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피 속에서 자란' 방언의 혼령들
노루: 함주시초(咸州詩抄)
장진(長津)땅이 지붕에 넘석하는 거리다
자구나무 같은 것도 있다
기장감주에 기장 차떡이 흔한 데다
이 거리에 산골 사람이 노루 새끼를 다리고 왔다
산골 사람은 막베 등거리 막베 잠방둥에 입고
노루 새끼를 닮았다
노루 새끼 등을 쓸며
터 앞에 당콩순을 다 먹었다 하고
서른 닷 냥 값을 부른다
노루 새끼는 다문다문 흰 점이 백이고 배 안의 털을 너슬너슬 벗고
산골 사람을 닮았다
산골 사람의 손을 핥으며
약자에 쓴다는 흥정 소리를 듣는 듯이
새까만 눈에 하이얀 것이 가랑가랑하다
넘석하는: 목을 길게 하고 넘겨다보는
당콩: 강낭콩
가랑가랑하다: 그렁그렁하다
백석의 시집 『사슴』을 평하는 자리에서 박용철은 "修正없는 方言으로兒童期 回想을 그린 부분이 中心이 되어 있다. (중략) 外人의 첫눈을 끄는 이 奇怪한 衣裳같은 것方言: 필자)은 모든 이 詩人의 피의 소곤거림이 言語의 外形을 取할 때에 마지못해 입은 옷인 것이다. (중략) 이 詩人의 포즈에는 하고 泰然하려는 이 보인다" 라고 했고 김기림은 "시집 『사슴』의 세계는 그 시인의 기억 속에 쭈그리고 있는 동화와 전설의 나라다. 그리고 그 속에서 실로 속임 없는 향토의 얼굴이 표정(表情)한다. (중략)그 외관의 철저한 향토의 미각에도 불구하고 주책없은 일련의 향토주의와는 명료하게 구별되는 '모더니티'를 품고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또한백철이 "소박한 시골 풍경과 구수한 흙 냄새가 나는 이른바 民俗好僻인색채가 地色으로 나타나 있다. (중략) 그의 民俗은 결코 피상적인 것이 아니라 그의 詩學의 출발점이요 결론이었다" 라고 한 것을 종합해보면 그의 시의 일반적인 특징이 다 드러난 셈이다. 그의 시를 대하고 있으면 마치타임머신을 타고 옛날 어느 한적한 농촌 마을에 온 느낌이 든다. 그만큼 그의 시는 시간대와 공간대가 아주 작게 싸리 울타리를 치고 있어서 인간의 때로 오염되지 않은 절대 청정구역이다.
시집의 책장을 열면 쏟아져 나오는 방언은 그의 시의 혼령들이다. 이 혼령은 자신의 정신과 정서가 흠뻑 배어 있으면서 그가 사랑하는 모든 것의 혈맥 속에서 호흡한다. 이 모든 것은 “나의 조상(은) 형제(는) 일가친척(은) 정다운 이웃(은) 그리운 것은 사랑하는 것은 우러르는 것" 등을 망라한다. 그것들은 아주 가깝게 아니 피부에 닿게 아니면 눈망울 속에 입김 속에 살아 움직인다. 이렇게 체감된 것은 풍속도 속의 인물이나 물상으로 체현된다. 때로는 풍자나 유머로 둘러치기도 하지만 그것은 낙천적이기도 하고 감상적이기도 하다. 섬세한 감각은 특이한 향취를 풍기기도 하지만 교묘한 의성어 (제비 소리를 "비애고지"라 한 것이나 오줌 소리를 “사르롱쪼로록" 이라 하는 등)나 의태어 (“사물사물 햇볕", "볕은 장글장글 따사롭고", "쇠리쇠리한 마을", "보득지극한 복족제비들이 씨굴씨굴 모여서는 짱짱짱짱 쇳스럽게 울어대고" 등) 속에 살아 움직인다. 사실 그가 그린 풍속화(민화)는 전래하는 풍속이나 민담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소재로 새로운 풍정(風情)을 창조하는 데 그 의미와 가치가 있다. 여기서 그의 시는 특유한 상징적 차원의 품격을 가지게 된다.
