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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이야기

승려와 철학자/장 프랑수아 르벨 · 마티유 리카르 지음

승려와 철학자/장 프랑수아 르벨 · 마티유 리카르 지음

서양 철학과 동양정신이 만나 펼치는 인류 지성사에 대한 열흘간의 지적 성찰!

[승려와 철학자]는 서구 과학문명을 공부하고 세포 유전학 분야의 과학자로 일하다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 히말라야에 정착해 위대한 스승들 밑에서 가르침을 받고 티베트 승려가 된 아들 마티유 리카르와 현대 프랑스 유명 철학자 5인 중의 한 사람으로 한림원 정회원인 아버지 장-프랑수아 르벨이 히말라야 산중에서 만나 열흘간에 펼치는 대화록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서양 철학자인 아버지와 전도유망한 분자 생물학자였다가 티베트 불교의 승려가 된 아들. 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인간의 갈 길을 모색하며 철학의 역할이 박탈당한 이 시대에 서양인이 불교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에 대해, ‘왜 불교일까? 왜 서양에서 대단한 호기심을 유발하는가? 수많은 추종자가 따르는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한 가장 적절한 해답을 제시한다.

 

인류가 안고 있는 위기를 헤쳐 갈 대안을 모색하는, 인류 지성사에 대한 광범위한 탐구.

26세 되던 해, 모든 것을 버리고 티베트 불교에 귀의해 구도의 삶을 살아가는 아들과 프랑스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언론인인 아버지는 20년 만에 네팔의 히말라야 산중에서 만나게 되고 둘은 인류의 정신적 삶에 대해 열흘간 지적인 대화를 나눈다. 이 책의 첫 주제는 왜 출가했느냐로 최고 수준의 과학문명을 공부한 학생으로서 지난 30년간 이룩된 인류 사상 가장 놀랄 만한 지적이고 과학적인 모험에 동참하지 않고 왜 히말라야로 갔느냐는 아들의 출가에 대한 아버지의 비판적 질문으로, 불가지론자인 아버지는 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적 깨달음에 끝없이 회의를 품는다. 아들은 풍부한 비유로 이를 설명한다. 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동서양 철학과 과학을 넘나들며 불교와 삶의 본질에 대해 진지하고 깊이 있게 이어진다. 현대 인문학의 세계, 인류 지성사를 한눈에 조망하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아들 마티유 리카르는 생물학과 물리학이 생명의 기원과 우주의 형성에 관련하여 놀랄 만한 지식을 낳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들로 행복과 고통의 근본적인 메카니즘을 규명할 수 있습니까?”라는 반문을 철학자인 아버지에게 던지며, 특히 출가 전 위대한 철학자나 예술가, 시인을 만나고 세계적인 과학자들을 사귀었지만, ‘저것이 내가 진정으로 열망하는 모습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겼다고 고백한다. 비록 자신의 분야에서는 세계적인 위치에 올랐지만 가장 소박한인간적인 완성과는 거리가 멀었고, 이를테면 위대한 시인이 사기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절망했으며, 이에 반해 그가 대학 시절 히말라야 여행에서 만난 티베트의 승려는 엄청난 감동으로 다가왔다고 말한다. 가르침과 현실에서의 삶이 일치하고 진정한 내면의 평화를 가져오는 불교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새로운 삶의 방편으로 손색이 없었으며, 20년 훨씬 넘게 승려생활을 한 아들은 아버지와의 대담에서도 이 선택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라고 이야기한다.

 

동양과 서양, 삶과 사상, 휴머니티와 과학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를 깊이 있게, 혼란의 시대에서 인생을 풍요롭게 살아가는 지혜를, 인류의 참 미래를 모색하는 지적 대화.

서로 너무나 대조적인 가치관으로 평행선을 달릴 것만 같았던 두 사람이 히말라야의 정경을 바라보며, 서로의 가치관에 대해 체계적으로 논의해 본 적이 없었던 두 사람이지만 최근 서양 사회에서 불교가 급속히 확산되는 것을 계기로 자연스럽고도 짜임새 있는 대화를 통해 서로간의 생각을 허물없이 교환하는 자리를 마련하기에 이른 것이다. 카투만두를 굽어보는 깊은 산 속의 외딴 산장에서 두 사람은 역사상 전 인류에게 부과되었던 여러 의문들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며 인류 지성사에 대한 탐구로, 동양과 서양의 정신사를, 삶과 사상, 정치와 휴머니티, 과학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폭넓게,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인생을 풍요롭게 살아가는 지혜와 인류의 참된 미래를 모색하기에 이른다. 인간 삶에 관한 진지한 성찰이 담긴 대화록 [승려와 철학자]에서 보여주는 부자간의 대화가 더욱 가치 있는 점은 이들 부자가 최고 수준의 서양 과학문명을 공부한 학자로서, 단순히 철학적, 종교적 문제만을 다루는데 그치지 않고 안락사나 인종 갈등, 유전자 복제 등 과 같은 현대적 쟁점들에 대한 지식인의 진지한 고민을 보여준다. 특히 세상의 단맛과 쓴맛을 두루 경험한 나이 든 아버지가 피력하는 유한성의 철학과 순수한 종교적 이상을 간직한 아들의 불교 철학은 서로 수렴하기도 하고 분산하기도 하면서 더 나은 세계와 인간을 지향하는 사람들의 노력을 감동적으로 연출한다. 이들의 대화 [승려와 철학자]는 프랑스에서 6개월 동안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했으며 세계 16개국에서 번역 출간되어 수백만의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 책을 간추린 내용이다.앞의 숫자는 쪽의 번호. 

 

33.과학과 구도의 삶의 양립-가능하나, 두 개의 의자에 앉을 수 없고, 양 끝이 뾰족한 바늘로 바느질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양자는 결코 불편한 관계에 있지 않다. 다만 어느 한 편이 지나치게 한 편을 침범할 때는 달라진다.

 

34.과학이론은 새로운 이론에 대체되면서 낡아가나 불교의 교리나 마음의 탐구는 진정한 내면의 변화로 나타날 때 완전히 살아있는 탐구,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탐구가 된다. 불교와 같은 형이상학적 전통은 낡을 수가 없다. 삶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기 때문이다.

 

40.<마르크스도 예수도 아닌> <전체주의의 유혹> 이 책들은 정치적 전체주의와 종교적 전체주의에 대한 이중의 부정을 내포한 책이다. 전체주의가 나쁜 것은 이론의 일부가 오류임을 주장하는 개인의 수정주의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43.불교는 종교인가, 철학인가?-철학과 종교를 이어주는 다리

 

45.불교는 종교인가, 지혜인가, 형이상학인가?에 대한 질문의 답

달라이 라마-“불교는 참 안됐다. 종교인들은 불교가 무신론적 철학이고 마음의 과학이라는 이유를 들어 거부하고, 철학자들은 불교를 철학에 끼워주지 않고 종교에 결부시키면서 거절한다. 그러므로 불교는 어디에도 시민권이 없다. 그러나 어쩌면 바로 그것이야말로 불교가 종교와 철학 사이를 이어주는 다리가 될 수 있게 만드는 장점이다.”

