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영혼 없는 윤회는 가능할까? / 정성민
정성민 교수가 쓰는 [예수와 석가모니 12]
정성민 ㅣ 기사입력 2018/06/15
우리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육체가 그 생물학적인 활동을 모두 정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생동안 지녔던 마음이나 정신조차도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것일까? 아이러니하게도 석가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앞서 말했듯이 삶이란 다섯 가지 존재의 요소들(물질, 감정, 생각, 의지, 인식)의 조합이며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힘의 결합이다. 우리의 존재는 끊임없이 변하는 과정중에 있다. 매 순간에도 존재의 요소들은 똑같지 않다. 존재의 요소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면서 우리의 존재도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것이다. 붓다는 이렇게 설명한다,
수행승들이여,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육체, 감정, 생각, 의지, 인식)이 생겨나고 파괴되고 사라지고 죽을 때마다 우리들은 태어나고 파괴되고 사라지고 죽는 것이다.
이러한 석가의 주장은 비록 우리의 존재가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영혼을 소유하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삶이 존속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이는 우리의 육체가 소멸될 때에 우리 개인의 의지나 욕망과 같은 생의 에너지는 육체와 더불어 죽는 것이 아니고 저생에서 다른 삶을 시작할 수 있는 또 다른 형태를 취한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석가에 의하면 인간이 지닌 의지, 의도, 욕망, 그리고 갈애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이요, 에너지이다. 전 세계는 바로 이러한 에너지를 통해서 움직인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지닌 이러한 에너지는 우리 신체의 생물학적 기능이 멈추는 죽음 이후에도 작용한다는 것이다. 아주 흥미로운 주장이다. 다른 형태로 드러난 우리 자신의 에너지가 다시 시작되는 새로운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재생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재생이 반복되는 것을 불교적인 윤회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인간의 영혼이 없다고 하더라도 윤회는 가능하다는 논리이다. 사후세계에 관한 부처와 어느 수도사와의 대화는 이러한 석가의 주장을 잘 드러낸다,
바카: “존귀한 선생님, 모든 욕망을 극복했다는 '아라한(Arhat)'은 죽은 다음에도 계속해서사람으로 존재합니까?”
부처: “내세에서 다시 낳는다는 말은 아라한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바카: “그렇다면 다시 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부처: “아니다! 다시 나지 않는다는 말도 적용되지 않는다.”
바카: “선생님은 그저 아니라는 부정만 하십니까?”
부처: “바카(Vaccha)야! 너는 못마땅하게 생각하겠지만 사실 이것은 깊고 이해하기 어렵고 논리를 초월한 문제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내가 네게 물어볼 것이니 대답할 수 있겠느냐?”
바카: “예. 선생님!”
부처: “만일 타던 불이 꺼진다면 그 불이 꺼진 것을 너는 알 수 있겠느냐?”
바카: “예.”
부처: “그러면 그 불이 어디로 갔는지 - 동쪽으로 갔는지 서쪽으로 갔는지.......너는 말할 수 있겠느냐?”
바카: “선생님! 그것은 질문답지 못한 물으심입니다.”
부처: “너도 그와 같이 질문답지 못한 질문을 내게 물어왔다. 사람의 느낌이라든가 지각, 의식, 기력 따위는 아라한의 경우에 있어서는 모두 사라져 없어지고, 다만 깊고 오묘한 것만이 바다와 같이 아라한과 함께 남아있다.
그러니까, 다시 낳는다, 낳지 않는다, 또는 그 둘을 합하여 다시 낳고 낳지 않는다는 말들은 아라한에게 적절하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느 수도사와의 대화에서 드러난 윤회에 관한 석가의 입장은 다소 애매하다. 그래서이를 이해하는 것이 그리 쉽지않다. <숫타니파타>경전에서도 윤회에 관한 석가의 애매한 표현은 그대로 드러난다,
[붓다] 가령 바람의 힘에 꺼진 불꽃은 우빠씨바여, 소멸되어 헤아려지지 못하듯, 정신적인 것들에서 해탈한 성자는 소멸되어 헤아려질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붓다의 애매한 표현에 답답해진 존자 우빠씨바는 다음과 같이 질문하다,
[우빠씨바] 소멸해 버린 것입니까,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까, 혹은 영원한, 질병을 여윈 상태입니까? 성자시여, 그것을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당신이 깨우친 것이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Stn.1074-1075)
이에 석가는 또 다시 애매하게 답한다,
[붓다] 소멸해 버린 자는 헤아려질 기준이 없습니다. 언명할 수 있는 것이 그에게는 없습니다. 우빠씨바여, 모든 현상들이 깨끗이 끊어지면, 언어의 길도 완전히 끊어지는 것입니다. (Stn.1076)
이러한 석가의 윤회에 대한 애매모호한 입장을 스리랑카의 학승, 라훌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똑같이 이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분명히 영원하고 불변한 것이 한 삶에서 다른 삶으로 이어지는 것은 없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파괴되지 않은 채로 지속하지만 순간마다 변화하는 연속이다. 이 연속이란 실제로 움직임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 밤을 새워타는 불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똑같은 불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불꽃도 아닌 것이다......
