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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이야기

시킴 히말라야/임현담

시킴 히말라야/임현담

부처는 평생 윤회에 대하여 설법한 적이 없다고 한다. 다만 연기와 업을 들어 단초를 제공하기는 했다. 현재의 삶은 지난 생의 결과라 생각하면 그것이 윤회임을 믿는 것이다. 불교와 힌두교의 차이는 힌두교는 범아일체를 교의로 하여 아트만 즉 자아를 인정하지만 불교는 자아를 부정한다. 현재의 삶이 윤회 자체라고 생각하면 굳이 윤회를 부정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윤회를 인정해도 해가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일 따름이고, 죽음은 마침표가 아닌 쉼표이다. 누구나 하나의 순례지가 있을 것이다. 오고가는 사이에 삶을 지배하는 죽음에 대하여 명상해보라. 답이 나올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의 답이. 단 먼저 찾아가라, 갑작스러운 죽음의 방문을 받기 전에.

 

늦지 않다. 60살까지는 전생을 살았다고 간주하고 나머지 생은 후생이라 생각해보라.

 의식주행에 매달리는 일상은 목적에 시달리는 노예와 무엇이 다른가? 따라서 자연이 가지고 있는 무목적성을 잃게 된다. 산을 걷다보면 모든 목적이 무목적 안으로 수렴되는 순간을 만난다. 히말라야 같은 큰 산 앞에서 부처님이 푸른 허공에서 홀로 서서 시공을 초월하여 여는 영산법회와 같은 감회를 느낀다. 굳이 도를 깨치려고 노력하지 마라. 네가 도가 되면 그만이다. 굳이 부자가 되려 하지 마라. 네가 보석이 되면 그만이다.

 

힌두교와 불교가 다른 점은 힌두교는 아니다 아니다이며/ 불교는 있다고 하면 없다고 답하고 없다면 있다고 답한다는 점이다.

 

무고한 육신을 죽이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자살은 괴로움이 잔뜩 쌓여있는 마음에 대해서 해야지, 지각능력이 없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육체에 대해서 하면 안 된다. 자살 충동을 느끼게 하는 고뇌를 만들어내는 진짜 주범은 마음이다. 그러나 판단 착오로 인해 무고한, 지각능력 없는 육체가 그에 대한 벌을 받는 것이다. 우리네 삶에는 늘 잔고가 있다. 아무리 정신이 나가고 모자라도 육신이라는 잔고가 있고, 육신이 병들어도 정신이라는 잔고가 남아 있으니 살아 있는 동안 여하튼 잔고가 있게 마련이라 이것을 밑천삼아 갈 수 있는 곳까지 기어서라도 가야 한다.

 

무는 유를 초월하는가, 유가 무를 초월하는가. 무심은 유심을 포함하며 유심의 초월이다.

 

힌두교는 유일신인가, 다신교인가, 일원론인가, 이원론인가? 힌두교는 답한다. 그 모두다.

 

힌두교의 신의 수는 33천 만 개다. 이 숫자는 상징적인 숫자이므로 큰 의미를 들 것은 아니다. 그러니 범신론이라 한다. 경우에 따라 돌멩이 하나에도 신성을 부여하니 당연하다.

 

불교는 힌두교를 매끈하게 갈아 군더더기를 빼고 세상에 나온 철학이다. 힌두교는 태생에 따라 인간의 가치가 정해지는 지극히 불평등한 종교다. 4개의 계급도 모자라 감히 거기에도 끼지 못해 불가촉천민이라는 최하위 계급가지도 만든 종교이므로 현대 종교로서는 논의할 가치조차 없는 종교다. 불교에 붓다이즘이라는 단어가 붙여진 것은 부처의 철학적인 가르침을 종교로 착각한 무지몽매한 학자들에 의해 붙여진 300년 전의 일이다. 불교는 신성을 부정하고 있으며 부처는 자신을 절대로, 절대로 신격화 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신신당부하였다. 부처는 태생적인 계급사회를 부정하고 평등하게 모든 계층의 사람을 받아들여 모두가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던 인간이다. 부처는 스스로 깨어난 자, 혹은 항상 깨어 있는 자의 의미고 이름은 고타마, 부족의 명칭이 석가족이었으므로 석가모니 부처라 한다.

