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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생.불.멸[不生不滅]- 구산 스님[九山秀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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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辛卯年: 43세]음력 1월 15일. 동안거 해제解制를 맞이하여 부산 동래
금정사에 주석하고 계신 은사恩師 스님을 친견親見하고 다음 게송을 올리다.
大地色相本來空 以手指空豈有情 대지색상본래공 이수지공기유정 豈어찌기
枯木立岩無寒暑 春來花發秋成實 고목입암무한서 춘래화발추성실
◇. 1983년[癸亥年: 75세]음력 10월 15일. 동안거 결제 법어를 마치고 난 후, 스님은 미질微疾을 보이더니 스스로 세연世緣이 다함을 예감하고 병중공부로 37일[三七日] 용맹정진을 단행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수선사 선원 뒷산으로 산책을 나간 스님은 시자侍者에게 그간 공부에 대해 물으신 후, 손을 들어 보이며 또 묻기를,
"어째서 내 이 손이 부처님 손과 같으냐? "
" …… "
또 스님의 다리를 들어 보이며,
"어째서 내 이 다리가 당나귀 다리와 같으냐? "
" …… "
그리고 또 묻기를,
"삼세 불조三世佛祖가 일찍이 이르지 못한 일구[一句]를 일러 보아라 " 하셨다.
" …… "
깊어 가는 가을. 스승과 제자간에 조용한 문답과 많은 이야기가 오고갔다.
天地未分事 千聖不得會 천지미분사 천성부득회
寸步不離處 卽見本來人 촌보불리처 즉견본래인
날마다 스님을 친견하였어도 눈 먼 봉사였고,
날마다 스님의 법문을 들었어도 귀머거리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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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생불멸不生不滅의 원리를 깨달으면 그 세계를 체성體性이라 하고 물질세계를 연구하는 것을 과학科學이라 한다. 물질세계에서 현묘玄妙한 세계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을 향상일로向上一路라 하고 그것을 참구하는 과정을 철학哲學이라 한다.
적정寂靜한 체성이 동용動用하니 음과 양으로 나누어져 천지天地가 생기고 또 천지간에 만물萬物이 발생하니 이것을 현상계現象界라 한다. 이러한 이치를 연구하고 탐구하는 것을 자연과학이니, 또는 철학이니 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주의 대진리인 근본 체성을 우리가 어떤 면으로 연구하고 탐구하느냐에 따라서
철학이니 문학이니 예술이니 종교니 등 각기 다른 명칭으로 불리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근원根源을 논리적인 면으로 실험 분석하면 과학科學이 되고, 감성적인 면으로 표현하면 문학文學이 되고, 미적인 면으로 표현하면 미술美術이 되고, 음률적인 면으로 표현하면 음악音樂이 되고, 신앙적인 면으로 표현하면 종교宗敎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 오묘한 진리를 참구하여 깨친 자를 법왕[法王]이라 하며 절대자[絶對者]라 하고 대도인[大道人]이며 진리의 대상자[對象者]라 한다. 다시 말하면 이것을 체대體大·상대相大·용대用大로 나눌 수 있다.
진리의 체성體性은 무변허공無邊虛空도 그 속으로부터 발현되었으니 체대體大라 하고 보광명지[普光明智]가 무소부조[無所不照]라, 지혜광명이 비추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에 상대[相大]라 하고, 천지와 그 속에 건설된 온갖 것들이 무수하기 때문에 용대[用大]라 한다.
그래서 체성을 깨달은 자는 무생법인[無生法忍],즉 본래 청정한 진리를 증득하여 만물의 이치가 명백하니 만법萬法의 왕王이라 한다. 이 세상의 온갖 이치를 꿰뚫어 보매 이 어찌 만물萬物의 영장靈長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은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진리에서 이탈한 것이 한 가지도 없는 까닭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일즉일체[一卽一切]요 일체즉일[一切卽一]이라,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라. 이를 일합상一合相이라 하고 또한 이를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이라고도 한다.