이런 점에서 이 「노루는 상징적 효과가 크다. 그 상징은 (인간과 짐승이 순수한 본능을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만나고 있는 현장 뒤에) 교묘히 숨어 있다. 우리가 이 시를 대하고 있으면 화자와 노루의 관계를 흔히 하는말로 감정이입이란 심리 현상을 생각하게 되고 여기에 체홉의『憂愁』나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연상할 수 있다. 마부 이오나와 애마나 장돌뱅이 허생원과 늙은 당나귀의 관계는 감정이입이 거의 완벽하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은 소설로서의 그 사실성이 뛰어난 점에서 찬사를 받고 있지만 그의 시는 이 소설들보다도 더 냉엄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 김기림은"반석의 냉담에 필적하는 불발한 정신을 가지고 대상과 마주 선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 시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먼저 인정과 물성(物)이 오묘하게 교감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화자는 자신의 피붙이 같은 노루를 단돈 서른닷 낭을 받고 팔려고 한다. 그것도 자신의 손을 핥고 있는 애정을 외면한 채, 아끼던 강낭콩 순을 먹였다고 하면서 작자를 놓칠까봐흥정을 한다. 여기서는 서른닷 냥의 물정이 애정을 가리고 있다. 먹고 사는 본능만이 작용한다. 가책이 있을 수 없다. 본능은 언제나 단순한 법이다. 짐승의 새끼 사랑을 보면 안다. 새끼의 죽음에 어미의 슬픔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곧 잊어버리고 돌아선다. 자식 같은 노루 새끼를 서른닷 냥에 파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번에는 시 「선우사(膳友辭)」를 보자.
낡은 나조반에 흰 밥도 가재미도 나도 나와 앉아서
쓸쓸한 저녁을 맞는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은 그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할 것 같다/
우리들은 서로 믿업고 정답고 그리고 서로 좋구나
우리들은 맑은 물 밑 해정한* 모래톱에서 허구 긴 날을 모래알만 헤이며 잔뼈가 굵은 탓이다
바람 좋은 한 벌판에서 물닭의 소리를 들으며 단 이슬 먹고 나이 들은 탓이다//
외따른 산골에서 소리개 소리배우며 다람쥐 동무하고 자라난 탓이다 /
우리들은 모두 욕심이 없어 희어졌다
착하디 착해서 세괏은* 가시 하나 손아귀 하나 없다
너무나 정갈해서 이렇게 파리했다//
우리들은 가난해도 서럽지 않다
우리들은 외로워할 까닭도 없다/
그리고 누구 하나 부럽지도 않다.//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
우리들이 같이 있으면
세상 같은 건 밖에 나도 좋을 것 같다
(* 해정한: 깨끗하고 맑은 / 세괏은: 억세고 날카로운)
백석 시의 정신적 내지 정서적 본질은 가난에 대한 인식과 정조다. 안빈낙도(安貧樂道)니 빈이무원(貧而無怨)이니 하는 유교적 가르침을 실천한것이 우리 고시가의 한 유형이라면 현대시는 개성과 창조라는 명의(名義)로 낡은 판형을 폐기하고 개성 있는 가난의 새 틀을 짜게 됐다. 백석 시를대하면 가난의 본질을 육감하게 된다. 시 「女僧」에는 “절의 마당귀에 女人의 머리오리 (머리카락)가 눈물 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는 구절이 있고 시 시기의 바다에는 “병인(病人)은 미역 냄새나는 덧문을 닫고 버러지 같이 누웠다”는 구절이 있다. 