 

내가 불가와 인연을 맺은 것은 15살 때 원불교에서 京星이라는 불명을 받았으니 50년 전의 일이다. 내가 깨달은 사람도 아니고 신심이 두터운 사람도 아니나 49년을 헛되이 보내고 난 지금에 이르러 느낀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도반들이여! 내 이야기에 조금의 오류가 있거나 틀린 점이 있다면 나에게 도움의 말을 해주기 바란다. 목적과 수단 방편.

 

 

7.완적집(阮籍集)에는 사람이 아름다움에 접근하는 방법에 대하여 바람이 나부끼듯 황홀하니 곧 깊고 그윽하여 어둠을 꿰뚫는다. 얼음처럼 깨끗하고 옥처럼 맑으며 곧 밝고 생각이 떠오르며 담박하게 아무 욕심도 지니지 않으니 뜻이 커지고 정감이 어울릴 수 있게 된다.’ 이른 아침 설산에 올라갈 때 이 모든 것이 해당된다. 이것은 형이상학적, 심리적 얘기가 아니라 무사무욕을 걸음걸음에 밟는다.

지인들은 묻는다. 산이 뭐예요, 왜 가세요? 밖으로 매달린 이 자리의 고단한 인연을 떨쳐내고 저편 세상에서의 맑은 만남은 그 자체만으로 고맙다. 내겐 산이 고향이니 산에 오르는 것은 귀향과 같다. 산은 나를 조금씩 변형시켜 삶의 무게중심을 산으로 옮겨 놓는다. 여기 저잣거리는 단지 있을 곳이지 살아야 할 곳은 아니다. 不隨萎萎地 隨處作主 立處皆眞/臨濟錄. 임제의 말이다. 산은 말한다. 위축되어 끌려 다니는 일 그만하고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니 서있는 자리가 진정 너의 자리다. /도봉별곡

 

12.히말라야는 한 곳을 깨달았다고 그 나머지 부분까지 통할 수는 없다.(直須俉得一處 乃可通其他妙處)

 

17.東山五祖 法演이 물었다. “석가와 미륵이 모두 그의 노복이다. 어디, 말해보라. 그는 대체 누구냐.”

 

18.인도에서 시킴은 불교도 주(), 혹은 불국토, 佛國라는 의미다.

 

19.禪家에는 一機一境이라는 얘기를 한다.

一機는 가령 스승이 제자를 대할 때, 자신의 심기에서 나오는 깨달음에 대한 미묘한 표현으로 눈썹을 치켜 올리거나, 눈을 깜박이던가, 돌아보고, 살펴보는가 하면, 피식 웃기도 하고, ! 소리 지르는 것이다.

一境이란 외부의 사상을 들어 가르치는 것. 꽃을 들어보이던가, 동그라미를 그리고, 물을 가키는가 하면, 달을 가리키고, 또 지팡이를 세우는 따위의 행위로 상대의 근기에 따라 나타나는 다양한 방법이다.

여기에 一言半句가 더해진다. 이것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간단한 대답을 말하는 것으로 불성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에 없다()’ ‘뜰 앞의 잣나무(前庭白樹子),’ ‘麻三根등이 좋은 예가 된다.

 

35.七佛

역사적으로 붓다라고 칭하는 인물은, 인도의 싯달타 석가모니불을 일컫는다. 그러나 진리를 깨달은 사람은 붓다 이전에도 여럿 있었다는 다불(多佛)사상이다. 비바시불, 시기불, 비사부불, 구류손불, 구나함모니불, 가섭불, 석가모니불.

 

38-40.역사는 여러 개의 작은 단위들이 물리화학적으로 통합되면서 일어나는 작용-반작용의 기록이다. 역사에서 우리는 커짐으로 일어나는 부작용을 수없이 봐왔다. <노자>80장에 나오는 유토피아 理想鄕, 즉 가장 작은 기본 조건인 작은 나라의 작은 백성이라야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음을 역사의 교훈에서 알고 있음에도 반대로 가고 있다./유물론의 숙명이런가/도봉별곡

<장자>의 마제(말발굽 馬蹄)를 보면 모습이 또렷이 그려진다.

지극한 덕으로 다스려지는 세상에서는 백성들의 행동이 진중했고 사심이 없어 순박했다. 그런 시대에는 산 속에 길도 나지 않았고 못에는 배나 다리도 없었으며 만물은 무리지어 살면서 이웃이 되었고 새와 짐승은 테를 이루고 살았으며 초목은 무성하게 자랐다. 그래서 짐승들을 끌고 다니며 노닐 수 있었고 새나 까치의 둥지에도 기어 올라가 들여다볼 수 있었다. 무릇 덕이 충만한 세상에는 새나 짐승들과 함게 살았고 만물이 공존했나니 어찌 군자와 소인의 구별이 있었으리요. 모두가 무지하고 순박하여 그 덕을 잃지 않았고 모두가 욕심이 없어 소박했는데 소박해야만 백성들의 본성이 지켜지는 것이다.