만약 종교라는 것이 신자 스스로 그 교리의 참뜻을 재발견해야 할 필요 없이 맹목적인 신앙행위에 의해 받아들여진 교리에 집착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그러나 신앙이 내적 진리의 발견으로부터 생겨나는 내적이고 확고부동한 확신이나 이러한 발견에 대한 경이감으로 이해될 때 불교는 신앙으로서도 배제할 수 없다. 반면 많은 기독교도들과 많은 사람들이 유신론적 전통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종교로 간주하지 않는다.

불교는 교리가 아니다. 부처는 자신의 가르침을 검토하고 성찰해야지, 자신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항상 진리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불교도는 부처를 신이나 성인으로서가 아니라 최고의 경지에 오른 현자로서, 깨달음의 화신으로서 숭배한다.


*종교의 주인공은 교리가 아닌 인간이며, 더 나아가 결코 신이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신은 인간이 만들었기 때문이다./도봉별곡

 

47.불교는 고통이 욕망, 집착, 증오, 자만, 질투, 무분별, 그리고 마음을 동요시키고 혼란과 불안에 빠뜨리는 부정적혹은 몽매적이라고 불리는 모든 심적 요인들로부터 나온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러한 감정들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자아의 개념에서 생겨난다. 이러한 자아에 대한 집착은 실제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 집착의 대상인 자아는 어떠한 진정한 실재도 갖고 있지 않다. 자아란 다양한 상호 의존적인 요소들의 일시적 결합에 지성이 붙여놓은 이름표에 불과하다.

곧 의존적인 조건을 원인으로 결과가 발생한다는 연기법적 현상에 불과하다. 그 결과는 다시 조건이라는 원인이 된다./도봉별곡

 

49.마티유 - 최근 몇 년 전까지도 티베트에 소설 같은 허구의 문학은 없었음은 사실입니다. 허구가 아니라도 현실을 갖고 쓸 것이 충분히 많았습니다. 

*틱낫한은 <싯다르타의 발자취에 대해서>에서 초자연적인 면모들이 제거된 부처의 삶에 대해 시적이고도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부처님의 입적 이후 수세기에 걸쳐 뛰어난 현자들과 학자들이 쓴 213권의 주석서와 주해서, 티베트에서 쓰여진 수천 권의 책이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52.불교는 행복과 고통의 메카니즘을 분석하고 분해한다. 고통은 어디에서 기원하며 원인은 무엇이고 치유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성찰을 한다. 삶의 일상적인 목적인 권력, , 명예, 감각적 쾌락 따위는 일시적인 만족을 가져다 줄 수는 있지만 결코 지속적인 만족의 원천은 될 수 없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불만으로 바뀐다. 우리는 사는 동안 세속적인 목적을 추구하기 때문에 물이 마른 강에 그물을 던지는 어부만큼이나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

 

53.자아란 다양한 상호 의존적인 요소들의 일시적 결합에 지성이 붙여놓은 이름표에 불과하다. 자아의 속임수를 폭로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무지, 다시 말하면 사물의 진정한 본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시적인 무능력이다.

 

57.명상을 통하여 자아의 비실재성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생각의 노예로부터 해방되는 탁월한 방법이다.

 

61.환생과 윤회에 관하여

사후 의식의 연속성은 대부분의 종교에서 계시적인 진리의 문제다. 불교에서 환생은 그 어떤 실체의 전생(轉生)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기능이나 지속성이 아닌 실체적인 말로 이해하는 한, 윤회라는 불교의 개념은 이해될 수 없다. 어떤 실()도 윤회라는 목걸이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계속적으로 다시 태어나면서 유지되는 것은 인격의 동일성이 아니라 제약된 의식의 흐름이다. 흐름을 따라 내려가는 나룻배가 없는 강물에 비유할 수 있다.


시작과 끝이 동시에 모양 없는 모양에서 뭔가 비롯됐는데 뭐가 세상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졌을까? 시작 이전에 다른 끝이 있고, 끝 이후에 새로운 시작이 있다. 인간 존재에 대한 질문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태어나서 사라진다고 믿는다. 그러나 양자역학에서는 연결된 시간이 없다. 시간을 원(圓. 동그라미)이라고 한다면, 원은 시작도 끝도 없다.

붓다는 시간의 의미를 이해하셨다. 현대 우주를 연구하는 분야에서는 붓다의 말씀처럼 성주괴공(成住壞空)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시작과 끝이 없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고 믿는 것일까. 우린 항상 “나 시간 없어”라고 말한다. 서울 사람들은 뛰어다니는데 시간에 쫓긴다. 그들 스스로가 쫓기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없다니./도봉별곡



62.기도나 의식, 깃발

미신과는 거리가 멀며 우리가 정신을 차리도록 끊임없이 자극하는 수단과 방편에 불과하다. 정신을 환기시키는 용도일 뿐. 가령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은 이 기도 위로 지나가는 바람이 어디로 가든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고통과 그 원천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도록 해주시라는 바람이다. 이때는 자연 자체가 교과서가 된다.

 

65.일상적인 소원을 이루려는 것보다는 공덕을 쌓음으로써 마음을 정화하고 지혜로 향하기 위해 기도하라.

 

66.주문-어떤 불운으로부터가 아니라 방심이나 정신적 혼란으로부터 마음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68.존재하지 않는 자아를 소멸시킬 수는 없지만 부존재를 식별할 수는 있으며, 자아에는 기원도 종말도 없으니 우리의 세계관을 왜곡시키는 자아의 환상을 일소해야 하는 것이다.

 

73.명상 과학과 의식의 흐름

생각을 지배하려는 시도는 맨 처음이 어렵다. 처음에는 폭포였다가 강으로 변하고 급류의 과정을 거쳐 고요한 날씨의 바다처럼 변한다. 마침내 바다의 깊숙한 곳처럼 흔들리지 않는 투명한 의식의 상태에 도달하는데 이러 상태에서는 마음은 완벽히 맑아지고 이리저리 따지는 생각에 휘둘리지 않게 된다. 대상이 없는 순수한 각성 상태.

 

76.환생

부처는 죽음은 단지 삶의 한 단계이며 의식은 죽음 후에도 지속된다고 말했지만 우리는 분별할 능력이 없다. 항상 진리를 말씀하시는 분이니 믿는다.

