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부는 저녁 ― 안토니를 위하여/하일지
바람 부는 저녁
할머니는 내 서랍 속에서 잔다
내 제비들과 함께
바람 부는 저녁이면
내 제비들은 열이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열이 있기 때문이다
푸른 열
나선형의 열
바람 부는 저녁에
모든 오리나무들은 울고 있고
모든 양귀비들은 시들어 가고 있고
모든 뱀들은 차가운 흙 위에서
경마장을 회상한다
알래스카에서 열린 공의회처럼
허공에 펄럭이는 경마장
내 어린 제비들은 밤새 기침을 한다
바람 부는 저녁에는
아무도 길을 나서지 않는다
길모퉁이에는 오직
여윈 이방인 한 사람만이
낡은 아코디언으로
이국의 선율을 연주한다
시베리아로 떠나는 기차의
기적 소리가 난 뒤로도 오랜 시간이 흐르면
조금씩 조금씩 바람은 잦아든다
내 어린것들의 기침 소리도
그리고 내 식물원 위로는
천천히 새벽이 다가온다
그러나 내 서랍 속 어디에서도
할머니는 찾을 수 없다
제비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던 할머니는
벌써 스무 해 전에
내 곁을 떠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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