그런데 성인이 나타나자 허겁지겁 인을 행하고 허둥지둥 의를 행하게 되어 천하는 드디어 의혹에 빠지게 되었다. 제멋대로 음악을 만들고 쓸데없이 에의를 만들어 천하가 드디어 분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산에는 본래 길이 없었다.

 

44.<25>, 마호메트 평전으로 유명한 게오르규에 의하면 어떤 종교는 사랑 위에 구축되고 어떤 것은 희망 위에 구축된다.’

자연을 믿고 따르는 종족이 산에 있다는 사실은 함부로 산을 파괴하지 않는 지킴이가 있음이다.

 

45.사실 범부조차 큰 산을 바라보면 순식간에 마음이 비워지니 안과 밖이 합치되어 그 길이 하나가 된다. 지식 따위는 일순간에 날아가며 비어버리는 경험을 만나게 된다. 종교의 첫걸음은 이런 지식들이 버려지고 비워지는 자리에서 시작한다. 그 빈 자리에 은혜로운 것들이 들어앉을 공간이 생긴다.

무릇 산은 나라에 귀속되어 있지만 산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속해 있다. 산이 거기에 사는 사람을 사랑할 때 그 산에는 성현과 고덕이 들어가 살게 도니다. 성현들이 산에 살게 되면 그 산은 성현들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 산에 있는 나무와 돌은 울창하고 무성하게 되며 짐승들은 영특하게 된다.

<山水經>

 

산은 어디를 오르냐보다 누구와 오르냐가 더 중요한 것/영상앨범

 

46.우리는 어머니 자연에 대한 숭배를 감추지 못한다. 자연은 눈만 뜨면 보이는 실존이기에 비록 루교도의 옷으로 갈아있었으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자연 숭배가 쉬이 떠나지 못한다. 포이에르바 이야기처럼 자연은 그들에게 너는 나의 또 다른 나로 남아있다.

 

48.시킴이라는 하얀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한 번 피어나면 결코 지는 법이 없다는 萬年雪花였다.

 

55.눈 밟은 사람은 험악한 길을 피해갈 수 있듯 총명한 사람은 능히 모든 악을 여읜다./사분율 비 구계본

 

60.깨달음이란 범에서 성으로 나가는 길, 세속의 먼지를 하나씩 떨어뜨리고 멀어지면서 피안으로 간다.

 

61.휴정의 <선가귀감>에 의하면 말 없음으로써 말 없는 데 이르는 것은 선이요, 말 있음으로써 말 없는 데 이르는 것은 교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은(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대꾸가 없으시다. 그렇다. ‘앉은 채로 천하의 혀를 끊는다.’

 

63.불상과 경전을 생명화시켜라. 반복하고 그 앞에 섰을 때 물아의 경게가 무너지고 모든 사물에 불성이 있음을 알게 되는 것-너가 붓다가 된다. 심불반조(心不返照 看經無益) 마음으로 반조하지 않으면 경을 보아도 이익이 없다.

 

65.경전을 읽으면 스승의 기침소리, 숨소리를 들으며 마음자리를 다듬는 것은 도덕의 규범, 계율의 준수를 체득하기 위한 바른 길이다. 가만히 산을 응시하라. 그 안에 눈 밝은 사람으로 살아가며 걸어야 할 길이 더불어 올 것이며 우리가 죽음 이후에 겪어야 할 것들이 떠오를 것이다.

큰 산에서 말없이 느끼는 기쁨無言心悅과 지락무락至樂無樂은 선물이다. 감각기관을 이용해서 풍경을 받아들여 나를 잊는 경지로 나갈 수 있는 실마리가 있는 자리다./말로써 말 많으니

 

77.산을 보라. 천추에 영원히 존재하는 자연산수는 순간적으로 가버리고 마는 인간세계의 영화보다 높고 자연에 순응함이 인공의 조작보다 나으며 한가로운 자연 속의 산수가 호화로운 지에서의 풍악보다 장구하다./범서梵書 중에서

 

78.조주 선사와 투자 스님

투자 스님 또한 선사로 두 분의 이야기도 <전등록>에 들어 있는 공안 중의 하나. 조주가 투자를 찾아왔으나 장에 가서, 기다리는데 마침 투자가 기름 한 병을 들고 오기에 조주 왈,

-투자의 소문을 들은 오래건만, 와서 보니 기름장수 늙은이뿐이구만.

