인 스트릭랜드와 그의 삶을 묘사한다. 그러나 이런 건조한 서술 방식이 극의 사실성을 더하는 한편, 신비감을 주면서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광기 없는 예술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 예술을 위한 광기는 어떤 형태라도 용서될 수 있는 것인가. 결과가 좋다면(음악이건 회화건 무엇이건 간에 걸작을 창조한다면) 모든 평가는 뒤바뀔 수 있는 것인가.
*나는 후회 없이 무엇에 미쳐 본 적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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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는 아직 몰랐다
말로만 듣던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를 이제야 읽게 됐다. 하도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정보가 많아, 대강의 줄거리는 꿰고 있었지만 정작 내가 읽은 것하고는 또 다른 체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찰스 스트릭랜드에 대해 양면적 감정이 내적으로 치열하게 충돌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나이 40세에 그림을 그리겠다는 열정 하나만 가지고, 그동안 이룬 모든 것을 버리고 훌쩍 떠난 한 남자에 대한 도덕적 비난을 쏟아내는 자아와 또 한편으론 참 멋지다라는 느낌이 동시에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인간이란 존재는 태어나면서부터 현실과 이상이라는 서로 상이한 두 세계가 충돌하는 가운데 성장한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상)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라는 자조적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하고 싶은 일이 생활에 충분한 돈까지 벌어다 준다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그러기가 쉽지 않다. 영국 출신의 작가 서머싯 몸이 프랑스 야수파 출신 화가 폴 고갱을 모델로 삼은 소설의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는 영국 런던에서 증권 중개인으로 활동하던 중, 어릴 적 꿈을 실현하기 위해 17년간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훌쩍 프랑스 파리로 떠난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스트릭랜드 부인은 참을 수가 없다. 그녀는 찰스가 그림이 아닌 다른 이유, 젊은 여자가 생겨 떠났을 거라고 굳게 믿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 때 절실하게 사랑한 사람이 자기가 사랑했다고 믿는 남자의 꿈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다는 사실에 그저 한숨이 나올 뿐이다. 서머싯 몸은 작가의 페르소나//지혜와 자유의사를 갖는 독립된 인격적 실체. 삼위일체(三位一體)의 신(神)// 역할을 충실하게 대행할 인물로 화자인 나(역시 작가다)를 투입한다. 나레이터 역할의 나는 찰스 스트릭랜드의 행적을 쫓는 데 더할 나위 없는 캐릭터다. 찰스의 관심 분야와는 다르지만, 명확한 예술가이며 일반인들의 일상적 사고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찰스와 그나마 이야기가 통하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나’에게 찰스가 이야기를 털어 놓으니 소설의 진행에 큰 도움이 되는 건 당연하다.
소설 <달과 6펜스>는 크게 세 개의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초반부의 영국 런던에서는 내가 어떻게 해서 찰스 스트릭랜드의 삶에 개입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한다. 그 다음에 소설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프랑스 파리가 그 무대다. 요즘도 그렇지만, 예술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특정한 공간에 가야 한다는 공식이 그 시절에도 있었나 보다. 이 소설의 백미라고 생각하는 네덜란드 출신 화가 더크 스트로브와의 애증에 얽힌 삼각관계가 펼쳐지는 공간이다. 왠지 초중반의 긴장감에 비해 남태평양 타히티에서의 찰스 스트릭랜드의 최후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기에 김빠진 콜라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소진시켜 버린 예술가에게 마지막 걸작을 남기는 것 외에 무슨 사명이 있단 말인가.