상[相]이란 이 세상 모든 사물의 그 모양과 빛깔을 말하며 이 모든 사물의 모양과 빛깔을 통틀어 말할 때는 총상總相, 또는 대총상大總相이라 한다. 이렇듯 물질의 모든 상법相法이 변하기 때문에 무상無常하다고 한다. 이 덧없는 것을 영원불변하는 실상實相인 양 착각하므로 이 세상을 한바탕 꿈이라고도 한다.
철학은 과학의 모체母體요 과학은 철학의 지말枝末이라 할 수 있다. 비유하면 복숭아나무가 추운 겨울에 줄기만 앙상하게 서 있다가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열매가 열려서 마침내 맛있는 과일이 되었다고 할 때에 복숭아는 산소·수소·질소·탄소 등의 원소로써 결합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원소들을 가지고 복숭아를 다시 만들 수 있겠는가? 아무리 원소가 있다 하더라도 복숭아를 다시 만들기란 불가능 하다.그러면 무엇이 이 원소를 가지고 복숭아라는 과일을 만들어 내었는가? 이것이 문제의 초점焦點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우주의 근본인 우리 마음의 체성[體性]이다.
영원히 때 묻지 않고 변하지도 않는 본성本性인 것이다.
이렇듯 무위화無爲化의 본성이 이 만유의 모든 형상을 만들어 내고
변화시키고 파괴시키는 것을 용[用]이라 한다.
그래서 대도大道는 무문無門이라 하니 들어가고 나와도 출입이 없고, 생生하고 멸滅해도 증감이 없으며, 분단적分段的으로 변천이 있는 것 같으나 체성體性에 있어서는 추호도 손실이 없으니 무위대도[無爲大道]라 한다.
무변한 중생이 각체覺體를 여의지 않고 그 기틀을 따라 응용하며, 무량한 제불諸佛이 국토를 장엄함에 무위지[無爲智]를 운용하여 유정有情을 이익케 하니 이를 무위진인[無爲眞人]이라 한다. 이러한 묘용妙用을 다시 한 번 살펴보기로 하자.
여러분 자신의 주인공[主人公]이 있는가 없는가?
여자들은 남편을 주인主人이라 하지만 그 주인은 살림살이하는 가정에서 부르는 주인이고 사람들 개개인箇箇人의 주인은 각자의 마음이다. 몸은 객[客]이기 때문에 육체 본위로 생각하는 것은 객지생활[客地生活]이요 주인인 마음을 깨쳐 살 때 몸과 마음이 화합하여 건전한 정신에 건강한 육체로 살아갈 수 있다.
마음이 약화되면 육체는 병病이 나고 육체가 병이 나게 되면 하고자 하는 일을 뜻대로 이룰 수 없다. 주관主觀이 단단하지 못하면 잡신雜身이 침해侵害하게 되고 침해하게 되면 온갖 고통을 받게 된다.
또 마음의 수양修養이 부족한 사람은 언행이 불순하여 자기 자신만 해害를 입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쳐 마침내 패가망신의 화근을 초래하는 것이다. 인간은 수양의 경지가 높아질수록 겸손謙遜하고 양보심이 많고 자비慈悲하며 대인관계가 원만해진다.
그러기에 남에게 존경을 받고 화목하여져 일이 뜻하는 대로 성취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을 도덕군자道德君子라 한다. 적敵이 없어지고 언제 어디서나 근심 걱정이 없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일러 심덕心德이 좋은 분이라 입을 모아 찬탄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육체 본위肉體本位로 살며 물질에만 치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질에만 치중하지 말고 마음을 찿아서 깨쳐야 완전한 인격을 성취한다. 그가 바로 절대자요 만물의 영장靈長이요 진리의 대상자요 절대자유인 생사해탈生死解脫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모든 부처님이나 조사祖師들도 생사를 엄연하게 받는데
무엇을 보고 생사해탈生死解脫이라 합니까? "
도인道人은 말했다.