투자의 말.

-그대는 기름 장수 늙은이만 보았지, 투자는 보지 못하는 만.

-어떤 것이 투자입니까?

-기름이요, 기름.

 

81.높은 산에서 정신을 집중하여 생각을 멀리 하여보면 자연이 묘리를 깨닫고 있으니, 외물이나 자신을 모두 잊고 형체를 벗어나며 온갖 지혜를 떨쳐버린다. 지혜를 품고 있으면 유한이지만 그것을 떨어뜨리면 무한이 된다. 그 자리가 최고경지가 되니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무한이 유한을 버린다. 唯識無境을 공부한다.

 

81.풍수지리를 누가 비과학·비논리적이라 하는가. 좋은 자리는 마음이 먼저 알고 몸이 바로 안다. 산과 강, 사람 그리고 방위를 바탕으로 하여 음양오행의 논리로 태어났음을 모르는가! 여기에 무슨 논리와 과학을 들이대는가! 다만 명당혈을 짚는 개인적 陰陽宅에 국한된 풍수는 낡은 안목에서 나오는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는다.

 

83.승조대사의 조론에 천지는 나와 함께 같은 뿌리에서 나왔고, 모든 만물은 나와 함께 한다.’는 부분이나 장자의 제물론의 천지가 나와 함께 살아가고 만물이 나와 하나가 된다.’는 자리가 바로 자연이다.

 

85.소 잡는 사람 포정과 문혜군의 소 이야기

-3년이 지나니 소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요즘 저는 정신으로 소를 대하고 있고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시가 보이지 않아야 시인. 산이 보이지 않아야 흐르는 물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처럼 험악한 길을 피해갈 수 있다.

 

91.도봉을 보라, 암봉이 신이다. 용이다. 바람이다.

 

96.오월의 솔바람 팔고 싶으나 그대들이 값을 모를까 그게 두렵다.

 

97.산을 오르다보면 샨티-평화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스스럼없이 터져 나온다. 힌두 경전 우파닌샤드는 매장의 처음에 평온을 위한 낭독을 한다.

 

우리 스승과 제자를 무지에서 구하소서

우리의 노력으로 기뻐하소서

우리가 함께 탐구하게 하소서

우리 둘의 익힌 지식이 우리를 빛나게 하고

또한 우리가 서로를 시기하지 않게 하소서

옴 쌴티 샨티 샨티

 

98.마음에 근심이나 두려움이 있으면 맛을 모르고 좋은 음악도 들리지 않는다. 나무를 많이 심어 녹색공간을 늘리면 범죄율이 떨어짐을 알라. 나무의 영혼이 인간 영혼에게 주는 커다란 평화의 선물이다. 보라, 특히 붓다의 일생은 초록빛이다. 태어남과 수행, 깨달음, 초전법륜이 모두 숲속에서 이루어지고 반열반은 사라쌍수 아래다. 나무 아래서 수행하다 산에서 죽으면 왔다 갔다는 이름값을 한다지 않는가. 왜 내 이름은 불가에서 그리 많이 나오는 일까. 佛緣임에 틀림없으리.

 

99.해마다 정초가 되면 버릴 것을 이미 버려 하늘이 곧바로 보이는 겨울 숲을 찾아간다. 발목까지 차오르는 눈을 밟으며 혹은 빠지며 숲 속으로 들어가 보는 일이 연례행사, 시산제다. 가을에 떨어진 낙엽들과 지난 폭설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러져 내린 잡목들이 발밑에서 뿌드득거리는 소리 들으며 한참 들어간다. 입산금지의 푯말은 우리 山林學派에게는 연초의 종교적 행사이기에 벌금을 감수하고 들어가는 즐거움을 어디 비기랴.

 

105.티베트 불교를 알고 싶으냐, 인도인 빠드마삼바바를 기억하라.

 

108.혜능의 화두 非風非幡 風動幡動이라는 공안.

바람이 흔들리는 것도, 깃발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고 너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다.

 

115.바람은 어디에서든 오고 어디든지 간다.

 

117.금시조/가루다-불경에 나오는 신화적인 상상의 새. 금빛 날개를 달고 있으며 입에서 불을 내뿜고 용을 잡아먹는다고 한다.

