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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이야기

여보게, 설거지는 했는가/활안 대선사 법문-김성우 엮음(송광사 이양 상리 천자암 조실)

여보게, 설거지는 했는가/활안 대선사 법문-김성우 엮음(송광사 이양 상리 천자암 조실)

 

언어의 이중적 의미/병치법

길에서 길을 아는 사람을 만나거든 무엇보다 길을 묻지도 아는 척도 하지 마라

법은 문자를 떠났으며, 인에도 속하지 않고 연에도 있지 않다

 

경전과 어록은 똥 닦는 휴지/임제

도는 닦는 게 아니며 불법 또한 애써 배우는 게 아니니 평상대로 아무 일 없는 것이다/임제

생각과 행동이 같은 게 수행의 요체-일체유심조-삼계유심과 만법유식

모든 것은 인연으로 인하여 생멸하는 것이니 공이라 하고 공은 무릇 나눠지는 것도 모아지는 것도 아니리

 

진면목=자성. 행복 원하면 자성을 드러내라. 생멸시공 실상은 상주

공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마조도일이 백장회해 선사에게, 내가 숨을 안 쉬게 되면 체와 용(붓다의 근본법과 그 법의 쓰임), 두 가지를 중생들에게 어떻게 납득시키느냐?

 

법신 : 텅빈 자성. 진리의 몸

보신 : 일체 청정한 진리의 작용

화신 : 유도를 만행하는 화신의 몸

 

선은 우주와 삶의 이치를 바로 보는 것

마음자리를 청정하게 하면 육근 육경이 불필요

 

惺惺(또렷또렷)-몸과 마음을 하나로 합치는 수행법

펼치면 만법이요 닫으면 귀일이라 어디로 가느냐

성현들은 남 탓을 하지 않는다, 자기가 결정하니까

식물은 동물의 먹이가 되고 동물은 인간의 영양분이 된다. 돌고 돈다

너무 많으면 밥맛이 없는 법

나는 배부르니 먹을 일 없고 배고프니 뭐든지 다 먹는다

 

당나라의 선승 임제선사의 임제록(臨濟錄)

당나라의 선승 임제선사의 임제록(臨濟錄)을 보면 不隨萎萎地(불수위위지)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入處皆眞) 이라는 말이 나온다. 不隋는 끌려다니지 말라는 뜻이고, 萎萎는 시들시들한, 즉 생명이 없는 모습을 일컫는다. 는 우리가 밟고 다니는 대지란 뜻 외에 어떤 경지, 상황, 사태, 대상 등등을 가리킬 때 쓰이는 말이다. 수처란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환경이자 우리의 삶터이다. 작주란 인생의 주인이 되어 주체적으로 살라는 뜻으로, 이르는 곳마다 참주인이 되고 우리가 서 있는 곳 모두가 참진리라는 것이다.

스스로 깨달음의 주체, 즉 주인이 된다면 현재 이곳이 모두 아름다운 진리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늘 진실하고 주체적이며 창의적인 주인공으로 살아간다면, 그 자리가 곧 최고의 행복한 자리인 것이다. 즉 산송장처럼 살지 말라는 뜻이다.

 

성소작지, 평등성지, 묘관찰지, 대원경지

 

법화경-唯一乘 無三乘 중생 구제법은 하나요 깨달음에 이르는 세 가지 실천법은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

 

有爲法-인연에 의해 생멸하는 만유일체의 법/금강경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 인연에 의해 생멸하는 만유일체의 법은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 꿈과 그림자/환영과 물거품과 그림자 같고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 이슬 같고 또한 번개 같아서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 마땅히 지어도 이 같음을 볼 것이니라

불고수보리(佛告須菩提) :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하기를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 무릇 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다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 만약 모든 상을 상이 아니라고 본다면

즉견여래(卽見如來): 곧 여래를 본 것이다.

 

경허의 말씀-하고 싶은 대로 후회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거라

 

生滅未生前 是甚磨-활안 선사의 화두

 

215.100일 정진이 왔다 갔다 한 거지 내가 그런 거 아니다.

