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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이야기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카렌 암스트롱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카렌 암스트롱

 

머리말

삶의 잔혹함에 지친 사람들에게 마지막 피난처였던 붓다. 붓다는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세상과 그 괴로움을 초월하는 방법, 인간의 편협함과 편의주의를 넘어서서 절대적 가치를 발견하는 방법을 가르치려 했다. 우리는 붓다가 제시하는 방법을 완벽하게 실천에 옮길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우리에게 진정으로 향상된 인간성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알려주고 있다는 점이다. 스스로 삶의 미망에서 깨어난 뒤 그는 평생 동안 여러 곳을 다니며 가르침을 베풀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의 삶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영국의 저명한 비교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은 <스스로 깨어난 자 붓다>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 경전인 팔리어 경전을 토대로 붓다의 삶을 재구성하고, 신화와 전설 속에 갇힌 그의 삶과 가르침을 현대적인 관점에서 재해석한다. 저자는 삭카공화국의 왕자인 싯닷타 고타마가 영적 성장을 위해 집을 떠나는 순간부터 그가 궁극적인 니르바나(열반)에 들기까지 그의 삶을 추적한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붓다의 가르침이 왜 그토록 오랫동안 빛을 발할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된다.

 

구도

96.‘요가라는 말은 멍에를 씌우다또는 함께 묶는다는 동사 유지에서 나왔다. 그 목표는 요가 수행자의 마음을 자아와 연결시켜, 마음의 모든 힘과 행동을 속박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인간에게 보통은 불가능한 방식으로 의식이 통일된다.

 

96-97.우리의 정신활동 중에 많은 부분은 저절로 움직인다.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를 불러오고, 오래전에 잊었거나 망각으로 물러났던 연상들에 의해 두 이미지가 합쳐진다. 우리는 하나의 사물이나 관념을 있는 그대로 생각하는 경우(如如, 眞如)가 거의 없다. 그것은 개인적 연상에 물들어 있다. 이 연상이 그것을 즉각 왜곡시키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다. 이런 심리적인 과정 가운데 일부는 무지, 아집, 격정, 혐오, 자기 보존 본능을 특징으로 한다. 이런 과정은 통제하기 어려우면서도 우리 행동에는 깊은 영향을 주는 무의식적 활동(바사나 : 습기, 훈습)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프로이트와 융이 근대 정신분석을 발전시키기 오래전에 이미 인도의 요가 수행자들은 무의식을 발견했으며, 어느 정도는 정복하게 되었다.

 

97-98.무의식을 통제하려면 요가 수행자는 정상적 세계와 모든 유대를 끊어야 했다. 말하자면 자신의 낡은 자아를 죽임으로써 진정한 자아’, 완전히 다른 존재 양식을 깨우기를 바랐던 것이다.

축의 시대의 현자나 예언자들은 그들이 추구하는 절대적이고 거룩한 실재를 경험하는 데 아집이 가장 큰 장애라는 것을 차츰 깨닫기 시작했다.

요가는 우리의 세계관을 왜곡하고 우리의 영적 진보를 가로막는 아집을 체계적으로 벗겨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99.고타마(깨닫기 전의 붓다의 명칭)와 마찬가지로 논리적이고 추론적인 방법으로 법을 명상해서는 해방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이성적인 사고 방법은 정신의 극히 작은 부분만을 이용할 뿐이었다. 게다가 영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추려 할 때면 이 부분이 스스로 움직이는 무정부주의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나곤 했다.

 

100-102.사람의 마음에는 깨달음에 고집스럽게 저항하는 잠재적인 경향이 있는 것 같았다. 불교 경전에는 이런 힘들을 마라라는 인물로 인격화하고 있다. 그들은 이런 저항의 원인이 전생의 나쁜 업이라고 생각했다. 요가 훈련은 깨달음의 무의식적 장애물들을 부수고, 인간의 인격을 형성하는 조건들을 없애기 위해 고안되었다. 요가 수행자들은 이것을 이루면 마침내 진정한 자아와 하나가 된다고 믿었는데, 이 자아는 무조건적이고, 영원하고, 절대적이었다.

따라서 자아는 존재의 거룩한 수준의 주요한 상징이며, 일신교의 신, 힌두교의 브라만(우주의 절대 적이며 근본적인 원리)/아트만(자아), 플라톤 철학의 이데아()과 같은 기능을 한다. 고타마는 알라라 칼라마(붓다의 초기 스승)의 법 안에 들어가 살려고했을 때, <창세기>에서 최초의 인간들이 에덴에서 경험했다고 하는 그런 평화와 온전함으로 들어가 그 안에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초월적 조화에서 나오는 이 고요한 느낌을 자신의 심리 깊은 곳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이것이 그를 완전히 바꿔놓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육신이 당하는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난 새로운 자아를 얻으려 했다.

 

104-111.알라라 칼라마(붓다의 초기 스승)는 고타마에게 요가의 방법들을 하나씩 가르쳤을 것이다. 그러나 고타마가 명상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 도덕성의 건실한 기초를 놓아야만 했다. 윤리적인 규율들은 그의 자기중심주의를 제어하고 생활의 불필요한 부부들을 제거하여 그를 순수한 상태로 바꾸어 놓았다. 요가는 수행자에게 매우 강한 집중력과 자기 제어 능력을 주기 때문에 이기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면 수행자를 악마로 바꿀 수도 있었다. 따라서 수행자는 자기의 고집스런 자아를 단단히 통제하기 위해 다섯 가지 금지사항을 준수해야 했다. 금지사항은 도둑질, 거짓말, 과음, 살생, 성교 등을 금지했다. 고타마는 이런 것이 제2의 천성이 된 뒤에야 좀 더 진전된 요가 훈련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또한 니야마(신체적, 심리적 훈련)도 수행해야 했을 것이다. 여기에는 빈틈없는 청결, 법의 공부, 평정심의 유지, 금욕주의 훈련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수행자는 극단적인 추위, 굶주림과 목마름을 아무런 불평 없이 견디고, 말과 몸짓을 통제하여 절대 자신의 속생각이 드러나지 않도록 했다. 이것은 아니었으나, 고타마는 금지사항과 신체적, 정신적 훈련에 숙달된 뒤에는 아마 말로 묘사할 수 없는 행복을 경험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요가의 고전들은 이런 행복이 자기통제, 절제, 불살생의 결과라고 말한다.


고타마는 이제 진정한 요가 훈련 가운데 첫 번째 단계로 나아갈 준비가 되었다. 그것은 체위법, 즉 요가의 특징적인 자세의 훈련이다. 허리를 펴고 다리를 꼬고 앉는 가부좌가 대표적이다. 다음에 요가 수행자는 숨쉬기를 거부한다. 호흡은 우리 신체의 기능 가운데 가장 근본적이고, 자동적이고, 본능적인 기능이며,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므로 조식법, 즉 차츰 느리게 숨을 쉬는 호흡법의 기술을 익혀야 했다. 궁극적 목적은 느릿느릿한 들숨과 날숨 사이에 가능한 한 오래 숨을 참는 것이다. 이것은 수행자의 정신 상태에 깊은 영향을 준다는 것이 예전부터 확인되어왔다. 초기 단계에서 수행자는 음악, 특히 스스로 연주하는 음악을 듣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웅장하며, 광대하며, 차분하면서도 고상한 영역에 들어선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마치 자신이 몸을 소유한 것 같은 느낌이다.