 

132.티베트 불교가 세계로 퍼진 이유는 아이러니칼하게 중국이 그들의 꽃밭을 분탕질하는 바람에 꽃씨들이 대양을 신속하게 넘어섰다. 모닥불을 몽둥이로 내리치는 바람에 불씨가 사방으로 튀어 티베트를 모르는 사람에게조차 어느 날 시선 안에 불꽃들이 날아 들어왔다.

 

132.달라이라마의 노벨상 수상 연설문 그 생각의 깊이와 폭을 보라. 온갖 자비의 눈길에서 향기가 진동한다. 그는 아힘사/비폭력으로 맞섰다.

 

149.자연은 만변한다. 그러나 인간의 눈에 히말라야 변화는 감지 되지 않는다. 저지대의 모든 존재들이 생로병사를 겪어나가는 동안 부동으로 주석하니 진리의 모습을 닮았다. 참된 것을 스승으로 삼으라는 이야기가 설산이 주는 법문이다.

 

150.화쟁-개합여탈입파開合與奪立破/곧 어는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 논리에 근거하여 통합과 회통을 추구하는 것이 화쟁의 주된 특성. 화엄사상-1.법신불 2.보살 3. 유심 4. 법계연기사상

 

156.경전은 종이 위에 쓰이는 말함’-이고, 경전을 마음 안에 스면 말 없음’-이다. 티베트불교의 특징 라마-스승-구루는 필수조건.

 

184.199912월 말경, 깔마파는 티베트를 탈출하여 인도로 망명.

 

190.다니끼-공이라는 지혜의 하늘을 걷는 자를 말하며 깨달음의 에너지가 여성형으로 구체화.

 

191.땅을 파면 물이 나고 구름 걷히면 푸른 하늘 이 강산 어디나 그대 가는 곳 보고 듣는 모두가 자네 공부일세./묵암 선사

 

192.노자 41. 큰 소리는 들리지 않으며 큰 형상은 형태가 보이지 않는다.

 

194.인간은 먼지와 더불어 산다. 먼지 속의 인간.

 

196.까달음의 단서는 명상을 통해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산에서는 자연스러운 카리스마가 흘러나온다.

카리스마는 자발적인 숭배가 전제조건이다.

 

205.자연과 사람이 하나/然人不二

 

207.산은 오르되 정상 앞에서 멈추는 겸손을 갖추고 정복해서는 안 된다. 자신을 성취하며 남을 존중하는 의식은 스스로 성과를 배가시킨다. 산에는 높은 산과 낮은 산이 있다.

 

211.산수를 보는데도 법칙이 있다. 숲이나 샘물을 벗하는 마음, 즉 자연과 일치되는 마음으로 산수를 보면 그 가치가 높아질 것이고, 교만하고 사치스러운 자세로 임한다면 그 가치가 낮아질 것이다. 곽희의 林泉高致 중에서

1999년 지오그래픽 트레블러/완벽한 여행자가 일생에 꼭 가봐야 할 곳 50.

 

213.히말라야를 걷다보면 심심치 않게 자연과 정신은 둘로 나뉘어져 있지 않은 하나라는 생각이 들다가 그 생각조차 없어지는 무념에 들어간다. 만념이 일념이 되고 일념이 마지막 통로를 통해 무념으로 들어가는 현상을 경험한다. 한 쪽에 집착하여 저와 나를 구별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마라.

 

215.산을 가만히 둘러보면 기막히다. 이 산을 키워낸 힘은 절대적으로 무목적성을 가지고 있다. 그 결과 있어야 할 자리에 산, , 냇물, , 나비, 새 등등, 곡 있는 것들로 철두철미하게 합목적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경험을 자주 하게 되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이 자리 이외 나의 다른 고향을 알지 못한다.

-나는 집에 와있다.

-오랫동안 이 자리가 그리웠다.

-산에 오르면 도심에 살 때 돋았던 불같은 가시들이 사라진다.

 

222-4.산은 의인화를 통하여 모셔지고

산신은 사실 산 에너지의 의인화, 즉 인간화시킨 것이다. 일부 종교는 산신제를 타파해야 할 미심으로 여긴다. 너무 과민하다는 생각이 든다. 신은 신이고 종교는 종교다. 세상은 모두 다르기에 닭은 추우면 나무로 올라가고 오리는 물로 들어간다. 모두의 생각을 존중하고 함께 가야하며, 상대의 종교를 깎아내리는 행위는 인간에 대한 존경심이 부족한 것이다.