붓다는 쉽게 말하는데 선사들은 왜 어렵게 말합니까

두 말이 다른 게 아니고 방식이 다를 뿐, 붓다가 직접 설하신 아함은 기초고 방등(대승경전의 총칭)은 방식이다. 여기서 반야의 지혜가 나오고 지혜의 경지가 다해야 돈법이 생긴다. 돈법이 일망타진되어야 전체 원상(圓相)이 나온다. 자연은 제공권이 있고 생명은 결정권이 있다. 이 세상은 하자가 발붙일 곳이 없다. 생명이 주관이기 때문이다. 생명이 시작되는 밝은 요놈을 분석하면 마음이고, 마음을 분석하면 근거가 없다. 마음은 천지자연을 생산하는 원인이 되고 사람의 주인이다. 마음은 천지자연을 만드는 원인이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이 이루어지기 전이다. 마음은 근거가 없고 사실 무근이라고 한다. 요놈이 잠깐 의지해서 빛을 낸다. 이 몸의 그릇이 스스로 본래 마음을 알고, 본래 성품을 볼 줄 알아야 한다. 마음은 형상이 아니므로 육안으로 감당하기 어렵다. 자기 성품의 심지를 지혜로써 관조하여 천지자연을 결정하는 데 마음이 주인이 되어야 한다.

 

236.활안 스님의 거지는 無事人 : 일 없이 한가한 사람

마음의 중심에 밝은 기둥을 세우는 것이 수행-처처불심 처처불상

照用同時/비추고 씀을 동시에 한다. 자신의 실체에 철저한 데서 경계를 수용하면 그 자체가 삼매이다.

 

239.도 닦는 이유-惺惺寂寂한 환희를 느낄 수 있는 영원한 행복을 위하여

 

243.선은 문자를 세우지 않고 말 아닌 법을 전했기에 언어로는 미치지 못하고 생각으로도 이르지 못한다. 선의 핵심과 경지는 가르칠 수 있으나 그 교묘함은 가르칠 수 없다. 이와같이 극의 묘처는 言語道斷 心行處滅/말의 길이 끊어지고 생각이 갈 곳을 잃음. 선은 참구하는 것이니 강하지 말라.

 

254.밝아야 한다, 수행하는 자는. 밝음을 분석하면 마음이고 마음을 분석하면 사실무근이다.

 

257.雙照雙遮 圓明一貫는 중도의 도리요 一乘(모든 중생이 부처와 함께 성불한다는 석가모니의 교법. 중생을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수많은 부처의 교법이 실제로는 단 하나의 이치라는 뜻이다.)의 도리.

三乘(삼승)

[1] 성문연각보살에 대한 세가지 교법(敎法). ()은 물건을 실어 옮기는 것을 목표로 하니, 부처님의 교법도, 중생을 실어 열반의 언덕에 이르게 하는데 비유. (1) 성문승. 4()의 법문이니, 부처님이 말씀하는 소리를 듣고, 이를 관하여 해탈을 얻음. (2) 연각승. 12인연의 법문이니, 스승에게 가지 않고, 스스로 잎이 피고, 꽃이 지는 따위의 이치를 관하여 깨닫는 것. (3) 보살승. 6바라밀의 법문이니, 보살은 이 법문에 의하여 스스로 해탈하고, 남을 해탈케 하여 부처를 이룸.

[2] 3승법에 의하여 각기 수행을 마치고, 얻은 성문과연각과보살과를 말함.

 

285.십우도의 최종단계인 入纏垂手/저자에 들어가 중생을 돕다.

심우도/십우도

우리나라 십우도는 중국 송나라 때 보명(普明) 스님의 심우도(尋牛圖)와 곽암 스님의 십우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까지는 이 두 종류의 그림이 함께 그려졌으나 최근에는 곽암 스님의 십우도가 법당벽화에 주로 그려지고 있다. 심우도는 소를 찾는 과정을 단순하게 그리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의 본성을 찾아 깨달음의 세계에 이르는 깊고 심오한 선종(禪宗)의 사상을 담고 있다.

십우도는 도교의 팔우도에서 비롯되었으며 십우도는 불교의 선, 심우선(尋牛禪)을 가리키는데 소를 찾는 그림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찾는 의미를 부여한 그림이다. 도교의 팔우도에서 여덟 그림이었으나 12세기 중국 선의 마스터인 곽암선사가 팔우도에 두 개의 그림을 더 넣음으로 마침내 십우도가 되었다.

도가적인 팔우도에서는 채찍, 고삐, , 사람 등 범용한 것들이 모두 사라지는 것, 다시 말해 무()로 그친다. 그러나 곽암선사가 `반본환원`,`입전수수`를 첨가하여 `십우도`를 완성하면서 `심우선`은 비로소 비약하여 보다 완벽하게 되었다.

나약한 허무로 깨닫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술병을 들고 시장 바닥에 나와 중생들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깨친 자.