이처럼 여기서 죽은 사람과 다른 곳에서 윤회하여 태어난 사람은 같은 사람도 아니고 다른 사람도 아니다. 그것은 동일한 연속의 계속이다. 태어남과 죽음의 차이는 한 순간의 생각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이생에서 마지막 생각의 순간이 이른바 내생에서의 처음 생각의 순간이다. 그것은 실로 연속의 계속이다. 이생 자체에서도 한 생각은 다음 생각에 영향을 준다. 그래서 불교적 시각에서 사후의 문제는 커다란 신비가 아니다.
과연 우리의 의지나 욕망과 같은 에너지가 다음 생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동력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만일 그게 가능하다고 한들 그러한 윤회의 삶이 현재의 나와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 아무튼, 석가는 종교들이 보편적으로 강조하는 신의 존재와 사후세계에 대한 대체물로서 ‘재생’이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윤회사상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석가가 힌두교의 유아론은 부정하더라도 윤회사상의 틀까지는 완전히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석가가 힌두교의 윤회사상의 틀만 남긴체 그 내용만을 제거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물론 석가가 제거한 그 내용은 유아론, 즉 영혼의 영원주의 사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석가의 윤회사상이 지닌 모호성이나 의문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과연 개별적인 영혼이 없이도 그러한 윤회가 가능한가 라는 의문이다. 과연 의지나 욕망과 같은 에너지가 사후세계에서 새로운 삶으로 이어지는 원동력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이에 대해 김사업 스님은 개별적인 영혼이 없이도 윤회는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불교는 영원불멸의 아뜨만(영혼)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란 아뜨만은 없다는 것을 표명한 것이다. 또한 아뜨만은 자성에 해당하므로 무자성의 공에 의해서도 부정된다. 아뜨만을 인정하지 않는 무아와 공이 기본인 불교에서 윤회와 인과응보는 어떻게 설명될까? 무아와 ‘업에 의한 윤회’를 조화롭게 연결시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역사적으로도 바라문교에 속하는 여러 학파는 불교와의 논쟁에서 윤회의 주체 문제를 들고 나와 무아론을 공격했다.
인도에서 공사상을 선양해간 중관파의 시조 용수는 그의 저작 [인연심론석]에서 윤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윤회란 이전 생의 오온(정신과육체)을 원인으로 하여 또 다른 오온이라는 결과가 생한다고 하는 태어남의 반복을 뜻하지만, 이생에서 저생으로 옮겨가는 것은 띠끌 만큼도 없다.” 인과관계에 의한 새로운 오온의 이어짐은 있으나, 아뜨만(영혼)과 같이 다음 생으로 변함없이 영속하는 연속체는 없다는 말이다……
용수는 이 등불에서 저 등불로 불이 옮겨붙는 것도 윤회의 비유로 들고 있다. 이 비유에 근거하여 무아이면서 윤회의 인과응보가 어떻게 가능한 지를 팔자의 안목을 포함시켜 설명해 보겠다.