일단 이런 신체적 훈련에 숙달되자 집중 상태라는 정신적 훈련을 받을 준비가 되었다. 이것은 한 점에집중하는 훈련이다. 이 훈련에서 요기(요가 수행자)는 생각을 거부하고 하나의 대상이나 관념에 초점을 맞추고 다른 모든 감정이나 연상을 배제한다. 마음속으로 몰려들어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요소는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이것을 '까시나', 곧 집중체라고 한다.


점차 정상적 상태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고, 영원한 자아의 자율성에 다가가도록 노력하면서 감각의 철회(감각들이 정지한 상태)를 통해 지성만으로 대상을 명상하는 방법을 배웠다. 완벽한 집중 상태(다라나)에서는 연못에서 올라오는 연꽃처럼 또는 내부의 빛처럼 자신의 존재의 바닥에서 자아시각화하는 법을 배웠다. 명상하는 가운데 호흡을 중단함으로써 자신을 의식하고, 지성의 핵심까지 뚫고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랐다. 그 속에서 절대정신이 반영된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각각의 완벽한 집중 상태(다라나)12번의 호흡(프라나야마) 동안 지속된다. 12번의 완벽한 집중 상태(다라나) 뒤에 요기는 자신의 내부로 깊이 가라앉아 자연스럽게 황홀경(디아나, 팔리어로 자나 : 禪定. 요가의 수행 단계는 야마-니야마-아사나-프사나야마-프라티아하라-다라나-디아나-사마디三昧8단계로 나누기도 한다)’의 상태를 얻는다.


텍스트들에 따르면 대상을 주관화하지 않고 실제 있는 그대로’-요기들에게는 중요한 구절이다-볼 수 있다. 거기서 나의 사고로부터 는 사라지기 시작한다. 대상은 이제 나 자신의 경험이라는 여과지를 통하여 파악되지 않는다. 주관적인 연상이라는 왜곡을 동반하는 필터 없이 제대로 법을 새로 명료하게 수 있었다. 현대의 과학자들은 요기들이 명상 중에 심장박동이 느려지고, 뇌의 박자가 바뀌고, 신경학적으로 환경으로부터 멀어지며, 명상하는 대상에 극도로 예민해진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요기는 황홀경에 들어간 뒤에도 좀 더 깊은 그 정신 상태로 계속 나아간다.


수행자가 정말로 능숙하면 황홀경(자나)의 단계들을 넘어서 네 개의 명상 상태(사무색처, 사공처)에 들어갈 수 있다. 이 상태는 매우 강렬해서, 초기의 요기들은 자신이 신들이 사는 영역에 들어왔다고 느꼈다. 1.무한에 대한 느낌(空無邊處) 2.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는 순수한 의식(識無邊處) 3.부재에 대한 인식(無所有處)이며, 역설적으로 풍요에 대한 인식이기도 하다. 이 단계는 재능이 있는 요기만이 들어갈 수 있다. 4.이 단계는 ()라고 부르는데 세속적으로 경험하는 존재의 형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존재가 아니다.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이나 개념이 없다. 따라서 어떤 것이라기보다 ()’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방에 들어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묘사한다. 그럴 때 우리는 공허, 공간, 자유를 느끼게 된다.


일신교에서는 신을 경험하는 일에 대해 비슷한 언급을 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신학자들도 방식은 다르지만 모두 인간의식에서 거룩한 것의 고양된 방출상태를 라고 불렀다. 그들은 또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낫다고도 했다. 초월이나 거룩함과 마주치는 것은 말로는 도저히 표현이 불가능한 경험이기 때문에 언어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112-116.고타마는 평생에 걸쳐 요가를 수행한다. 여기서 그는 형이상학 교리에 대하여 회의적 태도를 보여 주는데, 이런 태도는 그의 생애 전체에 걸쳐 일관되게 나타난다. ‘의 상태가 어떻게 무조건적이고 창조되지 않은 자아일수 있는가? 그는 자신이 이런 경험을 만들어냈으며 는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가 얻은 의식의 고양 상태는 닙바나(해탈, 열반)일 수가 없었다. 이 황홀경에서 빠져나오면 여전히 정령과 욕망과 갈망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닙바나(열반, 해탈)는 일시적이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는 지각도 아니고 지각이 아닌 것도 아닌 상태라고 부르는 네 번째 단계가 있었다. 이것이 자아에 이르는 가장 수준 높은 단계인지도 몰랐다. 그는 이번에도 성공했지만,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자 다시 욕망과 공포와 고통의 노리개가 되고 말았다. 도반 웃타카는 요가의 마지막 경지에 들어갔으면 자아를 경험한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신비주의자들이 영원한 자아라고 부르는 것 역시 또 다른 망상은 아닐까? 수행자는 이런 유형의 요가를 통해 괴로움으로부터 잠깐 휴식을 얻을 수 있을 뿐이었다. 샴카-요가의 형이상학적 교리에 실망했다.


그래서 한동안 요가를 버리고 금욕주의·고행주의로 돌아섰다. 아무리 금욕적인 생활을 해도, 어쩌면 바로 그것 때문에, 그의 몸은 여전히 관심을 가져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여전히 욕정과 갈망에 시달렸다. 마침내 고행이 요가와 마찬가지로 보람 없다는 사실에 직면해야 했다. 그는 길의 끝에 이르렀다.

 

118.그는 이제부터는 자신의 통찰에만 의존할 생각이었다. 그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고 생각한 그 순간, 새로운 해법의 단초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깨달음/깨어남

120-121.어린 고타마는 개복숭아나무 그늘에서 풀을 뽑을 때 벌레와 알들이 죽는 것, 살생을 보고 묘한 슬픔을 느꼈다. 마치 동족이 죽임을 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 날은 아름다운 날이었고, 어느새 그의 마음에서는 순수한 기쁨이 솟아올랐다. 우리도 이처럼 우리 쪽에서는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는데 예기치 않게 그런 순간이 찾아오는 경험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행복감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 왜 우리가 이렇게 기쁜지를 묻고 자의식을 가지게 되는 순간, 그 경험은 빛이 바랜다. 우리가 자아를 기쁨 속으로 끌고 들어가면, 미리 계획하지 않았던 이 기쁨은 지속될 수 없다. 어쨌든 이것은 본질적으로 환희의 순간이다. 몸 바깥에서, 우리의 자기중심주의의 프리즘 너머에서 우리를 사로잡는 황홀이다. 이러한 엑스타시문자 그대로는 자아 바깥에 선다는 뜻는 우리가 깨어있는 시간의 주요한 특징인 갈망이나 욕심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나중에 고타마가 사유했듯이, 그것은 타나(욕망)을 일깨우는 대상들로부터 떨어져서 존재했다.” 어린 고타마는 자신과 관계가 생물들의 고통이 가슴을 꿰뚫었을 때, 자연발생적인 동정신이 이러나면서 자신의 바깥으로 나가게 되었다. 이렇게 자아가 사라진 감정 이입의 상태에 들어가면서 그는 순간적으로 영적인 해방을 맛본 것이다. 황홀경 이야기는 허구든 팔리어 전설이든 역사이든 고타마의 깨달음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세월이 흐른 뒤, 고타마는 낙관과 절망이 뒤섞인 채 틀림없이 깨달음을 얻는 다른 방법이 있을 것이다.“하고 소리친 직후, 어린 시절의 그 경험을 회상했다. 그 순간, 이번 역시 계획하지도, 구하지도 않았는데 그때 환희의 기억이 마음의 수면 위로 솟아올랐다. 야위고, 지치고, 심하게 병들었던 고타마는 개복숭아나무의 시원한 그늘을 기억했고 이것은 열반·해탈의 서늘함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극도로 몸이 허약해진 상태에서 개복숭아나무 그늘의 서늘함을 생각하면서, 열에 들뜬 삶 뒤에 찾아오는 회복기의 해방감(닙부타)을 상상했다. 그때 그의 머릿속에 특별한 생각이 떠올랐다. ”이것이 깨달음에 이르는 길일 수 도 있지 않을까?“ 그는 자문했다. 스승들이 틀렸던 것은 아닐까? 우리의 머뭇거리는 자아를 괴롭혀 마지막 해방으로 밀어 넣는 대신, 노력 없이 자연스럽게 그것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열반·해탈을 우리 인간의 구조 속에 내재화할 수 있지 않을까? 훈련 받지 않은 아이가 자나(禪定 혹은 요가의 황홀경)의 첫 단계에 이르고 아무런 노력 없이 엿볼 수 있다면 , 요가의 통찰은 인간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것임에 틀림없었다. 요가를 인간성을 공격하는 데 이용하는 대신, 체토-비뭇티(心解脫)마음의 해방이라는 말로 최고의 깨달음과 동의어이다.로 나아가는 타고난 경향들을 계발하는 데 사용할 수는 없을까? ************************************* 중략 ************************************