 

80.키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은 결코 일어난 적이 없고, 일어날 수 있는 일은 기적이 아니다.”

*기적이나 신화 등은 사실 여부를 따질 필요가 없다. 그 뒤에 담겨있는 의미를 잘 살펴보자. 결코 신비로운 의미가 숨겨진 것은 아니다/도봉별곡

 

81.스스로 높은 정신적 단계에 도달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불교 계율의 4대 위반 중의 하나.

 

83.육체와 정신 그리고 명상

불교에서는 유물론적 관점과 관념론적 관점 사이의 대립, 정신과 물질 사이의 대립을 잘못 제기된 문제로 본다. 사실 대부분의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의 생각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확고부동한 물질비물질적정신에 대립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유물론이 정신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 실패한 것은 물질을 물화(物化 :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가 물건과 물건사이의 관계로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천명을 마치고 죽는 것, 의 한계를 극복하고 융화되어 하나가 되는 것,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 육체와 정신 사이에서 걸림 없는 이동을 만물의 영원한 회귀이런 것들을 物化라 한다/도봉별곡의 주)했기 때문이다.

 

94.불교는 어떤 불멸의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연속성을 고려한다. 그것은 12연기설처럼 상호의존적이다.

 

101.현자의 평정과 행복은 어떤 외부적 요인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유리하든 불리하든 삶의 사건에 흔들리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커지고 굳건해지며, 개인을 인공낙원 안에 갇히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 자신의 마음을 활짝 열도록 인도한다.

 

104.불교에 따르면 비물질적 의식과 의식이 일시적으로 결부된 육체 사이에는 상호 작용이 있으며 의식의 흐름은 죽은 후에도 지속되며, 매번 태어나고 죽을 때마다 서로 다른 삶의 상태들을 경험한다. 물리학에서 에너지 보존 법칙에 대해 말하는 것과 같이 불교에서는 의식 보존의 법칙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각각의 존재에는 의식의 연속체 혹은 의식의 흐름이 있으며, 이것은 강물이 더럽혀지거나 정화되는 것과 똑같이 변형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인간은 그러한 변형 과정 중에 일상적인 존재들의 혼동 상태에서 부처의 깨달음의 상태로 이행할 수 있다. 베르그송은 의식은 뇌 이상의 것은 아니라며 초자연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이 될 수 없듯이 의식도 뇌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했다. 텔레파시의 존재는 비물질적 의식의 증거가 될 수 있다. 티베트 사람들은 생각의 전달이란 현상(텔레파시)을 거의 흔해빠진 일로 받아들인다.

*티베트인들은 이것으로 환생의 증거에 대한 시비를 증명한다고 생각한다. 바다와 파도는 같은가, 다른가? 여기서 바람은 의존적 존재로 등장한다. 그러면 같은가? 바다는 바람을 피할 수 없으니 같다. 그러나 다르다. 이런 것이 불교의 연기적 논법이다./도봉별곡

 

111.마음공부의 핵심은 생각과 감정의 정체를 밝히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해소하고 광대한 마음 안에서 그것들이 소멸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감정의 내용, 즉 감정을 촉발한 원인이나 정황에 집중하지 않고 그 감정의 근원을 캐나가는 것이다.

*마음 공부의 방법 중 가장 유효한 방법으로 명상을 꼽는다. 명상은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 이 둘 사이에 틈이 있다면 그것으로 비집고 들어가는 것<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티베트의 지혜/소걀 린포체>에서. 틈이 없다면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도봉별곡

 

112.-프랑수아 신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성을 합리적으로 증명하는 논문들은 철학과 신학 도서관에 가득하다. 여러 세기를 걸친 몇 톤 분량의 논문들이 쌓여있으니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것들은 신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성을 합리적으로 증명하는 데 결코 충분하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칸트는 선의 개념과 도덕의 개념을 통한 간접적인 증거에 의지한 것이다. 그것 역시 순수 이성을 통한 증거는 아니다.”

 

118.신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합리적 증명은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실험적 검증이나 재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 유의하라.

*존재 긍정의 증명 책임은 긍정을 주장하는 자에게 있다/도봉별곡

실험적 검증에 대하여는 유일한 차이는 내면적 깨달음은 보통 내면적으로 이루어지며 진실성이 약화되는 것은 아니다. 선량함, 관용, 자비심, 지혜와 같은 외적인 양상들은 단지 내면적 깨달음의 표시에 불과하다.

 

119.의학적 유물론-역사적 증언 같은 신비주의를 믿지 않는다. 과학적 증언의 영역 외는 믿지 않는다.

 

123.정신적 깨달음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며, 다른 차원, 즉 명상 체험-정신 영역에서 사물의 본성과 일치하기에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진실의 직접적 통찰-의 차원에 속한다. 이는 이 관점이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개념적인 추론을 초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명상적인 삶은 자체의 규칙을 갖고 있으며, 그 수련에서 생기는 심오한 확신은 물질세계에서 실행되는 그 어떠한 실험만큼이나 정신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다.

 

126.4장 마음의 과학/중요하므로 정독을 요망

 

128.명상의 두 가지 방법

1)개를 닮은 명상-생각이 날 때마다 쫓아다니는 명상

2)사자를 닮은 명상-생각의 근원을 향해 돌아서서마음에서 사념이 일어나는 근본 메카니즘을 조사하는 명상. 우선 잠시 생각의 흐름을 중단시키려고 노력하고, 지나간 생각을 간직하지도 말고, 미래의 생각을 부르지도 말고, 잠시 동안만이라도 이것저것 따지는 생각에서 해방된 현재의 각성 상태에서 머무는 것. 물결이 잠잠해지면 물이 맑아지듯이 본성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다음에 이것저것 따지는 생각의 성격을 검토한다. 예컨대 우리에게 고통을 주었던 사람이나 반대로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을 생각하면서 매우 강력한 감정을 의도적으로 일으킨다. 이러한 감정이 의식의 장에 나타나도록 한 후, 분석적인 조사와 순수한 명상을 번갈아 사용하면서 이러한 감정에 우리의 내면적 시선을 고정시킨다. 반복하다보면 그때 찾아지지 않음의 상태에 도달한다. 그 상태에서 잠시 명상에 머물면, 이것을 기술적인 측면에서 생각이 함을 알아봄이라고 부른다. 맑은 집중과 각성의 상태로서 해방이라 한다.

 

133.이것은 더 이상 감정의 노리개가 되지 않고 역경에 흔들리지 않거나 성공에 도취하지 않는 광활하고 평온한 마음을 갖게 된다. 소금 한 줌을 물 한 잔에 넣으면 그 물은 마실 수 없다. 큰 호수에 넣으면 물맛은 거의 변하지 않듯이 큰마음을 가져라.