(과거에 죽은 사람과 미래에 태어나는 사람은 등불과 등불의 불이 옮겨붙는 것과 전혀 같지 않습니다. 서로 붙어 있지 않으므로 옮겨갈 수도 없고, 옮겨갈 등불 같은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용수의 설명은 인간의 윤회에 대해서 아무 것도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갑이라는 양초의 심지에 불이 타고 있다. 이 불을 양초 을의 심지에 댕겨 불을 붙였다. 갑과 을의 두 불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우선, 같다고는 할 수가 없다. 두 불의 모양, 열의 세기, 연료 등 어느 것 하나 동일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갑의 불을 원인으로 해서 을의 불이 생겨났다는 인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양자가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둘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도 없어야 하므로 을의 불은 갑의 불없이 붙고 있다고 해야 한다. 이것은 아무런 원인도 없이 불붙었다고 억지 강변하는 것이고 사실에 어긋난다. 따라서 갑의 불과 을의 불은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닌 ‘불일불이’관계에 있다……
윤회는 갑에서 을로 불이 붙듯이 일어난다고 용수는 설명한다. 이생에서 다음 생으로 그대로 옮겨가는 아뜨만과 같은 뭔가는 아무 것도 없다. 이전 생의 정신과 육체가 원인이 되어 다음 생의 새로운 정신과 육체가 생겨나는 것, 이것이 불교가 말하는 윤회인 것이다. 이생에서 행한 악행의 과보를 다음 생에서 받은 경우, 그 악행을 행한 정신과 육체의 총체적인 업의 결과로 생겨난 다음 생의 새로운 정신과 육체가 그 과보를 받은 것이라고 불교는 본다. 아뜨만은 없으며 두 생에 걸친 정신과 육체는 전혀 동일하지 않지만, 동시에 완전히 다른 것이라도 할 수 없는 밀접한 관계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무아이면서도 윤회는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세근 교수는 이러한 무아적인 윤회의 가능성, 즉 영혼 없이 윤회할 가능성을 단적으로 부정한다. 그는 이렇게 진술한다, “윤회나 업도 모두 실체없이 운동만 있는 일종의 허상임을 불교는 주장한다.” 만일 윤회가 영혼이라는 주체자도 없고, 업도 다음 생으로 실체적으로 전해지지 않는다면, 불교가 말하는 윤회는 모두 허상이라는 말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불교의 윤회는 반윤회, 즉 실제적이고 실체적인 윤회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교의 윤회설을 상징적인 윤회설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이생에서 어떠한 의지와 욕망을 가지고 살았던 ‘나’라는 존재와 그 의지를 전달받아 사후세계에 다시 시작하는 새로운 존재가 전혀 ‘동일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매번 반복되는 윤회의 삶이 과연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라는 의아심이 든다. 이는 영혼이라는 실체가 없는데 어떻게 윤회가 가능한 것인가라는 철학적인 의문이기도 하다. 결국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실체로서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죽은 후에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만일 윤회가 불가능하다면, 불교적 수행의 목적이나 의미도 더불어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 윤호진 스님은 말한다,
윤회사상은 인도 종교와 철학에 있어서 핵심적인 것이다. 이 사상이 없다면 인도의 종교와 철학은 그 존재 이유를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인도의 거의 모든 종교와 철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 즉 해탈을 성취하는 것이므로 윤회가 없다면 해탈을 위한 노력은 의미가 없게 된다.
그렇다. 만일 석가가 실체적인 윤회는 없다는 반윤회 사상이나 재생의 형태를 지닌 윤회사상을 주장하였다면, 모든 불자들의 해탈을 위한 수행은 그 의미와 목적을 상실하게 된다. 석가에 의하면, 이생에서 마지막 생각의 순간이 내생에서의 처음 생각의 순간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생각의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들게 된다. 만약에 석가가 주장하는 무아론적인 윤회사상이 사실이더라도 현재의 내가 새로운 세상에서 재생하는 또 다른 나와 동일한 인격이나 동일한 기억을 공유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아마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삶을 도덕적이고 거룩하게 살아가야 할 당위성이나 의무감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윤호진 스님은 이렇게말한다,
윤회사상은 원시종교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막연한 재생신앙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루이드라발레뿌생이 지적한 것처럼 이 사상은 (그결과를) 보상받는 윤리적인 행위에서 윤회의 동력과 원칙을 인정하고 있다. 역시 윤회사상은 재생 신앙만이 아니라 여러가지 요소들로 이루어진 복합적인 사상체계이다.
만일 윤회의 의미가 우리의 윤리적인 행위가 다음 생에서 보상을 받는 것이라면, 힌두교의 유아론적 윤회사상이 불교의 무아론적인 윤회 사상보다는 더욱 설득력이 있다. 왜냐하면 힌두교의 윤회사상은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삶을 더욱 충실하게 살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출처] 윤회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작성자 유승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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