 

224.거짓종교에 관하여는 교리가 악하지 않으면 그냥 내버려두라.

 

233.기독교 신비주의자 쿠자누스는 이것을 배운 무지라 했다. ‘온갖 지식을 포기하고 무지의 세계로 들어갈 때 비로소 진리가 빛나며 그것을 파악할 수 없는 방법으로 통찰할 수 있다.’

 

240.인간의 양면성-신체적 본능인 동물적 욕망과 영적 본성.

 

243.자장율사와 선덕여왕의 일화

계율 없이 배구 년을 사느니

명상하면서 착하게 하루를 살으리

무지와 방종 속에 백 년을 사느니

깨달음 과 명상을 추구하며 하루를 살으리

.........................................................

불멸을 알고 하루를 살으리

<법구경 110-115>

 

246.5대 적멸보궁. 경남 양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영월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

 

263.

-내 죄는 무엇일까?

생각지도 않았는데 대답이 들려온다.

-다시 태어났다는 것이다.

 

274.티베트의 위대한 요가 수행자 밀라래빠와 수많은 제자들을 기억하라.

 

269.붓다 입멸 후 500년이 지난 무렵 인도 간다라 지방에서 불상이 만들어지고 불상을 모시는 금당이 보편화되면서 금당과 탑은 사찰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물이 된다.

 

278.노자 도덕경의 유래-노자가 세상을 등지고 들어갈 때 윤희에게 써 준 5,000자의 구절. 오늘 산에 들어가면 이 길이 내 마지막 길이 되리라.

 

287-8.空靜涅槃에 든 켄체 스님은 빛으로 화하여 허공계로 퍼져 나가 이제는 지상에 광명을 내려 보낸다. 땀방울이 흘러야 죄가 사해질 터인데 대신 눈물이 자꾸 떨어지는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하는데 하얀 꽃송이 발밑에서 환하다.

 

293.종소리는 지극히 종교적 상징이며 다르마의 진동으로 여긴다.

 

295.순야타는 더 이상 부서지려야 부서지지 않는다. 인간은 불심을 품은 마음 안에 종을 놓아야 한다.

 

296.직선으로 움직이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원 안에서 움직인다. 그렇다면 어떤 영혼의 완전한 타락이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것은 원을 완성하면 근원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지구가 둥글하므로 직선을 긋다보면 원이 된다.

 

305.반야의 불꽃

 

309.실존이 존재의 본질이지만 소멸 역시 존재 본질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것은 타고 남은 가벼운 재는 종교적으로 설명한다.

 

318.열반이라는 의미는 그 자체의 개별성을 잃어버리고 대상 전체 속으로 녹아드는 것열반을 꺼진 불에 비유하던 붓다의 설법을 상기하라.

 

327.코롬 코츠의 <살아있는 에너지> 중에서

마침내 영혼이 주변과 완전히 조화를 이루어 무한히 높은 진동상태에 도달하여 우주의 모든 것과 하나로 융화되면서 자신의 개체성을 상실하고 원래 태어났던 근원으로 돌아간다. 육체와 결합되어 있던 지금까지의 인생은 길고도 힘들었으며 때로는 고통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물질계의 여정을 끝내면서 물질계의 공허함을 완전히 이해함은 물론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영혼의 평정을 회복한다. 영혼은 평화로부터 샘솟는 이타적인 사랑으로 충만하여 우주 전체에 무조건적인 사랑을 항구히 전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영혼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나름대로 우주의 평화에 기안한다.

 

335.꽃이 피면 장사長沙, 바람이 심하게 불면 혜능慧能, 더위 추위의 동산洞山, 가을바람이 불면 운문雲門, 눈이 오면 방거사龐居士 등등 자연현상 앞에서 조사를 뵙고 선지식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산다.

 

345.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을 통해 모든 존재들이 시간에 의해 지배받고 있음을, 모든 존재는 결코 뒤로 물러서지 않는 시간의 흐름 앞에서는 겸허하게 자세를 고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시간도 자연이런가. 삶이란 자연 안에서의 自律이다.

 

346.왜 이부다처제로 살아야 하는지.

