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붓다 이야기

혁명가 붓다/ 데이비드 깔루빠나, 인드라 깔루빠나

혁명가 붓다/ 데이비드 깔루빠나, 인드라 깔루빠나

 

211.전법활동 초기에 수많은 출가자가 발생함으로서 생긴 붓다의 고민. 그는 이렇게 극복한다.

재가자들에게는 계율이 없다. 다만 이런 마음가짐을 요구했다.

 

재가자의 마음가짐

감각적 즐거움을 버리고 소유와 존재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은 마음속에 어떤 갈등도 불만도 없다. 그는 잘 자고 잘 깨어나며, 해야 할 일에 전념하고, 늘 평안하게 지낸다.

 

재가자가 이룰 수 있는 네 가지 형태의 행복

1.자신의 노력으로 애써 땀 흘리고, 도덕적인 수단으로 부를 소유하게 된 사람은 자신의 재물에 대해 나는 내 자신의 노력과 정당한 수단으로 이것을 획득했다고 행복하게 생각합니다. 정당한 소유의 행복.

2.도덕적으로 결함 없이 올바른 수단으로 축적한 부를 다른 사람과 어울려 그것을 누리고, 덕스러운 활동에 참가할 때 체험하는 나눔의 행복.

3.검소한 생활로 가진 것을 벗어나지 않고 절제하며, 오직 자신의 재산만으로 사는 것. 검소와 빚지지 않음의 행복.

4.정갈한 생활로 남들의 비난을 받지 않으므로 커다란 만족과 행복이 온다. 비난 받지 않는 행복.

 

240-1.네 가지 종류의 업/불살생의 종교 자이나교 마하비라의 제자와의 논쟁에서

선행으로 좋은 결과, 선행임에도 나쁜 결과, 악행으로 나쁜 결과, 악행임에도 좋은 결과에 이르는 업이 있다. 과거의 업과 앞으로 일어날 결과의 관계는 절대적인가? 아니다. 인 없는 과도 있고 인이 있어도 과가 없는 것도 있다. 업은 의존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며, 그에 따른 결과도 무수히 많은 조건들과의 의존적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 행위에 따르는 차후의 결과가 어떤 것이든 업의 진행이지 징벌이라고 할 수 없다. 나는 동기가 업이라고 단언한다. 업은 의도와 목적이 있을 때에 한해서만 한 행위에 한정한다.*

 

246.어여쁜 기녀 암빠빨리에 대한 비유

그대는 어부의 손에 잡혀 부뚜막의 솥에 넣어진 게와 같다. 너의 삶이 언제까지 느긋하고 편할 수 있겠는가?

 

아들 라훌라에 대한 비유

거울을 보라. 거기에 항상 너를 비춰보아라.

 

256.살인마 알굴리말라에 대한 비유

너는 키도 닻도 없이 급류에 휘말린 조각배처럼 끝없이 흘러가는 구나.

 

261.천국과 지옥은 극단적인 쾌락과 고통의 다른 표현이다. 다만 상징일 뿐이다. 이러한 상징은 도덕적인 삶을 영위하는 데 유용한 수단이 된다.

 

263.팔정도의 설명

말로써 다른 사람의 맘을 불편하게 했다면, 악의가 아니었다고 해도 변명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항상 조심하고 조심해서 팔정도의 정신을 버리지 말라. 바른 견해란 독단적인 견해와 무견해를 버린 중도의 견해다.

 

오직 날개의 무게로만 하늘을 나는 새처럼 가라.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을 상하지 않는 벌처럼 마을을 지나가라.

 

공은 에너지다.

 

341.15

싯다르타의 성도에 관한 묘사는 <중아함경 1.481-483>를 따랐다. <Ari >에서는 깨달음이 고도의 선정(사마디. samadhi)에 의해서가 아니라, 통찰의 지혜에 의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통찰이 번뇌의 소멸에 관한 지혜(panna)와 같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두 가지의 수승(秀勝)한 지혜(abhinna)에 의해 조장 촉진된 것이다. 붓다가 스스로 인정한 이 세 가지 신통력, 곧 숙명통 - 자신의 생존을 둘러싼 윤회하는 모습을 보고 판단하는 지혜(소급인식능력)과 천안통 - 행위()와 결과()의 인과관계를 꿰뚫어 알 수 있는 투시 통찰력, 해탈지견 내가 모든 번뇌를 지우고 이 생에서 성취한 해탈에 관한 지혜 중 앞의 두 가지 지혜.

