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 썸네일형 리스트형 신라 무상선사, 티베트 불교에 선〈禪〉을 전하다 신라 무상선사, 티베트 불교에 선〈禪〉을 전하다 돈황 문서에 의해 티베트 불교에 선(禪)을 최초로 전한 사람이 무상선사임이 밝혀졌다. 사진은 티베트에 불교를 받아들인 송첸감포왕이 부인 문성공주를 위해 지은 조캉사원. 이전 중국여행에서는 겪어보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성가신 일이 하나 생겼다. 바로 숙소를 구하는 문제다. 사천성이 티베트 인접 지역이라 그런지 숙소에 들어서면 직원이 한번 훑어보고, 여권을 보자고 한다. 여권에 승려 사진을 보면 숙소 직원이 단번에 퇴짜를 놓는다. 아무튼 사천성을 여행에서는 한 번 만에 숙소를 구한 적이 없고, 2~3번을 옮겨 다닌 후에야 겨우 숙소를 구할 수 있었다. 2008년 올림픽을 전후해 티베트 사람들에 대한 감시가 삼엄함을 느낄 수 있었다. 어쨌든 이 사천성은 중국 내륙.. 더보기 태고보우[太古普愚] 백장청규로 불교 쇄신한 조계종 중흥조 태고보우[太古普愚] 백장청규로 불교 쇄신한 조계종 중흥조 태고보우선사(1301~1382)는 나옹혜근선사와 백운 경한선사와 더불어 여말삼사(麗末三師)로 추앙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불교계의 최대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의 중흥조이다. 선사는 1301년에 태어나 1350년 이후인 공민왕대에 활동하였으며 조선건국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위화도 회군이 일어나기 6년 전인 1382년에 입적하였다. 선사는 왕사와 국사에 책봉되면서 불교계에 대한 쇄신을 꾀하고자 하였고 선사가 진작시킨 선풍은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에도 빛을 발하고 있다. 조선중기 이후 불교계에는 선사와 그의 문도가 계통적으로 이어진다는 법맥이 설정되어 있다. 나옹혜근.백운경한 선사와 ‘麗末三師’로 추앙 19세 때 가지산문서 ‘만법귀일 일귀하처’ 참.. 더보기 조계종의 법통 바로잡기/<지눌의 선사상> 조계종의 법통 바로잡기/ 길희성 교수(서울대·종교학)가 쓴 이 한손에 들어올 만한 크기의 영문 책자로 버클리 대학에서 발간된 때는 1984년이다. 그리고 2001년 봄이 되어서야 수정과 보완을 거처 우리말 번역판이 출간되었다. 하버드 대학에 제출된 박사학위 논문(1977년)부터 따지자면 어언 사반세기가 지나 독자는 그 한글본을 만난다. 은 일곱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첫 번째는 '지눌의 생애'. 고려라는 시대 상황과 고려 불교의 귀족적 성격을 조감했다. 마침내 개경을 떠나고야 마는 지눌의 뒷모습에서 독자들은 불교적인 '떠남', 즉 출가(出家)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지눌의 떠남은 단순히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12세기 고려 문화의 중심지로부터의 이탈이었다. 개인적인 구원에 목적을 둔.. 더보기 鏡虛의 禪思想 (경허의 선사상) ― 頓漸觀을 중심으로 ― 鏡虛의 禪思想 (경허의 선사상) ― 頓漸觀을 중심으로 ― Ⅲ. 鏡虛禪師의 頓漸觀(경허선사의 돈점관) 3-1. 鏡虛의 생애와 저술(경허의 생애와 저술)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 3000여 년, 한국에 불교가 전래된 지 1600여 년의 불교사상사를 돌이켜보면, 불교가 그 근본정신을 망각하고 썩은 고목처럼 되어 갈 때마다 불보살의 화신이 출현하셔서 썩은 고목나무에 새로운 가지와 잎과 꽃이 피게 하여 佛祖(불조)의 혜명이 다시 이어져 내려오는 것을 알 수 있다. 抑佛斥僧(억불척승)의 法難時代(법난시대)인 조선왕조가 멸망해 가고 불법의 혜명이 거의 끊어진 상태였던 근세에 法燈(법등)을 다시 밝히고 한국선 한국불교를 다시 중흥시킨 분이 바로 鏡虛禪師(경허선사)이다. 경허선사는 1849년 8월 24일 전주 子東里에.. 더보기 원효의 사상 원효의 사상 원효스님의 주요사상 1) 독특한 화쟁의 논리(화쟁사상) 원효스님은 한국역사상 유일하게 전문적인 논리학적 방법론을 사용했던 사상가이다. 