 

348.지극한 복덕-좋은 자리에서는 至福이 가득 차오른다. 어디선가 아름답고 고차원적인 영적인 힘이 몰려와 나의 내부를 가득 채워준다. 그러면 내 자신은 충만한 사랑으로 눈부시고 숭고해진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제는 시선 닿는 모든 세상의 삼라만상에게 축복을 주고 싶어진다. 내 안을 가득 채은 지복을 모든 것과 나누고 싶은 순간이 뒤따라와 사방팔방을 자비의 시선으로 어루만진다.

복 받으시라, 모두 붓다에 이루시라.”

 

355.노자의 <도덕경>을 돌아보면 여러 부락이 합쳐지고 덩치가 커지면서 曠土衆民에 이르며 이것이 바로 모든 재앙의 근원이다. 왕이 생기면서 모든 갈등이 생기기 시작한다. 왕의 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전쟁터에 나가야 하며, 성을 쌓는 노역에 끌려가야 했으니.

 

356.<장자>에서 하늘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천락天樂, 인간과 자연의 통합은 친화, 인간과 사회의 통일은 인화人和, 인간 사이의 조화는 인락人樂. 이 모든 것은 조화가 바탕이다. 어울림이다.

 

360.한 사유를 통해 세상은 전개되고 진행한다. 지도자 한 사람의 결정에 다라 세상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그 사람의 사유에 따라 사회는 어떤 변화를 겪어야 하는지, 우리 세대는 평생 동안 이 경험을 해왔지만 우리 역사는 대중을 사랑했으며 평화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느꼈던 테통택과는 다른 길을 선택함으로써 덕분에 전화戰禍를 통해 수많은 무주고혼無主孤魂을 이 땅에 양산했으니. 옴 바라 마니 다니 사바하.

한나라 유향劉向의 말, 설원設苑에서 하늘의 뜻을 아는 자 하늘을 원망치 않고, 자신을 아는 자 남을 원망치 않는다.’

생명보다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현군들은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고 현실적이고 현명하게 유혈을 빗겨갔다. 생명을 경시하는 이즘이나 종교는 천박한 아류에 불과하다. 모든 것은 연기로 인함이 불가의 핵심 중에 하나다. 역사를 가만히 보면 그 많은 요소들이 맞물리며 의 터를 닦아나가고 있으니 너그러운 사람들이 서로 도와주고 이해하며 살아가면 극락정토가 되고 그 반대로 나아가면 천박한 경쟁사회가 되어 천박한 세상이 된다.

 

362.무릇 좋은 터란 있다. 영혼이란 한 개체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고위高位의 에너지 형태다. 자연에게도 당연히 이런 패턴이 있어 인간은 미라는 개념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감동이라는 행위를 통해 접촉한다. 결국 아름다움 자체가 우주 창조의 정신이다.

그러지만 모든 사람에게서 이 과정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공자의 이야기처럼 모든 것은 나름대로 를 가지고 있지만, 누구나 그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름다운 것을 볼 줄 아는 감수성을 기르는 노력이 필요하다. 산과 술, 시라는 매체를 통할 수 있다면 우리 시산회는 복 받은 사람들이다. 작은 일에 감동하는 소년처럼 변해버리는 선사 조사들의 천진무구天眞無垢는 이런 자리에서 온다.

당시의 실세들은 무엇을 기원했을까, 수백 년을 버텨온 작은 부조浮彫 안에 세월을 따라 마모를 통해 더욱 온화한 표정으로 변한 붓다, 불보살, 구루(스승)들이 결가부좌로 앉아있다. 설산에 눈구름 피어나고 낮은 곳에서 꽃들이 어지러이 흩날리는 사이에 사람들은 가고 불보살들의 미소만 희미하게 남았다.

산에서, 바다에서 붓다의 형상을 보면서 가끔 과거의 모습을 만난다. 옛날의 내가 붓다 앞에서 이처럼 경건했을까? 산과 붓다가 말한다. ‘과거의 너를 이제 거두어 가라.’ 특정한 상황에서 느끼는 깊은 감명은 비단 명상으로만 얻어지는 것은 아닐 터, 바람 불고 작은 꽃잎 날려도 감추어진 언어로 혹은 감동으로, 떨림과 울림으로, 간혹은 그 사이에서 과거가 보이고 미래가 엿보이는 것은 왜일까? 그러나 범부에게 과거의 다서가 주어지는 일이 그리 대단할까. 단지 다르마와 삼사라라는 법을 확실하게 믿게 해 줄 따름이다. 그리하여 남은 삶에서는 피안으로 향하는 대승의 뱃전에서 노 젓는 보디삿뜨바가 되리라 서원한다. .