 

137-140.

깨달음, 그리고..

 

싯다르타의 상념은 계속되었다.

 

'나는 더 이상 의미 없는 관습과 의례, 그리고 검증될 수 없는 믿음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어떤 스승도 추종할 필요가 없다. 내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강 건너 서쪽 동산에 쾌적해 보이는 장소가 있었다. 동산 한 복판에 가지를 늘어뜨린 장엄한 보리수가 짙은 잎사귀로 산뜻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새들이 즐겁게 지저귀고 있었다. 지난밤에 머물렀던 곳보다 한결 평온해 보이고 까싸빠가 이끄는 불 숭배자들의 바쁜 움직임으로부터 떨어진 곳이었다. 그는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강물이 제법 세차게 흐르고 있었지만 바닥의 모래는 부드러웠다. 그는 발바닥에 힘을 모아 곧바로 선 채 생각했다.

 

'생명 없는 바리때와 달리 인간은 의지를 가지고 강물은 건너간다. 떠내려가지 않고 흐름을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그는 마음속에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바리때를 그려보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저것이 바로 내가 갈 길이다.'

 

강을 건넌 싯다르타는 보리수 아래로 다가가 나무를 등지고 동쪽을 향해 앉았다. 자리에 앉으면서 그는 가정과 조국을 버리고 찾아나선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는 결코 이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실로 웅대한 결심이요 엄청난 시도였다. 자리에 앉은 그의 전신이 지진에 흔들리는 대지처럼 전율하고 있었다. 그는 지혜와 통찰력을 향상시켜야 했다. 인간의 생사를 둘러싸고 얽히고 설킨 실타래를 풀어헤치지 않고서는 해탈을 기대할 수 없다. 그는 깊은 사색에 잠겼다.

 

'나는 알라라와 웃다까로부터 명상의 기법을 배웠으면서도 보다 고원한 지혜를 얻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그들로부터 배웠던 것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그는 먼저 명상의 예비단계를 거쳐 '의식도 비의식도 아닌' 무색계에 이르렀다. 다시 정진에 정진을 거듭한 결과 마침내 그는 모든 감각과 인식이 완전히 사라진 수상멸처 에 들어갔다. 그것은 완전한 소멸의 경지 니로다의 경지였다 . 그는 옛스승 알라라와 웃다까의 경지를 넘어선 것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삶과 죽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자리는 아니었다.

 

명상에서 깨어나자마자 두고 온 조국과 사랑하는 사람들, 야소다라와 라훌하의 얼굴이 떠올라 순식간에 그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뒤이어 온갖 유혹의 군사들이 몰려왔다. 감각적욕망, 탐욕, 권태, 기아, 갈증, 나태, 마비감, , 불확실성, 분노, 고집, 칭찬, 비난, 이권, 명예....

 

그것은 실로 끊임없이 물고 늘어지는 마구니의 화신들이었다.

 

그는 새로운 정력과 냉정, 평온과 평정으로 그들과 싸웠다. 마침내 그는 다시 명상의 첫 단계에 들어갔다. 점차 집중은 강화되고, 온전한 주의 집중과 평정으로 이루어진 제4선정에 도달했다. 여기서 싯다르타는 이전처럼 감각과 인식이 정지된 수상멸처로 들어가지 않고 대신 순일하고 유연해진 마음을 인간의 생사문제 쪽으로 향하게 했다.

 

극도로 순수하고 집중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통찰하기 시작했다. 그는 부모에 의해 만들어져 음식으로 지속되는 사대의 조합, 육체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손상되고 마모되고 부서지고 있음을 보았다 그 육신과 맞물려 일어났다 사라지고 다시 일어나 흐르는 의식을 꿰뚫어 보았다. 육체와 마음이 서로 어떻게 의존하며,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았다. 이런 통찰에 의해 그는 소위 정신과 육체의 화합체인 인간 존재의 본성에 관한 지혜를 갖게 된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고 또 사라지는지 알아야 한다.