스님이 사용한 논리방법론은 보통 ‘화쟁 논리’ ‘회통 논리’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동일한 문제에 대해서 경전이나 논서 사이의 해석이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 의견의 차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가 문제가 된다. 스님은 보통 각 주장이 가지는 옳고 그름(是非)에 대해서 설명 다음, 각 주장들이 취하고 있는 나름의 관점이 가지는 입장에서의 타당성을 긍정하는 형태를 취한다. 어느 경우이든 전적으로 옳다고 하는 입장은 취하지 않으며, 취하고 있는 관점 안에서의 타당성만 인정한다. 그리고 취사선택한 관점에 의해서 원효 스님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는 형태로 주장이 전.. 더보기 三國 ‘전륜성왕의 이름으로’ 불국토를 꿈꾸다 三國 ‘전륜성왕의 이름으로’ 불국토를 꿈꾸다 1. 고구려의 불교수용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였다. 고구려가 불교를 받아들인 372년은 국내외적으로 중요한 시기였다. 소수림왕의 아버지인 고국원왕이 백제와의 싸움에서 전사한 것이 불교를 수용하기 바로 1년 전인 371년이었고, 유교의 교육기관인 태학을 설립하고 율령을 반포한 것은 372년과 373년이었다. 이러한 나라의 국가적 위기를 타개하고 내치를 다지기 위해서 고구려는 불교를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는 372년 들어온 전진의 승려 순도와 374년 들어온 아도를 위해서 375년 성문사와 이불란사를 지었다. 소수림왕 국난 타개책으로 도입…광개토왕 전국 보급 물론 고구려에는 불교수용 이전 불교가 전래되어 있었다. 중국.. 더보기 5. 공유, 진속의 화쟁 ② 삼국통일 혼란 극복할 사상으로 ‘화쟁’ 제시 5. 공유, 진속의 화쟁 ② 삼국통일 혼란 극복할 사상으로 ‘화쟁’ 제시 원효는 한국이 낳은 가장 탁월한 불교사상가 중의 한 사람이다. 지정학적으로 신라는 한반도의 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불교의 도입이 고구려(372년)나 백제(384년)보다도 150년 이상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원효가 태어날 무렵은 신라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527년)된지 겨우 90년이 지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신라불교의 파급속도로 보아서는 불교의 순수교리에 대하여 연구할 기반을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것은 원효 이후 신라 통일기 불교가 교학에 대하여 쌓고 있는 업적으로 보아도 알 수 있다.1) 당시 민중은 계속되는 전쟁의 와중에 매우 고단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그러.. 더보기 조선후기 불교 사상의 정비와 사기(私記)의 저술 조선후기 불교 사상의 정비와 사기(私記)의 저술 조선 후기의 불교는 자생불교적 성격을 띄고 있다. 임란과 호란 이후 승군의 활동으로 일시적인 승직이 용인됨에 따라 자신들의 존재감을 확장해나갈 수 있었다. 17세기 전반에는 교단 내의 문파가 성립되었다. 이들은 유자들의 사회적 지위를 빌거나 자내적으로 법통설을 확립함으로써 정체성을 확인해나갔다. 또한 수행체계와 이력 과정을 정비하는 과정을 통해 불교의 구심력을 회복해갔다. 임제종 전통의 선 수행방식과 화엄을 정점으로 한 교학을 함께 이수하도록 정비해 나간 것이다. 이러한 교학의 중요성의 대두는 강학의 활성화로 연결되었고, 이에 강원의 참고서로서 여러 사기(私記)들이 다수 만들어졌다. 조선후기 불교는 단순히 철학적 담론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삼문수업과 같.. 더보기 이전 1 ··· 7 8 9 10 11 12 13 다음 목록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