 

*고통의 또 다른 원인은 자기중심주의다. 즉 아상(我相)에 빠지는 것/도봉별곡

 

135.8세기 불교의 스승인 샨티데바의 말씀

세상의 모든 행복은

남을 위하는 마음에서 오고

모든 불행은 이기심에서 온다

바보는 자기 이익에 집착하고

부처는 다른 사람의 이익에 헌신한다

네 스스로 그 차이를 보아라

 

137.선천적 자아 감정-우리 모두가 자연적으로 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으니 누군가 나를 부르면 대답하고, 날씨가 더우면 나는 덥다고 생각하고, 나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

 

139.불교의 두 철학 유파

1)의식은 궁극적이고 자율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으며, 마치 등잔의 불꽃이 외부의 광원을 필요로 하지 않고 스스로를 밝히는 것처럼 의식은 주객관계를 내포하지 않는 과정을 통하여 스스로를 의식한다.

2)불꽃은 어둠을 내포하지 않으므로 '스스로를 밝힐' 필요가 없으며, 빛이 스스로를 밝힐 수 있다면 어둠도 자기 스스로를 어둡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완벽하게 차단된 공간 안에서 불을 켜면 밝아진다. 불을 끄면 어두어진다. 그렇다면 빛은 어디로 갔으며 어둠은 어디로 갔는가? 오늘의 숙제다.

 -힌트

144.현상 안에서 의 동의어인 무한한 순수성......을 알기가 왜 이렇게 어려울까?/도봉별곡

 

145.마음 수련을 통해 마치 얼음덩어리를 녹여 물로 만들 듯이 사람과 사물에 대한 판단과 지각의 확고부동함을 녹여야 한다. 얼음과 물은 동일한 성분이지만 얼음은 단단하여 그 위에서 넘어지면 크게 다치지만 물은 부드러운 액체로서 모든 것을 감싸 안는다.

 

146.모두에게 불성이 있다.-각각의 존재는 그 안에 부처가 될 가능성, 다시 말하면 완벽한 해방과 깨달음에 도달할 가능성을 갖고 있다.

*卽心是佛. 내가 곧 부처다. 영원한 대명제/도봉별곡

 

150.영속적인 대상은 아무것도 없다. 사물은 너무나 미세하게 비영속적이어서 매순간 대상이 변한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공상(諸法空相)/도봉별곡

 

151.불교는 현상세계가 불가항력적으로 인과법칙에 의해 지배된다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인다. 그자체로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연기법을 제1의 교의로 인정한다./도봉별곡

 

155.불교가 가장 심하게 반대하는 힌두교의 이론은 이슈바라(시바?) 같은 전능한 창조자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즉 끊임없이 창조해야 진정한 창조자이다. 힌두교는 영원한 창조적 실체를 존재한다고 주장하지만 창조는 영원한 전지전능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한데 지금은 창조를 중단했다면, 즉 '창조의 의지와 결심'을 잃었다면 그는 전지전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으며, 영원한 실체를 인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창조하기 전과 창조한 후가 다르기 때문이다. 창조 당시에 그렇게 자주 나타났는데 현재는 왜 보이지 않는가. 

 

160.불교에서는 현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과연 무엇이 존재하는 것인가? 불교는 가운데 길을 택한다. 그것은 상대적인 지각의 세계에서 현상의 실재를 부인하지 않지만 현상 이면에 영속적 실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부인한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중도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우리 지각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라는 허무주의에 빠지지도 않고, 모든 지각으로부터 독립한 실재가 존재한다는 영원주의에 빠지지도 않는다.

불교는 현상의 에 대해 설명할 때 현상이란 겉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고정된 실체의 존재를 전혀 반영하지 않는다. 현상의 궁극적 본성이 이며, 은 그 안에 발현의 무한한 잠재성을 담고 있다.

*불교는 삼계유심(三界唯心), 만법유식(萬法有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등의 이론으로 모든 현상은 오직 마음의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도봉별곡

 

166.우리가 집착하는 자아가 실체 없는 허깨비임을 알 때 고통의 악순환이 끝난다.

 

171.5장 세계와 인간, 구도와 깨달음

 

172.불교를 가장 단순하게 정의하려면 로 간주해야 한다.

 

178.죽어서 사라진다는 것은 무지와 자아에 대한 집착이다. 그러나 그 빈자리에 깨달음의 무한한 장점들은 더없이 충만하게 나타난다. 깨달은 사람들은 더 이상 업의 영향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은 자비와 지혜의 힘을 가지고 중생들의 선을 위하여 제약된 세계에서 계속 나타난다. 그러나 그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니다. 열반, 즉 니르바나는 티베트어로 고통을 넘어서라는 의미다. 티베트 대승불교에서는 부처의 상태에 도달한 사람은 극단적인 것으로 불리는 윤회 전생에도, 열반에도 머물지 않는다고 한다. 무지로부터 벗어난 사람은 더 이상 그를 끝없는 환생으로 이끄는 업의 노리개가 아니기 때문에 윤회에 머물지 않으며, 또한 그는 끊임없이 고통받는 중생들에 대한 무한한 자비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열반의 평화에도 머물지 않는다.

 

179.불교의 초월의 개념-三體(모든 有情物에 내재하는 불성의 양상)

1)絶對體-모든 제한과 개념을 초월한다.

2)微細體-순수한 사랑과 지혜

3)發現體-석가모니와 같은 부처의 일신으로서 육체의 형태로 만날 수 있다

 

182.대승(大乘)의 심오함은 과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시각에서 기인하며 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현상이 고유한 실재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데 있다.

*無我라는 해석도 있으나 색즉시공을 보면 색의 본성은 이라는 것에 찬성, 그러나 아직도 안개 속 한 모퉁이에 서있는 느낌/도봉별곡

 

190.유일신교의 특징은 불관용과 공격성 때문에 전쟁의 종교라 한다. 항상 다신교가 훨씬 관용적임을 역사적으로 증명된다. 인도와 네팔의 경우다.

*야훼가 다신 중의 한 신, 특히 전쟁의 신이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기독교도가 많다./도봉별곡

 

191.달라이 라마는 평화의 배달부.