 

365.한편 제물이란 무엇을 포기하고 더욱 강한 것을 획득하기 위한 물건이며, 제의는 그것을 위한 위한 행위다. 소를 잡아 제물로 삼은 것은 보다 귀한 형제를 얻기 위한 시도, 피를 나눠마심은 혈연으로 묶임을 상징한다.

아홉이라는 숫자는 샤머니즘이 퍼져 있는 곳이면 마지막 수이므로 어디든지 지속을 상징한다.

 

370.종교의 용광로 이론과 모자이크 이론-초창기의 미국은 모든 것을 용광로 안에 넣고 단일화시키면서 발전해 왔으나 히말라야는 각기 다른 문화 종교를 가진 민족이 모여 자신 특유의 빛깔을 잃지 않고 함께 살면 더 좋다는 것이다. 팍스아메리카와 팍스몽골처럼.

 

372.산에 올라 하늘을 보라. 시선 아래로 구름이 가고 풍경에 도취하여 돌이켜보면 삶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밀려올 때가 더해지면 그것은 얼마나 덧없는 세상인가, 그야말로 空幻인 것을. 그러나 자연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벌어진 모든 인간사를 굽어보고 있었다. 모두 한갓 먼지가 되어 세상을 떠돈다. 인간이 사라진다고 허무와 공허일까? 그것뿐이기만 할까? 그렇지 않다. 만유萬有, 단지 만유유변有有變이다.

 

374.마치 눈 밝은 종사의 가르침처럼 적연부동한 산은 어디에 귀의하겠냐고 질문을 던진다. 그나마 산은 오랫동안 모습을 쉬이 바꾸지 않으니, 순간적으로 가버리는 삶에게 내가 무엇을 걸겠는가? 아니면 가버리는 것들에게 내 삶을 어찌 걸겠는가?

자연에 순응하고 몸과 마음을 맞추는 일이 성을 짓고 건축하는 것보다 나아보이는 것은 웬일인가.

 

한가히 산림에 누워 세상일 다 잊었네.

명리에 허덕이는 세상 사람 가엾어라

소쩍새도 잠이 든 달 밝은 밤에

한줄기 시냇물 소리 나의 벗일세.

-보우 선사

 

보우가 누군가. 혹여 선문답이라도 그를 모른다 하지 마라. 불교가 너를 키웠다면 그의 은공을 모르는 무뢰한과 다를 바 없으니 그를 염불을 외우는 중으로 기억하지는 마라, 우리가 가는 길 뭉친 먼지덩어리에서 흩어진 먼지로 가는 길목에서 우리를 반겨줄 사람이거늘.

무엇일까, 내 식이 겪었을 여정은?

 

376.진정한 발견은 새로운 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이리라.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79.여행자가 현지에 가면 이야말로 언어보다 가까워지는 문화 체험이며 지름길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으로 족하다.

 

380.부친에게는 조상들의 여자, , 술의 세 가지의 유전자가 있다. 나는 거기서 술의 유전자가 가장 좋다. 내가 아버지와 조상들에게 불평이 없는 이유다.

 

390.선현께서는 산을 오르면서 세속을 버리고 선경을 즐기듯이, 술을 마실 때는 세속을 접고 음주를 일상으로 삼듯이 마시라고 했다. 산이나 술이나 두고 온 것들에 얽매이면 참맛을 잃는다고 토를 달았다. 그 중 저녁에 마시는 술을 최고로 치고 그러다가 문득 술이 취하면 장차 옥산이 무너질 듯한 경지에 이른다(傀俄若玉山之將崩). 산에서 술을 마시는가, 아니다 술로 산을 마신다.

 

399.산에서 산을 제대로 감상하는 법은 잊는 것이다. 비행사는 비행의 위험함을 잊어야만 아름다움을 감상할 능력이 생긴다. 바다 항해사도 같으니 희로애락은 물론이고 모시는 신까지 통째로 잊는 殺不殺祖까지 나아가야 산은 산이 되고 물은 물이 된다.

 

401.조주와 투자 화상의 얘기-화두(78쪽 참조)

 

405.나는 누구고 남은 누군가? 왜 산에 오르는가, 물음에 답하지 말고 너가 다시 물어라, 산이 오라는 수동과 산더러 오라는 능동의 사이에서 너는 무엇을 보는가? 그래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가?

 

능선까지는 가파르나 거기에 오르면 다음부터 쉬워지는 게 우리의 산인 것을.

 

2014. 12.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