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에 관해 잘못 알려진 것들
1.붓다의 탄생
붓다는 대략 기원전 566년에 태어나 80년을 살고 기원전 486년에 열반에 든 것으로 되어 있으나 당시 인도에는 문자로 역사를 기록하는 관습이 없었으므로 탄생연대에 관한 정보가 정확한 것은 아니다. 다만 추정하고 후세 사가들과 불교 종단에서 사실에 가깝다고 인정하여 그렇게 쓰인다. 붓다는 현재 네팔에 속하는 남서쪽 국경지역인 까삘라왓투 근처의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숫도다나는 코살라국의 한 부족인 석가족의 부족장으로 까삘라왓투의 성주였으며, 어머니는 꼴리아족 출신의 마야이다. 숫도다나는 당시 부족회의에서 선출된 부족의 대표자 정도였으며, 부족장은 세습제가 아니며 부족회의에서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공화정을 실시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버지 숫도다나에게 붙여진 정반왕이라는 칭호는 적합하지 않다.<고따마 붓다-역사와 설화/성열 지음. 66, 81쪽 참조>
2.탄생에 관한 전설
붓다는 너무나 위대한 인물이었던 탓에 그에 대한 전설이나 설화가 많다. 이러한 전설이나 설화는 붓다가 살았을 때, 그 분을 직접 만나서 인격적 감화를 받았던 사람들이 붓다의 위대함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면서 생겼을 것이요, 후대에 내려가면서 붓다에 대한 이야기는 더욱 더 초인적인 존재로 각색되는 일이 자연스럽게 일어났을 것이라 본다. 대표적인 경우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경우인데 붓다의 탄생을 놓고 최고의 찬사를 보낸 기록 가운데 가장 오래된 불전은 ‘숫따니빠따’인데 경에 ‘모든 생명 가운데 가장 훌륭한 분이요, 가장 뛰어난 분이며, 모든 생명체 가운데 가장 높은 분’이라고 한 데서 이 탄생 설화가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따마 붓다-역사와 설화/성열 지음. 88-89쪽 참조)
3.붓다의 출가 이유
당시 인도는 축의 시대의 정점에 있던 시기로 끝없는 전쟁 등으로 사람들의 생활은 어렵고 비참했다. 동시에 카스트 제도라는 잘못된 계급의 사회였다. 사제, 군인과 관료, 평민, 하층민의 네 가지 분류도 부족하여 하리잔이라는 불가촉천민인 최하층의 계급을 두었으니 오늘날 생각해도 상상할 수 없이 불평등한 사회였다. 이런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모습과 생로병사의 고통을 보면서 출가를 결심한다. 붓다는 자신의 뜻을 펼치면서 ‘모두가 행복하기를 한없이 바란다’는 생각을 잠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 그것이 불가의 깨달음에 대한 첫걸음인 사무량심이다. 중생을 교화·제도하기 위해 갖춰야 할 끝없는 네 가지 마음을 말한다. 곧 자무량심(慈無量心 모든 존재가 잘 되기를 바라며)·비무량심(悲無量心 슬픈 일에 함께 슬퍼하며)·희무량심(喜無量心 좋은 일에 내 일 같이 기뻐하며)·사무량심(捨無量心 너 나 할 것 없이 귀천이 없고 위아래가 없다는 평등심)이다.
한편, 알려진 것과 달리 붓다가 출가할 때 말을 타고 담을 넘었다는 설화가 전해지는데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말을 타고 성벽을 넘는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며, 전해지는 기록에 의하면 아버지를 포함한 가족의 울부짖는 배웅을 뒤로 하고 슬픈 마음으로 출가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모르고 있으며 연구 중이라 한다.
다만 태어날 때 훌륭한 왕이 되든지 전륜성왕이 되어 온 세상을 밝히는 스승이 된다는 예언이 있었고 훌륭한 정치를 하였을 것이 분명하므로 이를 두려워 한 코살라 왕이 출가를 명령했을 수 있다. 출가할 때 부모와 부인이 자식을 두고 떠나는 붓다를 울면서 배웅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더 연구의 가치가 있다.
4.붓다의 자비심의 한계
붓다가 한량 없는 자비심으로 모든 것을 용서했을까? 아니다.
붓다는 자비심을 가지고 승단의 수행자들이 저지른 잘못은 처음이니 그럴 수 있다며 용서했으나 여섯 가지의 행동만은 처음이라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분명히 책에서 읽었으나 근거를 찾을 수 없고 메모조차 찾을 수 없다. 훗날 근거를 찾을 수 있을 때까지 확실한 것이 아니다. 그 중 네 가지를 든다.
1)부모형제를 죽인 자
2)승단의 결속을 해친 자
3)자신을 신으로 착각한 자. 예를 들어 점과 관상을 봐주면서 미래를 예측한다는 자, 무당 같은 행위, 이적(異蹟)을 일으켜 마치 자기가 신인 척 하는자
4)붓다를 위해 동물을 살생하는 희생제의
5.붓다의 육식
붓다는 원칙적으로 육식을 금했다. 다만 탁발의 경우에는 고기가 들어있어도 가리지 않고 주는 대로 먹었다. 자신을 위해 살생하는 것을 금했다. 나아가 인간의 행복을 기원하기 위해 동물을 죽이는 희생제의를 끔찍히 싫어했다.
붓다는 오전에 한 번 탁발한 음식을 먹고 오후에는 먹지 않았으니 하루 1식의 원칙을 지켰다. 탁발한 음식에는 고기류가 들어있어도 먹었다. 다만 자기를 위해 죽인 생물을 먹지 않았을 뿐이다.
6.명상 할 때의 자세
특정한 자세를 말하지 않았으며 숫타니파타에 숲 속에 고요히 앉아 혀를 입 천장에 날카롭데 대라는 말만 나온다. 한국 선불교는 결가부좌를 최선의 자세라 하는데 중국 선불교에서 유래된 것이다. 남방불교에서는 의자에 편하게 앉아서 명상을 하기도 하니 굳이 자세에 구애 받지 마라. 행주좌와 어묵동정. 무릇 깨우침이 올 때는 명상의 상태에서는 오지 않는다는 것이 거의 통설이다. 선정의 상태는 거의 수면의 상태이므로 깨달음이 올 수 없다는 것이다.
7.연기(緣起)와 중도(中道)
붓다가 오랜 고행이 결코 수행의 옳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보리수 밑에서 선정에 든 후 새벽에 깨달음을 얻었다. 그때 "나는 연기를 알았다"고 했다. 불교 이론은 12연기를 기본으로 알고 있으나 수많은 연기 중의 일부일 뿐이며, 다만 팔리어로 쓰인 초기 경전인 숫타니파타에서는 16연기를 먼저 말했다. 그런데 간혹 연기 대신 중도를 알았다고 하는 주장이 나온다. 확실한 공부가 필요하다.
8.숫타니파타 등을 공부하면서 전재성 박사가 한 말
석가공화국을 다스리면서 재판과정에 참여하는 등 많은 세상 공부를 하였다.
오늘 이 공부를 보면 많은 수행자들과 수많은 토론을 경험하고 확실한 경지에 이른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훌륭한 말씀을 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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