 

193.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과 강요는 단지 탈선일 뿐이다. 진실의 힘으로 설득해야지 폭력을 통하여 진실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를 입증하기 위하여 폭력을 필요로 하는 진리라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195.일신교는 모든 것을 감시하는 인격신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데 종교의 미명 아래 종족의 말살 같은 만행이 자행되고 있다. 인간 존재의 다양성을 존중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196.이란 개념은 갈피를 잡기 힘들어서 심지어 많은 사람들을 질리게 한다. 에서는 아무것도 생길 수 없고, 아무것도 적절하게 작동하지않을 것이며, 이러한 공허안에서는 인과법칙을 비롯한 어떤 법칙도 작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공 안에 발현의 가능성이 조금도 담겨있지 않다고 생각하고는 그 점에 관해 거북하게 느낀다. 이는 와 불교적 의미의 을 혼동해서 야기되는 것이다. 에는 아무것도 없는 반면, 보편적인 가능성’, 우주, 존재들, 운동, 의식 등을 말한다. 현상의 궁극적인 본성이 이 아니라면 현상이란 전혀 발현될 수 없을 것이다. 단순히 비유적 표현에 불과하지만 공간이 없으면 가시적 세계가 전개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만약 공간이 본질적으로 확고하고 영속적이라면 그 어떤 발현이나 변화도 불가능할 것이다. 때문에 불경에서는 이 있으므로 만물이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은 그 안에 모든 것을 담고 있으며, 이러한 가능성들은 상호 의존적이다.

 

198.불교에서는 세계에 시작이 없다고 말한다. 사실 시간의 시초(始初)를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발현에는 항상 선행요인이 필요한데, 어떤 것이 나타나기 이전에는 시간의 개념이 의미가 없다. 시간은 다만 관찰자에 의해 지각되는 연속적 순간에 붙여진 개념에 불과하며 시간에는 고유한 실재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각각의 순간들과 분리된 시간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은 단지 특정한 기준 체계와 우리의 경험에 관련하여서만 존재한다.

*불교의 시간은 과거는 죽어버렸고 미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며, 현재의 시간은 지각될 수 없다고 본다. 이를 초월하는 제4의 시간을 절대 부동의 시간이라 한다. 물론 진짜 시간은 아니며 상징적 표현에 불과하다. 불교의 우주론 또한 순환에 대해 말한다. 한 우주의 순환은 네 개의 시기-우주가 형성되는 시기, 우주가 지속되는 시기, 우주가 파괴되는 시기,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 시기-로 이루어지며, 그 후에는 새로운 순환이 나타난다. 빅뱅과 빅프리즈, 빅크런치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으나 아직은 미흡/도봉별곡

 

203.도 아니고 현상들과 분리되어 현상들 외부에 있는 빈 공간도 아니다. 그것은 현상의 본성 그 자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불교의 한 기본경전에서는 공은 형상이고, 형상은 공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空卽是色 色卽是空).” 절대적인 관점에서 볼 때 세계는 참되고 구체적인 실재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상대적인 양상은 현상세계이고 절대적인 양상은 공이다. 비슷한 관점에서 물질은 에너지이고, 에너지는 물질이다

 

209.어떤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원인이란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수많은 원인들도 결코 를 바꾸지 못한다. 는 본성을 바꾸지 않는 한 존재로 변하지 않는다.

 

212.6장 행동하는 서양문화, 성찰하는 동양불교

우리의 일상적인 삶은 전부 고통으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이 고통으로 벗어나기 위해서는 본질적이고 지속적인 실체, 즉 세계와는 별도로 시간 속에서 지속되는 자아라는 잘못된 감정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이러한 환상적 자아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탐욕, 욕망, 야망, 질투의 원천이다. 따라서 해방은 자아의 환상적 본질을 의식하는 데 있다. 고통에 대한 성찰은 우리를 깨달음의 길로 들어서도록 이끈다. 불자는 자신을 병자로, 부처를 의사로, 부처의 가르침을 치료로, 마음 수련을 치유의 과정으로 생각한다.

 

215.플라톤의 동굴의 그림자

플라톤을 공부하자면 동굴의 비유를 빼놓을 수 없어 간단히 소개한다. 가장 유명한 저서 <국가>에 나오는데 가장 핵심적 사상인 이데아를 설명한다. 이데아는 그림자 너머의 초월적 세계, 태양으로 표현된다.

처음에 동굴의 안쪽 상황이 자세하게 제시된다. 지하에 동굴 모양의 거처가 있는데 입구는 동굴의 너비만큼이나 넓으며 불빛 쪽으로 향해 있다. 동굴은 아래로 향해 있어 동굴 안으로 들어가려면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가게 된다. 이 동굴 안에는 어릴 적부터 사지와 목을 결박당한 채로 고개를 돌릴 수 없어 앞만 보도록 묶여 있는 죄수들이 있다. 이들의 위쪽으로 멀리 불빛이 타오르고 있으며, 이 불빛과 죄수들 사이에 가로 방향으로 길이 하나 있다. 이 길을 따라 담이 하나 세워져 있는데 이 담을 따라 사람들이 인물이나 동물의 모형을 들고 지나간다. 죄수들은 어려서부터 불빛에 비친 이 모형들의 그림자들만을 봤으므로 '인공적인 제작물들의 그림자들 이외의 다른 것을 진짜라 생각하는 일은 전혀 없다.' 그러다 이들 중 '누군가가 풀려나서는 갑자기 일어서 목을 돌리고 걸어가 그 불빛 쪽으로 쳐다보도록 강요'받고, 누군가에 의해 '험하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통해 동굴 밖으로 끌려간다. 끌려간 죄수는 빛에 익숙해지면서 처음에는 그림자를, 다음으로는 물속에 비친 사람들이나 다른 것들의 상을 본 후에 실제 사물들과 하늘에 있는 것, 그리고 하늘 자체를 보게 된다. 마침내 그는 '계절과 세월을 가져다주며, 보이는 영역에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하며, 그가 지금껏 보았던 모든 것의 원인인 태양'을 바라본다. 태양을 바라본 죄수는 계속해서 밝은 빛이 비치는 세상에 살고 싶어하며, 어두운 동굴로 다시 돌아갈 생각이 나지 않는다. 플라톤은 이를 빗대어 죽은 후에 죽은 자들의 왕이 되기보다는 살아서 남의 머슴살이를 하는 것이 낫다는 심정과 같다고 표현한다. 그러나 그는 다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그는 처음 올라올 때 빛에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동굴로 돌아가면서 다시 어둠에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동굴에 돌아가서 과거에 그와 있던 죄수들과 함께 보았던 그림자들을 다시 판별해볼 것을 요구받게 되는데, 그는 아직 어둠에 익숙한 상태가 아닌지라 다른 이들의 '비웃음을 자초'하거나, '위로 올라가더니 눈을 버려 가지고 왔다고 하면서 올라가려고 애쓸 가치조차 없다는 말'을 듣게 되거나, 심지어 죽임을 당하게 된다.