 

극도로 순수하고 집중된 마음은 자신의 과거를 더듬어 거슬러 올라갔다. 복잡하게 얽힌 지난 생, 수십. . . 만 생의 과거, 그리고 여러 차례에 걸친 세계의 생성과 소멸을 회상했다. 어떤 종족에서 어떻게 태어나 무슨 이름으로 어떻게 살았으며 어느 곳에 다시 태어났던가 하는 지난 생이 관한 상세한 내용을 상기한 것이다. 그는 이러한 끝없는 과거 생에 대한 소급 인식능력으로 자신의 생존을 둘러싼 신비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또 어떤가? 그들도 나와 같은 것일까? 그는 분명하게 알고 싶었다.

 

싯다르타는 온전한 집중력과 순일해진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의 생을 추적해 나갔다. 그는 범부의 안목을 초월한 신묘한 눈으로 중생들이 윤회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때로 비열하게, 혹은 고상하게 아름답게, 추하게, 행복하게 또는 불행하게 사라지고 또 다른 생을 이어간다. 그는 인간이 어떤 식으로 자기 행위의 영향을 물려받고 반복하는지, 즉 행위와 결과의 인과관계를 꿰뚫어 알았다. 그는 몸과 입과 마음으로 악행을 저지르고, 잘못된 소견을 가지고 그런 사견으로 말미암아 또 다른 악행을 저지른 중생들이 불행과 파멸의 지옥에 태어나는 것을 보았다. 마찬가지로 그는 선행을 하고 바르게 산 사람들이 마침내 행복한 존재로 태어나며, 천상의 복락을 누리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그는 다른 사람들의 삶과 죽음의 양상을 알았다.

 

이 두 종류의 지혜는 '어떻게 왔으며 어떻게 지속되고 있는가' 하는 인간 존재의 본질에 관한 필수적인 정보를 제공했다. 그는 인간의 고뇌가 무명에 쌓인 자신의 기질적 성향과 쾌락을 최대한으로 늘려 영위하려는 끝없는 탐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을 보았다. 원하는 것을 얻고 나면 좀더 늘리기 위해 욕심을 부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또 다시 불만과 괴로움에 빠져야만 되는 것이다.

 

다시 싯다르타의 집중된 마음은 인간 번뇌의 본질, 즉 오욕에 빠지는 성향을 통찰해 나갔다. 그는 감각적 욕망이 곧 번뇌의 뿌리이며, 생존에의 갈망 및 무지와 그릇된 견해가 곧 번뇌의 근원임을 깨달았다. 그는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어떻게 인간의 성향을 결정짓는가를 보았다. 그러한 성향에 따라 선택되고 형성된 것들은 결국 불만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마침내는 실망과 괴로움, 좌절로 끌고 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또한 어떻게 하면 이들 좋은 것과 싫은 것, 갈망과 증오심을 제거하고 성향의 평정, 곧 완전한 해탈로 향할 수 있는지를 깨달았다.

 

이런 것들을 명료하게 꿰뚫어 봄으로써 그는 자신의 성향을 평정할 굳은 결의를 다졌다. 탐욕과 증오와 무지가 모든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확신은 거의 자동적으로 싯다르타로 하여금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나게 했다. 그는 해탈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해탈했다는 것을 알았다.(解脫知見)

 

싯다르타는 마침내 사랑하는 사람들과 조국을 등지고 찾아나선 궁극의 목표에 이르렀다. 그는 앞길을 가로막고 있던 무명의 짙은 안개를 걷어내고 깊이와 넓이를 가늠할 길 없는 삶과 죽음의 간극을 뛰어넘었다.

 

드디어, 무명과 집착과 혐오와 미혹으로부터 벗어나 열반을 성취한 것이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이생에서 이룰 수 있는 유일한 해탈임을 깨달았다. 다른 식의 해탈이란 단지 바람이거나 구체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또한 탐욕이 사라졌음으로 내생의 원인 또한 제거되었음을 알았다. 그는 수행의 궁극에 도달했으며 더 이상 찾아야 될 것이 없음을 알았다.