이상적인 도덕론자도 아니면서 독자의 양심을 건드리는 것은 17년간 함께 한 가족마저 저버린 찰스 스트릭랜드의 행동이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은 어디까지인 걸까. 스트릭랜드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겠지만 그의 가족들은 절대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 아니라면 자신에게 영원히 기회가 없다는 사실을 파악한 찰스는 가족 특히 아내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은 모름지기 예술가는 이상과 현실을 병행할 수 없다는 그의 확고한 신념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그런 점에서 서머싯 몸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프라하의 어느 천재 작가 역시 현실 속에서 창작의 고통에 괴로워하지 않았던가.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소설의 제목처럼 하나는 이상을 지칭하는 ‘달’로, 그리고 다른 하나는 물질이라는 이름의 현실을 상징하는 ‘6펜스’로 형상화되고 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두 명의 캐릭터가 자못 흥미진진하게 다가왔다.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찰스 스트릭랜드야 도덕성 때문에 실컷 욕을 먹었을 테니,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충분할 것이다. 첫 번째 인물은 바로 나레이터인 ‘나’다. 어떻게 해서 나는 계속해서 찰스 스트릭랜드의 삶에 개입하게 되는 걸까. 그 때는 아직 인간의 본성이 모순되고, 성실성의 이면에 얼마나 많은 위선이 내재되어 있는지 몰랐다는 고백에서 미생(未生)의 인격을 만나기도 했다.
어쨌든 런던, 파리 그리고 마지막의 타히티까지 아우르는 여정은 도저히 개연성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찰스 스트릭랜드가 타히티의 숲 속에서 태고적 아름다움의 비밀을 만났게 되었다는 건 어느 정도의 개연적이라는 느낌이 들지만, 타히티까지 갈 이유가 전혀 없어 보이는 내가 그곳까지 가서 직접 스트릭랜드의 최후를 목격한 사람들의 전언을 듣게 된 것은 운명적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그것도 하나의 소설적 장치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예술가가 아닌 다른 직업군의 사람이 나레이터 역할을 맡았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그야말로 불사른 천재 화가 찰스 스트릭랜드의 열정을 그려낼 수 있었을까. 물론 두 번째로 이야기할 문제적 인간 더크 스트로브야말로 그 누구보다 앞서 스트릭랜드의 천재성을 일찍이 인정했다. 후반에서 찰스 스트릭랜드가 죽기 전에 쉽게 그의 그림을 구할 수 있는 기회가 허다했지만 그러지 못해 아쉽다는 나레이터의 말은, 예술마저 물신화되고 돈이라는 가치로 계량화된 현대 사회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소설의 또 다른 문제적 인간은 바로 더크 스트로브다. 나는 그를 어릿광대라고 부르곤 하는데, 비록 그것이 그의 특징을 정확하게 짚어낸 것이라고 하더라도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헌신적인 행위를 한 그에게 지나친 표현이 아닐까 싶다. 배은망덕이라고 한다면 세계 챔피언 급이라고 할 수 있는 찰스 스트릭랜드는 더크 스트로브와 부인 블란치의 지극한 정성으로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났으면서도 결국 한 가정을 파멸로 몰아넣고야 마는 신공을 보여준다. 주변의 호의를 아무런 염치도 없이 받아들이면서, 최소한 지켜야할 인간의 도리조차 지키지 않는 것이 예술가의 특권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 냉혹한 잔인성에 그만 질려 버렸다. 어쩌면 서머싯 몸은 이런 극단적 대비를 통해 독자의 감정에 호소하는 방법론을 터득했는지도 모르겠다. 요즘 우리나라 방송계를 쥐락펴락하는 막장드라마의 원조격이라고나 할까.
더크 스트로브는 찰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 팔리는 화가지만, 자신의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화가라고 생각하는 찰스 스트릭랜드는 자신의 은인을 환쟁이라고 부르면서 주저하지 않는다. 창조의 재능이 없다고 해서, 그 창조력을 분별하고 비판하는 능력까지 부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더크 스트로브는 온 몸으로 대변해준다. 물론, 이런 찰스의 행동을 파악한 나레이터 나는 교묘하게 그를 자극하면서 이야기의 빠진 퍼즐 조각들을 하나둘씩 채워 넣는다. 스트로브는 스트릭랜드에게 빠져 자신을 버린 블란치가 다시 돌아오기만 한다면 언제라도 용서하겠노라고 나에게 선언한다. 문제는 블란치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는 점이다. 비극의 피날레에서 스트로브가 스트릭랜드가 그린 블란치의 누드화에 칼질을 하려는 순간, 영혼의 고뇌를 거쳐 정화된 예술혼의 결정체에 압도되는 장면이야말로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사족에 불과할 따름이다.