 

동굴의 비유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상징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동굴의 안쪽은 선분의 비유에서 언급된 감각에 의해서 알 수 있는 영역, 즉 지성이 없어도 알 수 있는 곳으로 진리가 아닌 의견의 영역이다. 반면에 동굴의 바깥쪽은 반드시 지성에 의해서라야 할 수 있는 곳으로 참다운 진리가 있는 곳이다. 죄수들이 보고 있는 그림자는 불빛에 비친 진짜 사물의 그림자로 복사물(태양의 복사물인 불빛)에 의해 만들어진 복사물, 즉 복합적인 허상이다. 반면에 태양은 모든 사물의 근원인 진정한 원인, 영원한 진리를 상징한다. 동굴의 비유 중 앞의 죄수가 동굴 밖으로 나가서 태양을 보기까지의 과정은 국가의 예비 통치자가 어떻게 진리를 인식하게 되는지에 대한 비유이며, 태양을 보고 다시 동굴로 돌아오는 과정은 진리를 인식한 후 실제로 국가를 다스리기 위해 어떠한 정치적 실천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에 대한 부분이다.


267.불교의 사랑과 자비는 지혜, 즉 사물의 본성에 대한 앎과 분리될 수 없으며 불행의 근본적인 원인인 무지로부터 타인을 구원해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자비에 모든 힘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지혜와 현명함이다.

 

282.9장 본성에 대한 망각, 선과 악

근본적으로 악은 오류 이외의 다른 실체를 갖지 않는다. 불교에서는 부처의 본성이 마치 참깨 속의 기름처럼 모든 사람의 내부에 존재한다고 한다. 거짓은 참된 존재를 갖지 않으며, 거짓은 어쨌든 참을 구성하는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악은 일종의 탈선에 불과하며, 이는 오류가 현실에 대한 그릇된 인식에 불과하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악은 허상으로만 존재한다.


285.서양의 철학자들은 어떻게 선한 존재이기만 한 신이 자연 안에 악이 존재하는 것을 허락할 수 있느냐를 설명하려 애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역설'은 악의 존재에 대한 설명이다. 이 역설은 '신은 전능하며 신은 선한데 악은 존재한다'는 삼도논법(3자 택일의 궁지窮地/딜레마)이며 그 내용은 자주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된다.

 

"신은 악을 없애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신은 전능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는 할 수 있지만 하지 않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악의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능력도 있고 없애려 하기도 하는가? 그렇다면 악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는 능력도 없고 없애려 하지도 않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를 신이라 부르나?"

 

그는 자연학에 있어서는 원자론적 유물론을, 윤리학에 있어서는 쾌락주의를 주장하여 쾌락주의 철학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쾌락은 방탕자의 환락이 아니라, 고통과 혼란으로부터 해방되는 일종의 평정(아타락시아)을 말한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널리 퍼져서 종교처럼 되고 큰 영향을 끼쳤다./도봉별곡

 

 

286.악과 고통의 원인인 무지는 우연한 오류이고 마음의 궁극적인 본성에서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갑작스러운 망각이지만 연쇄적인 고통스러운 체험을 일으킨다.


287.라이프니츠-신은 전능하고, 그러므로 악에 대해 책임이 있다, 아니면 신은 전능하지 않고, 그러므로 그는 신이 아니다.----그것이 바로 전능한 창조주라는 개념을 반박하기 위해 불교가 사용하는 추론이다.


288.결국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는 불교가 죄, 특히 원죄라는 개념을 거부한다는 점이다.

 

289.마음 수련의 근본적인 목표는 항상 완벽한 경계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주의와 경계는 정신적 삶을 통해 계발할 수 있는 근본적인 자질이다.

 

307.우리는 죽음의 순간도, 죽음을 야기하는 상황들도 예견할 수 없다. 그러나 본질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한 순간도 허비해서는 안 된다. 삶은 짧다. 그러므로 내적 자질을 계발하기 위한 길로 들어서는 것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337.기원전 2세기에 인도 서북부 박트리아를 통치했던 그리스의 왕(알렉산더가 인도를 정복하기 전에 확보한 영토의 왕) 밀린다와  불교의 현자 나가세나 존자 사이에 오간 대화형식의 철학 모음집(밀린다왕문경)에 비유를 통하여 왕을 교화시킨 기록이 있다.

*불경에는 비유법의 표현이 매우 많다./도봉별곡 

 

340.대승불교는 사랑과 자비를 강조한다. 그 가르침에 따르면, 주변의 중생들이 계속 고통을 받을 경우 자기만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은 소용이 없다. 구도의 목적은 본질적으로 모든 중생을 위하여 자신의 내면을 발전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343.길(道)-부처께서는 나에 대한 존경으로 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말라. 그것을 검토하고 그것의 진리를 발견하라. 나는 너희들에게 길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길을 따라 가는 것은 너희들에게 달려있다.”

*절에서 불상을 보며 3배를 하는 것은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3독(탐욕과 분노심, 어리석음)을 없애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고 오체투지는 몸과 마음을 낮춰 3독에 교만과 질투를 땅에 버리겠다는 의지로 본다/도봉별곡

 

350.만다라는 세계와 존재들을 완벽한 장소와 거기에 머무는 신들의 형태로 상징적으로 재현한 것이다. 만다라의 들은 신이 아니다. 그것은 불성의 원형이며 그것의 다양한 양상들이다. 만다라에 대한 명상은 이른바 순수한 통찰력’, 즉 만물에 존재하는 불성의 이해로 이끄는 것이다.

 

351.사리탑은 부처님의 마음, 글씨는 말, 조상(彫像)은 육체를 상징한다. 탑을 돌 때 깨달음을 향해 걷는 것이고, 불을 밝힐 때는 인간 존재의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이 불타 없어지게 하소서’, 먹을 때는 각자가 관조를 맛볼 수 있도록’, 문을 열 때는 자유의 문이 모든 존재에게 열리게 하소서를 기원하는 것이다.

 

352.초자연적인 존재들을 그려놓은 벽화는 어떤 본질적인 실체가 있는 그 신이 아니고 깨달음의 다양한 특징들을 상징적으로 재현한 것이며, 얼굴은 유일(唯一), 절대를, 두 팔은 자비의 방법과 하나를 이룬 의 지혜를 상징하는 것이다. 첫째 마음의 집중, 둘째 명상의 의식, 셋째 자기 안의 불성에 대한 이해.

