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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

윤회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 정성민

윤회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 정성민

정성민 교수가 쓰는 [예수와 석가모니 9]

정성민 ㅣ 기사입력 2018/06/11 [08:02]

석가가 이 세상에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믿었다. 유한하여 사라질 영혼이라는 실체를 영원한 것으로 믿고 사모하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라는 것이다. <잡아함경> 제 10권 58경에 보면 이러한 석가의 생각이 잘 드러난다.

어떤 어리석고 무지한 다른 비구가 있었다. 그는 무명에 쌓여 있어서 삿된 견해를 일으켜 이렇게 생각하였다. ‘만일 내가 없다면 내가 없이 업을 짓는 것인데, 미래 세상에서 누가 그 과보를 받을 것인가.’ 그때 세존께서는 그 비구의 생각을 아시고 모든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이 대중가운데 어리석은 사람이 있다면 지혜도 없고 밝지도 못하면서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만일 색에도 내가 없고 느낌, 생각, 결합, 식별에도 내가 없다면 내가 없이 업을 짓는데, 누가 그 과보를 받을 것인가?’

만일 그가 이렇게 의심한다면, 먼저 그 의심을 풀어주겠다. 어떤가, 비구들이여. 색은 영원한 것인가, 덧없는 것인가?”

비구들이 대답했다. “덧없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덧없는 것이라면 그것은 괴로운 것인가?” “그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덧없고 괴로운 것이라면 그것은 변하고 바뀌는 법이다. 그런데도 많이 들어아는 거룩한 제자로서 거기서 과연, ‘이것은 바로 나다, 나와 다르다, 나와 함께 있다’라고 보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느낌, 생각, 결합, 식별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만일 모든 색에 대하여 과거나 미래나 현재나, 안이나 밖이나, 거칠거나 미세하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멀거나 가깝거나, 그 일체는 나도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니라고 이렇게 보면, 그것은 바른 견해이다. 느낌, 생각, 결합, 식별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석가에 의하면, 인간은 결국 무아적인 존재이다. 왜냐하면 ‘나’라는 실체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불교사상의이해>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5온 이론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 존재란 5개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고 이 각 요소들은 모두 비실체적인 것이므로 이와 같은 요소들로 이루어진 인간 존재 역시 비실체적이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고정 불변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을 여러경전에서는 비유를 들어 ‘색(신체)’은 거품덩어리같고, ‘수(감정)’는 거품방울같고, ‘상(생각)’은 신기루같고, ‘행(의지)’은 바나나 줄기같고, ‘식(인식이나판단)’은 허깨비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거품덩어리, 거품방울, 신기루, 바나나줄기, 허깨비들은 어느 것 하나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이들 실체적이 아닌 요소들로 이루어진 존재가 실체적인 것일 수 없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무아’라고 표현한다...... 결국 인간은 ‘무아적인 존재’인 것이다.

정세근교수는 석가의 무아설이 힌두교의 윤회설을 부정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이고 효과적인 논리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영원히 존재하는 ‘자아’라는 실체가 없다면 윤회의 기본적인 틀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영원히 지속할 영혼이라는 실체가 없는데 무슨 사후세계이며, 무슨 다시 태어남이 있겠냐는 것이다. 정세근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석가가 주창한 무아설은 브라만교 윤회설의 무근거성을 가장 효과적이고 근본적으로 설파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브라만교는 전생의 내가 현생의 나를 규정하고, 현생의 내가 내생의 나를 규정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생을 거듭하는 나의 동일성을 주장하고 있는데, 나라는 것조차 없다면 윤회의 근본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계급의 전승과 고착화에 기여하는 윤회설을 부정하는 형이상학의 근거를 석존은 바로 무아설로부터 얻게 된 것이다......생로병사의 순환 속에서 괴로워하는 인간을 윤회라는 이름아래 정당화하는 브라만교의 형이상학이 인간의 평등한 존엄성을 감지한 싯다르타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불만족스러웠을 것이다...... 불교는 연기를 말함으로써 신에 의해 결정된 윤회가 아닌 인간행위의 윤리적 인과성을 강조한다...... 불교는 윤회조차 받아들일 수 없다. 영혼이 없고, 나의 정체성도 없는데, 어떻게 윤회할 수 있는가? 한마디로 윤회의 주체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무아론(영혼은 실체가 없다)을 내세우기 위하여 윤회설을 이런 식으로 포기한다면, 무엇이 문제가 될까? 사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윤회에서 벗어나서 해탈에 이르는 것이다. 그렇기에 만약 윤회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불교의 그 모든 교리는 존재의 이유를 상실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불교는 이 두 교리 가운데 그 어느 것도 포기하면 안된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무아론과 윤회설이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윤호진 스님은 이러한 난처하고 곤혹스러운 현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불교의 거의 모든 교리는 이 윤회사상 위에 세워져 있다. 윤회설은 불교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불교의 모든 교리는 윤회를 인정하는 데서 그 존재 이유를 가지게 된다. 왜냐하면 불교의 궁극 목적이 바로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무아설과 윤회설은 불교라는 하나의 건축물을 세우고 있는 두개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다. 무아설을 포기할때 불교는 더이상 불교가 아니다. 역시 윤회설을 제거해 버릴때 불교라는 구조물은 붕괴되고 만다. 불교는 이 두교리 가운데 어느 하나도 포기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교리가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무아의 입장에서는 윤회의 주체를 인정할 수 없다. 윤회의 주체를 인정한다는 것은 고정 불변하는 실체적인 ‘자아’를 인정하는 것이 되고 결국 무아설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무아설을 내세우면 당장 문제가 야기된다. 무엇이 윤회하며 누가 과보를 받으며 누가 열반을 성취하는가. 루이드라발레뿌쌩이 지적한 것처럼, “실체적인 나를 부정하는 것은 과보와 윤회를 부정하는 것으로서 죽음이 바로 열반, 즉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 이처럼 이 두교리는 양립하지 않는다.