 

132.있는 그대로 보는 것

사람은 보통 고통이 어디에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 그는 훈련 받은 요기의 기술을 통해 사물을 실제 있는 그대로 보게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소극적인 진리들 앞에서 멈추지 않았다. 똑 같은 강도로 능숙한상태들을 육성해나갔다. 요가훈련은 다리를 꼬고 프리나야마라는 호흡 훈련을 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통해 의식의 또 다른 상태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일단 적의와 증오를 마음에서 떨쳐버리면, 악의 없이 살게 되며, 마음에는 동정심이 가득하고, 살아있는 모든 존재가 잘 되기를 바랄 수 있다.······게으름이라는 정신적 습관을 떨쳐버리면, 게으름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뿐 아니라 맑은 정신을 가지게 되어, 정신이 스스로를 의식하면서 완전히 깨어 있게 된다.······불안과 걱정을 몰아내면, 불안 없이 살게 되며, 마음이 차분해지고 고요해진다.······불확실성을 버리면, 몸을 쇠약하게 하는 의심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며, 도움이 안 되는 아쿠살라(不善) 정신상태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

 

133.그의 체계에서는 명상이 희생제의를 대신한다. 동시에 동정심이라는 규율이 형벌과 같은 낡은 금욕주의(타파)를 대신한다. 고타마는 수도자가 동정심을 통하여 자신의 인간성 가운데 지금까지는 미지의 영역이었던 부분에 도달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138.붓다의 깨달음의 주제

고타마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삶의 제한적인 본성에 대하여 사유했으며, 자신의 모든 전생을 보았고, 어린 시절 경험했던 격리되어홀로된 상태로 다시 돌아갔다. 이어 그는 쉽게 첫 번째 선정(禪定)상태로 빠져 들어갔으며, 점점 더 높은 의식상태로 나아가다가 마침내 그 자신을 영원히 바꾸어놓는 통찰을 얻었고, 자신이 윤회와 환생의 순환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확신했다.

 

139.사성제/네 가지 고귀한 진리. 팔정도. 삼학

불교 전통에서 근본적 가르침으로 여겨온 고. . . 도 사성제라는 이름의 통찰이 특별히 새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중 네 번째 진리, 즉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선포한 것인데, 방법은 팔정도라고 불렀고, 이 구성요소는 계. . 혜로 이루어지는 세 가지 행동 방침으로 정리된다.

 

140.붓다가 보드가야에서 하룻밤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에 어떤 진실이 담겨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진지한 구도자가 열반·해탈에 이르는 길을 자신이 이미 발견했다는 갑작스럽고 절대적인 확신이 생겼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길은 그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창조물도 아니었으며, 그 자신의 발명품도 아니었다. 오히려 붓다는 늘 자신이 아주 먼 시대에 인간들이 다니던 길, 고대의 길을 발견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보다 앞서 왔던 다른 붓다들이 오래 전에 이 길을 가르쳤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옛 지식은 희미해지고 완전히 잊혀졌다는 것이다. 붓다는 이 통찰이 실제로 있는 그대로의 진술이라고 주장했다.

 

142.붓다는 네 가지 진리/사성제에 대한 자신의 지식이 독특하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다만 자신이 현시대에 이것들을 깨닫고자신의 삶에서 현실로 만든 첫 사람이라고 주장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이 인류를 속박하는 탐. . 치 삼독을 이미 껐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44.우리가 붓다의 경험을 공유하려면 완전히 자기를 버리는 태도로 진리들에 접근해야 한다. 우리는 갱생 불가능한 낡은 자아와 자기중심주의를 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 붓다가 보디나무 아래에서 열반·해탈을 얻는 순간, “나는 해방되었다!”가 아니라 그것이 해방되었다!”라고 외쳤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145.열반·해탈의 성취는 붓다가 앞으로 결코 괴로움을 경험하지 않을 거라는 뜻이 아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늙고, 병들고, 죽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고통을 겪을 터였다. 열반·해탈은 깨달은 사람에게 황홀경과 같은 면역상태를 주는 것이 아니라 내적인 피난처를 준다. 깨달은 사람은 이 피난처 덕분에 고통과 더불어 살아가고, 그것을 겪고, 인정하면서도, 괴로움 한가운데서 깊은 마음의 평화를 경험할 수 있다. 따라서 열반·해탈은 각자의 내부에서, 즉 존재의 핵심에서 발견된다.

 

146.닙바나는 고요한 중심이다. 그것은 삶에 의미를 준다. 이 고요한 곳과 접촉이 끊어지고, 삶의 방향이 이곳으로 향하지 않는 사람은 무너져버린다. 화가, 시인, 음악가들은 이 평화와 절대의 내적 핵심으로부터 출발해야만 온전하게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다.

 

147.자아란 자기중심주의의 감옥

우리의 언어는 불행하고 세속적인 존재의 감각 자료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실 자기중심주의가 사라진 삶을 상상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존재가 불가능하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 깨달은 사람은 죽은 뒤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주장은 불교에서 이단이 되었다. 다만 죽음이라는 윤회에서 자유로워졌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일신교도들도 그들이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실재를 적절하게 묘사할 수 있는 말이 없다고 주장해왔다. 훗날 붓다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최종적인 안식(파리닙바나 : 般涅槃)에 들어간 사람은 어떤 척도로도 규정할 수가 없다. 그것을 묘사할 수 있는 말은 없다. 어떤 사고로도, 어떤 말의 방식으로도 그것을 포착할 수가 없다.” 세속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니르바나는 이다./이다? 그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것과도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아란 자기중심주의의 감옥. 없다는 게 아니고 관념적인.