 

353.부처님께 절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궁극적 지혜를 구현한 사람에 대한 존경의 표시다. 이것은 지혜에 대한 겸손의 표시이기도 하다. 이것은 자만의 해독제로 사용된다. 자만은 지혜와 자비의 출현을 막는다. 물이 산봉우리에 고이지 않듯이 진정한 공덕은 자만의 꼭대기에 모이지 않는다. 오체(五體)를 땅바닥에 놓는 오체투지 동작은 증오, 욕망, 무지, 자만, 질투라는 오독(五毒)을 정화하여 그에 상응하는 다섯 가지 지혜로 변화시키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 손이 바닥을 따라 자신을 향해 미끄러질 때, 사람들은 모든 존재들의 고통을 나에게 끌어 모아서 그것을 감당하여 소진시킬 수 있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356.깨달음의 정의-자기 자신과 궁극적 본성을 발견하는 것. 자기 안의 불성을 발견하고 대화하는 것.

신앙의 종류

1)밝은 신앙

2)열망

3)확신

4)결실

 

358.14장 삶의 한 단계로서의 죽음

358.세상으로부터 은거한다는 것은 죽음을 위한 준비. 몽테뉴<수상록>철학을 한다는 것은 죽음을 배우는 것.

불교는 바르도라 불리는 죽음 이후의 전이 상태를 인정. 최고의 수행자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개인적 자아, 현상의 확고부동함, 소유 따위에 대한 애착이 사라지면 죽음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 죽음은 친구와 같은 존재이며, 삶의 한 단계이고 단순한 이행(移行. 옮겨감)이다. 죽음의 과정을 살펴보면 숨이 멎은 후에는 의식과 육신이 몇 단계에 걸쳐 소멸하게 된다. 그러고 나서 물질계가 우리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될 때, 절대의 상태-의식이 육신과 연결되어 인식에 의해 제약된 세계와 반대되는 상태-로 우리의 마음이 해체되어 사라진다. 죽음의 순간에 의식은 아주 짧은 동안 이른바 절대 차원의 광명 공간속으로 흡수되었다가 다시 나와 중간 상태인 바르도를 지나게 되는데, 우리는 이를 통해 새로운 삶, 즉 재탄생으로 이르게 된다. 바르도의 다양한 경험들이 다가오기 전, 바로 이 순간에 사물의 궁극적인 본성을 깨닫는 데 이를 수 있도록 절대상태에 머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명상도 있다.

 

361.죽음에 대한 추론

1)내세의 삶에 대한 믿음에 근거

 

2)순수하게 철학적이며, 내세를 믿지 않는다. 나라는 생물체적 실체가 붕괴되어 사라지는 것은 불가피하고 당연한 사건이므로 체념한다. 에피쿠로스는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해야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음과 결코 만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기 존재할 때는 죽음이 아직 없는 것이고, 죽음이 여기 있을 때면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주된 관심사는 쓸데없는 공포-, 죽음, 번개, 지진과 같은 자연현상들에 대한 공포-로부터 해방시킨다는 것이다. 티베트 교훈에 항상 죽음을 관조한다면 너희들은 마음 수련을 힘을 쏟을 것이고, 마음 수련을 행하고자 하는 열정을 새롭게 할 것이며, 죽음을 절대 진리와 결합하는 것으로 보게 될 것이다.”

 

368.불교에는 천벌이 없다. 행위에 대한 업보는 처벌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결과다. 죄는 환상과 이기주의 결과이기 때문에 그 자체의 처벌 역시 포함하고 있다. 신은 벌하지 않는다.

 

369.바르도-죽음과 탄생 사이의 중간 상태. 중간 혹은 전이 단계를 의미. 삶의 바르도, 즉 탄생과 죽음 사이의 중간 상태. 그 다음에는 죽는 순간, 즉 의식이 육체와 분리되는 순간의 바르도. 여기에는 두 가지 단계의 해체가 존재한다. 바로 육체적 · 감각적 능력의 외적 해체와 심적 과정의 내적 해체.

 

1)첫 단계의 해체는 육체가 살아있는 유기체에서 무생물로 변형. 생명을 갖고 있는 의식적인 유체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들의 해체라는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는데, 그 각각의 원소들은 생명이 없는 외부세계를 구성하는 다섯 가지 원소와 융합하면서 그 차이를 잃어버리게 된다. 견고함을 상징하는 의 원소가 해체될 때 유체는 무겁게 느껴지고 자세를 유지하기가 힘들며 산과 같은 무거운 것에 눌리는 것처럼 느껴진다. ‘의 원소가 해체될 때는 점막이 마르고 갈증을 느끼며 마음은 혼란스럽게 되어 강물에 휩쓸려가는 것처럼 표류하게 된다. ‘의 원소가 사라질 때 육체는 열기를 잃기 시작하고 정확히 외부세계를 인식하는 것이 힘들어진다. ‘공기의 원소가 해체되면 숨을 쉬기가 어렵게 되고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으며 의식을 잃게 된다. 환각이 생겨나고 마음속에서 우리 삶 전체가 필름처럼 전개된다. 어떤 사람들은 평온을 느끼게 되고 광명에 찬 평화로운 공간을 보기도 한다. 그리고 마침내 호흡이 멈추게 된다. 그러나 내적 호흡이라는 생명력이 잠시 존재하는데 얼마간 계속되다가 정지된다.

 

2)두 번째 단계의 해체에서는 지속적인 의식의 흐름이 점점 미세해지는 일련의 상태를 통과한다. 우리는 거대한 빛의 단계, 이어서 지복(至福)의 단계, 마지막에는 모든 생각이 완전히 부재한 상태를 체험한다. 우리가 짧게나마 절대 체험은 하는 것은 바로 그 순간이다. 훈련된 수행자라면 그때 절대적인 바르도라 불리는 상태에 남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죽음과 다음 번의 재탄생 사이의 중간 상태로 접어든다. 마치 업의 바람에 휩쓸려가는 깃털과 같다.

 

371.진리는 고유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거짓은 터무니없는 노력을 지불해야만 유지될 수 있기 때문에 조만간 실패에 이르게 되어 있는 덧없는 허울에 불과하다.

 

373.티베트의 불교에도 은거를 오래 할 때 가르치는 호흡 조절 훈련과 육체 훈련이 있지만 초심자나 특정한 마음 수련의 맥락을 벗어나는 경우에는 결코 가르치지 않는다.

*한국의 선불교도 같다. 개인 또는 오랫동안 검증되지 않은 단체가 금전을 받고 가르치는 호흡 명상이나 마음 수련은 권하지 않으며 육체와 정신건강상 해로울 수 있음을 알고 주의해야 한다. 너도나도 선생이라니./도봉별곡 

 

374.금욕의 목적은 마음의 지배이다.

 

376.명상에 관하여 불교에서는 자기의 마음을 아는 유일한 방법은 먼저 분석적인 방법으로, 다음에는 관조적이거나 명상적인 방법으로 직접 정신을 검토한다. 여기서 말하는 명상은 막연한 정신의 이완 요법보다 훨씬 많은 것을 의미하며 몇 년에 걸친 수행 끝에 마음의 본성과 심적 사건들이 나타나는 방식을 점진적으로 발견해 나가는 것이다.