<불교사상의이해>도 이러한 문제를 공감하면서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 불교에 있어서 이 문제는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진술한다. 이 책은 이렇게 말한다,

무아를 주장하는 불교에서는 이와같은 윤회의 주체를 인정할 수 없다. 불교에 의하면 인간 존재란 비실체적인 몇개의 요소들이 어떤 조건에 의해서 임시적으로 모여있는 하나의 집합체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에 고정 불변하는 어떤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알프레드 푸쉐는 윤회설이 없이는 불교의 모든 가르침들은 무너진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윤회설이 그 모든 사상적 토대이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업 사상이 부정되면 불교는 그 바탕에서부터 무너져 버릴 것이다. 마치 지동설이 나오자 고대 천문학설(천동설)이 그렇게 되었던 것처럼.” 이런 면에서 윤호진 스님은 서로 양립할수 없는 불교의 두 핵심 교리, 즉 윤회설과 무아설을 양립시킬 수 있도록 해답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윤회설은 유아설과 함께 불교이전에 성립되었다. 이 두 교리는 다른 바탕에서 이루어져 한자리에 모였다. 무아설과 윤회설은 양립할 수 없다. 그러나 불교는 이 두 교리를 양립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불교가 시작된 이래 이 문제는 계속해서 불교사상가들을 괴롭혀 왔다. 그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그렇지만 아직도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다. 무아, 윤회의 양립의 문제는 지금도 보다 좋은 설명을 요구하고 있다. 이 요구에 대한 답은 무엇인가. 불교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 답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불교의 두 핵심 교리, 윤회설과 무아론은 절대로 양립할 수 없다. 석가의 그 모든 깨달음과 가르침은 윤회설 위에 세워져 있다. 즉 어떻게 하면 윤회의 저주를 끊을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것이다. 이러한 고민에 대한 해답은 바로 무아론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본질은 단순히 물질적인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영원히 지속할 영혼이라는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깨닫기만 하면 누구든 그 모든 윤회의 허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그것은 바로 만일 윤회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즉 하나의 허구이라면 윤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그 모든 노력이나 수행도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결국 불교가 무아론을 받아들이고 주장한다면, 불교의 그 모든 수행은 아무런 쓸데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왜 수행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윤회라는 문제가 있을 때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 업(죄)을 쌓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업을 쌓지 않기 위하여 수행을 하면서 거룩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런데 윤회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윤회의 주체가 되는 인간의 영혼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윤회설과 무아론을 동시에 주장하는 불교에 엄청난 문제가 된다. 즉 불교의 핵심교리들이 그 출발부터 서로 모순이라는 것이다. 결국 불교는 윤회설이나 무아론 중에 단 하나 만을 선택해야 한다.만일 윤회설을 선택한다면, 불교는 그 정체성을 잃고 오히려 힌두교나 자이나교가 되는 것이다. 만일 무아설을 선택한다면, 불교는 더 이상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단지 무신론적 철학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http://www.newspower.co.kr/38465

과연 영혼 없는 윤회는 가능할까?

정성민 교수가 쓰는 [예수와 석가모니 12]

[출처] 윤회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작성자 유승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