 

2015. 11. 12.

 

 

 

 

 

 

 

211.전법활동 초기에 수많은 출가자가 발생함으로서 생긴 붓다의 고민. 그는 이렇게 극복한다.

재가자들에게는 계율이 없다. 다만 이런 마음가짐을 요구했다.

 

재가자의 마음가짐

감각적 즐거움을 버리고 소유와 존재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은 마음속에 어떤 갈등도 불만도 없다. 그는 잘 자고 잘 깨어나며, 해야 할 일에 전념하고, 늘 평안하게 지낸다.

 

재가자가 이룰 수 있는 네 가지 형태의 행복

1.자신의 노력으로 애써 땀 흘리고, 도덕적인 수단으로 부를 소유하게 된 사람은 자신의 재물에 대해 나는 내 자신의 노력과 정당한 수단으로 이것을 획득했다고 행복하게 생각합니다. 정당한 소유의 행복.

2.도덕적으로 결함 없이 올바른 수단으로 축적한 부를 다른 사람과 어울려 그것을 누리고, 덕스러운 활동에 참가할 때 체험하는 나눔의 행복.

3.검소한 생활로 가진 것을 벗어나지 않고 절제하며, 오직 자신의 재산만으로 사는 것. 검소와 빚지지 않음의 행복.

4.정갈한 생활로 남들의 비난을 받지 않으므로 커다란 만족과 행복이 온다. 비난 받지 않는 행복.

 

240-1.네 가지 종류의 업/불살생의 종교 자이나교 마하비라의 제자와의 논쟁에서

선행으로 좋은 결과, 선행임에도 나쁜 결과, 악행으로 나쁜 결과, 악행임에도 좋은 결과에 이르는 업이 있다. 과거의 업과 앞으로 일어날 결과의 관계는 절대적인가? 아니다. 인 없는 과도 있고 인이 있어도 과가 없는 것도 있다. 업은 의존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며, 그에 따른 결과도 무수히 많은 조건들과의 의존적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 행위에 따르는 차후의 결과가 어떤 것이든 업의 진행이지 징벌이라고 할 수 없다. 나는 동기가 업이라고 단언한다. 업은 의도와 목적이 있을 때에 한해서만 한 행위에 한정한다.*

 

246.어여쁜 기녀 암빠빨리에 대한 비유

그대는 어부의 손에 잡혀 부뚜막의 솥에 넣어진 게와 같다. 너의 삶이 언제까지 느긋하고 편할 수 있겠는가?

 

아들 라훌라에 대한 비유

거울을 보라. 거기에 항상 너를 비춰보아라.

 

256.살인마 알굴리말라에 대한 비유

너는 키도 닻도 없이 급류에 휘말린 조각배처럼 끝없이 흘러가는 구나.

 

261.천국과 지옥은 극단적인 쾌락과 고통의 다른 표현이다. 다만 상징일 뿐이다. 이러한 상징은 도덕적인 삶을 영위하는 데 유용한 수단이 된다.

 

263.팔정도의 설명

말로써 다른 사람의 맘을 불편하게 했다면, 악의가 아니었다고 해도 변명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항상 조심하고 조심해서 팔정도의 정신을 버리지 말라. 바른 견해란 독단적인 견해와 무견해를 버린 중도의 견해다.

 

오직 날개의 무게로만 하늘을 나는 새처럼 가라.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을 상하지 않는 벌처럼 마을을 지나가라.

 

공은 에너지다.

 

341.15

싯다르타의 성도에 관한 묘사는 <중아함경 1.481-483>를 따랐다. <Ari >에서는 깨달음이 고도의 선정(사마디. samadhi)에 의해서가 아니라, 통찰의 지혜에 의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통찰이 번뇌의 소멸에 관한 지혜(panna)와 같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른 두 가지의 수승(秀勝)한 지혜(abhinna)에 의해 조장 촉진된 것이다. 붓다가 스스로 인정한 이 세 가지 신통력, 곧 숙명통 - 자신의 생존을 둘러싼 윤회하는 모습을 보고 판단하는 지혜(소급인식능력)과 천안통 - 행위()와 결과()의 인과관계를 꿰뚫어 알 수 있는 투시 통찰력, 해탈지견 내가 모든 번뇌를 지우고 이 생에서 성취한 해탈에 관한 지혜 중 앞의 두 가지 지혜.

