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의 현문우답/ 간화선과 위파사나, 오르는 길 달라도 같은 곳서 만나죠 2011-04-11
북방 불교의 대표적 수행법인 간화선(看話禪)과 남방 불교의 대표적 수행법인 위파사나가 만났다. 10일 충남 공주 태화산 전통불교문화원에서 북방 불교의 간화선 선사인 고우(오른쪽) 스님과 남방 불교의 위파사나 선사인 파욱 스님이 만났다. 두 사람은 간화선과 위파사나의 소통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8~10일 사흘간 충남 공주의 조계종 태화산 전통불교문화원에서 ‘간화선과 위파사나 국제연찬회’가 열렸다. 조계종의 대표적 선지식(善知識)인 원로의원 고우(古愚·74·경북 봉화 금봉암 주석) 스님과 미얀마의 파욱(77·파욱 사원 조실) 스님이 직접 만났다. 예전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간화선 수행법을 중시하는 한국 불교는 남방 불교 수행법인 위파사나 수행을 ‘소승 불교’라며 무시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위파사나 수행을 하는 제자를 “외도(外道)에 빠졌다”며 파문하는 스님도 있었다.
최근에는 미얀마에 가서 위파사나 수행을 직접 배우고 돌아오는 스님과 재가자(在家者·일반인)가 꽤 늘었다. 이와 함께 ‘간화선과 위파사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한국 불교가 한 번은 마주쳐야 할 숙제였다. 조계종의 대표적 선지식과 남방 불교의 대표적 사야도(선지식)가 공식적으로 만나 대화와 토론을 하기는 처음이다.
파욱 선사는 미얀마에서 가장 존경 받는 선사다. 파욱 선사를 수행하는 싱가포르 출신의 저스틴 림은 “파욱 스님은 미얀마뿐 아니라 말레이시아·싱가포르·스리랑카에서도 유명한 분이다. 파욱 스님의 수행법이 스리랑카에도 건너갔으며, 지난번 방문 때는 스리랑카의 장관이 공항 활주로까지 마중을 나왔을 정도”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 “어쩌면 올해가 파욱 선사의 법문을 듣는 마지막 해가 될지도 모른다. 연세가 있으셔서 아마 내년부터 네팔의 히말라야에 거처를 마련해 조용히 머무실 것 같다”고 덧붙였다.
8일 전통불교문화원 강당은 160여 명의 스님과 재가자로 빼곡했다. 파욱 선사는 ‘아는 자와 보는 자’란 주제로 법문을 했다.
“여러분의 오른손을 들어보라. 그걸 바라보라. 여러분은 무엇을 보나. 손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의 원인과 소멸을 직접적인 지혜로 알고 볼 수 있는가. 손이란 물질이 무상하며 연기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볼 수 있는가. 아닐 거다. 여러분은 ‘손’이라는 개념을 바라보고 있는 거다. 여러분은 몸을 보면서 궁극적인 물질을 보고, 식(識)을 보면서 궁극적인 정신을 봐야 한다. 그래서 위파사나는 물질과 정신, 두 가지의 명상주제를 갖는다.”
파욱 선사는 구체적 수행법으로 콧구멍과 윗입술이 닿는 지점의 호흡에 집중하면서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를 깨우치는 ‘아나파나사티’를 제시했다. 그는 사성제(四聖諦·삶의 4가지 진리, 구체적으로 苦集滅道)와 팔정도(八正道·깨달음을 얻는 8가지 방법, 구체적으로 正見·正思惟·正語·正業·正命·正精進·正念·正定) 등 붓다의 기본 가르침에 매우 충실했다.
이튿날에는 고우 스님이 ‘간화선 수행’에 대해 법문을 했다. 고우 스님은 “간화선과 위파사나가 공식적인 장소에서 서로 소통하는 자리는 제 기억으로는 처음인 것 같다”고 대화의 의미를 짚었다. 이어 “부처님 법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어느 곳이든, 어느 시대든 통하는 진리라고 본다. 만약 제가 간화선만 절대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상대적인 세계에 빠지는 거다”라며 “내가 처한 시간과 공간에서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그게 바로 선(禪)이다”고 말했다.
고우 스님은 간화선과 위파사나 수행법을 산에 비유했다. “하나의 산을 간화선은 동쪽에서 오르고, 위파사나는 서쪽에서 오른다. 동쪽 길은 짧고 가파르다. 서쪽 길은 완만하지만 무척 길다. 그 차이다. 동쪽 길의 간화선은 손을 잡고 발을 디딜 곳도 없는 절벽을 올라가야 한다.”
고우 스님은 “자신에게 맞는 음식을 고르듯, 수행법도 자기에게 맞는 것을 고르면 된다”고 말했다.
◆간화선(看話禪) =‘이뭣고’등의 화두(話頭)를 들고 좌선하는 북방 불교의 선수행법. 화두를 통해 의심을 일으키고, 그 의심을 풀면서 깨달음을 얻는 수행법이다. 송나라의 대혜 선사가 이를 중국 선종의 전통적 수행법으로 확립시켰다. 현재 조계종단의 대표적 선수행법이다.