이러한 묘사는 전술한 대로 냉철한 객관적 사실풍의 묘사지만 「南鄕」에는 “하이얀 회담벽에 옛적의 쟁반시계를 걸어놓은 집 홀어미와 사는 물새 같은 외딸의 혼삿말이 아지랑이 같이 낀 곳”이라고 노래하기도 했다. 이 「膳友辭」는 바로 이러한 "따사로히 가난한“ 사람의 노래다. 「노루」의 객관적 사실 풍에서 주관적 서정의 사실로 방향을 바꾼 시다. 여기서 가난은 흰빛으로 상징된다. 흰밥과 가재미(뱃바닥이 희다)와 나를 하나로 묶은 것은 흰빛이다. 그것은 무욕과 착함과 정갈의 상징으로 되어 있다. 흰빛은 빛(色)이 아니다. 그것은 무게도 없다. 전무(全無)는 순수의 체질이다. 그래서 우리는 순수의 본체가 가난을 통해 은은히 비치고 있는 것을 그의 시에서 감지한다. 가난이 어두운 정으로 무게를 달면 안으로 파고 들거나 아래로 가라앉아 병이 되지만 그러나 밝은 정으로 무게를 덜면 밖으로 퍼져 나오거나 위로 솟아올라 빛이 된다. 우리는 자고로 많은 시에서 눈물이 낙과에 지고 웃음이 꽃 위에 뜨는 정념의 상도(常道)를 경험해왔다. 그러나 백석의 시는 이러한 현상을 극복하고 때로는 유머나 풍자로 혹은 위트로 마른 눈(눈물이 없는 눈)을 뜨고 자칫하면 빠지기 쉬운 슬픔의 강을 물새처럼 건너간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출출이 : 뱁새 / 마가리 : 오막살이 / 고조곤히 : 고요히
백석 시의 또 한 측면을 보여주는 시다. 그의 시에서 아주 드물게 보는 사랑을 주제로 한 시다. 그러니 전반적인 주조를 이루는 사실풍과는 대조가 되는 낭만적 정조로 시정이 사뭇 훈훈하게 느껴진다. 대개 시인이 강조하려는 속내는 반복의 형식 속에 들어 있는 수가 많듯이 제목 그대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런데 왜 춘향이나 심청이 아니고 하필 나타샤일까.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는 그 무대와 인물이 대서사적인 스케일 위에서 전개된다. 눈 덮인 산골은 광활한 설원과는 대조적이다. 파란만장의 전쟁 이야기를 몸에 감고 있는 서구적 미인은 산촌의 촌부로는 이미지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소재의 배치와 구성은 바로 그의 심리적 이상에서 발생한다. 「友辭」에서 나와 흰밥과 가재미가 일체가 되듯이 이질적인 세상(더러운 세상)의 별(나타샤)과 일체를 이루는 것은 현실 아닌 이상이다. 그래서 혼자 소주를 마시며 그녀가 꼭 오기를 믿고 기다린다. 여기에 가세하는 것이 흰 당나귀다. 흰 뱀이 있듯이 돌연변이로 나타날 수는 있겠지만 원래 흰 당나귀는 없다. 이것도 '나'의 이상이 그려낸 상징적 존재다. 그러나 현실적 이해가 가능한 것은 눈을 맞아 하얗게 된 당나귀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흰 눈이다.「膳友辭」의 흰빛은 순수의 상징이지만 여기서는 축복이다. 눈이 푹푹 내리고 푹푹 쌓이는 것은 나타샤와 나의 사랑의 실현을 의미한다. 이 사랑을 당나귀는 갓난아기의 울음으로 축복한다. 그렇지만 이 사랑은 처음부터 끝까지 가상된 사랑이다. 그럴수록 심리적 이상은 시적 긴장과 일치하는 탄력을 얻게 된다.
이밖에도 그의 시풍으로 색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시편들을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다. 「수박씨 호박씨」는 씨앗에 숨어 있는 인생의 의미를 기민한 예지로 찾아낸 작품이다. 그는 인생을 아주 작게 (미시적) 그리고 아주 좁게(예각적) 보면서 그 서리서리에 숨어 있는 가늘고 조용한 이야기를 끌어내기도 하지만 여기서처럼 인생의 큰 의미를 발견하기도 한다. 또 「修羅」는 미물(거미)에 대한 사랑이 속속들이 배어 있는 시다. 방바닥에서 쓸어낸 거미 어미와 새끼들의 동정을 따라가며 보살피는 다정다감한 세정(細情)은 바로 휴머니즘의 한 변종같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