 

*萬法歸一何處去. 붓다의 말씀을 펼치면 팔만 사천. 팔만 사찬 법문을 닫으면 하나, 불가에서는 팔만 사천 법문을 한 자로 줄이면 마음 심()이라고 한다. 불교 수행자들이 수행 과정에서 일차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은 마음이 고요한 상태다. 외부에서 오는 어떤 자극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내면의 어떤 욕구에 의해서도 몸이 들뜨지 않는 곳. 먼저 선정에 도달해야 지혜도 생기고 복덕도 자란다. 중생의 (업장과 그에 따른) 근기가 다양하기 때문에 수행 방법도 여러 가지 마련되어 있다. 참선, 간경, 사경,

108, 염불, 기도 등 모두 고요한 마음으로 가는 길이다.

 

깨치면 모든 업장이 소멸하여 열반에 든다?

모든 종교가 그렇듯이 불교도 같구나. 그래서 깨달으려고 그러시나요?

/김형경의 남자를 위하여


150.신이 아닌 인간 고타마는 축을 이루는 장소에 앉아 초자연적인 존재의 도움 없이 자신을 구원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고타마는 우주의 축, 우주 전체를 붙잡고 있는 신화적 중심에 이르렀음을 분명히 밝힌다. ‘부동의 지점은 우리가 완벽한 균형 속에서 세상과 우리 자신을 보게 해주는 심리상태이다. 이런 심리적인 안정과 올바른 지향이 없다면 깨달음은 불가능하다. ‘부동의 자리는 세속적인 세계에서는 정반대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던 것들이 반대의 일치로 합쳐져서 성스러운 것을 경험하게 하는 장소로서 생과 사, 공허와 풍요, 신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정상적인 의식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바퀴살들이 바퀴통에서 만나듯이 만나고 합쳐진다. 고타마는 자신이 어린 시절 갯복숭아나무 아래에서 잠시 맛보았던 완벽한 평형상태(반대의 일치, 조화)에 이르렀을 때 그의 기능들이 집중되고 자기중심주의가 통제되었을 때 드디어 부동의 자리에 앉을 준비가 되었다고 믿었다. 마침내 최고의 통찰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153.그러나 고타마는 혼자였다. 그의 옆에는 오랫동안 깨달음을 준비했다고 증언해 줄 사람이나 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오른손을 뻗어 땅을 짚으며, 땅에게 동정심에서 우러난 자신의 과거 행동들을 증언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땅이 엄청나게 큰 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그대의 증인이 되겠다!” 땅에 증언을 요청하는 자세, 즉 아사나 상태에서 땅을 짚는 붓다의 자세는 불교예술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다.(결가부좌의 항마촉지인)

다르마()는 엄하지만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다. 자아가 없는 인간과 땅 사이에는 깊은 유사성이 있다. 이것은 고타마가 개복숭아나무 아래에서 경험했던 황홀경을 기억하면서 느꼈던 것이다. 이렇게 신과 자신에게 승리를 거둔 후에는 고타마를 붙드는 것이 없었다.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은 우주의 근본구조와 조화를 이룬다.

 

154.첫 번째 선정

이제 고타마는 첫 번째 선정에 들어가 자신의 심리의 내적 상태를 꿰뚫었다. 그가 마침내 닙바나(열반, 해탈)의 평화에 이르렀을 때 불교 우주의 모든 세계는 진동했고, 천국과 지옥이 흔들렸고, 보디나무는 깨달은 자에게 붉고 작은 꽃을 비처럼 퍼부었다.

155.그러나 붓다는 세상을 대신하여 구원을 얻어줄 수 없었다. 모든 생물은 고타마의 방법을 실행에 옮겨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야 했다. 그것을 고타마가 대신 해줄 수는 없었다. 처음에 붓다-아직은 고타마라고 불러야 하지만-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을 설교하지 않을 생각이었던 같다. 사람들은 그를 흔히 석가모니라는 이름으로도 부르는데 이것은 석가족 출신의 말 없는 자라는 뜻이다. 그가 얻은 지식은 말로 나타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이 너무 어렵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그의 이 요구하는 힘든 요가와 도덕 훈련을 견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갈망을 버리기는커녕, 자신을 버리라는 그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붓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가 을 가르친다 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나만 지치고 실망하게 될 것이다.”


그러자 梵天(인도의 종교와 철학에서 최고의 신 또는 원리. 위대함을 강조하여 앞뒤에 대() 또는 왕()을 붙이기도 한다)이 나섰다. 고타마가 깨닫는 과정을 꼼꼼히 지켜본 그는 그의 결론에 망연자실했다. 그는 곤혹스러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만일 붓다가 그의 을 설교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사라질 것이며, 세상은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다!” 범천은 이 일에 개입하기로 결심하고 거리낌 없이 모든 신들을 불러들인다. 신들은 우주의 일부였다. 이교도 이웃들의 경쟁하는 신들에게 경멸을 퍼부었던 헤브라이(유태인)의 예언자들과는 달리, 초기 불교도는 수많은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숭배해오던 대상인 신들을 짓밟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범천이 개입한 이야기는 붓다의 마음에 갈등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범천은 땅으로 내려와 새로운 붓다 앞에 무릎을 꿇었다. 통상적인 관계가 완전히 역전된 셈이다. “항상 깨어있는 위대한 자여/여래여/스스로 깨어난 자여, 진정한 을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속에 욕망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방법을 몰라 한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일부는 이 진정한 을 이해할 것입니다.” 그는 붓다에게 고통에 빠져 죽어가는 인류를 굽어보고, 세상을 구하기 위해 멀리 또 널리 돌아다닐 것을 간청했다.


동정심은 붓다의 깨달음에서 핵심적인 구성요소이다. 한 전설에 따르면, 고타마는 어머니의 심장 높이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것은 영적인 탄생을 보여주는 은유이다. 물론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158.고타마는 붓다가 되려고 오랜 기간 명상하고 준비하는 가운데 둑카(고통, 괴로움)의 현실에 전 자아를 개방했으며, 괴로움이라는 현실이 자기 존재의 가장 깊은 구석까지 다가가게 하였다. 그는 직접적인 지식으로 괴로움이라는 고귀한 진리(일체개고)’를 깨달았으며, 마침내 그것과 결합하여 일체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닙바나(해탈·열반)에 편안하게 파묻혀 있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새로운 종류의 쾌락의 궁전에 들어가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렇게 물러나는 것은 진정한 의 본질적인 역할을 훼손하는 일이 될 터였다. 붓다가 사람들이 뒤틀린 세상에서 괴로워하는 것을 보면서, 네 가지 가없는 마음(四無量心 : , , , )’을 수행하여 자비로운 감정을 땅의 네 모퉁이로 보냈던 것은 결코 자신의 영적인 이익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 그가 깨달음을 통한 해방을 얻은 주된 방법 가운데 하나는 자아를 버리고 자애와 공감을 계발하는 것이었다. 그의 진정한 은 그에게 시장으로 돌아가 슬픔에 잠긴 세상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다. 붓다는 마침내 그의 청원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였으며 마음에 동정심이 가득하여, 붓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중요한 언급이다.

 

159.그가 보디나무 아래에서 깨달은진리의 핵심은 남들을 위해 사는 것이 도덕적인 삶이라는 것이었다.