<달과 6펜스>의 실제 모델이었다는 폴 고갱의 삶에 대해 호기심을 느껴 찾아보았더니 정말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와 비슷한 삶의 궤적을 그리고 있었다. 나름의 논리를 갖춘 냉혹한 예술가 찰스 스트릭랜드는 무슨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걸까.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인정받지 못한 예술가란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니게 된 현실에 견주어 볼 때, 사후에 비로소 재평가를 받게 된 과정조차 씁쓸하기 짝이 없다. 그토록 원하는 달(개인의 꿈)에 도달하기 위해서라면 그 과정에서 타인에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 정도는 문제없다는 인식이 불편하게 다가왔다. 달에도 가기 어렵지만, 현실세계에서 6펜스를 얻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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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달과 6펜스
대단하다..그렇게까지 밀고 나가는 그의 신념이..처음엔 정말 모든것을 팽개친 그가 나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뒤로 갈수록 대단하다고만 생각되었다..그렇게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6펜스를 버리고 달만 쫒은 그...진정 고갱이었을지도 궁금하다..
읽다 지쳐 스르르... 2015-07-30
<달과 6펜스>라는 소설에 이런 글이 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모순에 찬 것이며 성실한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위선이 숨겨져 있고 고결한 정신 속에서도 얼마나 많은 비열함이 숨어 있고, 또 사악한 마음속에는 얼마나 많은 선량함이 깃들여 있는가 등을 그 무렵의 나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 서머싯 몸 저, <달과 6펜스>, 51쪽, 소담.
이것을 이렇게 바꾸어 볼 수 있겠다.
<어떤 사람이 성실하다는 것은 어느 부분에서만 그렇다는 것이고, 고결하다는 것은 어느 부분에서만 그렇다는 것이며, 불량하다는 것은 어느 부분에서만 그렇다는 것이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엔 하얀 색의 수건을 걸레로 사용하는 주부가 있다. 그 집에 가면 걸레가 얼마나 깨끗한지, 걸레인지 행주인지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하얀 걸레를 매일 빨아서 삶기 때문이다. 그런데 걸레만 보고 그 집의 청결 상태를 판단해 버리면 안 된다. 화장실에 가 보면 바닥에 머리카락이 떨어져 있기가 예사였기 때문이다. 화장실 청소는 자주 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 이런 주부도 있다. 방 청소보다 화장실 청소를 더 열심히 하는 사람으로, 자기는 바쁠 땐 방 청소를 생략하지만 화장실은 매일 청소한다고 한다. 집에서 화장실의 청결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이란다.
결론은 청결하다는 것은 어느 부분에서만 그렇다는 것.
이런 사람도 있다. 살림을 알뜰하게 하는 어떤 사람은 돈이 아까워 택시를 타는 일이 전혀 없을뿐더러 마당의 화초에 주는 물도 아까워 빗물을 받아 놨다가 화초에 물을 준다. 그런데 그는 여행을 다니며 쓰는 비용에 대해선 전혀 아까워하지 않아 사계절마다 여행을 다니며 돈을 쓴다.
결론은 알뜰하다는 것은 어느 부분에서만 그렇다는 것.
나의 경우, 결벽증이라고 할 만한 버릇이 하나 있다. 책장에서 책 한 권을 뽑아서 보려 할 때 키친 타올에 물을 적셔서 책의 겉면을 앞뒤로 닦은 뒤에 책을 보는 것이다. 먼지를 닦고 보기 위해서다. 이런 버릇은 책을 만진 손이 더럽다고 느낀 경험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책을 닦아서 보는 게 좋은 버릇이라고 여기지는 않아서 애들이 보는 앞에서는 절대 하지 않고 애들 몰래 닦는다. 애들이 나를 닮는 건 싫기 때문이다.) 이런 결벽증이 있다고 해서 모든 면에서 청결할 것이라고 보면 오산이다. 청결하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가령 텔레비전이나 전화기에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는 걸 보면서도 닦지 않을 때가 많다.
결론은 결벽증이 있다는 것은 어느 부분에서만 그렇다는 것.
흔히 사람들은 일부만 보고도 전체를 미루어 안다는 뜻으로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말하지만 이는 틀린 말인 것 같다. ‘열을 알고도 하나를 모르는 게 인간이다.’라는 말이 오히려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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