세상에서 출발하였으면 세상에서 끝을 맺어야 비로소 하나의 완전한 원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약한 허무로 깨닫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술병을 들고 시장바닥에 나오는 깨친자`가 된다.

한없이 열려있는 마음, 평정을 되찾은 마음으로 이 세상 `무상의 의미``영원의 의미`를 깨친 것이다.

심우도의 첫 장면은 잃은 소를 찾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목동은 자신이 소를 잃은 것을 알고 잃은 소를 찾아 길을 떠난다. 이것이 구도(求道)의 시작이다.

심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소를 잃었다고 자각(自覺)하는 바로 그 순간이다.

 

[ 심우(尋牛)] - (자기의 본심인) 소를 찾아 나서다.

태만한 목동은 소가 도망간 줄도 모르고 놀이에 열중해서 소를 챙길 지혜를 찾지 못한다.

그러나 어느 한 순간 문득 놀이에서 깨어났을 때 목동은 자신의 소가 도망 갔음을 안다.

이것은 바로 구도자에게 있어서 발심(發心)이다. 목동은 소를 찾아 길을 나선다.

 

Scene 2 [ 견적(見跡) ] - 소의 자취를 발견하다.

그리고 오랜 방황 끝에 소의 발자국을 발견한다.

목동은 소가 살아있음을 알고 소를 찾을 수 있다는 기쁨에 젖는다.

 

Scene 3 [ 견우(見牛) ] - 소를 보다.

소 발자국을 발견한 목동은 소를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더욱 열심히 소를 찾는다.

그는 얼마 후 마침내 자기의 잃은 소를 보게 된다. 그때의 희열.

 

Scene 4. [ 득우(得牛) ] - 소를 얻다.

목동은 소를 붙잡는다. 그러나 소는 목동을 따라오려 하지 않는다. 도망치려고도, 난폭하게 덤벼들기도 한다.

 

Scene 5. [ 목우(牧牛) ] - 소를 기르다.

목동은 소를 길들이기 위해 온갖 정성을 쏟는다. 그러자 마침내 소는 주인의 뜻을 따르게 된다.

 

Scene 6. 기우귀가(騎牛歸家) - 소를 타고 집에 돌아가다.(소를 타고 깨달음의 세계인 집으로 온다.)

소가 길들여졌음을 안 목동은 소의 등에 올라 앉아 집으로 온다.

 

Scene 7. 망우존인(忘牛存人) - 소는 잊고 사람만 있다.

소는 이제 주인으로부터 도망치려하지 않는다.

 

Scene 8. 인우구망(人牛俱忘) - 사람도 소도 모두 다 잊다.

어떤 경우에도 그 순간 목동은 소와 자기가 둘이 아님을 안다.(소도 사람도 본래 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Scene 9. 반본환원(返本還源) - 도원으로 돌아가다. (있는 그대로의 전체 세계를 깨닫는다.)

 

Scene 10. 입전수수(入廛垂手) - 저자에 들어가 중생을 돕다.(중생제도를 위하여 거리로 나선다.)

 

조선왕조 말기 국운이 기울어 가던 때에 태어난 만해 한용운 스님은 19193.1운동 때에는 독립선언서에 서명, 이 운동의 주관자의 한 사람이었다.

`종교란 그 시대의 살아있는 정신이어야 한다`며 현실 속에서 일제와 싸운 만해선사는 실로 참 도리를 깨달은 영혼의 스승이며 투사이다.

 

286.探竿影草/선문답을 할 때 상대편을 여러 방법으로 시험하는 언행

 

308.전강 스님과의 일화

 

311.고기를 잡을 줄 모르는 사람은 둑을 막고 물을 퍼내면 잡는 것.

 

314.어디는 공기가 있으니 숨을 쉴 수 있고 어디나 달이 뜨니 어디서든 볼 수가 있듯이 처처불심이요 처처불상이다.

 

322.이 거지야, 멍충아.

 

323.법을 구걸하지 말고 자신에 의지해서 수행하라, 밝음을 찾아서, 자신이 부처고 모든 것이 법이다.

 

325.행주좌와 어묵동정이 일상사 그대로 깨달음의 여정임을 확인시켜주는 무언의 법문.

 

327.수행을 게을리 하면 我相이 높아진다.

 

337.경허-만공-보월-금오-월산의 법맥?

 

340.참선 이전은 유위법, 이후는 무위법

 

345.장님이 눈뜬 사람을 그리려면 그려지느냐, 집어치우라? 죽는 게 옳은가, 사는 게 옳은가?

 

2014.12.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