◆위파사나 =남방불교의 명상 수행법. ‘위’는 삼법인, 즉 무상, 고통, 무아를 뜻한다. ‘파사나’는 이에 대한 바른 이해, 혹은 지혜를 의미한다. 미얀마를 비롯한 동남아 국가의 승가에서 주로 이 수행법을 따른다.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95> 간화선과 위파사나 2011-04-21
국내 선방의 수좌들 사이에서도 ‘빅 뉴스’라고 합니다. 십여 일 전 충남 공주 태화산에서 열렸던 ‘간화선(看話禪)과 위파사나의 만남’ 말입니다. 그 동안 간화선은 남방 불교의 위파사나 수행을 “개인의 수행에만 치중하는 소승 불교”라고 폄하했고, 위파사나는 북방 불교에 대해 “붓다의 직설이 아니다”며 무시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사실 국내 스님들도 적잖이 미얀마에 가서 위파사나 수행을 배웁니다. 그런데 한국에 돌아와선 “나는 위파사나 수행을 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하지 못합니다. 일종의 ‘커밍 아웃’이 필요하니까요. 자칫하면 “외도(外道)에 빠졌다”는 십자포화를 받기 십상입니다. 최근 어떤 스님은 “안거 때 스님들이 선방에 앉아서 화두를 드는 건지, 호흡 수행(위파사나)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고 말하더군요. 그만큼 국내에서 위파사나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번 만남은 ‘한 번은 꼭 넘어야 할 산’이었습니다. 미얀마에서 파욱 스님을 모르면 ‘간첩’입니다. 말레이시아·싱가포르·스리랑카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유명한 선사(禪師)입니다. 그날 토론장을 찾은 미얀마 젊은이는 “한국이니까 파욱 사야도(큰스승)를 가까이서 뵐 수가 있다. 미얀마에선 사람이 너무 몰려서 가까이서 뵙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말하더군요.
사실 파욱 스님은 간화선을 잘 모릅니다. ‘길 없는 길을 간다’는 간화선의 특성상 책이나 논리를 통해서 이해하긴 쉽지 않으니까요. 더구나 외국인에겐 말입니다. “만약 아끼는 제자가 간화선 수행을 하겠다면 어떡하겠느냐?”는 물음에 파욱 스님은 “아직 그런 제자를 보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건 그저 담담하고 솔직한 대답일 뿐이었죠. 위파사나와 간화선을 비교해서 던진 답으로 보이진 않았습니다. 파욱 스님은 스스로 “나는 간화선을 잘 모른다”고 했으니까요.
대신 파욱 스님은 77세의 나이에도 위파사나 수행이 왜, 무엇을, 어떻게 공부하는 것인가를 아주 치밀하게 설명했습니다. 요지는 “눈에 보이는 물질과 정신에 사로잡히지 말고, 궁극적인 물질과 궁극적인 정신을 찾아라”였습니다. 위파사나의 호흡법은 그걸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고우(봉화 금봉암 주석) 스님은 조계종의 대표적 선사입니다. 사실 ‘간화선과 위파사나의 만남’이란 토론장에 나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열린 시선과 용기가 필요한 일이죠. 고우 스님은 선뜻 간화선 대표로 대화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본래 부처다. 그런데 ‘내가 있다’는 착각 때문에 부처로 살지 못하고 있다. 간화선 수행을 통해 그런 착각을 걷어낸다”고 말했습니다.
간단합니다. 가령 미운 오리새끼가 있습니다. 그는 본래 백조입니다. 그러나 “나는 오리다. 오리가 실제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게 바로 착각이죠. 그럼 착각의 산물인 오리는 실제로 있는 걸까요? 맞습니다. 없는 겁니다. 그리고 “나는 오리다”라는 착각도 본래 있는 걸까요, 없는 걸까요. 그렇습니다. 본래 없는 겁니다. 그럼 실제 있는 건 뭘까요. 맞습니다. 백조만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백조다. 본래 부처다”만 남는 겁니다.
진정한 수행이란 뭘까요. 그건 “오리가 있다”는 착각을 걷어내는 일입니다. 위파사나 수행은 호흡을 통해서, 간화선 수행은 화두(話頭)를 통해서 “나는 오리다”는 착각을 걷어냅니다. 그러니 호흡과 화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착각을 걷어내느냐, 걷어내지 못하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수행을 통해 오리를 ‘착! 착!’ 걷어낼 때마다, 오리(착각)에 가려져 있던 백조의 이치가 ‘탁! 탁!’ 모습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런 이치가 우리의 삶을 자유롭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하는 겁니다.
위파사나 수행은 오리의 눈·코·입·머리·날개·깃털·다리·물갈퀴·발톱까지 마디마디 분석해서 “오리가 없다”는 걸 확인해 갑니다. 반면 간화선은 “오리가 통째로 없다”는 걸 단박에 보려는 식입니다. 위파사나는 지나칠 정도로 자세하고, 간화선은 지나칠 정도로 간결합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긴장감’을 안겨줍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정말로 행복해지는 거니까요.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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