"당신 보기에는 생사를 받는 것 같이 보이지만
유有와 무無에 착각한 허물을 어찌 모르는고. "
비유하면 해가 떴다가 지면 낮과 밤이 반복하니 이를 하루라 한다.
하루하루가 모여서 한 달이 되고 한 달 두 달이 모여서 일 년이 된다.
그러나 일광[日光]의 자체에도 낮과 밤이 있겠는가?
이와 같은 것이다.
진리를 깨친 자는 자타自他가 없고, 자타가 없기 때문에 원근遠近도 없고,
원근이 없기 때문에 거래去來도 없고, 거래가 없기 때문에 생사生死도 없다.
나 자신의 본래 성품인 진리는 천만 겁을 지나가도 오고감이 없는 것을 누구에게 일러줄꼬?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이 몸은 물질이기 때문에 분단생사分段生死가 있다.
비유譬喩하면 옷을 갈아입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아무리 좋은 천으로 옷을 지어 입어도 헤어지고 떨어지면 불가불 갈아입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새 옷을 갈아입었다 해서 사람까지 딴 사람으로 변하겠는가?
시조時調나 한 수 읊어 보리라.
雖好錦衣故換新 수호금의고환신 이나 雖 비록 수
氣分爽快本來人 기분상쾌본래인 이로다
勤修福慧非閑事 근수복혜비한사 나
應備百年身後身 응비백년신후신 이로다
입은 옷 좋다 해도 언젠가는 갈아입고
새 옷을 입었다손 사람마저 달라지리
이 마음 백 년 뒤에 무슨 옷을 입으련고.
<오도송>
深入普賢毛孔裡 심입보현모공리
捉敗文殊大地閑 착패문수대지한
冬至陽生松自綠 동지양생송자록
石人鶴駕過靑山 석인학가과청산 駕 멍에 가. 탈 것
보현의 모공毛孔 속에 깊이 들어가
문수를 붙잡으니 대지가 한가롭구나
동짓날에 소나무가 스스로 푸르르니
돌사람이 학을 타고 청산을 지나가네
<열반송>
滿山霜葉二月花 만산상엽이월화
物物頭頭大機彰 물물두두대기창 彰 밝을창
生也空兮死也空 생야공혜사야공
能仁三昧微笑逝 능인삼매미소거 逝 갈서
가을 서리 내린 낙엽이 봄꽃 보다 붉나니
두두만물의 큰 기틀이 모두 뚜렷하도다.
삶도 공空이요 죽음도 공空이러니
부처님의 해인삼매 속에 미소 짓고 가노라.
♤ 구산 선사九山禪師 연보年譜 ─────────────────────────────
* 스님의 본적은 전라북도 남원군南原郡 남원읍 내척리內尺里 509번지이며,
진양 소씨晉陽蘇氏 재형在衡을 아버지로,화순 최씨和順崔氏 성녀性女를 어머니로,
1910년 1월 27일(1909년 己酉年 음력 12월 17일)에6남매 중 3남三男으로 태어나다.
* 법명法名은 수련秀蓮이요 법호法號는 구산九山이며, 별호別號는 석사자石獅子요,
아호雅號는 타우자打牛子 또는 "소친애 " "조계산 돌맹이 "라 하고,속명俗名은 봉호이다.
* 1937년 음력 4월 8일. 조계산曹溪山 송광사松廣寺 삼일암三日庵에서
효봉 학눌曉峰學訥 선사를 은사恩師로 사미계沙彌戒를 수지受持하다.
* 1939년 음력 4월 15일. 영축산靈鷲山 통도사通度寺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해담 치익海曇致益 화상을 계사戒師로 구족계具足戒를 수지受持하다.
* 불기 2527년(서기 1983년) 12월 16일(癸亥年 음력 11월 13일).
승보종찰僧寶宗刹 송광사 조계총림曹溪叢林의 삼일암 미소실微笑室에서
입적入寂하니, 세수世壽는 75세요, 법납法臘은 46년이다.
[출처] 불생불멸[不生不滅] - 구산 스님[九山秀蓮] |작성자 혜연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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