 

진리

165.그러나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붓다는 교리나 신조를 싫어했다. 그에게는 제시할 신학이 없었다. 고통(괴로움)의 근본원인에 대한 이론도, 원죄도, 궁극적 실재에 대한 정의, 규정도 없었다. ‘버림은 붓다의 기본 가르침의 기본 가운데 하나이다. 깨달은 사람은 아무리 권위적인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움켜지거나 거기에 매달리지 않았다. 모든 것이 지나가며, 어떤 것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았다. 붓다는 자신의 가르침을 뗏목에 비유한 적이 있다. 한 나그네가 넓은 강가에 이르렀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그곳을 건너야 했다. 다리도 나룻배도 없었으니 뗏목을 만들어 강을 건넜다. 붓다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나그네가 뗏목을 어찌해야 합니까? 큰 도움이 되었으니 어디든 질질 끌고 다녀야 합니까? 아니면 강변에 그냥 묶어두고 자기 갈 길을 계속 가야 합니까?” 답은 간단했다. “수행자들이여, 내 가르침 역시 뗏목과 같습니다. 강을 건널 때만 쓰면 되지, 늘 거기에 매달릴 필요는 없습니다. 내 가르침의 본성이 뗏목과 같다는 점을 정확히 이해하면, 나쁜 가르침은 말할 것도 없고 좋은 가르침도 다 버리게 될 것입니다!”그의 가르침은 완전히 실용적이었다. 그 유일한 목적은 사람들이 고통의 강을 건너 저쪽 강변(피안 彼岸)’에 이르게 하는 것이었다. 그가 할 일은 괴로움을 덜어주고 니르바나의 평안을 얻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이런 목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우주 창조나 최고의 존재에 대한 난해한 이론은 있을 수 없고 불필요했다. 바닷물이 왜 짠가를 알기 위해 모든 바닷물을 마실 필요는 없다. 오늘날의 불가지론(不可知論)과 맥을 같이 한다. 세상이 영원하든 시간 속에서 창조되었든 그것이 무슨 차이가 있으며 어느 쪽이든 비통과 고통과 비참은 계속될 터인데, 오로지 고통의 단절에만 관심을 가졌다.

 

168.붓다의 첫 번째 가르침

붓다는 사슴공원(鹿野園)에서 함께 수행했던 다섯 벗을 만나 처음으로 법을 풀어놓는다. 네 가지 진리(四聖)와 중도의 길, 즉 양 극단의 중간에서 八正道를 발견했는데 이것이 수행자들을 깨달음으로 곧바로 이끌어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고집멸도(苦集滅道)는 형이상학적 이론이 아니라 실천적인 강령으로 제시되었다. 다르마(법 또는 진리)있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있어야 할 것--도 의미한다. 붓다는 특별한 요가를 가르친 것으로 암시되고 있다. 그들에게 깨어있는 마음가없는 마음을 훈련시켰으며, 명상은 깨달음에 불가결했다. 그들은 냇물에 들어간 자가 되었으며 괴로움의 바다에서 건져졌다.


각각의 진리에는 세 가지 길이 있다. 그 다음에 진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설명했다. 괴로움은 완전하게 알아야했다. 괴로움의 원인인 갈망은 버려야했다. 괴로움의 단절인 닙바나(열반, 해탈)는 아라한(阿羅漢)의 마음속에서 현실화 해야했다. 팔정도는 따라야했다.

 

173.불교명상의 가장 흔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의존적 인과관계의 사슬즉 열두 가지의 사슬, 十二緣起이다. 이 사슬은 다른 것에 의하여 결정되는 동시에 또 다른 것을 결정한다. 십이연기에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


업은 무지에 의존한다. 의식은 업에 의존한다. 이름과 형상은 의식에 의존한다. 감각기관은 이름과 형상에 의존한다. 접촉은 감각기관에 의존한다. 감각은 접촉에 의지한다. 욕망은 감각에 의존한다. 집착은 욕망에 의존한다. 존재는 집착에 의존한다. 출생은 존재에 의존한다. 고통은 출생에 의존한다. 여기에서 노화와 죽음, 슬픔, 탄식, 비참, 비애, 절망이 나온다. 용어들은 약간 모호하니 정확하게 복습하기 바란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流轉門 : 順觀어떻게 미혹한 세계가 형성되는가를 설명).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이 소멸한다(還滅門 : 逆觀어떻게 미혹한 세계를 극복하고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지를 보이는 것).

 

178.붓다는 브라만교의 무아상태의 황홀경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수행자들이 늘 말짱한 정신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감정적인 과시를 금지했다.

 

179-180.붓다의 두 번째 설교(자아의 부정) -수레의 비유/무아의 배경/자기중심주의 배척

다섯 수행자들이 냇물에 들어간 자가 된 지 사흘 뒤에 붓다는 사슴공원에서 설교를 하면서, 아낫타(무자아 : 無我)라는 독특한 교리를 설명했다. 그는 사람의 인격을 색, , , , /, 감정, 지각, 의지(의식적, 무의식적), 의식(五蘊)으로 나누었다. 예를 들어 몸이나 감정은 순간마다 변한다. 이것들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며, 또 실망과 좌절을 준다. 지각과 의지에 대해서도 같다. 따라서 각각의 구성요소는 괴로움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결함이 있고 계속 변하며, 수많은 금욕주의자와 요가 수행자들이 구하는 자아를 구성하거나 포함할 수 없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물었다. “이렇게 불만족스러우니, 정직한 사람이라면 각각의 구성요소를 검토한 뒤에 그것과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내것이 아니다. 이것은 진짜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그러나 붓다는 영원하고 절대적인 자아의 존재를 간단하게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제 안정된 자아는 없다고 주장했다. ‘자아나 자신이라는 용어는 단순히 관습일 뿐이었다. 인격에는 고정된 또는 항상적인 핵이 없었다. 연기론이 보여주듯이, 모든 지각 있는 존재는 항상 유동적인 상태에 있었다. 그것은 단지 일시적이고 쉽게 변하는 존재상태의 연속일 따름이었다. 붓다는 인격을 묘사할 때, 항상 변하고 있는 타오르는 불이나 흐르는 냇물 같은 비유를 즐겨 사용했다.

 

120조 개의 세포. 핵의 밖에는 끊임없이 도는 전자와 양자/똑 같은 것은 없다

 

181-182.자아의 부정은 추상적인 철학적 명제가 아니라, 불교도들이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라는 요구였다. 이 교리의 윤리적 영향은 광범위했다. 자아라는 관념은 우선 나와 나의 것에 대한 서투른 사고들을 낳고, 이기적인 갈망을 자극한다. 나아가 자기중심주의는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주장할만했다. 자아에 대한 과도한 애착은 경쟁자에 대한 질투나 증오, 자만, 과대망상, 우월감, 잔혹성을 낳을 수 있으며, 자아가 위협을 느낄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구인들은 자아의 부정을 허무하고 우울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지만, 붓다는 근본적으로 좀 더 나아갔다. 그는 자아를 없애려는 것이 아니었으며 자아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해버림으로서 자아를 항상적 실재라는 잘못에서 빠져나오게 하고, 그런 잘못이야말로 우리를 괴로움의 순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무지의 증상이라고 주장했다. 그 교리는 철학적, 형이상학적 교리가 아니고 일차적이며 실용적인 교리였다. 자아를 부정하면 자기중심주의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183.수행자가 깨어있는 마음을 훈련하기 시작하면 자아라고 부르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보게 된다. 그는 덧없는 정신적 상태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게 된다. 그는 자신의 욕망, 공포, 갈망을 자신과 관계없이 먼 곳에서 생겨나는 현상으로 보게 된다. 붓다는 두 번째 설교의 마지막에 다섯 수행자들에게, 일단 이런 냉정과 평정을 얻으면, 개달을 준비가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탐욕이 희미해지고 갈망이 사라지면, 암음의 해방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들은 목표를 달성하여 붓다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처럼 승리의 외침을 내지를 수 있게 된다. “거룩한 삶을 이미 그 끝까지 살았다! 해야 할 일을 다 이루었다. 달리 할 일이 없다!”

