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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메모

사각지대(死角地帶)의 서정-저항과 체념의 갈등 / 신경림

사각지대(死角地帶)의 서정-저항과 체념의 갈등 / 신경림

 

 

農舞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주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 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 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라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신경림의 시는 대체로 사실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다. 그렇다면 사실주의 시는 어떤 원론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지 살펴보자. 그것은 최상의 조건으로 내세우는 다음의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일반적인 상태(situation), 일상적 배경사회 하위 계층 옹호. 둘째, 무리한 이미지나 은유를 사용치 않음. 셋째, 일상적 담화를 재현하거나 산문적 리듬에 접근하는 경향을 보임 등이다. 한 가지 더 추가한다면 개인의 심적인 한계(지평)를 초월하려는 의도를 보이지 않는 것 등이 있다. 시집『農舞』에 실려 있는 시들은 대체로 이러한 조건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먼저 소재의 선택이 빈한한 농촌 사회의 일상적 삶에 근거한 것들이고 용어의 성격은 수사적으로 활용된 압축어가 아닌, 산문적 문체의 리듬을 타고 있다. 그리고 화자의 생각은 농촌 서민의 공동체를 대변하면서도 표현 형식은 철저히 자신의 심상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시를 리얼리즘의 본질에 비추어 이해할 경우, 앞에서 열거한 리얼리즘 특징 말고도 인생은 조화와 균형이 결핍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인생의 중요한 이슈를 윤리적인 것(도덕성)으로 본다든가, 리얼리스트의 대부분은 그들의 어조가 대체로 코믹하고 풍자적이며 냉혹하기는 해도 침울하지는 않다(러시안 리얼리즘은 예외)는 특징 등이 이 시에 원용될 수 있다. 이 시의 화자는 '나' 아니면 '우리'다. 그리고 나는 어디까지나 우리 속의 나다. 그만큼 우리라는 집단이 중심이 되고 주체가 된다. 이 집단은 농촌 마을의 빈한한 젊은 농민들이다. 그만큼 그들의 이야기와 행위는 소박하고 단순하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고 생각한다.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했으면 무슨 대책을 세워야 하거늘 우직하고 소박한 탓일까.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고 농악 패거리에 빠져든다. 혹은 가난에 찌들리고 시국에 피해를 입은 탓일까. 무기력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못하는 망설임이 "날라리를 불거나 어깨를 흔들거나" 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이 ‘~거나'형 어투는 시 「겨울밤」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싸구려 분냄새라도 맡아볼거나” “올해에는 닭이라도 쳐볼거나 "연애편지라도 띄워볼거나" "올해에는 돼지라도 먹여볼거나." 또 시「場」에서는 “어디를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싯집에라도 갈까" 등이 나온다. 시적 화자를 통해 시대적·사회적 고민의 심리 현상을 그려 보이고 있다. 사회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을 드러낸 것으로 “이제 우리에겐 맺힌 분노가 있을 뿐이다 맹세가 있고 그리고 맨주먹이다”(「遠隔地」), “빈 주먹과 뜨거운 숨결만 가지고 모였다./ 아우성과 노랫소리만 가지고 모였다” (「갈 길」), “억울한 자여 눈을 뜨라/ 짓눌린 자여 입을 열라" (밤새」) 등이 있지만 이는 마치 1930년대 우리 농촌소설을 보는 감개를 자아낸다.우둔하면서도 정의감이 강하고 감상적이면서도 저돌적이고 즉흥적이면서도 고지식한 고집이 섞여 있다. 이러한 그의 리얼리즘 풍의 사설조調) 시를 보면 리얼리즘이 주로 소설 장르에 활용된 점을 새삼 인식하게되는 것은 물론 시와 소설이 만나는 모호한 한계점을 생각하게 된다.

 

이번에는 이러한 사실성을 통한 호소력이 내면화된 현상을 찾아보자.

 

쓸쓸히 살다가 그는 죽었다./

앞으로 시내가 흐르고 뒤에 산이 있는/

조용한 언덕에 그는 묻혔다/

바람이 풀리는 어느 다스운 봄날/

그 무덤 위에 흰 나무비가 섰다.

그가 보내던 쓸쓸한 표정으로 서서

바람을 맞고 있었다.

그러나 비는 아무것도 기억할 만한

옛날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언 듯

거멓게 빛깔이 변해가는 제 가냘픈

얼굴이 슬펐다/

무엇인가 들릴 듯도 하고 보일 듯도 한 것에

조용히 귀를 대이고 있었다.

(「墓碑」)

 

이 시의 의미상 특징은 생전과 사후가 잘 상응하고 있다는 데 있다. 시문을 산문 형식으로 압축해서 정리하면 쓸쓸히 살다가 그는 죽었다.” 다음에 그는 죽어서도 쓸쓸하였다'로 요약하면 된다. 이 시의 비극성은 생전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명당자리 같은 고택을 마련해주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데 있다. 아니 그를 위로하기 위해 새운 목비(木碑)가 그 한을 씻어주는 것이 아니고 생전과 같거나 오히려 더해주고 있는 것 같은 아이러니성이 이 시의 특징이다. 더군다나 기억할 만한 아무것도 없는 비천한 삶이었으므로 무의미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다. 이런 인생에 무엇을 들을 것도 볼 것도 없으련만 그래도 막연한 기대를 거는 우둔하면서도 순박한 인간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간결하면서도 건조한 문체가 암묵(暗默)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ㅡ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갈대」)

 

이 작품은 시집『農舞』에 실려 있는 작품 중 드물게 보는 순수 서정시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회성이 표면화되지 않은 작품이다. 이 「갈대」는 직관과 관념이 복합된 내면적 사실풍(寫實風)의 시다. 이런 유의 시는 외면적 사실풍이라 할 수 있는 이미지즘 계열의 시와 비교해보면 그 성격이 명확해진다. 김광균의 시 「해바라기의 感傷에는 “보랏빛 들길 위에 黃昏이 굴러나리면 시냇가에 늘어선 갈대밭은 머리를 헤뜨리고 울고 있었다"는 구절이 있다. 갈대의 외면적 형상과 울음을 울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나 혹은 울음소리와 같은 감각적 지각이 이해의 한계가 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바람과 달빛이 갈대에 미치는 물리적 감각이나 혹은 낭만적 정서를 차단해버리고 흔들림의 의미를 내면적 동기에서 찾고 있다. 거기다가 슬픔을 슬픔으로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삶이 온통 슬픔이란 사실을 모르고 사는 비극보다 더한 비극이 어디 있겠는가 하는 반문을 여운으로 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