 

137-140.

깨달음, 그리고..

 

싯다르타의 상념은 계속되었다.

 

'나는 더 이상 의미 없는 관습과 의례, 그리고 검증될 수 없는 믿음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어떤 스승도 추종할 필요가 없다. 내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강 건너 서쪽 동산에 쾌적해 보이는 장소가 있었다. 동산 한 복판에 가지를 늘어뜨린 장엄한 보리수가 짙은 잎사귀로 산뜻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새들이 즐겁게 지저귀고 있었다. 지난밤에 머물렀던 곳보다 한결 평온해 보이고 까싸빠가 이끄는 불 숭배자들의 바쁜 움직임으로부터 떨어진 곳이었다. 그는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강물이 제법 세차게 흐르고 있었지만 바닥의 모래는 부드러웠다. 그는 발바닥에 힘을 모아 곧바로 선 채 생각했다.

 

'생명 없는 바리때와 달리 인간은 의지를 가지고 강물은 건너간다. 떠내려가지 않고 흐름을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그는 마음속에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바리때를 그려보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저것이 바로 내가 갈 길이다.'

 

강을 건넌 싯다르타는 보리수 아래로 다가가 나무를 등지고 동쪽을 향해 앉았다. 자리에 앉으면서 그는 가정과 조국을 버리고 찾아나선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는 결코 이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실로 웅대한 결심이요 엄청난 시도였다. 자리에 앉은 그의 전신이 지진에 흔들리는 대지처럼 전율하고 있었다. 그는 지혜와 통찰력을 향상시켜야 했다. 인간의 생사를 둘러싸고 얽히고 설킨 실타래를 풀어헤치지 않고서는 해탈을 기대할 수 없다. 그는 깊은 사색에 잠겼다.

 

'나는 알라라와 웃다까로부터 명상의 기법을 배웠으면서도 보다 고원한 지혜를 얻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그들로부터 배웠던 것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그는 먼저 명상의 예비단계를 거쳐 '의식도 비의식도 아닌' 무색계에 이르렀다. 다시 정진에 정진을 거듭한 결과 마침내 그는 모든 감각과 인식이 완전히 사라진 수상멸처 에 들어갔다. 그것은 완전한 소멸의 경지 니로다의 경지였다 . 그는 옛스승 알라라와 웃다까의 경지를 넘어선 것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삶과 죽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자리는 아니었다.

 

명상에서 깨어나자마자 두고 온 조국과 사랑하는 사람들, 야소다라와 라훌하의 얼굴이 떠올라 순식간에 그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뒤이어 온갖 유혹의 군사들이 몰려왔다. 감각적욕망, 탐욕, 권태, 기아, 갈증, 나태, 마비감, , 불확실성, 분노, 고집, 칭찬, 비난, 이권, 명예....

 

그것은 실로 끊임없이 물고 늘어지는 마구니의 화신들이었다.

 

그는 새로운 정력과 냉정, 평온과 평정으로 그들과 싸웠다. 마침내 그는 다시 명상의 첫 단계에 들어갔다. 점차 집중은 강화되고, 온전한 주의 집중과 평정으로 이루어진 제4선정에 도달했다. 여기서 싯다르타는 이전처럼 감각과 인식이 정지된 수상멸처로 들어가지 않고 대신 순일하고 유연해진 마음을 인간의 생사문제 쪽으로 향하게 했다.

 

극도로 순수하고 집중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통찰하기 시작했다. 그는 부모에 의해 만들어져 음식으로 지속되는 사대의 조합, 육체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손상되고 마모되고 부서지고 있음을 보았다 그 육신과 맞물려 일어났다 사라지고 다시 일어나 흐르는 의식을 꿰뚫어 보았다. 육체와 마음이 서로 어떻게 의존하며,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았다. 이런 통찰에 의해 그는 소위 정신과 육체의 화합체인 인간 존재의 본성에 관한 지혜를 갖게 된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고 또 사라지는지 알아야 한다.