 

185.자기중심주의는 사람을 옭죈다. 붓다는 자아 없는 삶이 사람들을 열반으로 이끌어줄 것이라고 믿었다. 일신교도라면 그것을 통해 신의 임재(臨在) 속으로 들어간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붓다는 인격화된 신이라는 개념이 너무 제한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면 최고의 진리는 또 다른 존재로 전락해버리기 때문이었다. 열반은 인격체도 아니고 천국과 같은 장소도 아니다. 붓다는 늘 어떤 절대적 원칙이나 최고 존재가 있다는 것을 부정했다. 우리가 이것에 다시 집착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오히려 깨달음에 족쇄나 장애물이 되기 때문이다.

 

191-192.이렇게 해서 붓다의 승가 집단은 아주 짧은 시간에 세상에는 붓다를 포함하여 61명의 아라한이 생겨났고, 붓다는 그들에게 명령했다.

이제 가서 사람들의 복지와 행복을 위해서, 세상에 대한 동정심으로, 신과 인간들의 유익, 복지, 행복을 위하여 돌아다니십시오. 두 사람이 같은 길을 가지 마십시오. 수행자들이여, 최상의 진리를 가르치고, 거룩한 삶에 대하여 명상하십시오. 욕망은 거의 비웠으나 법을 듣지 못하여 번민하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법을 이해할 것입니다.”


불교는 특권을 가진 엘리트들을 위한 교리가 아니었다. ‘민중을 위한 종교이며, 다수의 중생을 위한 종교였으므로 누구에게나 열려있었으니 카스트의 하리쟌(불가촉천민)을 배척하지 않았으며,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하나의 집단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종교적 강령을 구상한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불교는 <우파니샤드 : 인도의 정통 브라만 철학의 연원으로서, 철학·종교 사상의 근간·전거(典據)가 되었다. 근본 사상은 대우주의 본체인 브라만(Brahman:)과 개인의 본질인 아트만(Ātman:)이 일체라고 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으로 관념론적 일원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외부가 아닌 내면에 있는 신을 찾고 의례적인 제식이 아니라 만물에 스며있는 브라만을 찾으라는 가르침이 핵심이다>의 현자들이 설교하는 것과 달리 비의(秘義)적인 진리가 아니었다.

 

전도

197.능숙한 요가 수행자들은 요가를 통하여 잇디(특별한 힘)를 얻는다고 여겼으며, 이것은 훈련받은 정신이 물질을 지배한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붓다는 수행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잇디를 행사하는 것을 비판하고 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경고했으며 영적인 인간이 단순한 마법사로 전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199.붓다의 세 번째 설교

붓다는 입을 열었다. “수행자들이여, 모든 것이 불타고 있습니다.” 감각과 그 감각의 먹이가 되는 외부세계의 모든 것, , 정신, 감정이 모두 불타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이런 큰 불이 났는가? 탐욕, 증오, 망상(三毒)이라는 세 가지 불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이 불길에 연료를 계속 제공하는 한, 이 불은 열반의 계속 타 해탈의 서늘함에 결코 이를 수 없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인격의 더미, 또는 구성요소(오온)는 암묵적으로 장작 더미에 비유되었다. 우파다나(집착)라는 말에도 이런 비슷한 말장난 비슷한 것이 있다. 그 어근의 의미가 연료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계속 불타게 하고 우리의 깨달음을 방해하는 것은 이 세상의 것들에 대한 우리의 집착에 가까운 욕망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 탐욕과 갈망은 증오와 짝을 이루고 있으며, 증오는 세상의 아주 많은 악과 폭력의 원인이다. 무지의 세 번째 불이 계속 타오르는 한, 사람은 슬픔, 애도, 고통, 비애, 절망을 안은 채 나고 늘고 죽는순환, 불에 타 연기를 내뿜는 순환으로부터 해방을 얻는 데 핵심이 되는 네 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 고집멸도)를 깨달을 수 없다. 따라서 수행자는 냉정해야 한다. 수행자는 늘 깨어있는 마음이라는 기술을 통해 자신의 오온으로부터 멀어지고 불을 꺼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해탈의 평화와 자유를 경험할 것이다.


불의 설교는 고대 인도의 베다 신앙체계에 대한 뛰어난 비판이었다. 브라민(바라만)은 그릇된 신앙의 사제 엘리트로서 이 세 가지 불을 돌보면서 자신의 아집이라는 불에 장작을 계속 집어넣고 있을 뿐이었다.

 

223.오계-불살생, 불투도, 불망어, 불음주, 불사음

 

226.붓다의 황금률

붓다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에 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하기를 원치 않는 짓을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라.”

 

230.붓다는 칼라만인들에게 삼독을 피하면서 동시에 그와 반대되는 덕들, 비탐욕, 비증오, 비망상을 실행에 옮기면 분명 유익이 있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만일 그들이 자비, 친절, 관용의 마음을 계발하고 삶을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그들은 더 행복해질 것이다. 만일 다시 태어나야 한다면 (붓다는 환생 교리에 익숙하지 않은 칼라만인들에게 그 교리를 강요하지 않았다), 이 선한 업·행동을 통해 다음 생에는 하늘에서 태어나게 될 수도 있다. 다른 세상이 없다 해도, 이런 사려 깊고 다정한 행동은 다른 사람들도 그들에게 비슷한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적어도 자신이 올바르게 행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은 언제나 위안이 된다. 붓다는 그들에게 이런 능숙한 심리를 훈련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하여 명상 기술을 가르쳤는데 그런 자비 명상 훈련을 거듭함에 따라 자신이 풍부하고, 고양되고, 가없는 자비에 물들어 있음을 알게 될 터였다.······일반인들은 지속적인 해탈을 얻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 궁극적 해방의 암시 정도는 받을 수 있었다.

 

231.붓다는 일반인 모두에게 새로운 사회에 만연한 자기중심주의, 인간의 삶의 거룩한 영역에 다가가는 것을 막는 자기중심주의를 동정심으로 공격하여 완화시키라고 가르쳤다. 그의 완벽한 온정주의는 다음 시에 잘 나타나 있다.

 

모든 존재가 행복하게 하라!

약하든 강하든, 높든 중간이든 낮든,

작든 크든, 보이든 보이지 않든, 가깝든 멀든,

살아 있든 태어날 것이든 모두가 온전히 행복할지어라!

 

아무에게도 거짓말하지 말고,

어디에 있든 누구도 경멸하지 말라.

분노 때문이든 증오 때문이든 살아 있는 것이

해를 입지를 바라지 말라!

 

어머니가 하나뿐인 자식을 소중히 여기듯이

모든 생물들을 소중히 여기라!

우리의 사랑의 마음들이 위든 아래든 옆이든

가없이 온 세상을 채울지어다

속박 없고, 증오와 적의에서 자유로운,

가없는 호의로 온 세상을 대할지어다!