 

401.습관적인 성향(유식론에서 제8아뢰야식에 저장된 업식)이 남아 있을 때 불교는 앎의 불로 그것을 태워버리는 것이 더 간단하다고 생각한다. 앎은 마음의 궁극적인 본성, 을 깨닫게 해주고 동시에 모든 성향들의 흔적을 지워준다.

 

404.불교의 명상은 해독제를 사용하여 욕망의 본질적인 함을 인식하게 하고 욕망을 앎으로 전이시키게 된다.

 

411.18장 진보와 새로움에 대하여

 

412.고통의 해독제, 즉 자아에 대한 집착을 치유하는 해독제는 사유의 근원에 이르러 우리 마음의 궁극적인 본성을 인식하는 데에 있다.

 

413.마음의 본성에 대한 명상이 목표하는 바는 증오, 욕망, 질투, 불만, 자만 등은 사람들이 그것들에게 빌려주는 힘만을 지닌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것들을 분석하고 그 근본적인 성격을 알게 될 때까지 벌거벗겨관조하면 그것들이 확고부동함이나 억압적인 힘들을 실상 갖고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416.시간 속의 구원은 곧 보살의 서원으로서 모든 중생이 고통과 무지로부터 벗어날 때까지 노력하는 희망이다. 환상에 탐닉하는 예술가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서양에서는 예술가들이 완전히 엉터리 같은 그림을 그리는데도 개성이 있다고 해서 그 그림들에 엄청난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들을 미술관에 전시한다. 이러한 현상은 임금님은 벌거숭이!’라고 외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420.계시적 종교의 한계

*증명이 불가능하다는 과학과의 갈등이 있어 무신론에 가까운 불가지론이 등장/도봉별곡

 

423.보편적으로 창조성이 의미하는 것은 내적인 감정의 본능적인 표현인데, 그것은 우리를 조종하는 습관적인 성벽의 범위 안에서 뱅뱅 맴돌 뿐이다. 그것은 우리를 무지나 욕망, 적으로부터 해방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를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지도 않고, 더 현명하고 더 자비롭게 만들지도 않는다. 진정한 창조성은 진리를 가리고 있는 우리의 무지와 자기중심주의와 점차 결별하고, 마음과 현상의 궁극적 본성을 밝히는데 있다.

 

425.불교 수행자는 자신이 갖고 있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은 손에 보물을 쥐고 있다.’고 생각한다. 불만족은 불필요한 것을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태도에서 나온다. 이것은 부와 지식, 안락, 쾌락에도 적용된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 개념이 여기에서 착안한 것 같다. 불필요한 것은 가지지 않는 것. 수행승들의 방은 대체적으로 검소하며, 그러므로 깨끗하다./도봉별곡

 

426.부처와 마라(에고)의 대화-너는 무슨 권리로 깨달음에 도달하기를 원하느냐? 나의 권리는 내가 수많은 삶의 과정 끝에 얻은 앎에 근거한다. 새벽녘이 되자, 마지막 무지의 조각들이 무너져 내리고 부처는 마침내 인간과 사물의 비실재성을 완벽하게 깨닫고, 즉 현상세계는 상호의존적 작용에 의해 나타나며 본질적이고 변함없이 오랫동안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붓다는 연기법의 이치를 완벽하게 깨달았으며, 사성제, 팔정도, 오온, 삼법인, 삼독, 중도, 삼학, 유식, 공은 연기법을 보총 설명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도봉별곡

 

427.마음 수련에서는 어려움이 처음에 오고, 세상사에서는 어려움이 끝에 온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오지 않고, 중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끝에는 아무것도 떠나지 않는다.' 진정한 앎을 얻는데 필수적인 근면함은 '고통'이 아니며, '노력의 형태로 흘러나오는 기쁨'이다.

 

429.구조주의는 실존주의에 대한 반작용인데 실존주의는 자유와 개인의 선택과 개인의 궁극적인 책임에 모든 문제를 돌렸다. 구조주의자는 아니다, 인간은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을 통해 작용하는 구조들이 인간을 관통하고 있다고 한다.

 

432.자아는 아무것도 아니며 나는 단지 어떤 실재의 흐름이 지나가는 장소일 뿐이라는 확신에 이르게 되면 어느 정도 평온에 도달한다. 불교 신자의 경우 무아는 해방을 경험하는 것이다.

 

435.현자의 시각은 하늘보다 높고, 인과법칙에 대한 그의 식별능력은 밀가루보다 더 섬세하다. 우리는 스스로가 뿌린 씨앗에 저항할 수 없지만 우리를 불행으로 이끌어 가는 것과 그 불행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을 분별할 줄 앎으로서 미래를 건설할 수 있다.

 

438.기독교는 죄악회개면죄의 변증법적 종교였기에 그러한 변증법에 따라 움직여 왔다.

 

440.이타주의와 자제는 지혜의 표시, 감정들로부터의 해방은 명상의 표시다.

 

445.은둔자에게 있어 모든 소리들은 기도, 그리고 그는 만족한다. 날으는 새가 하늘에 아무런 자취를 남기지 않듯이 은둔자에게 있어 모든 생각들은 절대적 본성 안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그는 만족한다.

 

451.우리가 현재의 삶에 의미를 주는 지혜를 발견한다면 바로 그 지혜가 미래를 살아갈 우리의 삶에도 의미를 줄 것이다. 따라서 앎과 정신적 깨달음은 삶이 길건 짧건 간에 하나이든 여럿이든 상관없이 삶의 순간마다 적용된다. 우리가 삶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한다면 그 발견의 혜택을 누리기 위해 죽음을 기다릴 필요는 없다.

 

452.장-프랑수아 : 나는 삶을 견디어낼 수 있게 해주는 모든 지혜에는 한계가 있다. 가장 큰 한계는 죽음이다. 나는 내세나 죽음 이후의 무엇과 같은 어떤 형태로든 그 영원성을 믿는 교리들과, 죽음이란 한 존재의 완전한 無化이며 내세란 없다는 원칙에서 출발하는 교리들을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살-마음이 죄를 저질렀는데 왜 죄 없는 육신을 죽이는가? 어느 누구도 육체를 죽일 권리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 불교의 입장이다./도봉별곡

 

2014. 6. 24.

 

바닷물이 왜 짠가를 알기 위해 모든 바닷물을 마실 필요가 없듯이 전체를 읽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하여 도반들과 작은 것이라도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 간추려 메모한 것을 올립니다. 올렸으니 이미 제 손과 마음을 떠났습니다.


2016. 2. 5. 도봉별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