 

극도로 순수하고 집중된 마음은 자신의 과거를 더듬어 거슬러 올라갔다. 복잡하게 얽힌 지난 생, 수십. . . 만 생의 과거, 그리고 여러 차례에 걸친 세계의 생성과 소멸을 회상했다. 어떤 종족에서 어떻게 태어나 무슨 이름으로 어떻게 살았으며 어느 곳에 다시 태어났던가 하는 지난 생이 관한 상세한 내용을 상기한 것이다. 그는 이러한 끝없는 과거 생에 대한 소급 인식능력으로 자신의 생존을 둘러싼 신비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또 어떤가? 그들도 나와 같은 것일까? 그는 분명하게 알고 싶었다.

 

싯다르타는 온전한 집중력과 순일해진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의 생을 추적해 나갔다. 그는 범부의 안목을 초월한 신묘한 눈으로 중생들이 윤회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때로 비열하게, 혹은 고상하게 아름답게, 추하게, 행복하게 또는 불행하게 사라지고 또 다른 생을 이어간다. 그는 인간이 어떤 식으로 자기 행위의 영향을 물려받고 반복하는지, 즉 행위와 결과의 인과관계를 꿰뚫어 알았다. 그는 몸과 입과 마음으로 악행을 저지르고, 잘못된 소견을 가지고 그런 사견으로 말미암아 또 다른 악행을 저지른 중생들이 불행과 파멸의 지옥에 태어나는 것을 보았다. 마찬가지로 그는 선행을 하고 바르게 산 사람들이 마침내 행복한 존재로 태어나며, 천상의 복락을 누리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그는 다른 사람들의 삶과 죽음의 양상을 알았다.

 

이 두 종류의 지혜는 '어떻게 왔으며 어떻게 지속되고 있는가' 하는 인간 존재의 본질에 관한 필수적인 정보를 제공했다. 그는 인간의 고뇌가 무명에 쌓인 자신의 기질적 성향과 쾌락을 최대한으로 늘려 영위하려는 끝없는 탐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을 보았다. 원하는 것을 얻고 나면 좀더 늘리기 위해 욕심을 부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또 다시 불만과 괴로움에 빠져야만 되는 것이다.

 

다시 싯다르타의 집중된 마음은 인간 번뇌의 본질, 즉 오욕에 빠지는 성향을 통찰해 나갔다. 그는 감각적 욕망이 곧 번뇌의 뿌리이며, 생존에의 갈망 및 무지와 그릇된 견해가 곧 번뇌의 근원임을 깨달았다. 그는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어떻게 인간의 성향을 결정짓는가를 보았다. 그러한 성향에 따라 선택되고 형성된 것들은 결국 불만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마침내는 실망과 괴로움, 좌절로 끌고 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또한 어떻게 하면 이들 좋은 것과 싫은 것, 갈망과 증오심을 제거하고 성향의 평정, 곧 완전한 해탈로 향할 수 있는지를 깨달았다.

 

이런 것들을 명료하게 꿰뚫어 봄으로써 그는 자신의 성향을 평정할 굳은 결의를 다졌다. 탐욕과 증오와 무지가 모든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확신은 거의 자동적으로 싯다르타로 하여금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나게 했다. 그는 해탈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해탈했다는 것을 알았다.(解脫知見)

 

싯다르타는 마침내 사랑하는 사람들과 조국을 등지고 찾아나선 궁극의 목표에 이르렀다. 그는 앞길을 가로막고 있던 무명의 짙은 안개를 걷어내고 깊이와 넓이를 가늠할 길 없는 삶과 죽음의 간극을 뛰어넘었다.

 

드디어, 무명과 집착과 혐오와 미혹으로부터 벗어나 열반을 성취한 것이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인간이 이생에서 이룰 수 있는 유일한 해탈임을 깨달았다. 다른 식의 해탈이란 단지 바람이거나 구체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또한 탐욕이 사라졌음으로 내생의 원인 또한 제거되었음을 알았다. 그는 수행의 궁극에 도달했으며 더 이상 찾아야 될 것이 없음을 알았다.

 

2015. 11. 12.