234-235.불교 전설에서 붓다는 여러 차례 여성으로 태어나기도 했다. 처음에는 여자의 승단의 입교를 반대했지만 결국 승낙한八敬法 : 여승으로 지켜야 할 여덟 가지 규칙붓다는 여자의 역할가사와 출산을 심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팔경법은 후대에 붙여진 것이며, 훗날 교단 내의 남성우월주의를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붓다의 성격으로 미루어 볼 때 상당한 설득력이 있는 주장임에 틀림없다. 자신처럼 부인여자에 대한 애착이 구도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제자인 수행자들에게 여자를 볼 때도 깨어 있는 마음으로 보라고 했다.

 

240-242.초기 교단 시절부터 붓다는 권위적이고 통제적인 통치자가 되기를 거부했으며, 수많은 여러 교단이 있었으니 그들의 법은 같았으며, 생활방식도 같았다. 흩어져 있던 교단은 6년마다 한 자리에 모여서 유대(계본. 戒本)라는 신앙고백문을 암송했다. 그 이름이 말해주듯이, 그 목적은 교단을 하나로 묶는 것이었다.

 

모든 해를 주는 일을 삼가며,

능숙한 것을 얻으며,

자신의 마음을 정화하니,

이것이 곧 붓다들의 가르침이다.

 

자제와 인내는 모든 금욕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것이며,

붓다들은 열반. 해탈이 최고의 가치라고 선포하였다.

다른 삶을 해치는 자는 진정으로 떠난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자는 진정한 수행자가 아니다.

 

흠을 잡지 말며, 해를 주지 말며, 근신하라.

먹을 것과 하나의 침상과 의자에 관한 규칙을 지키며,

명상으로부터 나오는 더 높은 지각에 몰두하라.

이것이 깨달은 자들의 가르침이다.

 

붓다는 이 의식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으므로 이 모임에 빠지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초기의 승단을 결속하는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일부 학자들은 이 규칙이 <비나야 : >(출가자가 수행 생활을 위해서 지키는 규율 조항을 말한다)에 기록된 최종적 형태로 확립되기까지 200~300년이 걸렸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243.수행자들은 얻고 소비하는 일과 관련된 갈망을 버리고, 오로지 남이 주는 것에만 의존하면서 최소한의 것으로 행복해지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런 생활방식 때문에 명상에 몰두할 수 있었으며, 우리를 괴로움의 수레바퀴에 얽어매는 삼독의 불을 멀리할 수 있었다. 그 일관된 지속성은 우리에게 인간생활의에 대하여 중요한 점을 가르쳐준다. 예를 들면, 엄청난 숫자의 병사들을 바탕으로 한 커다란 제국은 모두 무너졌지만 佛家라는 공동체는 2,500년이 지나도 끄떡 없이 유지되고 있다.

 

244.승단이 발전하는 가운데 붓다라는 고요한 통제된 상태의 인물, ‘깨달음을 얻은새로운 인간이 있었다. 붓다는 완전히 자기를 버릴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금방 이해될 수 없는 모호한 존재이다. 개달음을 얻은 뒤 그는 비인격적인 존재-결코 메마르다거나 차갑다는 의미는 아니다-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인간으로서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분류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나온 비유들일 것이다.

 

245.한 바라문이 나무 아래에서, 차분한 표정으로 큰 평화와 완전한 고요 속에 명상에 잠겨 있는 모습을 보고 경외감을 가지고 물었다.

-선생님은 신이십니까?

-아니오.

-천사가 되어 가는 중입니까? 아니면 이 되어가는 중입니까?

-아니오.

-선생님은 인간이십니까?

-아니오.

바라문은 그를 어떻게 분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자 붓다는 그에게 말했다.

-나를 스스로 깨어난 사람으로 기억해주십시오. 항상 깨어있는 사람으로.

 

최후의 안식

247.붓다가 깨달음을 얻은 지 45년이 되는 해, 자신의 전도를 포함한 일생 거의를 보낸 두 강국 마가다와 코살라 중 코살라의 왕이 와서 왕들은 권위에 취하고, 탐욕에 사로잡혔으며, 혼자 패권을 잡기 위해 끊임없이 군대를 동원하여 전쟁을 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고 탄식했다.

 

249-250.붓다는 노년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모든 존재를 괴롭히는 고통의 상징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붓다 자신도 늙었다. 역시 젊지 않았던 아난다는 그 무렵 스승의 변화에 놀라고 있었다. 피부에는 주름이 잡혔고, 팔다리는 흐느적거렸고, 몸은 굽었고, 감각기관들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렇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아난다여.” 붓다도 동의했다. 그러나 붓다의 말년에 관한 이야기는 나이가 들면서 생김새가 볼품없어지는 면보다는 노인이 외부의 공격에 약한 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텍스트들은 붓다의 삶의 마지막 단계를 다루면서, 성스러움에 대한 느낌이 사라져버린 세계의 공포를 강조한다. 붓다는 노년이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모든 존재를 괴롭히는 괴로움의 상징이라고 생각했다. 교단조차 이런 세속적 정신으로부터 면역이 되지 않았음을 기억해야 한다.

 

251.붓다는 이적을 통해 요가의 힘을 세속화하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다. 신화나 기적처럼 그것은 믿음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263.붓다의 유언

나는 여러분들에게 나 스스로 온전히 경험한 것만 가르쳤습니다. 내가 가르친 모든 진리를 철저하게 배우고, 명상을 통해 그것을 살아 있는 경험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각자 스스로를 섬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자신만을 의지하며, 다른 누구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두 法/담마을 섬으로 삼고, 만을 의지하며 다른 어느 것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소수의 선택받은 지도자들을 위한 비밀 교리 같은 것은 없었다. 죽음에 직면한 붓다를 보는 수행 제자 아난다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채 슬퍼한다.


아난다여! 무엇을 기대합니까? 어떤 것도 영원히 지속되지 않으며,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 그리고 모든 사람들과 늘 헤어진다는 것이 의 정수 아니었나요? 사리자(붓다의 열 제장 중 지혜 제일 제자)가 떠나면서 불교도의 삶의 기본이 되는 통찰과 법률도 가져갔다고 생각하는 것인가요? 덕의 규칙과 명상의 지식 역시 교단을 떠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여래여."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불운한 아난다는대답했다. 사리자가 그들 모두에게 매우 관대했고 지칠 줄 모르고 담마/진리/법를 설명하여 그들을 돕고 또 풍요롭게 해주었다는 기억 때문이었다.

 

269.붓다는 자신을 위하여 특별히 도살한 고기는 먹지 않았다.

 

272.궁극적 해탈·열반

붓다는 늘 해탈·열반을 정의하지 않으려 했다. 감각과 정신의 영역을 초월하는 이 경험을 표현할 적절한 용어가 없기 때문이었다. 신을 소극적 술어로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일신교도들처럼 붓다도 가끔 그것이 아닌 것을 통해 설명하는 것을 좋아했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해탈·열반을 다음과 같은 상태라고 말했다.

 

땅도 없고 물도 없으며, 빛도 없고 공기도 없는 상태이다. 무한도 허공도 아니다. 이성의 무한이 아니지만 절대적 공허도 아니다.······이 세상이 아니지만 다른 세상도 아니다. 그것은 해이며 달이다.

 

이것은 열반·해탈이 가 아니라는 뜻이다. 아라한이 열반·해탈 속에서 존재를 중단한다는 주장이 불교에서는 이단이 되었음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 열반·해탈은 자아를 넘어선 상태였으며, 어떤 이기심도 없기 때문에 행복한 상태였다. 깨닫지 못한 우리들, 아집에 의해 여전히 시야가 제한되어 있는 우리들은 이런 상태를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자아의 죽음을 성취한 사람들은 자아가 없는 것이 공허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붓다는 제자들에게 심리의 핵심에 자리 잡은 이 평화로운 에덴이 무엇인지 암시를 주려할 때 소극적 술어와 적극적 술어를 섞어서 사용했다. 그는 열반·해탈이 탐욕. 증오. 망상 삼독의 소멸이라고 말했다. 열반·해탈은 세 번째 고귀한 진리였다. 오점이 없고, 침해할 수 없는 것이며, 괴로움이 없는 상태, 번민이 없는 상태, 적개심이 없는 상태였으며, 소멸의 상태가 아닌, 죽음 없는 상태였다. 적극적으로 진리, 미묘한 것, 건너편 언덕, 영속적인 것, 평화, 더 나은 목표, 안전, 자유, 순수, 독립, , 피난처, 항구, 의할 것, 넘어선 것이었다. 후일 대승에서는 붓다가 열반·해탈과 완전히 융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가 열반·해탈과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280.붓다의 마지막 길

바람에 꺼진 불이

쉼을 얻어 규정되지 않듯이,

깨달음을 얻어 자아로부터 자유로운 자는

쉼을 얻어 규정되지 않는다.

그는 모든 형상들을 넘어선 곳으로 갔다.

말(언어)의 힘을 넘어선 곳으로 갔다./숫타니파타 5 : 7

 

맺는 말

붓다는 평생 세 번의 큰 위기를 맞이한다.

.99명을 죽인 앙구리라마와 마주쳐서 봉변을 당할 뻔 했으나 그는 오히려 감화되어 상가(승단)에 몸을 바친다.

.253.처남 데바닷타-붓다를 헌신적으로 모셨던 늙은 밤비사라의 암살음모에 연루되어 군대의 장교들이 상가(승단) 전체를 말살하려 했으나 왕은 붓다가 처남과 절연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그 이단자의 행위에 상가 전체가 책임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250.붓다는 잇디(이적)을 통해 요가의 힘을 세속화하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다. 신화나 기적처럼 그것은 믿음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적의 힘으로 왕자 아자타삿투를 감복시켜 붓다를 죽이려 화살을 쏘고, 바윗돌을 굴렸으며 코끼리 날리기리를 풀어 밟아 죽이려 했으나 오히려 코끼리를 감화시켰다.

 

*열반 [Nirvana, 涅槃]

() nibbāna.

불교에서 수행을 통해 도달하는 궁극적 경지.

반열반(般涅槃대반열반(大般涅槃)이라고도 한다. '열반'은 산스크리트 '니르바나'(nirvāṇa)를 음역한 것이고 취멸(吹滅적멸(寂滅멸도(滅度() 등으로도 번역된다. 열반의 본래 뜻은 '소멸' 또는 '불어 끔'인데, 여기서 '타오르는 번뇌의 불길을 멸진(滅盡)하여 깨달음의 지혜인 보리(菩提)를 완성한 경지'를 의미하게 되었다. 열반은 생사(生死)의 윤회와 미혹의 세계에서 해탈한 깨달음의 세계로서 불교의 궁극적인 실천목적이다. 인도에서는 불교가 아닌 다른 종교·사상에서도 열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나 불교의 열반 개념과는 다르다. 더욱이 불교 내에서도 소승과 대승의 여러 학파에 따라 해석에 차이가 있다.

 

소승의 부파불교(部派佛敎)에서 열반이란 번뇌를 멸해 없앤 상태를 말하고 여기에 유여열반(有餘涅槃)과 무여열반(無餘涅槃)2가지가 있다고 한다. '유여'란 의존해야 할 것, 즉 육신이 아직 남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유여열반은 깨달음은 이루었으나 번뇌를 지닌 육신에 의지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무여열반은 완전한 열반, 즉 반열반(parinirvāṇa)으로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방편으로 의지하고 있던 육신을 벗어나 인간으로서의 삶을 마치고 법신(法身)의 상태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에서는 열반을 실체적인 것으로 보았으나, 경량부(經量部)에서는 열반이란 다만 번뇌를 멸한 상태를 가리키는 명칭으로서 그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대승불교의 경전인 열반경에서는 열반의 개념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열반은 상(((()4(四德)을 갖추어야 한다고 보았다. 상은 상주(常住)함을 말하는데 열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생(((()의 변화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상이라 하며, 낙은 안락의 뜻으로 열반은 번뇌가 다하여 괴로움과 즐거움을 모두 떠난 진정한 즐거움의 세계이므로 낙이라 하며, 아는 진아(眞我)를 뜻하는 것으로 열반은 망아(妄我)를 벗어나 진정한 자아에 도달한 세계이므로 아라 하며, 정은 청정의 뜻으로 염오(染汚)에 덮힌 생사의 세계를 여읜 열반의 세계는 청정한 세계이므로 정이라 한다. 대승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4덕을 갖추지 않은 소승의 열반은 유위열반(有爲涅槃)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이에 대해 4덕을 갖춘 열반을 무위열반(無爲涅槃)이라 하여 이를 최상의 목표로 삼았다. 또한 열반에는 상(((청정(淸淨불로(不老불사(不死무구(無垢쾌락(快樂) 8종의 법미(法味)가 있다고 하는데, 이를 4덕과 관련하여 상·항은 상에, ·쾌락은 낙에, 불로·불사는 아(), 청정·무구는 정에 대응시켜 설명하기도 한다. 대승불교 안에서도 종파에 따라 열반에 대한 해석에 차이가 있다. 유식사상(唯識思想)에 근거한 법상종에서는 열반을 본래자성청정열반(本來自性淸淨涅槃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 등의 4종 열반으로 나누었다. 이중 유여의열반과 무여의열반은 앞에서 설명한 유여열반·무여열반과 같다. 본래자성청정열반은 성정열반(性淨涅槃)이라고도 하는데, 모든 존재가 실상(實相)에 있어서는 진리 그 자체인 진여(眞如)의 이체(異體)라는 절대적 차원에서 열반을 말한 것이다. 무주처열반은 완전한 깨달음을 이룸으로써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의 번뇌를 모두 여의고 생사의 세계를 벗어났으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열반의 경지에 머무르지 않고 생사의 세계에서 활동하는 것을 가리킨다. 또한 지론종과 섭론종에서는 성정열반과 방편정열반(方便淨涅槃)2종열반설을 세웠는데, 이것은 후에 천태종(天台宗)에서 성정열반·원정열반(圓淨涅槃방편정열반의 3종열반설로 전개되었다. 성정열반은 본래자성청정열반과 같고, 원정열반은 지혜를 완성하여 번뇌를 여의고 증득(證得)한 열반을 말한다. 방편정열반은 부처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방편으로 모습을 나타냈다가 인연이 다하여 들어가는 열반으로 응화열반(應化涅槃)이라고도 한다. 열반은 모든 중생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 이상적 경지이지만 불교의 근본적인 관점에서는 현실세계와 대립 단절된 열반의 적정(寂靜)에 집착하는 태도를 비판한다. 불교의 최고 원리 중 하나인 중도(中道)를 깨달아 모든 존재의 여실한 모습을 보게 되면, 생사와 열반이 다르지 않고 번뇌가 곧 깨달음이므로(生死卽涅槃 煩惱卽菩提) 생사와 열반은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의 차이일 뿐 근본적인 차별은 없다는 것이다.

 

2014. 10.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